천일애화

천일애화 - 5 (完)

카이멜 시레노바 x 리비에르 시라 (1000일 AU 로그)

D+1001

고풍스럽게 꾸며진 책방 안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리리는 창가 근처 의자에 앉아 가만히 밖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소녀를 발견할 만도 했으나,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리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가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리리의 뒤에서, 아노렐은 푹신한 소파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잠깐 리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반 바퀴 굴러 쿠션을 깔아뭉개고, 자세를 바꿔서 거꾸로 매달렸다가. 정신 사나울 만도 했지만 리리는 그런 아노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노을 진 녹안은 오직 저 멀리, 광장의 시계탑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째깍, 째깍. 아노렐의 시선도 책방의 구석에 걸린 벽시계로 향했다. 큰손은 거의 12에, 작은 손은 7에 다가오고 있었다.

…57, 58, 59.

7시.

뎅, 뎅, 뎅….

희미하게 시계탑의 종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종소리에 반응하듯, 책방 카운터에 올려져 있던 두 손목시계의 다이얼이 반짝였다. 아노렐이 소파에서 튕기듯 폴짝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왔다. 기웃거리는 붉은 눈이 시계를 확인하고 샐쭉 휘었다.

“역시~ 이제 확실하게 안정된 모양이네. 그런데 언제까지 기다리면서 지켜볼 셈이야, 리리?”

그제서야 리리는 아노렐과 시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등진 창밖의 풍경은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리리는 어깨에 들어간 긴장을 풀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간의 뒤틀림이 고쳐진 것을 확인했으니, 당신 말대로 이제 더는 이곳에 머무를 필요는 없겠죠.”

아노렐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개의 시계를 낚아채 카운터의 서랍을 확 열었다. 아노렐, 좀! 조심히! 그러다 다른 마법 물품하고 부딪쳐서 간신히 안정된 시계가 또 폭주하면 어떡할 거예요! 기겁해서 잔소리하는 리리의 목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소년은 대충 서랍에 시계를 던져 넣고 탁 닫았다. 리리가 짜증을 내든 말든, 아노렐은 곧바로 다시 소파로 달려가 폭 파묻혔다.

“오랜만에 다시 얼굴 본 우리 옛 마술사님들하고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랬지? 굳이 하루 더 걸려 확인하지 않아도 됐는데~ 이해해, 이해해.”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이제 리비에르 씨나 카이멜 씨나 평범한 인간인데, 더는 이런 종류의 일에 연관되지 않는 게 나을 거예요.”

“응, 응. 이해해~”

“하……….”

반쯤 포기가 뒤섞인 리리의 한숨이 들려왔다. 흐음, 으음, 의미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아노렐을 한 번 째려보고 리리는 높은 책장 속으로 사라졌다. 부스럭부스럭, 한참 무언가를 찾는 소리 끝에 돌아온 리리의 품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여전히 뒹굴거리는 아노렐을 그대로 무시하고 리리는 카운터에 앉아 책을 펼쳤다.

펼쳐진 책은 온통 백지였다. 리리는 펜을 집어 들고 귀퉁이에 날짜를 적어넣었다.

10월 5일.

모든 것이 시작된 날이었다.

한창 펜이 종이에 긁히며 사각거리는 화음이 이어졌다. 이윽고 아노렐은 지루해졌는지 빼꼼 고개를 들고 리리를 향해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어?”

리리는 책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꾸했다.

“기록하고 있어요. 이런 특수한 일이 생겼을 땐 제때 기록을 해둬야 다음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참고할 사례가 생기겠죠.”

“설마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날까? 시계가 폭주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별의 조각이 영혼을 흡수해서 시간이 이렇게 꼬여버린 건 아마 천만년 만에 일어나는 역대급 사고 아니었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죠. 하지만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곤 할 수도 없고. 천만년 후에라도,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기록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요.”

성실하네~ 감탄하며 짝짝 박수치는 아노렐을 리리는 잠깐 흘겨보고 가볍게 쏘아붙였다.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불이라도 좀 켜봐요, 벌써 해가 다 졌네요.

리리의 요구대로 아노렐은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불을 더 환하게 켰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엔 별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노렐은 창틀에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괸 채로 하늘을 구경하다 멍하니 질문을 하나 뱉었다.

“그런데, 리리. 그들의 천일은 진짜 존재하긴 했던 걸까?”

사각거리는 소리가 잠시 멈췄다. 리리는 의문의 눈길로 아노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밝은 금발도, 군데군데 섞인 분홍색 브릿지도, 소년의 눈 밑에 새겨진 검은 문신 같은 어둠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뜻이에요?”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이 사건으로 시간만 몇 번 돌아갔지? 세 번? 아무튼 한 번 시계를 돌릴 때마다 다시 10월 5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했잖아?”

리리는 답이 없었다. 아노렐이 옆 탁상에 놓인 달력을 집어 들고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날짜를 계산했다. 그의 손가락이 6월 12일 위를 배회했다.

“음, 적어도 이번 250, 아니 이제 251일은 확실히 존재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글쎄요… 기준이 애매하긴 하네요. 그 돌려진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리비에르 씨와 카이멜 씨, 오직 그 둘뿐일 테니 말이에요. 심지어 본인이 돌리지 않은 시간의 기억은 흐릿할 테고.”

둘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리는 열심히 적던 것도 멈춘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밤의 색이 짙어지고, 별이 비단처럼 하늘을 수놓을 때, 아노렐은 예고 없이 팔짝 창틀에서 떨어져 씩 입꼬리를 올리고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뭐,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 그 시간 자체는 없던 일이 된다 하더라도, 둘이 서로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눴던 사실조차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말야.”

“…그러네요. 이건 그들만의 천일, 아니, 천일과 하루, 마치 천일야화와도 같은 이야기네요. 셰에라자드가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줬듯이, 설령 이 반복된 하루하루를 전부 기록한다 하더라도 단 하나 온전히 똑같은 날은 없을 테니까요.”

“리리는 아는 것도 많지~”

히죽 웃는 아노렐에게 리리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잠깐 들고 있던 펜을 던질까 생각했는지 손이 움찔했지만, 별로 소득 없는 일일 거라 깨달은 리리는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노렐, 우리 일단 표면적으로라도 책방에서 일하는 사서거든요? 시간도 많겠다, 저기 쌓여있는 책들 한 번이라도 봐보는 게 어때요?”

아노렐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열심히 해봐, 리리! 난 이만 안쪽이나 정리하러 가볼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아노렐을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던 리리는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미련 없이 시선을 다시 책으로 내렸다. 페이지는 반쯤 리리의 단정한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손목을 한 번 돌리고 다시 펜을 쥔 리리는 망설임 없이 사각거리며 책을 채워나갔다.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펜을 사각거리며 적던 리리의 펜은 페이지의 끝에 다다라 온점을 찍었다.

6월 12일.

시간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 기록의 이름은 천일애화(千一愛話).

천일, 그리고 하루. 사랑의 이야기였다.


Written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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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하리(@hariii015)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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