問2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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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이 고민에 빠진 사이 후배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두 엄지손가락을 액정 위에서 빠르게도 움직인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하는 모양새다. 오 분 여가 지나서야, 그녀는 액정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맞은 편의 선배를 향한다. 다크서클이 깊은 선배는 그녀 조금 위의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당연히 일반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선배, 예진이 이쪽으로 불렀는데. 얘기 나눠보실래요?"

잠시 꿈에서 깬 얼굴로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후배의 시선을 맞받는 유준.

"예진이? 아...... 아까 그 단발머리 말이지?"

"네. 궁금한 게 있다고 하니까, 물어보라고 하더라고요. 다들 컨디션이 나빠져서 오늘 하려고 했던 스터디도 파했대요. 시간 많다나?"

라운지에 앉아 좀 더 시간을 죽이니 입구에서 익숙한 단발머리가 나타났다. 전화를 하고 있다. 후배는 전화를 하고 있지 않으니, 그녀의 다른 지인과 통화 중인 게 아닐까. 유준은 두 손을 들어 존재 표명을 해 본다. 단발머리의 예진은 두 사람이 앉은 구석의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 사이 통화가 끊겼는지, 이젠 귀에서 휴대전화를 뗀 채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아까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말투가 꽤 냉랭한 감이 있다. 예진은 후배의 옆 자리, 유준의 대각선 자리에 앉는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어깨 너머로 라운지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자리를 뜨는 모습이 보였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간다. 아무래도, 방학인데도 학교에 세 시 넘어서까지 있고 싶지는 않겠지.

"누구랑 통화를 그렇게 해? 남친?"

후배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예진에게 물었다. 예진의 표정이 그리 나빠지지 않는 걸 보니, 두 사람은 그럭저럭 친한 관계인 듯 싶다. 유준은 그렇게 넘겨짚는다.

"아니, 강민 선배. 쓰러진 사람이 걱정돼서 병원까지 찾아갔대."

"헐. 진짜? 어떻대, 그 사람?"

예진은 시선을 살짝 떨군다. 자신의 무릎 정도를 바라보고 있다.

"영양실조래. 탈수도 심각하고. 며칠 동안 뭘 제대로 안 먹은 것 같다는데. 아직 눈도 못 떴대."

정말로 며칠 동안 갇혀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살아있는 게 기적인 상황이다. 스터디를 오늘이 아니라 내일 했다면, 과방에서 시신을 치울 뻔 했다.

후배는 예진에게 유준을 소개했다. 전에 있었던 동아리의 선배 분인데, 약학과에 다니고, 이런 이상한 사건을 조사하는 걸 좋아해. 예진이 너도 들었었나? 도플갱어 소문. 그것도 이 선배가 엄청 관심을 가져서......

"마지막으로 스터디를 한 게 지난 주 언제예요?"

유준은 적당한 부분에서 후배의 소개를 커트했다.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의 소개를 듣던 예진은, 유준의 물음에 고개를 그의 쪽으로 돌린다.

"지난 주 금요일이요. 과방에서 스터디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서 나왔어요. 그게 여덟 시 좀 넘어서였나."

"과방 열쇠는 경비실에 잘 맡겨뒀고요?"

"네. 퉁명스러운 경비 아저씨한테 건네드렸던 게 기억이 나네요. 오늘도 과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그 분한테 열쇠를 받았고......"

받은 열쇠로 과방의 문을 여니 별안간 안에서 이질적인 냄새가 풍겼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 시도도 하기 전에, 스터디원 세 사람의 눈에 들어온 이물이 있었다. 과방 바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쓰러져 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도둑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바닥에 엎드려서 움직이질 않는 거예요. 셋이서 벙 쪄서 가만히 서 있다가... 강민 선배가 먼저 과방 안으로 들어갔죠."

스포츠머리의 강민은 과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주춤주춤하며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몇 번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곤 충혈된 눈으로 과방의 열린 문 너머를 응시했다. 손에는 작은 새장 모양의 오브제를 들고 있었다. 남자는 오브제를 든 채 과방 안을 빙글빙글 돌다가, 뒤늦게 문턱 가까이에 있던 진우에게 저지당한다. 손목을 잡고,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 하나 하지 않고 그대로 픽 고꾸라진다.

문턱 너머로, 고꾸라졌다. 복도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진우는 그제야 그의 정체를 떠올려냈다. 같은 학과 사람이다. 경재라는 이름의 선배다. 예진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강민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강민은 경재야, 경재야 하며 복도에 쓰러진 그를 몇 번이고 흔들다가, 반응이 없자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때 유준이 중앙 계단에서 나타난다. 타임라인 자체는 간단하다.

세 사람의 파리했던 얼굴을 유준은 떠올린다. 겨우 사람이 하나 쓰러진 거 치곤 셋 다 너무 기겁해 있다 싶었다. 쓰러진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과방 안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엎어졌던 거라면야, 충분히 기겁할 만도 하다.

"문이 잠겨있던 걸 차치해 두더라도요. 아니, 과방에서 자주 본 사람이면 몰라. 아예 처음 본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 엄청 놀랐죠. 손에 이상한 것도 들고 있었고. 어쩐지 기분이 확 나빠지더라고요."

"아, 그거. 저도 봤어요. 무슨 지혜의 고리라고 하던데?"

"지혜의 고리요?"

예진의 옆에서 줄곧 무언가를 검색하던 후배가 대뜸 테이블 위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유준과 예진에게 검색 결과를 보여주고 싶은지, 액정을 보인 휴대전화를 둘에게로 스윽 미끄러뜨린다.

"이거 봐요. 선배가 말한 모양의 지혜의 고리를 찾아 봤는데, 딱 비슷한 게 나왔어요."

유준은 액정에 띄워진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를 찬찬히 살핀다. 확실히 아까의 현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형태의 퍼즐이, 있었다. 바이러스를 닮은 구체를 안에 품고 있는 새장 모양의 실린더. 하지만 미묘하게 만듦새가 다르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고민하고 있으니, 예진이 아, 하는 탄식으로 입을 뗐다.

"튀어나온 부분의 길이가 다른 거 빼고는, 똑같아 보여."

"길이? 아, 그렇네......"

그녀의 말대로였다. 구체의 표면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돌기들의 길이가 명확하게도 달랐다. 구글이 보여준 퍼즐은, 구체의 돌기들이 분명 실린더의 기둥 사이로 비죽 튀어나와 있긴 하지만 그 길이가 그렇지 길지 않다. 이 정도면 구체를 적당히 회전시켜 실린더 안에서 꺼낼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쓰러진 그가 가지고 있던 퍼즐은 그렇지 않았다. 구체의 돌기가 상당히 길었다. 그래, 흔해빠진 이쑤시개의 평균적인 길이보다도 조금 더, 길었다.

그래서는 구체를 실린더에서 결코 빼낼 수 없다. 구체를 아무리 잘 돌려도, 기다란 돌기가 기둥 사이사이에 부딪혀 방해가 될 거다.

빼낼 수 없다......?

지혜의 고리는, 얽힌 두 입체를 풀어내는 형식의 퍼즐.

그런데 그가 가지고 있던 퍼즐은, 결코 풀 수 없는 형태의 퍼즐이었다고......?

풀 수 없는 퍼즐을 풀기 위해 밀실에 틀어박힌 남자......?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또한 불가해한 상황.

어쩐지 기분이 확 나빠진다.

예진의 말대로다.

유준은 은근슬쩍 눈꺼풀을 들어 맞은 편 예진의 얼굴을 살핀다. 아니나다를까, 퍽 좋지 못한 표정으로 액정을 응시하고 있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준은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꾸며낸다.

"퍼즐이 불량품인가 보네. 그보다......"

상식의 세계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나는 아직, 상식의 세계에 발을 붙이고 서 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밀실을 만든 거라고 생각해, 아니면 남에 의해서 밀실에 가둬진 거라고 생각해?"

"저, 저는. 전자라고 생각해요."

액정에서 고개를 떼어낸 예진의 단발머리가 박력있게 흔들렸다.

"그 사람,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바닥에서 잠깐 일어났을 때 바지 앞주머니에 꽂혀있는 걸 봤어요. 남이 가둔 거라면요, 휴대폰이 멀쩡하게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연락을 안 했을 리 없잖아요. 하다 못해 119도 안 부르고..."

"그러면, 굳이 과방에 갇혀 있어야 할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사실 어디에도 굳이 갇혀 있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갇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가둬져야 할 이유는 간혹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유준은 높은 확률로 남이 그를 가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예진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눈동자를 갈팡질팡 움직였다. 그런 홍채 운동이 삼 초 정도 지속됐다.

"......모르겠어요. 과방에 뭐 특별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 봤자 과에서 받은 상패 정도인데, 그런 게 남한테 그렇게 특별할 것 같지도 않아요."

과방에 보물이 숨겨져 있어 봤자 밀실을 만들면 허사다. 보물을 가지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단숨에 떠오른 논리적 귀결을, 유준은 목구멍 안으로 밀어넘긴다.

잠시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예진은 다시 시선을 자신의 무릎께로 떨어뜨렸다. 유준은 그와 반대로 조금 위의 허공을 바라본다. 후배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듯 눈을 굴리다가, 테이블로 몸을 불쑥 내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습이다. 유준은 눈짓으로 그녀에게 발언권을 넘긴다.

"그런데요, 선배. 자기가 밀실을 만든 거나 남이 밀실을 만들어서 가둔 거나, 일단 밀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한 사람이 더 필요해요. 과방 안에서 문을 잠글 순 없으니까요. 그 사람의 조력자가 있었거나, 아니면 범인이 따로 있거나 하겠네요."

"조력자나 범인이 있다고 한들, 열쇠는 어떻게 하고?"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난 후에야 짜임새가 제법 웃긴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건에 조력자도 범인도 없을 리가 없지 않나.

"그야, 경비실에서 잠깐 슬쩍한 거죠. 경재 씨를 과방에 넣어둔 후에 밖에서 문을 잠그고, 다시 경비실에 열쇠를 돌려둔 거예요. 경비원 분이 항상 경비실에 상주하시는 건 아닐 거 아녜요? 순찰 나가신 틈에 슬쩍할 수도 있고, 화장실 간 틈에도......"

얘가 말이 이렇게 많았나. 많았던 것 같다. 게다가 사건에도 상당히 관심이 있어 보인다. 우리 동아리를 나가지 않았다면 동아리의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너희 과방 근처에 CCTV 있어?"

"어, 음, 아뇨. CCTV는 없는데, 자연대 건물 입구에는 있어요."

"그러면 경비실 근처에는?"

"있지 않을까요? 경비실 근처니까."

"그러면, 그걸 보면 되겠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잊고 있었어."

유준이 별안간 의자를 뒤로 밀고 벌떡 일어났다. 맞은 편의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돌발행동을 지켜본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큰 눈망울을 더욱 크게 뜬 후배였다.

"CCTV... 보러 가시는 거예요?"

"CCTV도 경비실에 있을 거 아냐. 가서 이것저것 좀 떠 보려고."

"떠 봐요?"

"사람이 쓰러졌는데 CCTV는 확인해 보셨냐, 주말 동안 경비 시스템은 어떻게 돌아갔냐. 뭐 그런 것들."

자연대의 경비실은 1층 왼편 가장자리 부근에 있었다. 일자 형태로 길게 지어진 자연대 건물은, 북쪽의 뒷산을 등지고 동서로 뻗어있다. 경비실은 남쪽에 난 정문으로 들어와 왼쪽, 즉 서편에 있는 것이 된다.

유준은 새삼스럽게 건물의 방위를 인식한다. 경비실 왼편에 난, 계단 근처의 창문에서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온 탓이다. 문득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다섯 시에 가까워졌다. 시간이 왜 이리도 빨리 가는지.

아무도 없는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두 사람은 유준을 따라왔다. 다소 어리둥절한 기색이 표정에서 묻어난다. 선배가 떠 본다 하시길래 궁금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어떻게 떠 보실 건지 짐작도 안 되네요, 라는 함의를 담은 면면들이다.

경비실의 벽면에는 작은 창이 나 있다. 순찰 중, 따위의 표식이 걸려 있지 않은 창 너머로 경비의 무뚝뚝한 옆 얼굴이 보였다. 경비원 조끼를 입은 채 방 안쪽의 책상 앞 의자에 걸터앉아 마우스를 연신 클릭하고 있다. 네 개의 분할화면으로 나누어진 모니터 화면이 엿보였다.

유준은 창을 몇 번 두드려 본다. 경비는 무뚝뚝한 얼굴을 바꾸지 않고 이쪽으로 향했다. 불청객들의 신원이 학생들임을 대강 확인하더니, 바퀴 달린 의자를 드르륵 끌어 창 앞으로 불쑥 다가온다. 닫혀 있던 창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학생들."

"안녕하세요. 저, 아까 실려간 애 친굽니다."

"어? 그, 그래."

어딘가 미묘한 반응이다. 무뚝뚝했던 얼굴에 한순간 당혹의 빛이 스친 것을, 유준은 놓치지 않는다.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잠겨 있던 과방 안에 애가 갇혀있었거든요. 과방 열쇠는 선생님이 관리하시죠? 생명과 과방이요."

"그렇지."

그렇지, 한 마디 하곤 입을 꾹 다무는 경비원. 그 외의 부연설명은 없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묻는 수밖에.

"마지막으로 과방 문을 잠근 애가, 얜데요. 금요일 저녁에 잠궈서 열쇠를 선생님께 건네드렸답니다. 기억하세요?"

조금 뒤에 서 있던 예진을 손짓으로 부른다. 경비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가 싶더니, 기억에 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여전히 부연설명은 없다.

"혹시 주말 간 과방 열쇠를 가져간 사람은 있을까요?"

"없어."

단호하다. 대답의 템포도 이전의 질문보다 빠르다. 꼭, 이미 그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유준은, 이번에는 질문 대신 빤한 시선으로 그를 압박해 본다. 눈을 피하던 경비는 입가를 불만스럽게 뒤틀다가 뒤이어 대답했다.

"이 건물 과방 열쇠는 전부 내가 관리해. 학생들한테 받아서 이 서랍에 넣어둔다고."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하나 꺼낸다. 그러더니, 몸을 조금 숙여 유준의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는 서랍의 자물쇠를 찰칵찰칵하며 따냈다. 아마 창 바로 서랍이 있을 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생물과라고 쓰인 라벨지가 붙은 열쇠를 꺼내들었다.

"이렇게 말이야. 이 서랍 열쇠, 이거, 열쇠 꾸러미는, 내가 항상 들고 다녀. 나 외의 다른 사람한테 준 일도 없어."

"주말 동안에도요?"

"없어."

여전히, 단호하다.

"그래서 선생님도 CCTV를 확인해 보고 계셨군요."

"......그래."

"뭔가 수확은 있으셨습니까?

"아니."

또다시 대화가 끊기려는 기미가 보여서, 유준은 빠르게 후속 질문을 던진다.

"CCTV가 어디어디 있는데요?"

"그야 뭐. 건물 현관이랑, 엘리베이터랑, 1층 여기저기에."

"3층에는요?"

"중앙 계단이랑 구석 계단 근처에만 있을 건데."

일자 모양의 자연대에는 계단이 두 곳 있다. 건물 가운데에 난 정문 현관으로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중앙 계단과, 왼쪽 복도 끝에 존재하는 구석 계단. 과방이 있는 건물 오른쪽 부근에는 계단이 없다. 엘리베이터는 중앙 계단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경비는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경비원 조끼의 주머니로 되돌렸다.

"방학이기도 하고 해서. 주말 동안 여기 드나든 사람은 별로 없어. 기껏해야 대학원생 몇 명이 왔다갔다 했나. 그래서 CCTV도 살펴보고 했는데, 모르겠어. 3층에 간 사람이야 있지만 그 사람들이 과방 열쇠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거고."

"서랍 열쇠 말인데요. 진짜 계속 가지고 계셨던 거 맞아요?"

"당연하지. 조끼 안에서 계속 찰그랑대는데. 없어졌으면 금방 깨달았겠지."

"조끼를 벗고 계셨던 적은요?"

"없어. 여기에 열쇠고 지갑이고 다 있어서, 밥 먹을 때도 안 벗어."

"다른 분이랑 교대는 안 하세요?"

"낮부터 저녁 늦게까지는 내가 있고. 밤부터 아침까지는 다른 사람이 있지."

"그 때 열쇠도 건네주시고?"

"그래. 그 사람도 조끼는 계속 입고 있을 걸. 야간 순찰 도는 새벽 시간대니까, 분명 입고 있을 거야."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유준은 생각한다.

밀실이 된 과방 안에서 발견된 사람. 과방의 문은 밖에서만 잠글 수 있다. 하지만 문을 잠글 수 있는 열쇠는 주말 내내 경비실의 서랍 안에 있었다. 서랍 밖에서만 잠글 수 있는 작은 밀실에 갇혀 있던 과방의 열쇠.

이게 사실이라면, 조력자 내지 범인은 밀실을 하나 풀어낸 후 또 다른 밀실을 만든 셈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서랍의 열쇠는 줄곧 경비의 조끼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은 하나.

열쇠를 주고 받은 사람들 중 누군가 거짓말을 했거나, 알려지지 않은 복제 열쇠가 있거나.

이런 '무대 위의 허점'이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지는데......

CCTV를 보여달라고 해 봤지만 칼같이 거절당했다. 더 이상 경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 것 같아 세 사람은 경비실에서 멀어진다. 시간이 어느덧 다섯 시 반을 향해 가던 와중, 예진은 친구들과 선약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자연대 현관에 덩그러니 남은 두 사람. 평일인데도 영 사람의 기척이 없는 현관을 대충 둘러보다가, 3층에 가 보자는 말을 먼저 꺼낸 건 후배 쪽이었다.

"아직 경찰이 오진 않은 것 같으니까요."

애초에 경찰이 다룰 만한 사건인가? 사람이 하나 빈사 상태로 발견되었으니 분명 사건은 사건일 테지만, 민중의 지팡이가 시선을 둘 만한 사건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판단이 되지 않는 유준이었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이상 현장을 둘러보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찝찝하다.

두 사람은 중앙 계단을 올라 3층으로 향한다. 생명과가 주로 사용하는 강의실과 연구실이 몰려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방학이고, 또 저녁인지라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질 않는다. 무슨무슨 연구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전자기기의 작동음이 들려올 뿐이다.

중앙계단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 그 막다른 끝자락에 과방은 있었다. 평범하게 밀고 당기는 식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혹시나 싶어 안을 살펴보았지만, 달리 사람은 없다.

"아까, 경비원이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어?"

유준이 물었다. 분명, 그가 서랍을 열어 생명과라는 라벨이 붙은 열쇠를 꺼내 보여주었던 기억이 있다. 후배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수 번 끄덕인다.

"예진이랑 같이 있던 사람들이 열쇠를 반납하고 간 거 아닐까요?"

"문은 왜 안 잠그고?"

"119도 왔고 하니까. 경찰이 올 거라 생각한 거려나? 그럼 그냥 열어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나 봐요."

편리한 논리지만 그것까지 따질 생각은 없었다. 유준은 거리낌 없이 과방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후배는 잠시 쭈뼛대다가 유준의 뒤를 따랐다.

방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놓여 있는 큼지막한 소파 두 개. 침대 대용으로 사용해도 무방할 법한 크기다. 테이블 너머에는 학과 일정과 동네 맛집 따위가 어지럽게 쓰여있는 대형 화이트보드가 하나. 그 옆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종이 박스가 수도 없이 쌓여 있다. 분명 뚫려있을 터인 창문은 화이트보드와 박스 등으로 가려져, 이제는 겨우 손바닥 두 개 만한 크기만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유준이 밀고 들어온 문 외에 다른 출입구는 없다.

허공과 면하는 오른쪽 벽은 텅 비어 있다. 액자나 옷걸이가 달려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들로 비밀 통로의 문을 가릴 수 있어 보이진 않는다. 애당초 오른쪽 벽에 문을 달아봤자 1층 바닥으로 자유낙하나 할 뿐이고.

왼쪽 벽에는 책장과 진열대의 중간체로 보이는 선반이 세 개 정도 늘어서 있다. 늘어선 선반들로 벽이 완전히 가려져 있어, 벽에 문이 있는지 없는지는 선반을 치우지 않는 이상 확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선반에는 과방에 잠시 두고 간 건지, 아니면 물려줄 요량으로 버려두고 간 건지 모를 전공서들이 잔뜩이다. 예진이 언급했던 상패 역시 전공서가 꽂힌 윗 단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액자 형태인 것도 있고 트로피 형태인 것도 있다. 특히나 트로피 형태의 상패는 아랫부분보다 윗부분이 더 큰 잔 모양이라, 저것들을 쓰러뜨리지 않고 선반을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니까, 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이 방에 드나들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결론이다.

역시 다른 가설을 검토해야 하나. 열쇠를 주고 받은 사람 중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 라든가.

금요일, 스터디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과방의 문을 잠그는 시늉만 하고 경비에게 열쇠를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경재를 과방 안으로 밀어넣는다. 이후 밖에서 문을 잠그고 사라진다.

아니, 이 가설에서, 그는 경비에게 건넨 열쇠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찾아올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경비까지 포섭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우리가 경비실에 들르기 전에 끼이이익 경비는 이미 CC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사건의 쟁점을 사전에 감지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범인에게 포섭되었다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한 사람이 경비에게 과방의 열쇠가 아닌 다른 모조 열쇠를 건넸다고 한다면. 즉, 그는 계속 수중에 과방의 열쇠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렇게 된다면, 그는 경비에게서 열쇠를 되찾는 스텝을 쿵 거치지 않아도 된다. 보다 간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애매한 선에서 부정된다. 오늘 과방의 문을 연 스터디원들은 경비에게서 받은 열쇠로 제대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문단속을 한 부원과 문을 찰칵 개방한 부원이 동일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만일 일이 틀어 다른 사람이 먼저 경비에게서 모조 열쇠를 받아 문을 열려고 시도한다면 허사가 되는 계획이다. 나라면 그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열쇠를 복사하는 수밖에 없나?

가장 가까운 열쇠방이 어디에 있지?

주말에 열쇠를 복사할 수 있나?

아니, 애초에 뭘 위해서?

이 과방에 사람을?

그러니까......

퍼즐을.

어때요?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다려 봐. 조금만 더 생각하면 풀릴 것 같아.

하지만 벌써 날이 졌는데.

지구가 도는 거랑 문제 풀이는 상관이 없잖아.

그거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겨우 이런 걸 해결 못하면 자존심이 상해.

그럼요. 할 수 있어요. 풀 수 있어요.

어디까지 했더라.

열쇠를 복사했다는 가설까지요.

그래, 맞아. 거기부터 다시.

다시 검증하자.

검증해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으니까.

죽을 때까지 생각하고, 사유하고, 고민하고, 헤아리고,

역시 사람은 머리를 좀 써야 사는 게 재미있는 거 같아.

하하하......

맞아. 나는 언제나 옳지.

언제나 옳은 답을 낼 수 있는 몸이니까.

어떤 파국으로 치달아도......

답을 낸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어진 문제를 풀었을 뿐이잖아?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거라니까......

허공에서

손.

머리?

어깨, 몸통.

팔.

뻗는다.

이쪽으로.

인지.

나를 향해.

아니...

나를 넘어?

소리.

소란.

사려.

소름.

수라.

생령.

수륜.

손.

선배?

후배의 얼굴을 짓누른다.

소파 위로 쓰러진다.

마스크가 찢어진다.

그런데 쟤는 이름이 뭐였지?

발버둥.

그러니까, 후배?

누구의?

동아리 후배?

우리 동아리에 저런 애가 있었나?

"유준아."

네? 교수님.

"정신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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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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