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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ouflage (4)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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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옥상에서 내려온 세 사람은 잠시 로비 소파에 앉아 침묵으로 일관된 시간을 보냈다. 나무의 비강 출혈이 다시 시작된 탓도 있기야 했지만, 애당초 앞으로 한두 시간만 있으면 갤러리와 바깥 세상의 길이 연결되는 시점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덕도 있었다.

변호사의 비서라고 말했던 탐정은 소파에서 일어나 갤러리 쪽으로 사라졌다. 무언가 도움이 되는 증거를 찾아보겠다는 이유였다. 누구한테 도움이 되는 증거라는 건지 나무는 이해하지 못했다. 경찰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였을까.

어느새 가벼운 화장을 마친 유신은 그와 함께 길쭉한 2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갤러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등 뒤로 큰 창이 나 있어 밝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밝고 화사한 장소에서 그녀는 답잖게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휴지로 콧구멍을 막은 나무는 배터리가 얼마 닳지 않은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일곱 시에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늦어도 아홉 시에는 경찰이 들이닥치게 될 것이다.

그 때까지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까.

대강의 가닥은 잡혔다. 모두를 모아 범인을 지목하자.

그게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다.

"목말라."

동현이 갤러리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던 유신이 대뜸 립이 발린 입을 열었다.

"뭐 좀 마시러 갈까?"

나무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로비 테이블에 아직 치우지 못한 샴페인 잔들이 각자의 음료를 머금고 남아있기야 하였지만, 상온에 뚜껑도 없이 열두 시간 가량 방치된 음식물은 섭취에 무리가 있을 게 분명했다.

바깥과의 왕래가 불가능한 지금, 갤러리와 안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음식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갤러리 3층의 레스토랑 뿐이다. 유신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무는 그녀를 데리고 갤러리로 향했다. 어제오늘 몇 번이고 왕복한 연결 통로는 이제 익숙할 지경에 이르렀다.

갤러리 1층에 이르자 경사로 밑의 소파 세트에 사람이 몇 모여있는 게 보였다. 지민과 승현이 영우를 붙잡고 일방적으로 물음을 쏘아대고 있는 모습 뒤로 당황한 얼굴의 동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무가 입에 밴 인사를 했다. 뿔테안경을 밀어올리던 지민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인사를 받는다. 코를 막고 있는 휴지를 보고 놀란 듯했다. 그녀 옆에 앉은 승현은 나무에게 슬쩍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다시 영우에게로 눈동자를 돌렸다.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컬이 들어간 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유신이 붙임성 있게 물었다.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나무는 판단했다.

어제와 다르게 아이보리색 정장의 자켓은 입지 않고 있던 영우가 세팅되지 않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새카만 셔츠가 창백한 축에 속하는 얼굴빛과 대조되어 어딘가 흉흉한 분위기를 준다.

"아아...... 작가님들께서 궁금하신 게 많으신 모양입니다. 어제 작가의 방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자꾸 물으시네요. 별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언제나의 미소를 팔자 눈썹과 함께 내보인다. 하지만 그 얼굴 굴곡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가 쌓여있었다. 듣도보도 못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갤러리에 갇힌 모두에게 주어진 피로감이다.

"평론 컨펌을 받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젯밤 갓 구워진 크로와상을 옮길 때, 작가의 방에서 말 그대로 튀어나온 영우가 안채까지 동행하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아영 작가의 전시 홍보를 위해 쓴 평론을 작가 자신에게 컨펌받기 위해 작가의 방으로 향했는데, 때마침 그 자리에 한 선생님까지 계셔 대단히 긴장하고 말았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 얘기를 해 드렸더니 그거 말고는 한 얘기가 없냐면서......"

"아영이를 거의 마지막으로 보신 분이잖아요. 뭐라도 짚이는 게 없나 싶어서 여쭤본 거죠."

머쓱하게 보브컷을 매만지던 지민이 시무룩한 어조로 변명했다.

"그런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요, 저는 천식이 심해서 그 안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마스크 갖고 계시지 않으셨어요?"

"작가의 방 전시를 보고 나서 버렸습니다. 일회용이었거든요."

그리 말하고 영우는 전시를 진행하던 아영의 모습이라도 떠올랐는지, 눈을 꾹 감고는 미간에 깊은 골을 새겼다. 짧은 추모였다. 동시에 짧은 침묵이 경사로 밑을 가득 메웠다.

"머리는 없었습니다."

승현이 언제나의 독특한 어조로 짤막한 침묵을 깼다.

"안채도 뒤졌고 갤러리도 전부 뒤졌지만 없었다. 직원 구역에도 들어가 봤는데 없었습니다."

"직원 구역이요?!"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소파 옆에 어영부영 서 있던 동현이 아연해선 목소리를 높였다. 정작 승현은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한 시선을 그에게 보내기나 한다.

"저기, 갤러리 프론트 뒤의 창고랑, 안채 프론트 뒤의 직원실도."

"뭐가 있던가요?"

나무가 물었다.

"철제 선반, 갤러리와 안채 운영에 필요한 것들. 특별히 빗물에 젖은 것도 없었고, 아영이의 머리도 없었습니다."

"수장고는 없던가요?"

"수장고?"

승현이 의아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녀의 돌발 행동을 염려했는지, 지민이 손을 올려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장고는 못 찾았어요. 아마 작품 보관은 외부 수장고에 맡기는 시스템인 것 같네요. 선생님께 여쭤볼까요?"

"그 말대로입니다."

돌연 뒤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슨트 은수가 이제는 그녀의 심복으로 보이는 서진을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걸어오는 방향으로 보아 안채의 연결 통로에서 나온 듯했다.

"갤러리 헴에는 자체 수장고가 없습니다. 작품의 보관은 외부 업체와 계약을 맺어 외부 수장고에 보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설치 미술 작품이 많아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큐레이션을 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하던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섯 명 분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가, 그녀 뒤편의 서진에게 향했다가를 반복했다. 서진은 몸을 움츠린 채 그들을 흘끔이기나 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남의 시선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어 보이는 은수는 승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객실은 조사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승현은 그녀의 의도를 재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범인은 작가님의 머리를 잘라서 어떤 이득을 보았을까요?"

대답이 없는 승현을 보고 은수가 말을 이었다.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기는 했다.

"왜 머리를 잘라야 했다고 생각합니까?"

나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승현을 응시하던 은수의 눈동자가 순간 나무를 향한다. 눈이 마주친다. 새카맣고, 또 기백 있는 시선이었다. 소나무라는 인간을 살피듯이 머물렀던 그녀의 눈은 이내 다른 이를 시야에 담았다.

"테오도르 제리코는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이끈 천재입니다."

주제가 뜬금없이 다른 쪽으로 튀었다, 라고 인식될 만한 서두였다. 하지만 세 명의 예술가들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졌는지, 한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침묵으로 일관되었는데도 분위기의 전환이 이렇게 명료할 수가 있을까.

"당대 유행했던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신고전주의와는 다르게, 고고학적, 종교학적 틀에서 벗어나 화가 자신의 욕망과 심리를 서슴없이 그려낸 낭만주의의 '광인' 테오도르 제리코는 《메두사 호의 뗏목》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1800년대 메두사 호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그림은, 난파된 선박에서 뗏목을 겨우 엮어 망망대해에서 조난하던 150여 명의 인간들이 살인과 식인을 자행하며 생을 연명한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알고 있는 그림이다. 나무는 언젠가 참고 자료로 보았던 《메두사 호의 뗏목》을 떠올린다.

다 부서져가는 뗏목 위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뒤엉켜있는 사람들. 결코 살아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들이 뗏목 가장자리에 축 늘어져 있다. 개중에는 몸의 일부를 잃은 이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을 양분으로 하여 살아남은 이들은 수평선을 향해 하얀 천을 흔들며 환호한다. 파도 저 너머에 배가 한 척 보이는 것이다. 길고 긴 조난의 끝이다.

"수평선에서 다가오는 배를 보고 환호하는 생존자들의 모습은 뗏목 위에서 희생된 사체들의 상세한 묘사와 대비되어 희망과 희생이라는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신고전주의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감정이 흘러넘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민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뿔테안경 뒤의 두 눈에서 노기가 일렁였다. 그녀의 강렬한 시선을 받고도 은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서진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겁을 먹은 듯 보였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사체 묘사가 상세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작품 생활 초기부터 죽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영안실을 드나들며 인간의 신체 토막을 관찰하기도 했고, 당대 단두대에서 잘린 머리를 작업실로 가져와 보고 그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영우가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지민과는 다르게 당혹의 감정이 두 눈에 새겨있었다.

"지금 우리 중 누군가가 사람의 머리를 모델로 사용하려고 잘라서 보관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성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칼 같이 잘린 단발머리가 머리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린다.

"그럼 묻겠습니다, 조영우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새로이 태어난 작품 『조화』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떤 생각을 했냐니, 그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평론가가 숨을 잘못 마신 듯한 기이한 소리를 냈다. 실룩이는 입에선 어떠한 말도 나오질 않는다.

"특수한 재료로 만든 예술 작품은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관객을 압도합니다. 이 세상에는 개미 수십만 마리를 죽여 그 사체를 늘어세워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피와 소변, 하다 못해 유골로 작품을 만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더한 비윤리 논쟁의 영역으로 가 볼까요? 굶주린 도마뱀과 귀뚜라미를 한 공간에 몰아넣어 적자생존을 표현한 작가는 어떻습니까? 상어와 송아지의 사체를 이용해 죽음에 대한 광적인 부정을 묘사한 작가는 어떻고요? 예술 작품에서 인간의 사체와 상어의 사체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요?"

"달라요. 다르다고요! 도슨트 님이 말씀하신 작품 저도 전부 알아요. 하지만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상어를 죽이진 않았잖아요! 우리 안의 누군가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죽였어요. 선후 관계가 달라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그 작가 역시 작품을 위해 상어를 죽였습니다. 상어잡이에게 부탁해서 상어를 조달했으니 말입니다. 설마 상어를 죽인 건 상어잡이니 살생을 요구한 예술가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하, 하지만 사람은 상어랑 다르잖아요."

"어디가 어떻게 다릅니까? 상어도, 이아영 씨도 예술 작품의 완성을 위해 원치 않은 죽음을 맞은 건 같습니다. 상어는 인간과 소통할 수 없으니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영 씨가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면 살인을 포기했을까요? 작품의 완성을 포기하고 물러났을까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은 승현이 입가를 비틀며 물었다.

단발머리 도슨트는 망설임 하나 없이 대답한다.

"그렇게 그 분의 머리를 찾고 싶으시다면, 공용 공간 외의 개인 공간도 조사해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설마 사람 머리를 곁에 두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지 마시라는 겁니다. 범인은 예술을 위해 인간 하나를 공물로 바친 광인이니까요."

지민과 승현은 그녀의 조언을 따라 개인 공간을 침범하기로 마음 먹은 듯했다. 소파 주위의 모두에게 객실을 드나들어도 괜찮겠냐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은수의 강력한 논리 설파가 끝난 직후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모두가 객실 공개에 찬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객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해 봤자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몰리기나 할 뿐이다.

소파에 모여있는 이들은 모두 여덟 명. 갤러리 안에서 생존해 있는 열 명 중 여덟이 한 자리에 모여있으니 두 사람만이 단독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한 명은 객실에서 잠을 자겠다며 사라진 유선이고, 다른 한 명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선혜다.

"한 선생님께선 객실에 계실 겁니다. 저희가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왔거든요."

은수가 말했다. 저희라는 건 그녀의 뒤에 얌전히 서 있는 서진을 포함하는 말이었으리라.

"상심이 깊으신 모양이라 위로를 해 드렸습니다."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꼬투리를 잡는 사람은 없었다.

동현이 뒤이어 유선 역시 객실에서 잠을 자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에 없는 두 사람의 신변이 간접적으로 확인되자 지민은 승현을 데리고 안채 쪽으로 사라졌다. 영우는 좀 쉬어야겠다며 한숨을 푹 쉬고는 그들을 뒤따랐다. 자신의 객실로 갈 요량인 듯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이들이 모두 사라졌는데도 그저 소파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던 동현은 나무와 눈을 마주치고 불편하게 웃었다. 유신은 그 모습을 흘기다가, 안채로 향하는 영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수에게 묻는다.

"목이 말라서 뭐라도 좀 마시려고 했는데, 혹시 레스토랑에 뭐가 남아있는지 아세요?"

"생수라면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샴페인이랑 주스는요?"

"어젯밤에 동났습니다."

"레스토랑 냉장고 안에 있는 거죠? 생수."

"예. 꺼내드셔도 될 겁니다."

그 길로 유신은 항상 데리고 다니는 나무와 주인을 잃어 허망해 보이는 동현을 대동하고 경사로를 올랐다. 도슨트 두 명은 애제자를 잃은 선혜가 어지간히 걱정되는지 다시 안채로 가 보겠다고 했다. 경사로 난간 밑으로 연결통로 쪽으로 걸어가는 하얀 셔츠의 도슨트들이 보인다. 안채의 인구 밀도가 높아지는 모습이다.

2층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풍겼다. 생리적인 거부감이 유신의 몸을 엄습한다. 어릴적 한참을 머무른 병원 한구석에 은은하게 배었던 향과 비슷하다. 흐릿한 플래시백을 애써 무시하며 2층으로 발을 내딛었다.

"저, 레스토랑으로 먼저 가 있으실래요? 전 현장을 다시 보려고요."

"다시 보고 싶은 게 있어? 대체 뭘 보려고, 오 탐정."

"아뇨, 그냥, 전체적인 모습을......"

어차피 빨리빨리 움직일 이유 같은 건 없다. 지금 당장 음료를 마셔야 할 정도로 목이 마르지도 않다. 유신은 궁금한 게 많은 탐정을 따르기로 했다. 나무도 큰 불만은 없는 듯했다. 그는 대체로 인생에 불만이 없어 보인다.

경사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사건의 참상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마네킹들이 서로 맞닿거나 맞닿지 않거나 하며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 있는 작품 가운데에, 이제는 체온이 식다 못해 몸 밖으로 흘러나온 혈액마저 완전히 온기를 잃은 사체가 누워있다.

미술용 앞치마 밑에 캐주얼한 복장을 걸친 모습은 어제와 다르지 않다. 머리만 있었다면, 어쩌면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유로운 자세로 잠을 청하는 특이한 작가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머리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머리를 잃은 목에서 흘러나온 혈액은 어깨 위로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제는 하얀 바닥에 말라붙어 칙칙한 갈색을 띤다. 폴딩 도어가 활짝 열린 작가의 방 쪽으로 같은 칙칙한 색의 선이 이어져 있다. 작가의 방 테이블 위에 있는 절단기에서 목이 잘려 작품까지 질질 끌려왔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다.

동현은 시신 앞에서 짧게 묵념을 하는가 싶더니 혈흔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작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은 아직 켜져 있었다.

"이, 이걸로, 머리를 자른 거겠죠."

작가의 방 안쪽 테이블 위의 절단기를 가리키며 동현이 말했다. 혈액으로 범벅이 된 테이블이 이상한 빛을 내뿜는다. 테이블과 맞닿은 벽에도 혈흔이 남아있기야 하였지만, 단순히 테이블에 떨어진 피가 튄 느낌으로 묻어있을 뿐 피가 흩뿌려진 느낌은 아니었다.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나오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죽인 후에 목을 잘랐다. 살아있는 인간의 목을 자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유신은 문득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상상되어서 상당히 역겨운 기분이 든다.

"여기서, 목을 잘라서... 머리를 어떻게 한 걸까요? 잠깐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몸을 작품 안에 끌어다놓고,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머리를 챙긴 걸까요?"

"그랬겠지. 머리를 먼저 챙기고 몸을 끌어다 놓는 것보단 그편이 편하고 이치에도 맞잖아."

"그럼 머리는 어떻게 챙겼을까요? 피가 많이 흘렀을 테니까 분명 어딘가에 넣어서 옮겼겠죠. 이, 이게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작품을 완성하고, 우욱, 머리를 챙기는 일석이조의 계획살인이라고 한다면요. 범인은 분명히 머리를 넣어서 옮길 운반 도구를 준비해 왔겠죠?"

"숨길 장소도 미리 생각해뒀을 거 같아. 숨겨서, 갤러리에서 나갈 수 있게 되면 몰래 가지고 나가려고 한 거겠지...... 소름끼쳐."

"......대체 어디에 머리를 넣어서 옮긴 걸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새벽에 일어나 보았던 풍경을 떠올린다. 불이 켜져 있었던 안채의 1층 로비. 정문 근처 바닥에 들이친 비. 하지만 비바람치는 밖에서 들어온다면 자연스럽게 생겨야 하는 젖은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즉, 안채 정문을 통해 누군가가 건물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누군가는 안채의 정문을 통해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안채의 정문과는 주차장이 가까우니, 그는 어쩌면 주차장의 차에 볼일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향한 그는 안채의 정문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발자국 없는 안채 정문의 바닥이 그것을 증명한다. 안채가 아닌 갤러리의 정문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높은 확률로 아영이의 목을 잘랐다.

"......역시 차에서 머리를 담을 뭔가를 가져온 거 같아."

유신이 중얼거렸다.

"그거 말고는 상황이 말이 안 돼. 송 군, 아까 뭐라고 했었지?"

피로 젖은 절단기에서 조금 떨어져 작가의 방 가운데의 커다란 테이블을 살피던 나무는, 갑작스레 대화의 배턴을 넘겨받았는데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대답했다.

"여기에 갇힐 상황을 예견하고 차에 살인 도구를 실어두는 범인이라면 그 수고를 보아 무죄방면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었지."

"살인 도구가 아니라, 그냥 사람 머리를 옮길만한 통이 차에 실려있었다면 어때? 왜, 세차할 때 세차도구들을 담는 통이라든가."

"보통 그런 걸 싣고 갤러리까지 오나? 세차장 갈 때나 싣지."

"예를 든 거잖아, 예를."

"사람 머리만이라면 적당히 큰 비닐에도 담을 수 있을 테니까. 일리는 있네. 아아, 비닐이라면 통보다 부피도 줄일 수 있겠고. 좋은 착상인데."

"그래! 범인은 안채 정문으로 나와서, 주차장에 주차된 자기 차에 우연히 실려 있던 통이나 봉투, 하다못해 비닐 같은 걸 꺼낸 거야. 아영이를 죽여 작품을 완성하고......"

말을 할수록 목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죽음을 입에 담는 게 무의식 중에 저항감이 든다. 많이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얼굴을 마주하고 말을 나누었던 사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던 사이다. 조심스러운 주제를 꺼냈던 사이다.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문장을 차마 끝맺지 못했다. 제 목은 잘만 붙어있는데 목소리 하나 내질 못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죽음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한순간 현실로 초점이 뚜렷해지고야 만다.

아영이는 왜 죽어야 했을까.

"거기에 잘린 머리를 담아 약취했다."

그가 나직히 이어 말했다.

"그럼, 잘린 머리는 도로 차에 태워 뒀을까? 작가 분들이 여기저기를 이잡듯이 뒤지신 것 같은데, 사람 머리 같은 눈에 띄는 게 보이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건물 외부...... 차에 뒀을 가능성도 있군."

"주차장으로 가 볼까요?"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는지, 탐정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몸을 내밀었다.

그의 말마따나 일리 있는 추측이다. 주차장에 가서 모두의 차를 뒤져보는 건 결코 불필요한 행위가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목이 너무 탄다.

함부로 목소리를 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지도 모른다.

"가기 전에,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물 한 잔만 마셔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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