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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ouflage (5)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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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제의 잡무를 증명하는 텅 빈 샴페인 병과 음료수 통만이 오픈형 주방의 조리대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크로와상 생지를 덥혔던 오븐은 차갑게 식었고 선반에 가득했던 잔은 상당수가 반납되지 않아 듬성듬성하다. 유신은 그 중 탄산음료 잔으로 보이는 부피감 있는 녀석을 집어들었다.

"송 군도 한 잔 줄까?"

"아니."

"오 탐정은?"

"아우, 저도 괜찮아요."

"아침부터 일이 많은데 다들 배고프진 않아?"

"새벽부터 일어났더니 입맛이 없네."

"그러니까요. 게다가 이상한 사건도 일어났고. 긴장이 돼서 그런지 입맛이 없어요."

동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신은 제빙기의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반도 남지 않은 얼음을 스쿱으로 퍼내 잔에 옮겨담는다. 나무는 그새 주방의 큼지막한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내주었다. 2리터짜리 페트병이다.

"냉장고에 뭐 있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생수통밖에 없었다고?"

"크로와상은 어제 다 먹었는지 안 보이고, 음료 병은 다 마신 게 저기 놓여있고. 너한테 준 생수가 마지막 물건이었어. 갤러리 정식 오픈은 나중이니까 그 때 식재료를 채워두려고 했었나 본데."

그의 대답을 들으며 유신은 얼음이 가득 담긴 컵에 차가운 생수를 흘려넣었다. 물의 흐름에 따라 얼음이 짤랑대며 부산히 움직인다. 소리 하나 없는 레스토랑에서 들으니 괜시리 오싹한 느낌이 있다.

"머리만 잘못 맞아도 죽는 게 사람이니, 살인 방법은 제쳐두고 머리를 자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고민해 보는 게 좋겠어."

나무가 말했다. 드디어 코를 막고 있었던 휴지를 빼고 있었다. 멍하니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살피던 동현이 그의 말을 듣고 번뜩 정신을 차린다. 차갑다 못해 얼음장 같은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걸 마시고 있는 건 유신인데도.

"시신이 그렇게 놓이고 머리가 탈취된 상황에서는 살인의 이유 같은 걸 생각해 봤자 헛수고잖아.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범인, 머리를 가져가기 위해 목을 자른 범인. 그는 분명 우리 안에 섞여있는데도 광기는 편린조차 보이질 않으니...... 좀 더 실용적인 사고를 해 보자고."

"그럼, 일단 한선혜 선생님은 제외되겠네요."

눈을 둥그렇게 뜬 동현이 말했다.

"팔도 불편하시잖아요, 그분. 휠체어도 손목을 움직여서 겨우 조종하시는 것 같던데요."

"맞습니다. 양손을 못 쓰시죠. 손가락을 못 움직이세요. 제가 알기로 왼팔은 손목까지, 오른팔은 팔꿈치까지 움직일 수 있으십니다. 그런 불편을 극복하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계시기에 거장이라고 불리시는 거긴 합니다만."

"극복하셨다는 건......?"

"한 선생님도 이아영 씨와 같은 설치 미술가셔서 독특한 오브제를 많이 만드시곤 했습니다. 장애를 갖게 된 이후로도 작품 제작은 원활하게 하고 계시고요. 오브제의 전체적인 상은 컴퓨터로 시뮬레이팅한 다음 공장에 맞춤 제작을 맡기고 미세한 묘사는 첨단 기기를 활용해 직접 작업하신다는 모양입니다."

"어, 어라, 그러면."

"절단기로 사람 목 자르는 정도는 충분히 하실 분이죠. 하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선생님의 소개를 계속하던 그는 돌연 시선을 유신에게로 돌렸다. 얼음물의 싸한 냉기가 위벽을 할퀴고 내려가는 느낌에 괴로워하던 유신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눈썹을 들어올린다.

"물 한 잔만 줘."

"뭐야, 아까는 괜찮다고 했으면서."

"말하다 보니 목이 마르네."

얼음물은 나무에게도 지나치게 차가운 것 같았다. 건네받은 얼음물을 마시고 미간에 주름을 새기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하지만, 운전은 하실 수 없습니다. 한 선생님과 비슷한 전신마비 환자들의 경우 특수 제작 컨트롤러로 자력 운전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으셔서 운전을 꺼리신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자가용도 갖고 계시지 않고요."

나무가 근처 테이블에 올려둔 얼음 컵에서 짤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서 머리를 담아갈 무언가를 꺼내 갤러리로 향한 범인상과는 틀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애시당초 자신 소유의 차가 없으니 말이다.

"아영이가 선생님이랑 같이 왔다고 했었어."

유신이 조리대에 두 손을 얹고 말했다.

"그 선생님이라는 분은 범인에서 제외되나, 그럼?"

"아영 씨가 살해되기 전 한 선생님이 차 키를 건네받았다면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지. 차를 같이 타고 왔다면 안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 테니까. 트렁크에 작품의 재료를 싣고 있었다면 비닐은 널려있을 테고."

핸디캡을 지녔음에도 한선혜는 용의자 리스트에서 제외되지 못했다. 당신의 예술에 대한 갈망 탓에 제자를 살해한 용의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얘기해준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오 탐정, 아영이 차 키 봤어?"

"어, 아니요. 못 봤죠. 작가의 방이나 아영 씨 객실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 외의 장소에 있으면 안 되는 거 같긴 하네."

농담조로 말한 유신이 애써 웃었다.

"작가의 방에는 없었어. 아까 테이블을 쭉 훑어봤는데, 차 키 같은 건 안 보였어."

"송 군도 참 관찰하는 거 좋아한단 말이야."

"일단은 그림으로 먹고 살고 있어서."

온난한 레스토랑의 실내 기온은 품던 액체를 잃은 얼음이 천천히 녹아가기에 딱 알맞았다. 나무는 얼음만 남은 잔을 들어 여태 오픈형 주방 안쪽에 서 있는 유신에게 도로 건넨다.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며 얼음은 싱크대에 버려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

"예를 들자면?"

"음, 영우 씨라든가. 그 분도 확실히 예술계에 몸담고 계시잖아. 갤러리에 차도 갖고 오셨고. 아, 그러고 보면 차를 안 갖고 온 사람은 우리뿐이지?"

"너랑 내가 택시로 왔고, 여기 비서님이랑 변호사님이 한 차로 오셨다고 했고, 아영 씨랑 한 선생님이 또 같이 오셨고, 나머지 작가 두 분이랑 도슨트 두 분, 영우 씨는 자차로 왔으려나. 일곱 대? 주차장에 차가 그렇게 많았다고?"

"아뇨, 주차장에 차는 여섯 대였어요."

동현이 끼어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왜인지 쑥스럽다는 티를 내며 슬쩍 웃는다.

"제 객실에서 주차장이 보이거든요. 음, 그러니까, 나머지 다섯 분 중에 어떤 두 분은 같이 오셨다는 게 되겠네요."

"도슨트 분들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분들은 객실도 같이 쓰시니까요."

"어쩐지 2인1조로 여겨야 할 것 같은 분들이지."

"형사도 2인1조로 다닌다니 그다지 이상하진 않은데."

나무의 의미 없는 추임새를 적당히 대화의 흐름에 묻어버리고 유신은 말을 이었다.

"그럼 유선이 차랑 아영이 차를 빼고, 남는 건 네 대. 지민 씨, 승현 씨, 영우 씨 그리고 도슨트 분들의 차겠지. 정황 상 범인은 주차장에 들른 게 확실하니까 이 안에 범인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 같지?"

"아까 말씀하신 거처럼 한 선생님도 빼 놓긴 애매하죠. 제자의 차 키 정도는 적당히 구실을 대서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요."

"하긴, 차에 뭘 놓고왔다고 둘러대면 될 일이야."

"조영우 씨는 범인이 되기 어려울 것 같아."

유신의 능숙한 대화 실력으로 말할 기회를 잃은 나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분은 천식이시잖아? 더군다나 마스크도 한 번 쓰고 버렸다고 하셨지. 분진이 가득한 작가의 방 안에서 사람을 죽이고 목을 잘라 폴딩 도어를 연 다음 시신을 작품까지 끌고 간다? 그 전에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는 게 빠르지 않겠어?"

"여분의 마스크가 있다면 어때?"

"너도 봤잖아. 마스크도 없이 작가의 방에 들어갔다가 허둥지둥 나와서 기침하시는 모습."

"일부러 안 끼고 나왔다면? 더는 마스크가 없는 척하려고 말이야."

"누구한테 마스크가 없는 척하는데?"

"으음, 한 선생님이나 우리한테. 아영이는 죽일 생각이었으니 제외하고......"

"그건 말도 안 되지. 그 분도 한 선생님이 작가의 방에 계신 건 예상 외였다고 하셨었잖아. 게다가 우리가 때마침 작가의 방 앞을 지나간 것도 우연이야. 그 때 레스토랑에서 도슨트 분들이랑 대화를 좀 더 길게 했었다면 우리는 영우 씨랑 마주치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러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영우는 본래 아영에게만 목격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죽일 상대의 앞에서 마스크가 없는 척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는 여분의 마스크를 갖고 있지 않아 맨입으로 작가의 방에 들어갔다, 라는 증언을 해 줄 사람을 제 손으로 죽여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그에게 여분의 마스크가 없는 건 사실이다. 또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작가의 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조차 없는 천식 환자인 영우는 작가의 방 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이 되지 못한다.

논리적인 추측이다. 유신은 조리대에 두 팔꿈치를 대고 건너편의 나무를 빤히 쳐다본다. 풍성한 머리칼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려 조리대까지 닿는다.

"그럼 지민 씨는?"

"옷이 어제랑 똑같았어."

"응? 그야 그 분은 짐이 하나도 없었으니 당연하지. 갈아입을 옷 같은 게 있었을리가."

"바지가 통이 넓었잖아."

동현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리는 모습을 흘기면서, 유신은 눈짓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유순한 동거인은 저항 하나 없이 추리를 잇는다.

"사람을 죽여서 그냥 둔 것도 아니고, 죽여서 목을 잘랐어. 게다가 목을 자른 다음에 남은 몸을 질질 끌어서 작품에 가져다두기도 했어. 그 분이 입은 바지는 통이 상당히 넓더군. 한때 유행이었던 나팔바지가 떠오를 정도던데. 목을 자른 절단기는 책상 위에 있었으니 십분 양보해서 바지에 피가 흐르지 않게 주의했다고 해도, 몸을 끌어 작품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 통 넓은 바지에 피가 묻지 않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워."

"묻은 피를 빨아서 다시 입은 거 아냐?"

"피가 그렇게 쉽게 빨리지 않잖아. 객실 욕실에는 과산화수소수 같은 건 없어. 더군다나 청바지처럼 색이 짙은 바지도 아니던데. 최대한 빨았어도 희미하게 자국은 남았을걸. 그런데 아까 다같이 모여있던 자리에서 봤더니 바지에 뭐가 묻었던 자국은 안 보였어."

"갈아입을 바지를 차에 싣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테니 지민 씨의 바지는 결백하다는 게 되겠네요."

지민의 바지가 피에 젖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 역시 범인은 아니다. 유신은 불현듯 지난 봄 카지노에서 보았던 남자를 떠올린다. 크로스백에 갈아입을 셔츠를 가지고 다니던 수상한 남자였다. 갈아입을 바지를 가지고 다니는 것보단 셔츠를 가지고 다니는 게 덜 수상쩍기야 하지만.

"남은 건 승현 씨랑 도슨트 두 분인가. 승현 씨부터 물어볼까?"

"그 사람들이 수상쩍다고 생각하나 봐? 마지막까지 미뤄두고."

"그야 수상하잖아. 차도 같이 쓰고 객실까지 같이 쓰는 사람들이야."

"아, 맞아요. 생각해보니 지민 씨랑 승현 씨한테 이런 얘길 들었는데요."

동현은 줄곧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퍼뜩 들고 말했다. 어제 저녁 안채의 지하 홀에서 지민과 승현을 만나 수상쩍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무언가 하면, 리셉션에서 도슨트 은수가 그의 발을 걸어 일부러 쓰러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 탐정, 나 모르는 새 도슨트 분한테 미움이라도 산 거야?"

"아니에요. 저도 영문을 모르겠더라고요."

"바닥에 있던 무언가를 줍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넘어뜨렸다, 라."

나무가 동현에게서 전해들은 가설을 천천히 되읊었다. 미심쩍다는 얼굴을 숨기지도 않고 있는 게 유신의 눈에는 새롭게 비쳤다.

"그게 사건하고 관련이 있을까요?"

"으, 그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분들이 수상하다고 하시길래......"

"죽은 건 이아영 씨고 발에 걸려 넘어진 건 동현 씨니까,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나무는 간단히 동현의 의구심을 제쳐두고 다음 사람의 혐의를 분석했다. 발이 걸린 당사자인 동현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지만, 나무의 추리에 흥미가 있는지 투정 하나 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승현 씨는, 인공 와우를 쓰고 있지만 그게 살인에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문제 없이 자신의 차에서 머리를 담을 통 같은 걸 꺼내 갤러리로 향한 후 이아영을 살해할 수 있어. 절단기로 머리도 물론 잘라낼 수 있지. 폴딩 도어를 열고 남은 몸을 작품 안에 끌어다놓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하지만."

나무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범인은 우산을 쓰지 않았지. 그게 문제야."

"엥?"

유신이 허를 찔린 듯 묘한 목소리를 냈다.

"우산이요?"

동현이 덩달아 의아한 투로 물었다. 나무는 두 사람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안채 정문 근처 바닥이 물로 젖어있었잖아. 생각해 봐. 문 앞에 서서 우산을 쓰고 나와서 문을 닫는다. 그러면 바닥에 빗물이 많이 들이치지 않겠지. 그런데 유신이 네가 말했듯 정문 바닥은 젖어있었어. 그건, 범인이 문을 열고 빗발에 당황하다가도 결국 우산 없이 주차장으로 나갔다는 증거야."

"잠깐, 알았어. 그건 이해했어. 그런데 우산이 없는 게 왜...... 아!"

"안승현 씨의 인공 와우는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으니까."

반삭인 승현의 귓바퀴에서 번쩍번쩍 빛나던 메탈릭 레드의 인공 와우를 유신은 떠올렸다. 동현도 같은 걸 떠올렸는지 처진 눈을 번쩍 뜬다.

"인공 와우는 말 그대로 인공이야. 귀에 항상 매달고 다녀도, 그걸로 주변의 소리를 인식해도 어쨌든 기계라는 말이야. 그런 게 빗발에 젖어서는 안 되지. 인공 와우가 고장나서 겪는 불편함은 그렇다 쳐도, 하룻밤만에 인공 와우가 침수로 고장이 나면 사람들이 얼마나 의심하겠어."

"아, 아니. 승현 씨는 인공 와우를 꼈다가 안 꼈다가 하셨잖아요. 주차장으로 나갈 때 잠깐 인공 와우를 떼서 주머니에 넣었던 거 아닐까요?"

"주차장에는 파쇄석이 깔려 있어요."

동현이 미간에 주름을 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무는 고개만을 슬 돌려 탐정 겸 비서를 살핀다. 묘한 흥분이 서린 표정이었지만, 동현은 아마 인식하지 못하리라.

"사람을 죽이고 머리를 담을 통을 가지러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상황이 아주 곤란해집니다. 그런데 발을 내딛을 때마다 파쇄석이 밟혀서 버석버석 소리가 나죠. 유신이마냥 우연히 로비로 내려오지 않아도, 창밖에서 버석대는 소리가 나면 주차장 쪽으로 창이 난 객실의 누군가가 창문 밖을 쳐다볼 수도 있어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청각을 포기하고 용감하게 파쇄석을 밟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격이 대담하신 분이라고 해도, 어려울 것 같긴 하네요."

또다시 침묵.

나무의 물흐르는 듯한 추론으로 세 명이 혐의를 벗었다. 영우는 여분의 마스크가 없어 작가의 방에서 활동할 수 없기에, 지민은 통이 넓은 바지에 피를 묻히지 않고 시체를 운반할 수 없기에, 승현은 우산을 쓰지 않고 주차장으로 나갈 방법이 없기에 범인 후보에서 제외된다.

남은 건, 휠체어를 탄 선혜와 항상 붙어 다니는 도슨트 두 명.

"저, 도슨트 분들 얘기하기 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요."

동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선생님은 지민 씨랑 비슷한 이유로 범행에 어려움이 있지 않나요? 휠체어를 타고 다니시잖아요. 목은 절단기로 어떻게 잘 잘랐다고 해도, 몸을 옮기면서 휠체어 바퀴 같은 데에 피가 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뇨. 한 선생님께선 휠체어를 이용하시니 발목을 잡고 몸을 끄는 느낌으로 시신을 옮기셨겠죠. 그럼 혈액이 솟는 머리는 자연스럽게 휠체어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게 됩니다. 여성이라고 해도 신장이 160cm, 머리가 잘렸으니 140cm라고 쳐도 휠체어의 앞뒤 폭보다는 훨씬 깁니다. 그러니 적어도 몸을 옮기는 과정에서 피가 묻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의 반론을 듣던 탐정은 뭔가 얘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수긍하는 체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우여곡절 끝에 도슨트 둘만이 남았다.

최은수, 그리고 박서진.

나무는 입가를 살짝 비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객실을 봐서 알겠지만 침대가 하나에 욕실도 하나지. 이런 상황에서 같은 방을 쓰는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고 들어왔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이상해. 유신이 네 증언을 따르자면 범인은 적어도 새벽 한두 시 즈음에 범행을 한 거니까. 안채의 객실은 그런 시간에 룸메이트 몰래 방을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아냐."

안채의 객실은 전부 1인실이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침대가 보일 정도로 협소하다. 더군다나 침대도 1인용이라, 아무리 커플이라도 이런 방에는 함께 묵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두 분 중 한 분을 범인으로 모는 건 정황 상 불가능하지. 차라리 둘이서 같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이치에 맞아. 공범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살인의 리스크는 커지지만 어찌되었건 살인 당시에는 상당히 편리해져. 사람을 죽이고, 목을 자르고, 폴딩 도어를 열고 몸을 작품 안에 가져다 두고 하는 힘든 일을 오롯이 혼자서 떠맡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

"내 생각에 그분들한테 살인이 불가능한 이유는 없는 거 같아. 주차장에 세워둔 차도 있고, 파쇄석을 살금살금 지나갈 수도 있고, 작가의 방 안에서 숨쉬기 곤란한 것도 아니잖아."

조리대에 두 팔꿈치를 대었던 유신은 어느새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나무는 그녀의 의견에 크게 반대도 하지 않고 그저 눈꺼풀을 천천히 끔뻑이기나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분들한테 살인이 불가능한 이유는 없어. 작가의 방에 들어갈 수도 있고, 머리를 잘라 몸을 무리 없이 작품까지 끌고 갈수도 있지. 지금으로서 가장 혐의가 짙은 사람은 그분들이야."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기어올라온다.

그들은 분명 어젯밤 이곳에서 간단한 밤참을 만들었다. 밤참 준비로 바쁜 와중 갑작스레 레스토랑을 방문한 나무와 유신에게 얼음컵에 담긴 음료수를 내어주기도 했다. 『평생의 친구 2』에 대한 해설도 가볍게 제시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아영이의 목을 잘랐다......?

작품을 완성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아니다, 그건 이상하다.

"은수 씨는 몰라도 서진 씨는 아르바이트라고 했어. 도슨트로서 갤러리의 안내를 한 건 은수 씨뿐이었잖아. 서진 씨는 딱히 사람들 앞에서 작품을 소개하지도 않고...... 기억 나? 우리가 서진 씨한테 『평생의 친구 2』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나무는 잠시 눈꺼풀을 닫았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동작이다. 유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제의 리셉션이 꼭 몇 달 전의 일처럼 흐릿했다.

"자긴 아르바이트생이라 잘 모르겠다고 했었지. 기억 나."

"아르바이트생에다가 예술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서진 씨가 작품의 완성을 위해 작가를 죽일 수 있을까? 아니, 만약 주범이 은수 씨라고 해도 말이야, 겨우 그런 이유로 은수 씨를 따라 살인을 도울 배짱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어, 하고 유신은 덧붙였다.

"잘 모르겠어, 송 군. 내 눈에 서진 씨는 그럴 수 있을 사람으로 보이질 않아. 무서워서 손을 뗐으면 뗐지."

"그럼 서진 씨는 동료에게 협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되는군."

그녀의 주장을 조용히 해석하던 나무가 결론을 내린다.

"네 말대로 서진 씨가 살인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입을 닫고 있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범인한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협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겠지. 정해졌네. 다음으로 취할 행동을 골라봐. 하나, 아까 말했던 대로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머리가 어느 차에 숨겨져 있는지 알아낸다. 둘, 박서진 씨를 찾아가서 죄를 털어놓으라고 협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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