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
“꽤 험한 꼴을 봤군.”
사와다 코헤이는 그리 말하며 포장 상자를 열어 잘 포장된 케이크 세 조각을 꺼냈다. 좁은 부채꼴 모양의 조각 케이크 세 개가 차곡차곡 모여 있다. 사와다는 우선 딸기 쇼트 케이크를 병상의 탐정에게 내밀었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그나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포크를 들어 케이크의 말단을 잘라낸다. 자른 케이크를 찔러 입으로 가져가자,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가 덩달아 간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사와다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딸기를 제 포크로 찔러 케이크로 돌려놓았다.
“자네가 누운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땐 이젠 부검대 위에서 다시 보게 될 줄 알았다네.”
“무서운 소리를 하세요.”
“실제로 무서운 상황이었어.”
샤라쿠는 탈출을 감행한 딸기를 우선 입안으로 옮겼다. 철이 아닌 딸기는 그다지 단맛이 없었다.
“거즈 둘러맨 꼴 보니 수술은 얼추 끝난 것 같고. 이젠 재활 치료에만 집중하는 건가?”
“네. 줄곧 누워 있어서 부러진 뼈는 거의 붙었는데, 아무래도 근육은 전혀 쓰지 않은 통에……. 그쪽은 재활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4층 높이의 건물에서 추락한 샤라쿠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다. 떨어진 곳이 건물 화단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척추 내지 목뼈에 큰 이상이 없는 건 기적이었다고 했다. 소소하게 장기가 파열된 건 둘째치고. 왼쪽 어깨가 골절되고 하반신에 일시적인 마비가 온 것 빼고는 중대한 이상이 없었다.
장기가 찢어진 거야 수술로 꿰매붙이면 그만이다. 골절 역시 뼈가 붙을 때까지 얌전히 지내면 된다. 하지만 마비는 이야기가 달랐다. 샤라쿠의 경우 운이 좋게도 재활 치료를 실시하면 충분히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의, 경도의 마비 증세를 보였는데. 문제는 그가 사고 이후 이 주 간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재활 치료를 할 수 없다. 신경의 가소성을 북돋을 수 없다. 따라서 샤라쿠가 긴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뜬 순간, 그는 다리를 움직여 침대 밖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
“정말 놀랐어요. 평생 다리를 못 쓰게 되는 줄 알았죠.”
그 상황에서 처음으로 든 생각이, 이래서야 완전히 안락의자 탐정이 되는 게 아닌가…… 라니. 샤라쿠는 자신의 관성에 놀라 스스로를 조소했다.
“그래서. 재활은 잘 되고 있고?”
“네. 이젠 목발 하나만 있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래봤자 병동 안을 돌아다닐 뿐이지만, 하고 샤라쿠는 덧붙였다. 사와다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몫은 노란 치즈케이크다.
“그런 사고를 당한 것치고는 운이 좋군.”
그런 사고.
샤라쿠는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샤라쿠는 자신이 즐겨 다니던 마장이 마약의 유통 루트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장의 가운데도 구석도 아닌 애매한 위치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브로커와 마작을 치는 게 그들의 거래 암호였다. 평범한 작사처럼 쳐서는 물론 안 된다. 그랬다가는 구매자가 아닌 마장 손님으로 구분되어 브로커는 평범하게 마작을 칠 뿐이다.
하지만 특정 패들을 우후죽순 버리는 순간 브로커는 그를 구매자로 인식한다. 버려야 할 패의 종류는 브로커가 그날그날 지정한다. 일반적인 마작을 칠 때에는 여간해서는 버리지 않을 중요패들이 주로 지정된다.
마작의 패는 완전히 랜덤하게 배부되는데, 브로커가 지정한 패가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떡하냐고? 그럴 일은 없다. 해당 마장의 작탁은 전부 전동이니까. 원래대로라면 전동 작탁 역시 무작위로 패를 섞어 나눠주지만, 브로커가 앉아있는 한 패는 항상 같은 순서로 배열된다. 브로커가 앉은 자리 아래에 조작 프로토콜을 실행시키는 버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곳은 본래부터 평범한 마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기꾼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손님들의 돈을 뜯기 위해 사기 마작을 벌이는 아지트라고 해도 무방했다.
샤라쿠는 어느 날 브로커가 앉아있던 작탁에 앉아 마작을 쳤다. 4인 마작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우울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는 무난하게 패를 던졌다. 왼편에 앉은 레게 머리도 역시 그러했다. 문제는 오른편의 장발이었다. 그는 눈에 띄게 이상한 타패를 했다. 여태 마작을 쳐 오며 타패에 나름 익숙해졌다고 자부했는데, 그가 노리는 역이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전체는 커녕 일부조차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초심자인가, 하고 샤라쿠는 넘기려고 했다. 가끔 패를 순서대로 정리하는 법만 아는 초보가 오는 일도 있기는 하니까.
막 1판을 끝냈을 때였다. 뭔가 발로 채이는 소리가 났다. 멀리서 난 소리는 아니다. 작탁 아래에서 난 것 같았다. 샤라쿠는 슬쩍 몸을 뒤로 하고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물증은 없다. 심증도 애매하다. 하지만 샤라쿠는 자신의 신경을 긁는 모호한 위화감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일단 시선을 들어 은근히 세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최대한 기억해두었다. 맞은 편의 남자는 얼굴이 익었다. 아마 이곳에 자주 오는 손님일 것이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샤라쿠는 꼬박꼬박 마장에 나갔다. 최근에는 의사의 권고도 있고 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만 갔었지만, 사건 해명을 위해서는 의사의 권고 따위 헛것이다. 그런 탐정으로서의 의식이 샤라쿠의 안에는 내재되어 있었다.
“정말로 약을 주고받는 걸 목격했을 땐 깜짝 놀랐죠.”
딸기 쇼트 케이크의 마지막 한입을 입에 넣은 샤라쿠가 말했다.
“그걸 보고 곧장 모리시타 쪽으로 연락을 넣었던가. 나도 얘기 전해 들었었네.”
“네. 그쪽으로 연락하는 게 그래도 가장 대응이 빨라서요.”
“머리는 좀 나쁠지 몰라도 행동력 하나는 좋은 녀석이지.”
공조 수사가 시작된 직후 샤라쿠는 브로커를 붙잡아 경찰 측으로 넘겼다. 경찰은 착실하게 브로커를 신문해 뒷배를 알아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브로커는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경찰에 적발되었다는 사실을 뒷배에게 알렸다. 마장에 드나들던 웬 꾀죄죄한 남자가 자길 제압했다는 사실까지 알렸던 모양이었다. 샤라쿠가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심상치 않은 모습의 사내들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미행을 떼어낼 요량으로 근처 상가 건물에 몸을 숨겼다.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 골목의 상가라 그런지 공실이 많았다. 사내들은 기민하게 샤라쿠의 뒤를 따랐다. 샤라쿠도 헛으로 탐정 경력을 쌓은 건 아니었기에, 발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모습을 그들의 시야에서 감췄다.
계단을 오르며 모리시타 형사에게 메시지로 이변을 알렸다. 그가 조직범죄대책반 소속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건이니 대응해 줄 것이라 믿었다. 메시지를 보낸 뒤 잠시 계단참에 서서 인기척을 살폈다.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사람이 움직이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샤라쿠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상가 3층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앞에 뭔가 있었다. 듬직한 남자의 몸이었다.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다리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상대의 팔이 더 빨랐다. 샤라쿠는 자신의 운동 부족을 실감했다.
상대의 팔이 뺨을 스쳤다. 목 왼편이 따끔했다. 따끔할 뿐이었다. 그 이상의 충격은 없었다. 바늘인가? 아무튼 칼에 찔린 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안도하면서 샤라쿠는 상대를 살폈다.
풍채가 좋은 남자였다. 나이는 마흔 중반 정도 되었을까. 사나운 느낌이 있는 두 눈은 둥근 안경으로 가려져 있고. 제멋대로 난 다박수염은 그에게 괴짜 인텔리의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두툼한 몸을 겨우 가리는 폴로 셔츠 아래로 우람한 팔 근육이 엿보였다.
그는 잠시 뒷걸음질치는 샤라쿠를 내려다 보다가,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헛웃음을 보였다.
“이런 허술한 놈한테 잡힌 거야?”
계단 아래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샤라쿠는 눈앞의 상대를 무시하고 윗층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급한 일 하나 없다는 듯이 샤라쿠를 따라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그 모습이 샤라쿠에게는 이상하게 비쳤다.
자신의 행동을 읽고 한발 앞서 3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가. 지금은 왜 추격하러 오지 않는 거지?
지금 같은 비상 사태에 깊게 생각해 봤자 다리만 늦출 뿐이다. 샤라쿠는 생각을 멈추고 에너지를 하반신에 집중했다.
4층의 문을 열고 튀어나갔다. 입점한 가게 하나 없는 텅 빈 상가엔 공허만이 굴러다니고 있다. 샤라쿠는 계단실 문 근처에 있던 화분을 밀어 가볍게 문을 막았다. 다른 통로를 찾아야 한다. 건물을 나갈 수 있는 다른 통로를. 엘리베이터를 탈까?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문이 열리자마자 몸으로 밀고 튀어나가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 홀을 찾아 달려나갔을 때였다.
시야가 한순간 흐려졌다. 꼭, 쓰고 있던 렌즈가 빠진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지금은 안경을 쓰고 있으니까. 샤라쿠는 웬만해서는 렌즈를 쓰지 않는다. 잠입이나 변장 업무를 맡지 않은 최근에는 더더욱 쓸 일이 없었다. 당황한 샤라쿠는 제 얼굴에서 안경을 벗어들었다. 평소대로의 둥근 테 안경이…….
없다?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손에 딱딱하고 둥근 그리고 복잡한 구조의 무언가가 있다는 자각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흐려서 그런 게 아니다. 샤라쿠의 안경은 테가 그렇게까지 얇지 않다. 허나 지금 시야에 보이는 거라곤 살구색의 여섯 갈래로 쪼개진……. 아니 다섯 갈래의……. 팔 말단에 붙은 그…….
주변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으니 물론 주변도 그에 맞춰 움직이는 거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팔다리가 이렇게 쌩쌩하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 않나. 샤라쿠는 안경을 집어던졌다. 집어던졌을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는 하는 무언가가 그의 손아귀에는 있었다. 단단한 그것이 바닥에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내고 짓밟히고 깨지고 분질러지는 게 그 방증이었다.
복도 양 옆의 상가에는 어느새 불이 들어와 있었다. 공허했던 과거는 급격하게 바랬다. 대체 언제 인테리어며 익스테리어를 마친 건지 각양각색의 네온사인이 과하게 번쩍거렸다. 보라색 네온을 전면으로 내세운 그곳은 주점도 노름방도 아닌 서점이다. 파란색 네온으로 창문을 꾸민 그곳은 오로지 커피만을 취급하는 카페다. 노란색 네온으로 갈색 출입문을 한바퀴 두른 그곳은 탐정 사무소다……. 샤라쿠는 세 가게가 자신을 둘러싼 막다른 골목에서 발을 멈췄다. 눈이 부셔서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후퇴할까…… 후퇴하자. 자신에게는 이제 그 길밖에 없다.
뒤를 돌자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찔렀다. 둥그렇게 뜨인 눈동자들이 가지각색의 위치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찌르고 해부하고 있었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탐정이다! 유서 깊은 탐정 가문의 아들이다. 탐정은 사건을 해결하고 세상의 혼란을 누그러뜨리고 질서를 복원하는 그러나 법률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선 다시 말해 영웅이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그 자리가 몹시도 싫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사건 현장의 사진을 보았던 날부터 구역질이 올라와서 도저히 앞으로 갈 수가───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키히코의 등을 밀었다. 억지로 전진했다. 아키히코는 나츠히코의 새로운 역사가 되어야만 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은 또다시 겨울을 맞이해야만 했다…… 노란 가을은 언젠가 지고 겨울이라는 후손을 남겨야만 했다!
“아키히코 같은 건 없어, 후유히코 따위도! 그딴 건 더 이상 없어!”
샤라쿠 아키히코는 그리 울부짖으며 눈앞의 눈동자들을 때려눕혔다. 도무지 조절되지 않는 격양과 분노가 그의 여섯 갈래 주먹에 오롯이 담겼다. 눈동자들은 아키히코에게 복부를 얻어맞고───샤라쿠는 눈동자에게 복부와 위장과 내장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의 일이 그의 분노를 식힐 수는 없었다───이따금 다리를 걷어채이고 코가 부러질 때까지 맞고 상당히 당황한 기색으로 뒤로 물러났다가───가장 큰 눈동자가 끝내 아키히코를 제압했다.
그 눈동자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날렵하게 위로 올라간 눈꼬리가 재미있다는 듯이 휘어졌다. 샤라쿠 아키히코───의 이름을 거부한 그 사내는 있는대로 악을 지르며 거대한 눈동자의 뺨에 이젠 새빨갛게 물들어 얼얼한 기색밖에 남지 않은 주먹을 내리꽂았다. 제대로 공격했다고 생각했다. 눈동자가 눈꺼풀을 움직여 잔뜩 길어진 속눈썹으로 그의 주먹을 칭칭 감아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그제서야 생각했다. 논리적인 사고를 겨우 재개할 수 있었다.
옳아, 나는 다시 그 세계로 들어오고야 말았구나!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 뿐이다. 괴물과 마법이 득시글거리는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통로를 찾는 것. 오로지 그것 뿐이다. 옳은 생각 같았다! 그래서 샤라쿠 아키히코는 팔을 강하게 움직여 눈동자의 속눈썹을 모조리 뜯어버린 다음 다시 뒤를 돌았다. 막다른 길의 세 가게가, 서점과 카페와 탐정 사무소가 네온을 반짝이며 아키히코를 반겼다. 이것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정표 대신이라면. 그렇다면 샤라쿠 아키히코라는 불청객은 어디로 들어가면 좋을까. 너무나 당연한 길이 하나 있지 않은가! 탐정 사무소가 가을의 노란 빛을 반짝이며 아키히코를 꾀고 있지 않은가!
샤라쿠 아키히코는 지체 없이 노랗게 빛나는 탐정 사무소의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시원하고 상쾌한 가을의 공기는 온데간데 없고 덥고 습한 여름의 공기가 그를 덮쳤다.
탐정 사무소의 바닥이 있어야만 했던 공간은 그저 텅 비어…… 있었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낙하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고통은 이상하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귓가에 누군가 속삭였다.
아키는 당신의 의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이것도 허상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애시당초 나의 세계는 현실이랄 게 없고 괴물이 가득한 허상만이 있지 않았나?
아키는 탐정 샤라쿠 아키히코의 의식을 취하고자 합니다
의식을 취하면 어떻게 되지? 한참 전의 일을 떠올린다. 괴물에게 의식을 찬탈당한 이들이 그리고 그런 반인반수들에게 목숨을 저당잡힌 이들이 자행했던 일들을 샤라쿠 아키히코는 떠올렸다.
아키는 지금 명백히 현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나?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상황이 인식되지 않았다.
아키는 탐정 샤라쿠 아키히코 씨와 계약합니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그 환청을 끝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트라우마란 말이지. 자신의 인생을 뒤틀어 놓은 근원이라고들 하지.”
류가 가라오케 룸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는 하잖아.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좀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보다는 폼나는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트라우마도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선택에 관한 기억이지. 만약 내가 그 때 친구와 술을 적당히 마셨더라면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때 다른 길목으로 돌아갔다면 졸음운전 트럭에 치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때 다른 사람과 만났다면 남편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 때 한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멀쩡하고 평균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열 명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만한 면적의 가라오케였다. 창문 하나 달리지 않아 실로 폐쇄적인 분위기를 준다. 그 안에 대여섯 명 정도의 사람이 흐느적대며 마이크를 집었다가 기본 제공된 무료 드링크를 바닥에 흩뿌렸다가 안주가 담긴 그릇을 머리에 덮다가 한다.
류는 소파 한구석에 앉아 약쟁이들의 광란의 파티 속에서 단 한 명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류가 개량한 약을 먹은 작곡가다. 그는 본래 약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류의 ‘권유’로 다른 약쟁이들이 그에게 약을 탄 음료를 먹였고, 결과는 꽤 탁월했다.
“나…… 나는……. 나는 그냥……. 고, 고고 고향에서, 고향이, 가, 싫었다……. 미안합니더, 미아……. 미안…….”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그리 말했다. 사투리가 심하게 섞인 말투였다. 류는 가볍게 알아본 그의 행적을 떠올렸다. 경상도 태생의 그는 스무 살 무렵 일본으로 날아와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냥 음악 활동을 하고 싶었다면 한국에 남아 상경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그의 흥미에 있었다. 그는 평범한 한국의 가요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일본의 음악, 그리고 서브컬쳐에 매료된 그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꿈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러니 트라우마란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은, 자신의 최악의 선택을 마주하는 것.”
그는 산발로 엉망이 된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몸을 벌벌 떨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입새에서 새어나왔다. 미안타…… 미안타. 희야가 미안타……. 그는 형 없이 홀로 큰 동생에게 큰 부채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유우정 씨 같은 예술가 부류는 이상하게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싶어하더군. 정신적 자상벽이 있는지도 몰라, 예술가들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지만 해결은 전혀 않고 그저 절망스러운 세계에 몸을 누인 채 우울해하지. 자신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서 이런 길을 가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하하,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창의력이란, 창작욕이란 그런 곳에서밖에 나오지 않는 건가?”
류는 도수 없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유우정의 육각형 안경 역시 테이블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초점을 잃은 유우정의 시선이 한순간 류를 향했다. 그는 류를 삼 초 정도 응시하다가 이젠 꺽꺽대며 울었다. 개량한 약은 개인차가 무척 심했다. 트라우마를 대하는 개개인의 방법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일전의 탐정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격양했지만 유우정은 우울과 슬픔에 잠겨 허우적댄다. 그렇다면 그 탐정은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없는 거구만…….
유우정은 소파로 기어와 싸구려 가죽 시트를 벅벅 긁어댔다. 손톱이 워낙 짧아 시트에 자국이 남는 일은 없었다. 하긴 기타를 쳐야 하니 손톱은 최대한 짧은 게 좋을 것이었다. 유우정은 이젠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엉엉 울었다. 희야가 나쁜 걸 갈쳤다……. 희야 때문에 탐즈이도…….
류는 가만히 유우정을 내려다보았다. 산발이 된 갈색 머리칼 사이로 창백한 뒷목이 드러났다.
류는 어두침침한 가라오케의 조명 아래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그 뒷목을 쳐다보다가, 이내 손을 가져다 댔다.
제 사촌이 데리고 있었던 남자애와 다르게 말라 비틀어진 몸은 류의 억센 손에 가볍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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