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포셔] Portia

*마비노기-밀레시안X포셔 드림글 입니다/G3과 G15에 대한 스포일러가 아주 약간 함유되어 있습니다. 날조주의. **미완

벨바스트의 여름은 마나난 맥 리르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내리쬐는 햇살, 쉼 없이 파도치는 바다, 짠맛이 나는 바람, 벨바스트 한가운데에 있는 정원에 핀 들장미와 압생트, 제라늄과 이름 모를 꽃들 속에서, 힘겨운 일상에도 웃음을 잃지 않은 벨바스트의 주민들 속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맘때의 바다는 더 푸르러지고, 물비늘이 더 반짝인다. 주민들은 이 계절을 ‘마나난의 기쁨’이라 부른다.

마나난이 무엇 때문에 기쁜지, 투아하 데 다난들은 감히 예측할 수 없었으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의 기쁨을 한껏 즐긴다. 이 여유로움은 무역에서도 이어진다. 벨바스트에 온 사람의 수만큼의 무역선이 출항하고 입항한다. 부의 강, 아니, 부의 바다는 겨울이 올 때까지 끊기지 않을 것이다. 높은 언덕에서 거센 햇살에 튕기듯 반짝거리는 상아색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새까만 그림자가 벨바스트를 집어삼키는 순간을 볼 수 있다. 잠시 햇빛이 가려지는 시간. 어둠 속에서 두 눈으로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의지할 수 있는 건 청각과 촉감. 이 순간 느껴지는 건 오직 파도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 손끝을 간지럽히는 풀의 감촉뿐이다. 그림자가 서서히 걷힌다. 벨바스트가 다시 빛을 되찾는다.

그런 풍경을, 우리는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어떤 감탄사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Portia

나와 포셔가 벨바스트로 온 지 3개월이 지났다. 알반 에일레르에 이 땅에 왔으니, 벌써 알반 헤루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압생트의 진한 향기를 맡으며 왜 우리가 이곳에 다다랐나를 생각했다. 아주 먼 동쪽 어드메에서 만난 포셔, 그녀를 떠올리자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팔라라를 그대로 머금은 듯한 금빛 머리카락과 물보라보다 더 쨍한 빛을 가진 푸른 눈동자, 오뚝한 코가 그녀가 굉장한 미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면,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입술과 연한 홍조가 내려앉은 얼굴은 그녀의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경고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 하나, 필리아에서 만났을 적 있었던 총기가 눈에서 사라진 채였다. 아니, 생기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장난스러운 소녀였지만, 동시에 어른이 되고 말았다. 죽은 눈을 가진 필리아의 여타 엘프와 다를 바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실망보다 분노가 앞섰다. 이렇게 변할 동안 그는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당장에라도 바사니오를 찾아 도끼로 그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다. 그 뺀질대는 머리가 두 쪽이 난 다음에 찾아올 고요를 생각했다. 그의 시체 혹은 무덤 위에서 춤추는 우리를 상상했다.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하지만, 포셔. 그러면 네가 슬퍼할 테니까.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게 분명해서, 나는 차마 도끼를 들 수 없었다. 포셔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살인자가 되어줄 테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내가 살인자가 되길 원치 않았다. 그녀는 나를 꼭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녀에게서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 본래는 시원하고 달콤한 향이었는데.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떨어졌다.

“밀레시안 님 몸에서 비누 향이 나요.”

아주 진하게요. 나는 그 말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다가, 침묵하기를 반복했다. 포셔는 그런 나를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나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새벽녘이라 손이 차가울 텐데.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포셔는 이미 내 손길에 얼굴을 맡긴 채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끝없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한기 서린 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금색 머리가 하늘 위로 흩날렸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그때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가라앉아 있었던 생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잠깐 빛났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 말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포셔, 널 데리고 도망치고 싶어.”

포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데려가 줘요. 어디든지 좋아요. 날 납치해요, 밀레시안님.”

그 뒤의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대지를 내달렸다. 더 넓은 세상을 본 포셔는 내 기억과 사뭇 달랐다. 그녀는 더욱 대담해졌고, 미지를 사랑했으며, 현재보단 미래를 보기 바빴다. 행선지를 벨바스트로 잡은 것도 그녀였다. 나는 그저 손을 붙잡고 도망칠 생각뿐이었는데. 포셔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 뒤에서 바라볼 때마다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필리아의 포셔가 성장한 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심 그녀가 자라지 않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나는 변치 않은 미소를 지으며 날 배웅하고 반겨주는 걸 바랬던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소녀는 이제 없다. 한 명의 어엿한 어른이 내 앞에 있을 뿐이다. 포셔가 내게 말을 거는 순간마다 내면의 본심이 스멀스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기보다 더 멀리 도망치자. 포셔, 바사니오도 찾지 못할 곳으로, 코나흐타 너머 새로운 세계로 단둘이 가는 거야. 내가 지켜 줄게. 네 마음이 다치지 않게 내가 안내할게. 이 이상은 없다고 말하지 말아줘. 네 말 한마디로 우리는 울라, 이리아를 떠나 제3의 세계로 얼마든지 갈 수 있어. 제발, 포셔, 제발…….

내뱉지 못한 단어와 문장들이 뱃속에서 아우성친다. 속이 쓰리다.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인다. 제발 닥쳐. 나는 내면을 꾸짖는다. 포셔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 순간만큼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본심도, 곤란함도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리고 만다. 아아, 이 얼마나 편리한지! 나는 배에서 내리는 순간,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간지럽다며 깔깔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나는 포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여성의 마음은 마나난의 바다만큼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던가. 딱 그 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여신을 구출한 밀레시안도, 에린의 수호자도 다 부질없어지는 것이다.

 

벨바스트의 여름은 강렬하다.

마나난의 사랑은 무슨. 이쯤 되면 태양신의 사랑이다. 오언제독이 추천해준 숙소에서 나는 포셔의 손에 뺨을 비비고 있었다. 포셔는 살짝 손을 떼는가 싶더니 이내 쪽, 하고 짧은 뽀뽀를 내 뺨에 남겼다. 이 사랑스러운 엘프를 어쩌면 좋지. 뺨에 남은 말랑한 감촉을 손으로 더듬는다.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금빛 머리칼이 햇빛에 비춰 반짝였다. 아, 진짜 이 엘프를 어쩌면 좋지. 나는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침대 위에 앉게 된 그녀는 내 팔뚝을 아프지 않게 토닥였다.

“벌써 정오인걸요.”

“괜찮아, 아직 시간 많아.”

“납치범이 이렇게 느긋해도 되나요?”

포셔의 상냥한 목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난 강해.”

“그러시겠죠, 에린의 수호자님.”

포셔가 예쁜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꾹꾹 누른다. 얼른 일어나라는 뜻이다. 언제까지고 벨바스트에 머물 순 없으니, 울라 대륙으로 넘어가든, 필리아에 몸을 숨기든지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다. 벨바스트의 오언 제독과 가느다란 친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하는 짓을 알게 되면—이미 알고 있는 거 같았지만—벨바스트에서 쫓겨날 가능성이 있으니까. ……기혼자를 데리고 도주라니. 맨정신으로 할 짓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건데. 바사니오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맞느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답할 걸 그랬나. 갑작스럽게 후회가 들었다. 물론 포셔를 납치한 데엔 후회 따윈 없다. 그리하여 포셔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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