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

시작 (1)

데스노트 L 드림

탐정과 나 by 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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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배경의 명령어 창이 사라지고 새하얀 불빛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찌푸리던 운은 화면을 확인하고는 서서히 눈이 커졌다.

L.

알파벳 한 글자만이 흰 배경 중앙에 검은색으로 박혀있었다.

운은 빠르게 움직였다. 커다란 트렁크를 꺼내 집 안의 물건들을 다급하게 담았다.

직접 맞붙었기에 알았다. 상대는 엄청난 실력자였고, 아마 자신의 신상정보는 모조리 넘어갔을 터다.

운은 자신의 원룸을 돌아보았다. 아예 살았던 흔적조차 없도록 처리하고 이곳이 자신의 위장 위치였던 척할 수 있다면 자신의 정보와 자존심, 둘 다 지킬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다시는 이곳에 안 올 생각으로 꼭 필요한 것만 챙겨 달아나는 것이 맞았다. 운은 자신의 몸과 맞먹는 크기의 가방을 억지로 눌러 잠그고선 신발장에 앉아 운동화를 집었다. 늘 구겨 신는 버릇 탓에 그 모양대로 굳어지다시피 한 운동화의 뒤축은 잘 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멀리 떠나야 할 듯하니 제대로 신어야 했다.

그렇게 운동화에 발을 밀어 넣으려 할 때,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여유롭게 기지개를 켠 운은 뿌듯한 표정으로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액수가 찍혀있었던 누군가의 계좌의 잔액은 반의 반 토막이 나 있었다.

한도만 아니었다면 탈탈 털어버리는건데, 라고 중얼거리며 운은 뻑뻑한 눈을 비볐다. 남의 피를 빨아 번 돈을 압수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주가 조작이라니. 얼마나 많은 개미들이 눈물을 흘렸겠나. 비록 피해자들에게 다시 돈을 돌려줄 방법은 없지만, 사기꾼에게 벌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좋았다. 피해자들도 어차피 못 돌려받을 돈이라면 사기꾼의 배를 채우기보단 사기꾼을 벌한 영웅에게 적선하기를 택할 것이다.

자신은 힘없는 피해자의 편에 서서 악을 벌한 정의의 사도였다. 소소한 용돈은 덤이었다.

악인들을 벌한 영웅은 출출했다.

뻣뻣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부엌 찬장을 열던 운은 아, 하고 탄식했다. 대용량 인스턴트 식품을 재어두고 먹기에 다 먹어갈 즈음 다시 주문을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늦게 주문하는 바람에 택배가 도착하기도 전에 식량이 동나버린 것이다. 배를 채우려면 나가서 외식하거나 사오는 수밖에 없었다.

제 몸보다 훨씬 큰 치수의 옷을 걸치다시피 입고 있었던 운은 귀찮은 내색을 아낌없이 내비치며 외투를 덧입고 집을 나섰다.

야심한 시간의 골목길은 가로등 아래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데다 외출할 일도 거의 없어서 최대한 변두리의 방을 골랐기에 더 그랬다.

어둠을 헤치고 도착한 편의점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별 생각 없이 걷던 운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 놓인 검은 물체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아 씨.. 저게 뭐야. 아까 올 때는 없었던 거 같은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다가가 살펴본 검은 물체는 노트였다. 약간 낡았어도 생채기 하나 없이 깔끔한 것이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데스.. 노트."

표지에 적힌 삐뚤빼뚤한 영어를 따라 읽은 서운은 천천히 손을 뻗어 노트를 집어들고 앞뒤로 살폈다. 노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도 조금도 젖거나 더러워진 곳이 없었다.

어딘가 께름칙했지만 차가운 새벽 공기에 대충 슬리퍼에 끼워 넣은 맨발이 시려오자 운은 일단 노트를 편의점 봉투에 넣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여 배까지 채운 운은 책상등을 켜고 노트를 펼쳐 첫 페이지부터 읽어나갔다.

"첫째,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인간은 죽는다."

적혀있는 악필의 영어는 친절하게도 노트의 사용법이었다. 규칙들을 전부 읽은 운은 노트를 덮으며 비웃었다.

"이런 물건이 있었다면 진작 나타날 것이지.. 보육원에 있던 인간말종들을 다 없애버렸을 텐데."

운은 인간의 갱생을 믿지 않았다. 잡초는 자라봐야 잡초다. 나이를 먹어 연기력이나 자제력이 좀 오를 수는 있어도, 인간의 본질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운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보육원에서 운을 괴롭히며 문제를 일으켰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전과 한두 개씩을 달고 있었다.

잠시 노트를 바라보던 운은 고민하다가 노트북 화면에 가지런히 정렬된 파일들 중 하나를 열었다. 그 파일에는 한 여자의 개인정보와 날짜별로 정리된 여자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운은 여자의 SNS에서 가져온 여자의 사진들을 비릿하게 웃으며 훑었다. 휴양지에서 환히 웃고 있는 여자의 표정은 보육원에서 자신에게 오물을 뿌리며 즐거워하던 그 표정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운은 펜을 들고, 여자의 얼굴을 뇌에 새기며, 여자의 이름을 신중하게 써넣었다.

엄숙한 행위를 마치고 비장하게 고개를 든 운은 허탈해졌다. 눈앞에는 아마 그저 누군가의 장난일 노트와 그 노트에 꾹꾹 눌러 쓴 여자의 이름, 그리고 노트북 화면에 크게 띄워진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이 꼴은 마치 자신이 사이비에 빠져 사특한 저주를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릴 적 들었던 괴담 속 저주가 이보다는 더 정성스러운 과정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붉은 펜이어야 한다든가, 이름을 적은 후 태우는 등의 정교함이 있었다면 더 신빙성 있었을 텐데, 종이에 이름만 쓰면 끝이라니. 장난도 대단히 건성으로 만든 장난이었다.

혹시 누군가가 남을 놀릴 작정으로 노트를 둔거라면 이 노트를 주워가는 자신을 보며 비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운은 노트북을 끄고 노트를 성의 없이 책상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해가 뜬지 오래라 방 안은 전등 없이도 밝았다. 운은 신경질적으로 암막커튼을 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서 노트 같은 건 지워버린 채, 운은 잠이 들었다.

말도 안 돼.

서운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노트북 화면을 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운은 여자의 SNS에 올라온 비보를 멍하니 바라봤다. 심장마비. 오늘 새벽. 정말로 죽었잖아. 우연인가? 그럴 리 없어. 세상에 기적은 없다. 운은 그렇게 믿었다.

운은 책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노트를 떨리는 손으로 집어들었다. 이건 자신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행복하다고는 못할 인생에도 타락하지 않고 꾸준히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를 실현해 온 제게, 정의라고 해봤자 온라인의 소소한 악인들을 제 나름 골려줬을 뿐이지만, 어쨌거나 그 보상이, 동시에 더 큰 책임이 찾아온 것이다.

운은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감에 집의 문과 창문들을 확인하고 커튼을 꼼꼼히 친 후 방의 불을 껐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한줄기 스탠드 조명 빛이 노트와 노트를 든 운의 손을 비췄다. 자신은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우월감과 갑자기 손에 들어온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에 대한 경외심이 동시에 운을 덮쳤다. 자신은 이제 막중한 사명을 안고 있었다. 진정한 정의의 사도, 아니, 신이 될 차례였다. 놀림 받던 외관도, 흠이라 불리던 무(無)의 인간관계도, 사실은 자신이 신이 될 재목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운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어린애 마냥 기뻐 날뛰는 건 신답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이게, 그리고 신답게 노트를 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찻잔을 든 남자는 티스푼으로 찻잔 속 코코아를 젓고 있었다. 코코아를 작게 한 모금 넘긴 L은 각설탕을 두 개 집어 찻잔 속에 빠뜨리곤 다시 젓기 시작했다.

미국의 교도소에서 시작된 의문의 심장마비. 처음에는 하루 사망자 수가 셋을 넘지 않았고 사망자들은 모두 같은 교도소에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범위와 수는 늘어 미국 곳곳의 교도소에서 같은 현상이 발견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사망자가 나오고 있었다.

사망자들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범죄자. 그러나 범죄자라고 해서 다 사망하지는 않았다. 그 기준은 죄의 경중에 따르는 듯했다. 아주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사망하지 않았고, 적어도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만큼의 피해를 준 자만 사망했다.

걸리는 점이 있다면, 유독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아주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만이 죽었다는 것. 죽음은 미국에만 유난히 엄격했고 다른 나라에는 유했다. 왜일까.

L은 사망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을 찾아냈다. 세간에 얼굴과 이름이 풀린 범죄자라는 것. 미국은 머그샷을 공개하기에 범죄자들을 둘러보고 죽일지 말지 고민할 수 있었지만, 다른 나라는 어지간한 중범죄가 아니고서야 얼굴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L은 미국 경찰 홈페이지 접속 기록 중 수상한 기록들을 발견했다. 다른 나라의 사망자에 관한 온라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하지만, 지나치게 평범한 기록들이었다. 평범해 보이려고 엄청난 공을 들인 기록을 파고들면 그 속에 숨겨진 단단한 철벽이 나타났다. 여기서 L은 막혔다. 철벽을 깨지 못한 것이다.

L은 설탕이 다 녹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예측할 수 없는 살인 방법과 자신을 막아선 엄청난 실력은 L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천천히 코코아를 음미하는 L의 모습은 여유로워 보였으나 L의 머릿속은 엄청난 속도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때 L의 컴퓨터 화면에서 작은 창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L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화면을 향해 몸을 숙인 L은 무서운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운은 자신이 접속한 루트를 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확실히 위장했지만, 늘 완벽하고 깔끔한 것을 추구하는 일종의 강박이었다.

그러다 자신을 추적하려 시도한 흔적을 발견했다. 확인해 본 결과 상대는 자신이 접속한 모든 기록에 손을 댔었다.

자신의 완벽한 위장이 들통 났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만큼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직감한 운은 이 싹을 잘라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조회 기록을 역추적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흔적을 파고들던 운은 상대에게 감탄했다. 이리저리 얽힌 미로 같은 방화벽은 일반인이 구축할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전통적인 방식은 파훼법이 확실했다. 누구나 아는 비밀번호의 자물쇠를 아무리 많이 달아봤자 보안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원리였다.

"시도는 좋았지만 방식이 너무 낡았어, 그래도 실력은 봐줄 만 하네. 아니, 나에게 비하면 한참 멀었지. 내가 일부러 봐주려고 짠 코드도 이것보다는 재밌을 거야.. 어, 잠깐만."

허공과 대화하듯 혼잣말을 하던 운은 갑자기 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눈치챘다. 상대가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운은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그런 구식 보안을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대응도 구식일거란 운의 예상과 달리, 상대는 처음보는 형태의 트릭과 코드로 운을 옭아맸다.

그제야 운은 그 보안이 자신을 유도하기 위한 덫이었음을 깨달았다. 지금부턴 상대의 역공이었다. 다급해진 운은 온 힘을 다해 막았으나, 정신없이 명령어를 입력 중이던 명령어 창이 예고 없이 꺼지고 눈부시게 흰빛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흰 화면 중앙에는 검은 이니셜이 있었다.

L.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었다. 범죄자에 관해 검색할 때 봤던 세계적인 탐정이었다. 자신의 흥미가 가는 사건만 맡고, 맡은 사건은 반드시 해결한다는 괴짜 탐정.

운은 헛웃음을 지었다. 세계적인 탐정이면 어쩔건데. 신이 내린 힘은 인간이 알아챌 수 없는 것이었다. 노트에 이름만 쓰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도 죽일 수 있다고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세계적인 탐정의 컴퓨터를 털려고 했다는 혐의는 얼마든지 잡힐 수 있었다. 물론 결론적으로 탐정의 컴퓨터를 터는 데에는 실패했으니 그 시도만으로 높은 형을 받지는 않을 테지만, 이렇게 얽힌다는 것 자체가 피곤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룐, 나 좀 도와줘. 이거 좀.. 이거랑, 이것도. 맞아, 다 차곡차곡 넣어야 해. 여기 이걸 다 담아야 한다고. 나중에 귤 많이 사줄 테니까."

허공에 대고 지시한 운은 빠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모든 증거를 없애고 떠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없었다. 탐정을 속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도망은 칠 수 있을 것이다.

운은 자신의 흔적이 될만한 모든 물건을 트렁크 안에 닥치는 대로 욱여넣었다. 운이 던져넣은 물건들은 어느새 나름의 질서를 갖춰 정렬되어 있었다. 운은 노트를 가방 앞주머니에 필기구와 함께 챙기고, 혹시 몰라 몇 페이지를 찢어 옷 주머니와 속옷 안에 끼워 넣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계획에 없던 이삿짐을 싸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깜깜했던 창 밖은 어느새 어슴푸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희미한 햇빛에 의지하여 마지막으로 집 안을 둘러본 뒤 긴 여정을 위한 운동화를 꺼내 신으려는 찰나,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옆집이겠지,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돌아온 걸 거야, 스스로 되뇌며 운동화 끈을 매는 손을 멈추지 않았지만, 발소리는 계속해서 자신과 가까워졌다. 자신의 집 현관 바로 앞에서 멈춘 발소리에 운마저 숨을 죽인 그 순간.

딩동.

짐이 거의 빠진 공허한 집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은 신발 끈을 쥔 채로 굳어 가만히 있었다. 현관 밖의 누군가는 잠시 기다렸다가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운은 천천히 신발 끈 매듭을 완성했다. 제멋대로 문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영장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영장 없이 문을 땄다간 오히려 주거침입으로 맞서면 된다. 조용히 있으면 잠시 후퇴하겠지, 그 틈에 잘 나가면 될 것이다.

운이 머릿속으로 건물 구조를 그리며 탈출 루트를 짤 때였다.

똑똑.

현관 밖 누군가는 노크했다. 그리고 무언가 꺼내는 듯한 지퍼 소리 다음에 현관에 무언가를 붙이는 소리가 났다.

무엇을 붙였는지 고민할 새도 없이, 복도나 다른 방에는 들리지 않도록 현관과 밀착하고 음량을 작게 조절한 스피커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운 씨, 맞으십니까."

"..."

"지금 저희와 가신다면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만 대답해 주시면 되지만,"

"..."

"아니라면 아주 피곤하고 복잡하게 일을 진행하셔야 할 겁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탐정이다. 운은 맥이 풀렸다. 변명할 여지도 없이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버텨보아도 어차피 한동안은 저 탐정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지금의 자신은 케이지 안 햄스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몫을 최대한 찾아와야 했다. 한낱 햄스터일지라도 온몸이 묶인 실험대보다는 아늑한 케이지가 나으니까.

"어디로 가서, 언제 풀려나나요?"

평정을 되찾은 운은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탐정은 여전히 변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시는 답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제 소지품을 가져가도 되나요?"

"검사 후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물건은 허용하겠습니다."

운은 짧게 고민하곤 주머니와 속옷에 넣어뒀던 노트 페이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따라가겠습니다. 준비를 해야 하니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아뇨, 당장 함께 가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신발만 신게 해주세요."

운은 일부러 신발 소리를 크게 내며 조심스레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노트 페이지들을 도로 잘 끼운 후 노트를 허공에 내밀었다. 운이 허공에 입 모양으로 뭔가 말하는 듯 뻐끔대니 노트가 서서히 운의 손을 빠져나와 허공으로 떠오르곤 사라졌다.

운은 허공을 향해 한번 미소 지은 후 가방을 들고 문을 열었다.

"모시겠습니다."

검은 모자를 눌러 써 얼굴을 가리고 긴 검은 코트를 입은 노년의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무전기와 비슷한 모양의 물체를 현관에서 떼어내곤 운에게 먼저 내려가라는 듯 길을 터주었다.

"아, 짐은 제게."

운의 무거운 가방을 받아든 그는 운이 건물을 빠져나갈 때까지 뒤에서 따르다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앞장서서 검은 차의 문을 열었다.

"타시지요."

운은 차에 몸을 실었다. 앞좌석과 뒷좌석이 투명한 창으로 분리된 연행용 차량이었다. 게다가 바깥에서 볼 때는 썬팅이 옅다 싶더니, 뒷좌석만 바깥에서는 안을 볼 수 있되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거꾸로 썬팅이 되어있었다.

운은 남자가 트렁크에 자신의 가방을 싣고 앞좌석으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는 것을 얌전히 앉아 지켜보았다.

"잠시."

남자는 뒷좌석과 앞좌석을 분리하는 창 위에 말려있던 검은 커튼을 쳤다. 동시에 차량 천장에 있던 작은 등이 켜졌다. 사방이 검은색으로 막히니 방향 감각도 옅어져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던 운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두다 눈을 감았다. 참았던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차량의 경로를 기억하려던 것도 포기했다. 차량은 과하게 빙빙 돌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길이 아닌 곳도 통과하는지 회전 사이 간격이 자신이 기억하던 근처 도로망과 맞지 않았다. 세계적인 탐정의 치밀함이란 이런 건가.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자신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운은 옅게 미소 지으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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