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ng fall
사다오는 태어났을 때처럼 맨몸으로 은신처에 왔다.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합의된 납치였을지언정 미노리 저택에서 사다오를 제외하고 이가 빠진 자리가 또 보여서는 안 됐다. 그래서 세이시로는 발자국마다 피를 흩뿌리는 사다오 대신 사다오의 겉옷 하나와 애들 장난 같은 반지만 챙겨 나왔다. 그 겉옷마저 미노리 부인에게 피 흘리는 아들의 모습을 숨기려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밤길을 차로 달리는 동안 지혈을 위해 꽉 묶은 천이 소용없이 배어 나오는 피에 흠뻑 젖었다. 그날 사다오가 걸쳤던 모든 것이 그 모양이었기에 벗고 난 후에는 못쓰게 되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혼수로 아무 것도 지참하지 않은 사다오를 돌보는 것은 모조리 세이시로의 몫이 되었다. 한동안 세이시로는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사다오를 대신해 갓난쟁이를 기르듯 사다오를 먹이고 입히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즐거움이 그친 것은 사다오가 한풀 꺾인 더위처럼 금세 냉랭해져, 세이시로가 이르게 매대에 나온 겨울 이불을 보고도 사다오와 함께 덮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돌아섰을 때쯤이다. 늦여름의 세이시로는 다 큰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을 인정하듯 사다오를 놓아줄 때가 왔다는 예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다오의 침대에 단정히 갠 옷을 올려놓고, 사다오가 그것을 그대로 입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 체념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사다오는 심장을 얕게 그은 상처를 안고서 세이시로의 요람으로 돌아왔다.
사다오에게는 많이 다쳐보지 않은 사람 특유의 치유력이 있었다. 세이시로는 아직은 회복하는 데 싫증을 내지 않는 사다오의 몸처럼, 사다오를 손수 돌보는 것이 지겹지 않고 늘 기꺼웠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좋아한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연인일지언정 사다오는 분명하게 세이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다오가 생활 곳곳에 닿는 세이시로의 손길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했다. 여름의 문을 애정 어린 자두 향기로 열고는 그 안쪽은 속절없는 이별의 준비로 채웠기에 지난 늦여름에 익숙해진 세이시로는 사다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여겼다. 사다오의 체온이 익숙해져 날로 식는 공기가 유독 낯설었듯이 이제는 처음 겪는 것도 아닌 사다오의 애정이 새삼스레 북받쳤다. 그러나 세이시로가 사다오의 방에 다시 발을 들이고서 눈물을 보인 이후로 사다오는 세이시로가 눈시울을 붉힐 때마다 미안해했으므로 세이시로는 오로지 사다오를 위해 사다오의 수용을 마주할 때마다 금세 사다오와 함께하는 삶에 다시 익숙해진 양 의연한 체를 해왔다.
그동안 배웅도 없이 홀로 외출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이시로가 장을 보고 오겠다고 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사다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함께 나갈 테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등을 보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사다오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려 방으로 들어갔기에 세이시로에게는 옷소매를 당겨 눈물을 찍어 닦을 자유가 잠시나마 주어졌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사다오가 방 안에서 미노리를 불러 급히 달려가야 했다. 이렇게 부르면 세이시로가 기뻐할 것이라 예상했던 사다오는 세이시로의 얼굴을 보고 놀라 성큼 다가왔다. 엄지손가락이 약간 열이 오른 눈 아래를 쓸고 지나갔다. 사다오의 손끝은 젖지 않았지만 사다오는 촉촉한 눈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며 물었다. 울었어? 아니요... 사다오는 빤한 거짓말을 추궁하지 않았고 세이시로는 사다오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그리고 수줍게 내리 깐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열린 옷장을 보고는 깨달았다. 여름이 지나기 전 사다오를 보내줄 생각이었기에 가을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다. 세이시로도 급히 옷장을 뒤졌지만 세이시로가 몸에 적당히 맞도록 입는 옷들이 사다오의 몸에 들어갈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사다오가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고는 몸의 부피에는 덜 구애받는 전통복식뿐이었다. 세이시로는 평소 세이시로가 입을 때보다 품을 넉넉하게 해 끈을 묶느라 사다오를 껴안다시피 하며 내내 웃었다. 가을옷을 사야겠네요. 사다오는 소매가 짧은 옷을 멋쩍게 매만지다 대답했다. 그래야겠네.
세이시로가 외출 준비를 하며 차곡차곡 정리한 과일과 야채, 찬장에 채울 생필품의 목록은 모조리 잊히고, 그동안 사다오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만 하면서도 그 옷을 꺼낼 때가 되면 입어줄 이가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두고 돌아섰던 옷들만이 쇼핑카트에 겹겹이 담겼다. 세이시로가 옷에 걸린 옷걸이를 아래로 접어 사다오의 턱 아래에 대보는 동안 사다오는 원하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옆에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마음에 드는 거 없어요? 너무 혼자 들떴나 싶어 멋쩍어진 세이시로가 물어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네가 골라줘. 그러더니 의류 매장을 나오고 나서야 카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 집어넣었다. 사다오가 무엇을 하든 안 된다는 말을 하는 법이 없는 세이시로는 이번에는 사다오가 집은 상자를 보고는 잠시 망설이다 만류했다. 안 사도 괜찮아요. 사다오는 불확실한 기억을 되짚으며 집안의 살림을 꿰고 있는 세이시로에게 물었다. 거의 다 쓰지 않았나? 여느 때 같으면 곧바로 답을 내놓았을 세이시로는 웬일로 머뭇거렸다. 사다오... 세이시로는 사다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불러놓고는 답이 없고, 사다오와 눈이 마주치면 열세살 그때처럼 고개가 떨어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앞으로는, 안 써도...
세이시로가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사다오는 세이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사다오는 드물게 세이시로가 원하는 것을 단번에 들어주었다. 그리고 쟈코카이 종합병원에서의 정사 이후로 신경 쓰이기 시작했던 것을 지적해야 할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무엇이 되었든 천장에 빼곡히 깔린 조명이 숨을 곳 없이 모든 곳을 비추고 사람들이 요란하게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저마다 대화를 나누는 마트 한복판에서 서서 실랑이할 주제는 아니었다. 사다오는 카트 안에 던져넣었던 상자를 도로 제자리에 두고 말했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달아오른 뺨을 숨기려 고개를 숙인 세이시로는 사다오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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