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전

Unlimited Potentiality

12/08,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자신을 얼렸던 따스한 사람에게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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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문대씨 계신가요? 배달왔습니다 동생의 따끈한 생일국밥입니다 생일축하해~!!!

"아?"

인적 드문 골목길. 길고양이 두어 마리가 구석에 서로 기댄 채 웅크리고 누운 좁고 긴 골목 안에서 약간 어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만약 그게 자기 목소리와 똑같다면 류건우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원룸으로 가는 지름길인 그 골목으로 막 들어가려던 류건우는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에 몸을 굳혔다. 귀신인가? 아니면 누군가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틀어두었나? 전자든 후자든 현실성이 없다는 것은 졸업을 준비하느라 사회성이 말라가는 중인 류건우도 아주 잘 알았다. 귀신이란 건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후자는... 애초에 자신이라면 얕보이기 딱 좋은 저런 순둥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 리 없으니까. 아닌가, 시험 성적 확인할 때 동방에서 저런 소리를 냈던 것도 같고.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허락없이 녹음할 간 큰 부원은 없었다.

류건우가 잠시 딴생각에 빠진 동안, 골목 안에서는 타박이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흠칫 놀라 입술을 깨문 류건우는 주머니에 들었던 손을 빼낸 뒤 골목 안에 나타난 실루엣을 경계하며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난 실루엣의 주인은 남성이었고, 키가 제법 컸으며, 무엇보다도 자신과 똑같은, 아니, 자신이 나이가 든다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기억 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얼굴이. 그럼에도 류건우의 어깨에서 힘이 탁, 풀린 이유는 하나였다. 어떤 계기가 있어 제 성격이 좀 더 유해진다고 해도 저런 표정은 지을 수 없을 것임을 알아서. 그 표정 덕분에 류건우는 그것이 환상 같은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요 며칠 밤샘 좀 했다고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류건우는 평소의 무표정을 되찾고 남자를 지나치려고 했다.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거, 건우 형!"

류건우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의심했다. 저 사람이 지금 나를 뭐라고 부른 거지? 류건우는 외동이었고, 자신을 형이라 부를만한 후배들과는 군대를 다녀오며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다시 말하자면 류건우를 형이라고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일단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걸어가려 했지만, 그가 발을 뗀 순간 뒤에서 또다시 저를 형이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인데도 저렇게 애절하게 들릴 수가 있다니. 류건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거, 건우 형!"

"... ... 예?"

"네, 형 말이에요!"

류건우는 선뜩해지는 가슴을 안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얼굴이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류건우는 그 순간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내가 저렇게 얼빵하게 웃고 있다니. 하하. 뭐냐 x발. 아, 어지럽다. 잠깐의 휴식이 간절해진 류건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다. 하아.

"혀, 형!"

... 그 목소리가 류건우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으윽... x발."

류건우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깔끔하게 흰 벽지를 발라둔 천장, 곰팡이 하나 없는 널찍하고 깔끔한 오피스텔과 몸을 받치는 푹신한 소파. 그리고 커다란 창 너머 황금빛, 자줏빛, 붉은빛이 화려하게 뒤섞이며 펼쳐진 노을. 현실성이라곤 갖다 버린 그 아름다운 광경에 눈을 뺏긴 사이, 아련한 오르골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제게 말을 걸었다.

"형, 정신이 드세요...?"

... 아무리 들어도 저 순둥한 목소리는 도대체 적응이 안 되었다. 류건우는 머리를 짚은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점점 깨끗해지는 시야로 한껏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 류건우가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류건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안 돼요!"

"헉."

"지금 잠드시면 안 돼요. 적어도 분석이 끝날 때까지는요!"

"분석?"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은 듯 웃고는 볼을 긁었다. ... 류건우에게는 정말 낯선 표정이었다.

"네. 아무래도 또 시스템에 문제가 일어난 것 같은데... 분명 이제 시스템은 없는데 왜지...?!"

"시스템은 또 뭐냐."

"어, 그게... 음, AI? 저도 정확히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일단은 지금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석 중이니까요, 그게 끝나면 바로 형을 돌려보내드릴게요...!"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듯 서툴게 말을 마무리하는 남자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남자가 화들짝 놀라는 틈을 타 류건우는 자신이 누워있던 소파에 남자를 그대로 메친 채 멱살을 잡아 눌렀다.

"으악! 혀, 형?"

"너 누구야."

류건우의 얼굴이 험악해졌는지,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했다. ... 반격의 의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말랑한 몸에 잘못 짚었는지 고민한 것도 잠시, 류건우는 표정을 굳힌 채 재차 남자를 추궁했다. 그 무엇도 명확한 것이 없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이 남자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뿐.

"넌 누구고, 여긴 어디냐. 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는 대로 말해."

"형은 이때도 이런 거 잘 하셨네요......"

"헛소리 하지 마."

남자는 말할까 말까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았다. 류건우는 타들어가는 인내심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남자를 빤히 노려보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가 퍼뜩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아닌 허공을 보는 듯 멍하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잠시 다채롭게 변하던 남자의 얼굴은 끝내 울상이 되었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류건우의 미간은 좁아졌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못한 류건우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남자도 입을 열었다.

"저는 큰달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어, 혹시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 스물여섯."

"아, 그래서... ... 음, 아무튼 저는, 형이랑 곧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 인데요."

"뭐?"

옷깃만 잡는 수준이었던 류건우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자, 남자는 또 울상을 지으며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형, 형을 저한테 떠넘기시면 어떡해요, 하는 말은 또 뭐고. ... 누군가 울먹이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은 류건우에게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 우는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라면 더욱. 울다가 웃으면 뿔이 난다던데, 울다가 성을 내면 그건 뭐가 되는건가.

"아잇, 좀 들어보세요...! 형, 공시 준비하시려는 거죠?"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일단 들어보시라니까요! 여기는, 음, 일종의 심상세계에요."

"그러니까, 현실이 아니라는 거냐."

"네! 맞아요. 그리고 저는... 어어, 형의... 이, 이건 말해도 되겠지? 미래의 조력자 같은 거였는데요."

"..."

넌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하는 거냐, 하고 쏘아붙이려던 류건우는 문득 드는 위화감에 눈살을 찡그렸다. 자신은 왜 저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반말을 쓰고 있는지, 저 사람은 왜 자신을 형이라 부르는 것에 저항이 없는지, 무엇보다도 왜 애써 누르던 손에서 힘이 자꾸 빠지는지. 류건우는 저도 모르게 멱살을 쥐었던 손을 떼어냈다. 남자는 혼란이 깃드는 류건우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폭 뱉었다. 그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류건우를 폭 안았다. 밀어내려고 했지만 남자는 쉽게 밀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류건우는 그 포옹에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지금 뭐 하는..."

"헤헤. 고마워요, 형."

"뭔..."

"있잖아요, 형. 카메라 또 잡아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되겠죠, 역시."

굳이 남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상대가 알고 있자, 류건우는 흠칫 놀라며 상대의 눈을 보려 몸을 뒤로 물렸다. 그 행동은 저를 꼭 끌어안은 채 놔주지 않는 남자의 몸에 막혔다. 류건우가 몸을 뒤채며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남자는 결코 놔주지 않았다.

"형은 조금 더 솔직해지셔도 괜찮았을텐데. 왜 그랬어요, 제가 그렇게..."

... 못미더우셨나요, 아니면 두려우셨던 건가요. 큰달, 류건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꼴깍 삼켰다.

뒤에 무슨 말이 생략되었는지 류건우는 알 수 없었다. 큰달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함께한 그의 형이지, 지금 저를 토닥이는 이 류건우가 아니었다. 큰달은 눈앞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푸른 창을 보았다. 저를 향해 다정하게 반짝이는 팝업을 본 큰달은 목이 메이는 감각을 꼴깍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특별한 날이기에 발생한 균열도 곧 사라질 시간이 되었으므로, 이제 두 사람은 본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갈 것이다. 큰달에게는 그 전에 류건우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형."

"왜."

"생일 축하드려요. 태어나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형."

류건우는 할 말을 잃었다. 저를 응시한 채 입술을 달싹이는 어린 형을 보며 큰달은 따뜻한 햇빛炆旲처럼 웃었다. 이제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너도, 생일 축하한다."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류건우는 심상세계에서 사라졌고, 큰달의 눈앞에는 계속 그의 형이 보내는 걱정어린 팝업이 떠올랐다. 류건우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류건우가 서 있던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동그래진 눈이 붉게 충혈됐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나중에 만나요, 형."

심상세계에서 나가는 순간 류건우는 기억을 잃을 것이고, 오늘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남은 그 해의 12월 15일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류건우는 웃었다. 이윽고 심상세계에서 류건우의 모습이 사라졌고, 무사히 사태를 마친 큰달은 얼굴로 저를 걱정하는 형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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