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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N

ㅈㅎ님 드림 소설 작업물 / 27.03.07 / 맺음체 요청

빨갛게 동그라미가 그려진 달력을 보면서 고민했다. 생일엔 뭘 해 줘야 하지? H가 지난 본인 생일에 해 주었던 것을 복기했다. 기억 속에 선명히 남은 서프라이즈 파티를 되새겼다. 달력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봤다. 음… 땡! 그런 규모의 행사를 준비하기엔 시간이 한참 모자랐다. 어림도 없지. 눈을 감고 평소에는 지극히 귀찮던 잘난 학우들의 자랑을 떠올렸다. 나 어제 내 생일이었는데 말이야, 누가 나한테… 그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답안을 찾았다. 케이크를 구워 주자.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사지 말짱한 남고생이 하기에는 과하게 아기자기한 행동이었지만, 충분히 이벤트가 될 것 같았다. J, 천재인 듯? 되지도 않을 자기 칭찬을 스스로 한 번 갈겨 주고 마트로 향했다.

 

 

사 온 갖가지 재료부터 앞에 늘어놓았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달걀, 확인. 버터, 확인. 설탕은 저기 있고. 박력분. 박력분 맞지? 목록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요리책 재료 설명에 빨간색 별표가 세 개나 있으니까. 중력분을 쓰면 절대 안 돼요! 냉장고 문을 열어 나머지 재료 또한 확인했다. 우유 오케이, 생크림 오케이. 개수대 아래 서랍에서 오랜 시간 방치된 낡은 저울을 꺼냈다. 과하게 낡은 겉모습에 약간의 고민이 더해졌다. 이걸 쓸 수 있을까. 머리를 잠깐 긁적였다. 에구구. 다시 사 오기에는 늦었으니 그릇이나 턱 올려 영점을 맞췄다. 힘들게 글자를 읽어 내려 동작을 입력했다.

꿋꿋하게 요리책에 쓰인 순서대로 행동을 출력했다. 물론 조금 삐걱대는 구석은 가끔 있었어도. 우당탕탕 소리가 신경이 쓰이긴 했어도. 만들어줬다? 경험담과 더불어 망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 온 J는 몇 번이고 요리책의 순서를 다시 확인했다. 팔 근육에 힘을 빡 주어 반죽을 전부 엇는 것에 집중했다. 이리저리 튀어 과장 좀 보태서 반절 가까이가 날아간 은색 볼에 남은 게 없을 때까지 싹싹 긁어 베이킹 틀을 채웠다. 조금 어설픈 베이킹 틀을 오븐에 집어넣고 나서야 숨이라도 돌릴 조금의 틈이 생겼다.

오븐에 빵을 집어넣고 제일 힘들다는 그 크림도 해결했다. 젓는 것에는 자신이 있어서. 큰일 났다. 예상보다 빠르게 저어 낸 크림 탓에… 쩜쩜쩜… J는 다시 정신을 놓았다. 정확하게는 허공을 향해서 멍을 때렸다. 뭐 해야 하지? 멍한 표정 정신을 놓은 눈으로 재료와 함께 사 온 풍선의 포장을 뜯었다. 목 안까지 빨개질 정도로 열심히 고무 막 안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오븐이 전부 돌아갔다는 띵 소리가 들리자마자 불던 풍선조차 내려놓고 달렸다. 바닥이나 벽에도 고정하지 못한 풍선이 바닥을 나뒹굴어 발에 치였다. 잠깐만! 케이크에게 통할 리 없는 명령을 내린다. 심호흡을 한 번, 뜨거운 케이크 틀을 엎어 시트를 꺼내자마자 비명이 나와서 올라오는 열기를 견디고자 찬 물로 손을 씻었다. 요리책을 꼬라본다. 사이를 가르라면서요, 저걸 어떻게 해요. 어쩌겠어. 싫어도 해야지. 마음을 먹고 뜨거운 케이크 시트 위에 다시 손을 올려 삼 등분으로 갈랐다. 아직 채 식지 않아 따뜻함을 넘어서 뜨거운 케이크 시트에 더 큰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의 패배다, 케이크여. 바닥에 위로 시선을 줬다. 꿇어앉아 잘려진 케이크 시트를 봤다. 평평하게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무너진 꼬라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좆됐다. 새끼손가락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다시 손을 한 번 닦은 뒤 시트 위에 생크림 한 덩이를 퍽 올려놓으면서 생각했다. 보강하면 가려지겠지. 행복 회로를 돌린다.

 

 

삑 삑… 예상보다 빠르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해진 주방에 우당탕탕 조리도구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자, 잠깐만.

 

아직 준비 덜 됐어, 들어오지 마!

네에….

 

문 너머에서 하는 시원한 응답이 황당했다. 그걸 된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냐? 현관문으로 슬쩍 시선을 한 번 줬다가 다시 크림 칠에 집중했다. 잘린 모양이 좀 망해도 크림으로 보강하면 어떻게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으리라! 호기롭게 시작했던 다짐은, 글쎄. 무너져 내렸다. 물리적으로. 다짐도 케이크도 전부 다. 물리적으로. 다시 요리책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읽었다. 아! 시간에 쫓겨 시트를 식히는 걸 까먹었다. 바보 J는 허망한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너져 내린 케이크의 꼴이 객관적으로 웃겼다. 아마 하얀색 화산이 터지면 이런 느낌일 것이고, 분명 지구에 하얀색 운석이 내려꽂히면 이런 느낌일 것이리라. 절망! 더 이상 수정할 방법을 찾지 못한 지한은 주방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아오오. 콩쥐야 좆됐어, 베이킹 개 어려워.

쾅! 현관에서 둔탁하게 치이는 소리가 났다. 절망하던 것도 잊고 엥? 고개를 뻗어 상황을 살핀다. 지금 뭐야? 시선에 어느새 실내로 들어온 H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왜? 속을 알 수 없을 표정을 했다.

기다리겠다며. 응. 근데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생일자 주인공 H가 처음 마주한 건 앞치마를 한 J였다. 눈을 꾹 감고 마음속으로 귀여워! 소리를 질렀다. 두 번째로 마주한 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색색의 풍선들이었다. 이건 뭐야? J의 머리카락에 연녹색의 풍선을 문질렀다. 정전기가 잔뜩 통해 엉망으로 솟아오르는 머리칼을 무시하고 아무 말 없이 H의 손을 밀어 내리기나 했다. 침묵. 지한의 입은 여전히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H가 먼저 물었다. 하나하나 다 분 거야? 끄덕여지는 J의 고개에 마음속으로 귀여움 스탯 하나가 더 적립됐다.

또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겼다. 조리대 위로, 조리대 위의. 음.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하얀색 덩어리를 검지로 콕 가르켜 굳이 물었다. 저게… 저게 뭐야? 아. 멍한 채로 있다가 갑작스레 냅다 벼락을 맞은 J는 몸을 방패 삼아 필사적으로 앞을 가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뭘 봤는데?

아, 씨. 아무것도 아니라고.

 

왜애. 괜찮아! 어르고 달래는 말에 겨우 꿈쩍 않던 거구가 뒤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H는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런, 어, 삐리삐뽀 외계 아스트로넛을? 푸핫! 참을 수 없는 웃음에도 예의상 웃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끅끅 넘어가는 숨을 뒤로하고 겨우 묻는다. 니가 만든 거야? 질문에 순순히 고개는 끄덕인다. 방금 만들었어? 다시 끄덕. 아이, 괜찮아! 웃기고 좋은데 뭐. 지금 상태의 꽁한 J에게는 통하지도 않을 칭찬을 했다. 생일에 직접 케이크를 구워 주는 백구십 비슷한 남성.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아기자기한 생각에 H는 다시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방금 귀여움 세 스탯 적립됐다. 내 마음이다.

반대로 J는 확실히 마음먹었다. 사람들이 만들지 않고 사 먹는 것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다음 생일부터는 케이크 만들기란 없을 예정이다. 그냥 사 줘야지. 꼭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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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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