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체류

: 海駝

: oc by 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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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직감이라고도 했고, 혹은 능력의 새로운 갈래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해타는 무언가가 자신의 흉통을 짓무르는 듯한 느낌에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복잡하고 울렁거린다. 정적 속에서는 신체가 소란스레 속살거린다. 위장이 조여들면서 꿀렁이는 소리, 근육이 수축하는 소리, 침이 꿀꺽, 식도를 타고 흘러내린다. 어지럽다. 색채가 걸레에 얼룩진 물감들처럼 어지럽게 섞이고 오일 파스텔의 기름이 끈덕지게 뭉쳐 달라붙는 것만 같다. 목의 척추를 시큰한 한기가 저를 쥐어틀고 훑어버리면서 신경 마디에 덤벼들었다.

해타는 제가 덮고 있던 두꺼운 파카를 제끼며 튕기듯 일어났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짐을 싸 두는 것은 이 시대에서 당연한 수칙. 적당히 이것저것 들어간 가방을 들면 해타가 여기 머물렀던 흔적은 남지 않는다. 끼리릭. 쾅. 힘껏 창문을 열어젖히면, 정적을 깨는 거친 소리가 났다. 녹슨 창문이 삐걱이는 소리. 일순 균형이 무너지면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세워졌다. 더 이상 지체할 새도 없으매, 해타는 귀를 움찔거리며 건너편 건물의 테라스를 향해 가방을 던졌다. 가방은 어줍잖게도 빠르게 허공을 교차하며 건너편 테라스에서 나뒹굴었다.

문 너머 난해하고 불규칙적인 괴성이 들린다. 해타의 창문이 먼저였을지, 저것들의 접근이 먼저였을지는 알 수가 없다. 해타는 면밀하게 고민하고 싶지도 않는다, 머리 아파. 그와 함께 해타는 몸을 웅크렸다가 일순, 테라스의 난간을 밟고 반대편 건물을 향해 도약한다. 사람의 몸은 순간 종이비행기가 되어 찬 바람을 가르고, 날카로운 바람이 귀를 에윈다. 발 아래로 까마득한 인도가, 나뒹구는 차가, 말라붙은 피와 살점들이, 괴성과 함께 짐승 울음을 내는 시체가 생자를 바라보았다. 쾅. 것은 해타의 뒤로 두터운 나무문이 뜯기고 부서지는 소리다. 불쾌한 시체 썩은내가 났다. 수많은 손이 생자를 향해 뻗어졌다. 지은 지 시간이 된 탓에, 빌라의 낡은 테라스 난간은 갑작스레 시체들이 기대며 늘어나는 무게에 위태롭게 덜컹거린다. 그 손들을 뒤로 하고, 해타는 마냥 웃었다. 히. 것은 이번에도 살아남을 것이란 필연의 확신이다.

머리 보호. 머리 보호. 누군가 알려 줬던 몇 마디를 중얼거리면서 해타는 어깨부터 나뒹굴었다. 본능처럼 머리를 넣고, 부딪히는 어깨를 옹송그리며 등으로 굴렀다. 불안정하게 흔들렸던 난간에서 제대로 도움닫기를 하지 못 해서 그렇다. 해타는 누군가가 잔소리를 얹는 기분에 귀를 긁었다. 이상하지. 겨울의 외부 난간은 소름끼치도록 차가웠다. 꺼지는 듯 한숨을 내쉬며 해타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벌러덩. 체력을 조금이라도 채우려 조급하게 눈 붙인 것이 문제였을까. 건너편 빌라에서 죽은 자들이 해타를 향해 손을 내뻗고 비명을 지른다. 생전의 옷을 입고, 새까맣게 부패된 채로. 벌려지는 입 안 치아에는 명백하게 시뻘건 근육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질척이는 점액이 짓물러붙은 살점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질퍽질퍽. 우어어. 우어어어. 불쾌한 시체 썩은내가 났지만 익숙해진 해타는 물끄러미 멍을 때렸다.

이런 세상이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해타가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시체들이 걸어다닌다. 차가운 세계, 겨울이 냉막하게 길거리를 관통하는데, 거리 위에는 시체들이 낮밤을 차지하고 있었다. 낮은 광합성을 하듯 조금 느렸고, 밤에서는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네발짐승과는 비견도 할 수 없이 빨랐다. 조금 달라진 사람들은 살이 물렀고 움직임은 실이 끊긴 인형인 듯 고통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며 무작정 달려들었다. 생명력이 끈질겼으며 청각이 예민했다. 아마도 해타처럼,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불에 몰려들었다. 소리에 몰려들었다. 어떤 식으로 구동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시체들은 살아있는 생자들을 물어뜯었고, 그렇게 숨 앗긴 사람들은 눈 감지 못하고 육신에 갇혀버린 망자가 되어 황천 아닌 이승을 떠돌았다. 주위에 사람들은 없고, 아니 있었던가? 분명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로 갔더라.

아니, 그 전에 해타가 머리 보호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지?

해타는 문득 그것을 더듬어 올라가려 했지만, 무언가의 방해로 그 다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머리를 훑는 파노라마에 불씨가 붙는다. 불이 일었다. 이것이 해타의 한계선이라는 듯. 더 이상 생각이 뻗어나가기를 머리가 거부한다. 그 너머는 타 버린 듯 검은 숯검댕에 가려져 상실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일련의 절차들을 해타는 깨닫지 못했다. 약속이므로. 대가가 규정한 엄정함이다. 또한 이는 타인들만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이 도로록 굴러갔다. 익숙한 미소로 매끄럽게 입이 올라간다.

이 바닥에 오래도록 누워 있을 수는 없지이. 해타는 코어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해타는... 건물을 올라가야 해. 이유는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왠지 위험한 기분이 들어서. 좁은 테라스에서 가방을 등에 업었다. 장갑을 꺼내 쓰고, 파카를 단단하게 잠갔다. 딱. 딱. 단추를 눌러 닫았다. 겨울은 춥고 고요했다. 겨울의 세계에서 시체들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소리를 죽였고, 숨을 죽였고, 또한 사람을 죽였다. 가슴에 시린 듯 뻥 뚫린 기분이 들었다. 상실의 감각. 부서져 버린 퍼즐조각. 해타는 가방을 고쳐 매고 테라스 옆 수도관을 붙잡았다. 이곳은 삼 층. 두 층 정도를 올라가면 옥상이다.

작은 틈새를 딛고 재게 몸을 끌어올리면서 해타는 성큼 성큼 수도관을 타고 올랐다. 팔이 조금 후들거렸고, 입에서는 더운 입김이 맺히며 하얗게 피어올랐다. 끽. 금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그르렁대는 우짖음 소리가 들렸다. 목과 어깨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해타는 습관적으로 숨을 참았다.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늘 그렇듯이 심장소리가 들렸다. 쿵. 쾅. 쿵... 쾅! 오 층의 좌측 유리창, 깨지고 금간 유리 사이로 비쩍 말라붙고 졸아든 팔이 튀어나온다. 목적성 없이 허공을 향해 그 더럽고 무른 살점 덩어리 위족을 흔들었다. 생자의 열기와 소리를 느낀 것이다. 해타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닿지 않도록 몸을 기울이며 재게 옥상까지 올랐다. 그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텅 빈 수도관이 덜거덕대며 흔들렸다.

밤이 길었다. 새벽이 밝기까지는 한참이나, 너무나도 오래 남아서. 해타는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몸을 붙였다. 익숙하게 미끌거리고, 차가운 느낌은, 아무래도... 방수 페인트 처리가 된 모양이다. 옥상 문, 단단하게 걸린 체인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해타는 홀로다. 그것은 안전하다는 뜻이었지만, 본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그것은 반대로 적에게 노출되었을 때 홀로되어 대처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해타는 오래도록 붙이지 못해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밤은 안전하지 못한 시간이다. 지금은 마땅히 대처할 무기도 없어 더더욱이었다. 어느 샌가 잘린 머리가 휑했다. 아마 정신없이 도망치는 도중 잘라버렸을 것이다. 살기 위해. 그렇게 하나씩 버려서, 해타는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나? 단지 식량 조금과 로프 등이 든 가방을 몸에 끌어안고 추위를 삭였다. 위안이 필요했다.

불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발명이다. 인류는 어둠을 볼 수도, 날랜 발톱이나 추위를 견딜 털도 없다. 불로 하여금 안전을 얻었고, 생존을 얻었다. 그러니 문명의 증거인 것이다. 따라서 불을 앗긴 인류에게 이 시대는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날름거리는 불길은 필연적으로 매캐한 연기와 탄내를 동반했다. 거처를 들키기도 쉬울 뿐더러, 그 열기에 이끌리는 것은 생존자들뿐만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불을 피웠다가 단체 군집에 휩쓸려 망자들과 신세를 함께했다. 해타도 그걸 알았다. 그럼에도 가끔은 불길에 대한 열망을 참을 수 없었다. 뛰어들고 싶어. 온 몸을 데우고 싶어. 피부를 녹이고 달라붙는 불씨를 삼키며, 파고드는 따스함에 머리를 묻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혹자는 해타가 저 시체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말하기도 했다. 해타는 아직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뼈저린 추위와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딪혀댔다.

충동을 삼킬 수 있었다면, 해타는 어른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며칠 동안 숨 죽이며 식량을 긁어모았던 은신처는 아마, 지금쯤 잔열조차 남지 않은 채 그을렸을 테다. 그 사립 어린이집은 햇빛이 들어오면 매우 따스한 색깔로 빛났다. 연노란색과, 초록색, 아이들이 공부했을 한글 글자판과 작은 아이들의 신발, 가방 따위가 나뒹굴고 있었다. 창문을 조심스레 따서 기어들어가면서, 해타는 그곳에서 오래된 먼지 냄새와,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분유 냄새를 맡았다. 아이들의 웃음 냄새 같은 것들. 아주 평화로운 햇볕 냄새. 결국 참지 못하고 불 피웠던 것은 해타였다.

그런 뒤 일어난 일은 뻔하다. 시체들은 끈적한 살점과 점액을, 말라붙은 피와 뼈를 뿌리며 곳을 침범했다. 그것은 범람이었다. 시체덩어리의 범람. 아이들의 아늑한, 또한 어떤 어린 사람의 은신처를 마구 짓밟고서는 괴성을 질렀다. 해타는 도망치기를 머뭇거렸고, 그러자 시체들은 해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입을 쩍 벌린 채. 끼에에엑. 기괴하고 인조적인 비명이 고막을 간지럽힌다. 심장 소리가 뇌를 파고들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살아있는 피를 뿜어내면서, 혹은 악착같이 죽음을 몰아내면서. 해타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찰나 드는 거부감을 간신히 삼켰다. 인간의 형을 띤 것을 공격한다는 불쾌감. 살인. 살해. 무백색 상태에서도 일방적인 괴리감이 든다. 그러나 본능은 생존에 허덕이며 머리를 채우는 불쾌를 억눌러버렸다. 이성이 마비되고, 아드레날린이 강하게 날뛰었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고동쳤다. 해타는 어디선가 얻었던 무뎌진 톱니칼을 움켜쥔다. 저 사람들에게는 관절을 조이고 꺾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으므로, 해타가 할 것은ㅡ 행동이다. 해타는 강하게 팔을 휘두르며, 시체의 머리를 정수리부터 내려쳤다. 푹, 머리의 정가운데가 물컹하게 파이면서 그 뇌, 어쩌면 흔적기관이 되었을 머리의 중추가, 썩은 고깃조각에서 걸쭉해진 액체가 튀었다. 뇌수, 신경, 그 무엇이 되었던. 푹 튀는 액체를 들이마시지 않으려 애쓰며, 해타는 숨을 참고 몸을 띄우며 허공에서 허리를 뒤틀고 발로 그 문드러진 팔들을 걷어냈다. 손 아래 시체는 이미 희부옇게 부얘진 눈동자 하나 미동할 수 없게 된 지 오래. 앞쪽으로 쏠린 반동으로 톱니칼을 빼자, 시체가 들썩이면서 거칠게 살점이 뜯겨나갔다. 우두둑.

손 안에서 칼을 한 바퀴 감아 역수로 감는다. 달려드는 시체 하나의 낯을 팔꿈치로 친 다음, 눈과 눈 사이에 고스란히 횡을 그려 칼을 꽃았다. 무뎌진 날이 거칠게 살점을 찢고 뜯어낸다. 해, 타는, 두개골이 부서진다. 숨, 을, 손잡이에 힘을 주어 꾹 누르자 바스라진다. 들이, 켰, 다. 액체가 튀었다. 뒤쪽에서 거칠은 소리가 났다. 칼을 뽑는 궤적을 따라 반 접어 돌며, 달려드는 시체의 옆머리에 손가락을 꽂았다. 손바닥 아래서 이가 부딪히는 진동이 느껴진다. 거칠게 충혈된 안구와 귀를, 썩어버린 살을 무르게 가르고 들어가는 느낌이다. 기분 나쁘게 치덕이는 고깃덩어리였다. 힘을 주고 뇌까지 닿을 듯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반댓손에 쥔 칼로 시상면을 그어올리다 내려그었다. 총 두 번. 시체 위 수놓아진 봉제선에 살점이 뜯어진다. 또다시 진득한 액체가 튀었다. 그렇게 범벅 되는 것이다. 입에서는 단 숨이 났다. 숨을 길게 뱉으면서 한껏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숨길을 따라, 발로 차고, 쳐내고, 꺾고, 찔렀다가 뜯어냈다. 불 붙은 시체가 녹아내리면서 뜨겁게 몸부림쳤다. 튀어오르는 불씨를 감내하며 온갖 기하학적이고 형이상학적 각도로 몸을 꺾어서, 해타는 보이는 틈새로 몸을 욱여넣고 길게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어느새 톱니칼은 부서지고 날이 빠져 손잡이만 남았다. 그것을 마져 던져버리며 시체들을 밟았고, 밝은 대낮에서 달음박칠쳤다. 그 때부터였다. 혹사당하기만 한 육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겠다며 파업을 한 것은.

그으, 러니까. 피곤해... 저 아래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기어코 난간이 떨어졌을까. 해타는 경계를 곤두세우며 눈을 감았다. 아주 조금만, 정말 조금만... 눈만, 감고...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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