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2018~)

[민폐혜리] 무제

용과 계약자AU / 2019. 01. 13

 
 돌이켜보면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민폐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태어난 세계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그는 전설 속의 존재였다. 어떤 창작물은 용을 신에 필적하는 존재라 설명하기도 했었다. 손을 흔들면 벼락이 떨어지고, 포효하면 땅이 뒤집히는 힘을 가진 것이라고. 그것들은 창작물일 뿐이었다. 
 메이와쿠는 분명 내가 절대 접하지 못했을 신화 세계의 생물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달랐다. 처음 만났던 그는 숱한 가상 현실 속에서 묘사된 절대자가 아니었다. 절대자도 신도 그 무엇도 아닌, 한 개체의 용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놀랐다. 말이 통해서 더 놀랐던 기억이 있다. 분명 책 속의 용들도 사람과 말이 통했건만. 처음엔 저기요, 하고 말을 걸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그렇지 않은 줄 알았다. 저는 혜리에요. 양혜리.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나는 아마 그렇게 말했다. 눈앞의 용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용은 고개를 들어 이곳의 말로 답해줬다. 반말로 해. 용은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었지만 좋은 용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 이름이 뭐야? 그렇게 우리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랑. 계약해. 양혜리. 
 그래.
 결국 그 대화의 끝에서 우리는 계약을 했다. 거절할 이유 따윈 없었다. 돈도 능력도, 심지어 세계에 대한 지식도 없는 내가 이곳에서 홀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었다. 살아 있어야 돌아갈 시도라도 하지 않겠어. 그러나 실은 알고 있었다. 밑바닥에서는 민폐와 함께하고 싶단 마음이 솟고 있단 사실을 애써 못 본 척했다.  눈을 돌려 시간을 미루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 애써 이기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각자 고여 있던 우리의 시간은 고요히 흘러가는 바다처럼 그렇게 흘러나갔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는 다양한 지식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것들도 알아? 용이니까. 그래도 대단하네. 우리는 다양한 장소에도 갔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있어. 안 가본 곳이 없구나. 우리는 종종 숲에서 잤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용으로 돌아간 그의 곁에서 잠드는 게 좋았다. 용은 체온이 높았다. 용은 다 그래? 몰라. 미적지근한 대답이었다. 같이 숲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는 게 좋았다. 민폐는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했다. 반짝거리기만 하면 다 괜찮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시장에 가서 여러 물건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는 내게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안겨줬다. 어떻게 입어야 할지조차 가늠이 안 가는 본 적 없는 옷이나 매화를 본뜬 장신구 같은 것. 그 수를 셀 수도 없고 가격을 더해볼 수도 없는 수많은 것들. 이렇게 많이 받아도 돼? 계약자잖아. 나는 아무것도 못 주는데. 계약했잖아. 그는 이따금 계약을 입에 올렸다. 아주 가끔이었다. 우리의 계약은 입에 담을 필요도 없었다. 왼쪽 손등에 도드라지게 새겨진 표식이 계약의 증거로 남아 매일 알려주고 있었으니. 
 민폐에게 받은 옷 중에 시로무쿠(白無垢)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 학교에서 배웠던 게 얼핏 떠올랐다. 분명 혼례복이었다. 왼손의 표식과 원래 세계의 혼례복. 어쩐지 결혼식 같아 웃음이 났다. 예쁘다, 고마워. 민폐는 말이 없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본 신랑의 반응이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나는 단순한 계약자인데. 분명 여기가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막아뒀던 샘이 강을 이룰 모양새로 점점 솟아 나왔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분명 이런 거겠지. 용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나는 그 온기와 함께였다. 감정이 새어 나올 틈도 주지 않는 따뜻함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그가 계약자에게 주는 것들을 받기만 하면 됐다. 앓을 수조차 없는 첫사랑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계약자가 아니라 나로서. 
 사랑을 깨닫고도 나는 그와 같이 있었다. 계약자니까. 애초에 계약자긴 해도 하는 일은 없었다. 손등의 문양만이 선명했다. 민폐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박식한 용도 알지 못하는 나의 세계에 대해 얘기를 했다. 용이 실존하지 않는 세계, 네가 없는 세계. 두려워졌다. 그는 잠잠히 들었다. 아, 나는 결국. 내가 머물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잡은 네 손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꾸역꾸역 얘기를 이어나가며 실감했다. 내 세계는 너구나. 차마 뱉어낼 수 없는 말이었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그가 물었다. 어, 음. 그닥. 거짓말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말은 마침내 바다를 이룬 감정 속에 빠져 버렸다. 
“난. 너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
 결론적으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눈앞의 너를 볼 때마다 내 행운은 여기 있었구나, 하게 됐다. 나의 용이었다. 
 “여기서 뭘 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꽤 긴 시간 함께 아주 많은 일을 했으면서도 우리는 직접 살을 맞대진 않았었다. 용 모습을 한 네 곁에서 잠을 청하기는 했으나 살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손 정도는 잡을 법했는데. 무의식적인 거부였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손을 잡았으면 아마 너는 알았겠지. 말은 안 해도 섬세하니까. 그러나 이젠 다 상관없어졌다. 네 볼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민폐야.”
 “…”
 “메이와쿠.”
 “…왜.”
 처음엔 무슨 이름이 그렇냐는 생각도 했었지.
 “좋아한다고 말해도 돼?”
 속에서 작게 파도가 쳤다.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파도가 일었다. 마음속 해안으로 네가 걸어 들어 왔다. 좋아해. 손등의 증표가 반지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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