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마르 오스퇴가르드

귀환

떠나는 일

※ 1차.

※ 허락 없는 발췌를 금합니다.

귀환

떠나는 일

1

까마귀가 돌아왔다.

어느 날의 일기에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문장을 적은 지 꼬박 닷새만의 일이었다. 힐마르는 그가 돌아오면 건넬 인삿말을 네 개쯤 생각해 둔 참이었는데, 그중 어떤 것도 꺼내들 수 없었다. 말하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젊은 까마귀는 고작 그 닷새 사이에 온갖 덤불의 가지와 풀잎과 숲길에 뒹구는 먼지들, 돌과 모래와 자갈들, 이름 모를 동물의 털과 오물들, 이미 흘린 지 시간이 흘러 굳어버린 피딱지와 방금 막 흘린 핏방울, 그리고 숱한 상처들을 몸에 달고 과연 산 사람이 맞는지 의심되는 꼴로 기어서 간신히 야영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봐, 네가 몰래 레인저를 관두기로 결심한 줄 알고 까마귀 배지 돌려달라는 편지를 쓰던 참이다.” 같은 말이든, “제기랄 맙소사, 도망칠 기회를 찾았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었어야지, 여기까진 왜 돌아왔어?” 따위의 인사든 일단 들을 귀가 있어야 우스갯소리라도 될 것 아닌가. 쓰러지듯 품에 안긴 아나히스를 그는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그가 눈물나게 반갑다거나 못 이기게 소중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느다랗게 헐떡이던 그가 힐마르의 옷자락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난 숲짐승에게 쫓겨 나무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 가지를 부둥켜 안는 것처럼.

그러니까, 신기한 일이다. 그는 다른 조도 아니고 세꼬리늑대 조장 아닌가. 본인부터가 목숨 잃을 걱정 커다랗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고, 늑대 배지를 달고 있는 레인저치고 일찍 은퇴하거나 일찍 죽지 않는 자가 드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늑대를 묻어주었고 또 살아남은 늑대들을 격려하며 우두머리로 살았겠는가? 게다가 늑대 아닌 다른 조라고 사정이 달랐겠는가. 요컨대 기다리던 늑대와 돌아온 까마귀 모두가 죽음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잘 알고 거기에 길들여진 자들일 텐데…….

그러면 이 울음의 의미는 무어란 말인가. 까마귀는 닷새 간 삼키지 못해 응어리진 공포와 고독과 아득한 희망을 모조리 토해내듯 울었다. 힐마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모를 수가 없어서 이해할 수도 없었다.

헐떡이는 등을 토닥이며 생각했다. 너는 어떤 보금자리로 돌아온 거지? 그는 울음 탓에 대답할 수 없다. 아니 애당초 질문을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늑대는 다시 생각한다. 네가 귀환자라면, 나는? 이제 우리는 무엇이 되나?

늑대는 생각할 뿐 묻지 않았고 그럼에도 까마귀는 묻지 않은 말에 이미 대답했다.

그가 마침내 돌아왔으며 그 탓에 안심했다고.

여기 두 사람 몫의 둥지가 있다.

2

밤이 깊었다. 까마귀가 매달고 온 피 냄새가 그가 기어온 방향을 따라 저 바깥까지 길게 이어졌다. 늑대는 습관처럼 나무에 올라 그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주먹질 솜씨에 곧잘 가려지고는 하지만 사실 그의 몇 안 되는 재주 중 하나다. 고지를 차지하고 근방의 지형과 동태를 살피는 일. 어쩌면 그는 까마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는 대신 화살 꼬리에 까마귀깃을 매다는 사냥꾼이 되었을 뿐이다.

영리한 밤까마귀는 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오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아무리 옆구리에 구멍이 났대도 그 길을 곧장 돌아서 왔다면 사흘이나 나흘 안에는 순찰 나간 대원에게 발견되었을 테다. 야영지와 먼 곳을 빙빙 돌며 추격자를 따돌렸겠지. 때로는 풀숲에 웅크리고 때로는 나무 위에 숨어서. 힐마르 오스퇴가르드 역시 나무에 앉은 채 고심했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최대한 야영지에서 먼 곳으로 적을 유인한다. 그 주변을 맴돌며 그들을 교란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길게 시간을 끈다. 야영지에 주둔 중인 대원들이 내가 돌아올 거란 기대를 접을 만큼 오래.

그런 다음에는? 떠나야지. 어디로? 어디로든. 야영지만 아니라면, 어디로든. 힐마르는 나무 줄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데 너는 떠나지 않았다. 떠나는 대신 돌아왔어. 네가 모르는 데서 객사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오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말과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는 말은 같은 뜻일까.

네가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말과 네가 돌아오지 않기를 원했다는 말은 어떨까.

3

그는 정처없이 숲길을 걸었다. 전쟁이 끝난 어느 가을 숲처럼 낙엽이 붉고 샛노란 색으로 물들었다. 다리에 무게를 실을 때마다 바스락대는 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장화를 신은 발등에 따각대는 돌멩이들이 채였다. 응달에는 이름 모를 버섯들과 고사리들이 자라고 있었고 빨갛게 익은 나무 열매들이 가지에 매달린 채 목을 내밀었다. 어떤 것은 시고 어떤 것은 떫었다. 나무 껍질과 뿌리를 긁어먹고 조금이라도 붉은 모든 열매를 닥치는 대로 집어먹으며 살아남아야 했던 밤을 힐마르도 기억했다.

그는 까마귀가 기어온 길을 되짚어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일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떠난 자를 기다리는 보금자리와 요람에 대해서. 그가 건너온 수많은 죽음에 대해서. 또 지나친 많은 삶에 대해서.

4

다시 아침이 밝았다. 까마귀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들른 천막에서 힐마르는 드디어 그에게 인사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까마귀가 “생각해 보니 배지를 반납 안 한 게 떠올라서 돌아왔다”며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천막을 나온 힐마르는 자신이 그 말에 왜 웃지 못했는지 고민해 보았다. 그런 다음 웃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아나히스가 왜 사과했는지 생각했다. 그들은 그 순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침범하고 침범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나히스의 머리통을 껴안으며 구박했더라면 그 날의 울음은 없던 일이 되었을까? 그는 천막 앞에 앉아 온 숲의 풀을 다 태워버릴 기세로 담배에 불을 붙였고, 연기를 뻐끔대는 동안 무언가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앉은 자리에서 담배를 모조리 태워버린 그는 이윽고 천막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아나히스의 머리통을 거세게 껴안고 장난을 걸었다.

머저리 같은 놈. 그는 생각했고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는 기억하겠다고 말한 거야.

내 말을 알아먹겠냐? 우라질 멍청한 놈아.

그에게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었고, 기실 그는 그것조차도 바라지 않았다. 지난 칠 년 간 전쟁터에서 뼈저리게 배운 것이다. 열망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다고. 버릴 수 있고 버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언제나 힐마르를 안심시켰다. 그는 어떤 기억이든 묻어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떠나야만 하는 순간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봐, 다시 돌아와.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냐.

5

시일이 흐르고 힐마르는 떠났다. 아나히스는 끔찍하게 다쳤던 것치고 제법 빠르게 회복 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분간 숲을 떠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간 힐마르는 폭풍 숲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잔소리를 돌아가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했다. 겨울의 어느 날, 그는 마침내 홀로 소박한 짐을 꾸려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곧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때가 되면 어련히 돌아오리라. 폭풍 숲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숙련된 기수답게 허리를 빳빳이 펴고 눈 덮인 나무 뿌리에 고바이스가 넘어지지 않도록 고삐를 틀어쥐었다. 네 발굽 소리와 함께 어둑한 숲을 빠져나와서, 시리도록 찬 바람을 맞으며 끝없는 평야를 질주했다. 고바이스는 오 년 전보다 더 늙었고 자주 지쳤다. 말을 쉬게 하고 물을 먹이면서 예년보다 하루를 더 소요해 꼬박 엿새만에 목초지에 다다랐다. 멀리서부터 달려나와 말과 사람을 반겨준 것은 이제 열두 살쯤 먹은 양몰이견이었다. 아직까지도 개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힐마르는 녀석을 퀴노아라고 불렀다.

그사이 결혼한 헤비나 오스퇴가르드는 뜻밖에도 임신 중이었다. 처남 되는 사람이 자신을 무어라고 소개했고 힐마르는 샌님 같은 인사를 흔쾌하게 무시했다. 온몸에 도깨비풀을 묻히며 퀴노아와 놀아준 다음, 잔뜩 지쳐 투레질하는 고바이스를 눕혀놓고 빗질했다. 고바이스는 보기보다 겁이 많고 까칠해 좀처럼 편히 자는 법이 없지만, 농장에 돌아왔을 때만큼은 안심하고 몸을 눕혔다. 그는 헛간에 누운 채 말에게 모른 척 처남의 뒷다리를 걷어차 부러뜨려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말은 조용히 힐마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말의 큼직한 두 눈을 껴안고 싶었다. 밤새도록 말을 걸면서 잠드는 일도 잊고 싶었다.

헤비나는 힐마르의 귀환에 놀라지도, 그를 성대하게 대접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은 것마냥 당연하게 반응했다. 초대한 사람은 저녁을 차렸고 초대받은 사람은 묵묵히 일손을 도왔다. 뻔하고 살가운 안부 인사를 주고받거나 그동안 모아온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기실 두 남매는 가족의 기일을 썩 각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헤비나는 양친의 묘지를 살뜰히 관리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힐마르는 한 번의 추도식이 지난 뒤에는 사람을 기릴 줄 모르는 이였다.

식사는 식기를 달그락대는 소리와 처남의 공연한 헛기침 소리를 제하면 완전히 고요했다. 배를 불린 그는 바로 일어서는 대신 일부러 처남에게 술을 잔뜩 먹여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아직 입가에 솜털 자국이 남아 있는 애송이. 전쟁은 커녕 제 손으로 칠면조 한 번 잡아본 일 없을 샌님. 나이는 스물대여섯쯤 먹었을까. 그 나이에 힐마르는 이미 대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런 녀석은 골려주는 재미조차 없다. 힐마르는 이 젊은 청년을 잔뜩 낮잡아 보고 싶었다. 어린 치기와 혈기왕성함과 그로 인해 용서되는 무지를 비웃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쳐 준다면 조금쯤 통쾌하려나. 그는 전쟁을 알고 처남은 전쟁을 모른다. 한 가지 우스운 것은, 그 사실이 힐마르를 조금이라도 더 영리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다만 멍청한 입술을 비틀 따름이다.

6

뭐 이런 샌님이 목장 일을 한다고.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해.

양털 깎을 줄도 모르게 생겼어.

내가 아니까 상관없지.

헤비나.

왜 불러.

말 한 필이 필요해.

허락 받겠다는 건 아니지? 마음대로 해. 누가 탈 말인데?

나.

고바이스는 어쩌고?

네가 맡아줘.

헛소리.

고바이스도 나이를 꽤 먹었잖나. 팔아버릴 수도 없고, 다른 데 맡기자니 형편 어려울 때 멱을 따서 구워먹을 게 뻔하고, 부탁할 데가 너뿐이야.

네 동료들한테 맡기면 되잖아.

거긴 나하고 너무 가까워.

여긴 안 가깝나?

말 타고 닷새면 충분히 멀지.

가끔 편지하마. 헤비나가 생각하기로 힐마르가 떠날 때 그렇게 말한 것은 처음인 듯했다. 고바이스가 죽기 전에는 데리러 와. 힐마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쟤는 네 가족이잖아, 힐마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건 돌아오겠다는 약속이 될까?

일 년 안으로 태어날 조카들을 보러 오라는 말보다 고바이스를 살피러 돌아오라는 말을 먼저 꺼낸 건 순전히 헤비나의 친절일 테다. 아직 이름 없는 새카만 말을 타고 그는 농장을 떠났다.

7

평야를 가로지르며 말에게 말했다. 네 이름은 크로우야. 까만 말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한 번 정하면 그걸로 끝이거든. 그러자 녀석은 아예 걸음을 멈추고 시위했다. 제기랄, 그럼 찌르레기로 해. 찌르레기는 짜증이 치미는 듯 발을 굴렀고 성난 말 등에 탄 사람은 코웃음만 쳤다. 뭐. 어쩌라고.

그날 밤, 고바이스의 몸통에 새겨진 은하수를 쓰다듬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짜증이 난 나머지 그는 밤새 잠을 설쳤다. 자꾸만 뒤척이는 힐마르 때문에 찌르레기도 덩달아 잠을 방해받았는지 화를 냈다. 시끄러워, 민둥한 검은지빠귀 같은 놈아. 더 성질 부렸다간 네 몸통에 별바다를 그려버릴 줄 알아라. 그들은 서로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밤을 지새웠다. 평원은 드넓고 밤하늘 수놓은 별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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