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화단이 썩었다. 새벽제비는 안심했다. 이제 도시를 떠나면 됐다. 급하게 집을 팔았다.
후회할거라 했잖아.
멜이 말했다. 새벽제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돌보지 않았던 화단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상한 흙을 뒤집어 엎었다. 그리고 다시 무언가를 심지 않았다. 새벽제비는 자주 앉던 바위에 걸터앉았다. 원래 물주전자며 폭신한 방석이 그 곳에 있었다. 손에 넣고 굴리기 좋은 잡동사니들도 있었고. 주전부리를 담은 통도 있었다. 다시 가져다 놔야겠다. 그렇게 그는 동굴로 돌아왔다.
봄이 돌아왔다. 화단을 치우고 거진 반 년이 지났다. 새벽제비는 도시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폐허와 동굴에서는 자급자족을 할 수 없었다. 또 그는 엄연히 선봉대 소속의 수호자였다. 이름 없는 생명체에서 승천자가, 승천자에서 수호자가 되기까지 새벽제비는 수많은 시간을 겪어왔다. 그는 도시가 자신의 마음을 닳게 할 줄 알았다. 그는 한 번도 도시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인류 최후의 도시 - 라는 것은 만병통치약처럼 보였다.
도시로 가자.
새벽제비가 로젠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위태롭게 절벽에 서있었다. 로젠은 소리지르며 몇 번 몸부림쳤다.
도시로 가자, 그 곳에서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벽제비는 로젠을 억지로 튼튼한 지반에 올려놓았다. 로젠은 자리에서 무너져 울었고, 새벽제비와 함께 짐을 챙겨 눈 내리는 설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새벽제비는 집을 팔고 떠났다. 선봉대에서 할 말이 있다고 새벽제비를 불렀다. 어떤 엑소 여성이 다가왔다. 새벽제비는 그가 누군지 몰라 공손하게 굴었다.
칼리오페라고 합니다.
칼리오페는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로젠바움의 제자라고 하면 이해하기 편하시려나요?
새벽제비는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엑소이니 진짜 한숨을 내쉴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유기체를 정교하게 흉내낼 수 있었다.
새벽제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왜 로젠을 떠난겁니까?
화단이 썩어서…….
느린 목소리였다. 그리고 멈췄다. 칼리오페는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지만, 침묵이 감돌았다.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새벽제비는 칼리오페가 기대하던 말을 들려주었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새벽제비는 칼리오페를 스쳐지나갔다. 그가 선봉대에 명령을 받고 나오는 길인지, 선봉대에 명령을 받으러 가는 길인지 칼리오페는 알지 못했다. 새벽제비는 엑소 개체들과 인연이 없었다. 몇몇 만나보긴 했지만, 그들 중 하나와 깊은 연을 쌓지는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엑소에 대해 친밀감을 느꼈다. 엑소와 승천자, 둘 다 어린 시절이 없으니까.
동굴로 돌아오자, 그는 제일 먼저 폐허로 갔다. 화단의 흙은 폭신해졌다. 화단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고 화단 밖에서는 꽃씨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게 무슨 꽃인지 새벽제비는 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지난 계절에 심었던 봉숭아의 싹이었다. 썩어서 다 시들어버린 봉숭아를 새벽제비는 거두어 한켠에 던져놓았다. 그나마 맺혔던 씨앗들이 밑으로 떨어졌고, 떨어진 곳에서 씨들은 뿌리를 내려 지금 이 순간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벽제비는 따로 돌보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폐허에는 봉숭아가 자랐다.
봉숭아가 무르익어 환한 꽃을 피우고 또 그 꽃이 시들 때 즈음, 로젠이 찾아왔다.
네가 집 팔았던거, 다 처리 안 하고 가서 내가 처리해야했어.
새벽제비는 자기가 좋아하는 바위에 앉아 지팡이를 깎고 있었다. 로젠은 그냥. 그냥, 새벽제비 옆에 앉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로젠은 한 번도 이 장소에 오지 않았다. 파도는 절벽에 부서졌다. 절벽은 길게 이어져있었고, 저어편 절벽에는 바다새들이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긴 절벽 어딘가에 새벽제비의 동굴이 숨어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새벽제비가 깎던 나무를 들어 제대로 칼질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로젠은 지팡이가 조금 더 가늘었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새벽제비의 미안함 만큼만 생각했다. 새벽제비는 깎던 새 지팡이를 두고 일어섰다.
쓰던 것은?
낡아서 버렸지.
새벽제비는 똑바로 걸었다. 로젠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새벽제비는 누군가를 공격했다. 그가 벼락을 내릴 때, 매개는 항상 지팡이였으니까. 죽음과 폭력을 뒤로 하고 새벽제비는 시들어가는 봉숭아 꽃과 이파리를 땄다.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새벽제비는 더 이상 꽃을 찾지 못했다.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로젠을 바위에 앉혔다.
뭘 하려고?
새벽제비는 있어보라며 주전부리 통 한켠에 넣어둔 종이 꾸러미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백반이 들어있었다. 새벽제비는 굴러다니던 돌 두 개를 가져와 꽃과 꽃잎, 그리고 흰 종이에 들어있던 백반을 한데 넣고 찧기 시작했다. 재료들이 모두 곤죽이 되자 새벽제비는 로젠에게 손을 달라고 했다.
약인가? 난 다친 곳이 없는데.
아이들 유희다. 손 이리 내.
로젠은 의심의 눈초리로 곤죽과 새벽제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왼손을 내밀었다.
돌이 무너진다. 돌탑이 무너진다. 무너져 하나의 돌무더기가 된다.
이대로 하루 두라고.
로젠은 흰 종이가 꽃잎의 진액에 물들어 점점 붉게 변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자고 일어나서 벗기면 돼.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말했듯, 아이들 유희다. 그래서, 왜 왔지?
기다리고 있다며. 그것도 언제나.
로젠은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궤변에는 새벽제비가 더 강했다.
그것은 내 상태다, 로젠. 네 상태에 대해 묻는 것이다.
논리적이기에 로젠은 새벽제비의 궤변을 두고 보았다. 깰래야 깰 수 있겠지만, 그런 취미는 로젠에게 없었다. 새벽제비는 궤변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로젠이 그걸 벗겨버리면 새벽제비는 알몸이 되지 않는가.
좋아. 난 거리낄 게 없으니까.
로젠이 말했다.
너의 과거를 조금 들춰봤어.
나한테 직접 묻잖구?
맞는 말이었다. 그것 때문에 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고하기에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기에 로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제비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래서 지금 왔잖아. 그래야 너한테 사과할 수 있으니까.
새벽제비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을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해 닳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로젠의 앞이었다. 새벽제비는 흔들리는 눈으로 로젠을 보았다. 로젠에게 들키지 않도록. 로젠은 침착한 표정으로 새벽제비가 말하기를 기다려주었다. 사실,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젠이 최초의 부활을 보고 왔다고 해도 그건 새벽제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흔들렸다.
새벽제비의 동굴 위에는 폐허가 있다. 작은 판잣집이 다섯개 있었는데, 무너지지만 않게 새벽제비가 보강을 하고 있었다. 새벽제비는 폐허에 작은 돌탑을 쌓았다. 스물 아홉개나 되는 조약돌들을 쌓아 만들었다. 아이 하나에 돌 하나. 새벽제비는 서른번째 돌을 쌓아올렸다. 마지막 돌이 올라갔을 때, 새벽제비의 애끓음은 무게를 잃고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감정 두어개는 튀어 새벽제비를 때렸다. 새벽제비는 생각했다. 난 더 이상 애도도 못 하겠구나. 그리고 새벽제비는 펠윈터 봉우리로 돌아갔다.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로젠을 붙잡아 말렸다.
바닷바람은 점점 붉은 하늘을 머금어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새벽제비는 일어섰다. 깎던 지팡이를 멀리 던져버렸다. 로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벽제비는 그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이 곳엔 폐허와 동굴 뿐이니 돌아가도록 하라.
새벽제비. 그렇다면 지금의 네 상태를 알려줘.
새벽제비는 슬프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로젠은 따질 수 없었다. 새벽제비가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궤변이 아니라 진실을. 로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간 알려줄거라는 땅거미 진 믿음이 로젠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리고 그것도 진실이었다. 새벽제비는 로젠이 진실을 예측했다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새벽제비는 손을 흔들었고, 로젠은 자신의 도약선으로 갔다. 멜이 현실화 되었다. 새벽제비는 멜 대신 로젠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땅거미마저 지고 로젠의 뒷모습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다음에야 새벽제비가 물었다.
날 어떻게 볼까?
글쎄. 직접 물어보잖구?
멜은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을 가엾게 여기는 건 아닌 듯 하군요.
그런가…….
새벽제비는 돌무더기를 그대로 두고 로젠과 함께 도시로 떠났다. 로젠은 추억이 많았지만 새벽제비는 돌탑이 무너졌기 때문에 챙겨야 할 추억이 없었다. 새벽제비는 도시가 자신을 닳게 만들거라고 생각했다. 오랫만에 기대라는 것을 했다. 화단이 썩기 전이었다. 새벽제비는 무너진 돌 위에 둥지가 하나 있는 걸 보았다. 너무 개방된 곳이었기에 둥지는 버려졌고, 어른 새의 솜털 몇 개만 뽑혀 걸려있었다. 부화하지 못한 알 하나가 뒹굴었다. 당연히 썩은 알이었다. 새벽제비는 둥지와 돌무더기를 치웠다. 몇 달 뒤에는 화단이 썩었다. 똑같이 치웠다. 새벽제비는 치운다는 행위를 배웠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오자, 로젠의 손톱과 손톱 주변은 묶어 고정한대로 붉은 여명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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