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킨스 씨의 정원 (3)
당신 그 흉터 말이죠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서 생긴 것처럼은 안 보이거든요
어느 초여름, 여자는 초여름의 햇살에 볼을 물들이고 잡화점의 문을 열었다. 쏟아지듯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에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마치 홉킨스 씨의 가게처럼 오래된 가게는 처음 와본다는 듯 수줍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물건을 고르면서 맥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중에는 물건과는 전혀 관련 없는 질문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가게는 혼자 운영하시는 건가요, 홉킨스 씨?
가족 사업이오. 맥스가 대꾸했다.
부인분이 함께?
아니.
그렇군요.
맥스는 그녀에게 적절하게 되묻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어디서 왔느냐, 어디에서 지내고 있느냐, 간밤 꿈에서 그는 비 오는 참호 안에 있었고 자연히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미스 양은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말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말을 특이하게 하시네요. 웨일즈?
미국 출신이오.
아, 내가 맞춰볼게요. 텍사스?
감이 좋으시군.
어쩌다 여기서 이러고 계시나요?
뭐 이런저런 일 때문에.
분명 굉장한 모험들이었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지.
당신 그 흉터 말이죠,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서 생긴 것처럼은 안 보이거든요.
맥스가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어 웃더니 물건을 다 담은 봉투를 들고 잡화점을 나가 버렸다. 나가면서 열어둔 문으로 봄바람처럼 걷는 뒷모습이 보였다. 맥스는 반짝이는 금빛 머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고 맥스는 여러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알아냈다기보다는 관찰을 통해 수집한 진실에 가까웠지만.
여자는 잡화점 맞은편 집 부인의 조카로, 겨울 휴가를 교외에서 보내기 위해 런던에서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헬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재잘대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때로 무례했지만 듣기에 불쾌하지는 않았다. 교외 마을의 사람들은 헬렌을 좋아했다. 아름답고 낙천적인 헬렌. 런던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헬렌. 낯설고 새로운 아가씨 헬렌을.
그날도 헬렌은 아침 산책의 마지막 경유지로 잡화점을 택한 모양이었다. 잡화점의 문을 열고 들어와 뒷짐을 진 채로 새뜻한 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며 맥스는 반복적인 당혹감을 느꼈다. 말했잖소. 그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찾는 물건은 닷새 뒤에나 들어온다고.
헬렌이 소리 없이 웃었다. 눈꼬리가 휘어지며 고운 곡선을 그렸다.
알아요.
그러면 대체 뭣 때문에 온 거요?
구경이죠, 뭐. 다른 추천하실 물건은 없나요?
필요한 물건이 뭔지 말하면 소개해 줄 순 있소. 당신한테 뭘 팔고 싶은지는, 글쎄, 모르겠군.
정말로, 맥스 씨, 당신 같은 사람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요?
맥스는 진열대에 올려놓은 병의 띠지가 보이도록 돌려놓던 손을 멈추었다.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소?
홉킨스 양이 그렇게 부르는 걸 들었어요.
음흠.
애칭인가요?
이름이오.
그냥 맥스?
사연이 있지.
궁금한데요. 듣고 싶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서 있는 열의 진열대에 팔을 걸쳤다. 맥스는 원래 ‘맥스웰’이었던 이름이 몇 글자 줄어든 사연을 말하는 대신, 거기 기대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는 상자에서 병을 꺼내 진열대에 올려놓는 작업을 계속했다. 곧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일이 요원하다고 생각했는지, 헬렌은 한 손으로 오른뺨을 감싼 채 잠깐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 얘기를 거의 안 하는군요.
그렇게 해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소?
서로 좀 더 잘 알 수 있죠.
내 말이 그 말이오.
냉혈한처럼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는 며칠째 계속되는 의미 없는 방문과 질문이 슬슬 부담스러워지던 참이었다. 하지만 맥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헬렌은 그의 냉정한 말들이 마치 상냥한 인사와 덕담이라도 되는 양 대했다.
당신에 관한 소문은 이미 많아요, 맥스.
그건 나도 알지.
그런데 나는 진짜 당신이 알고 싶거든요. 소문이 아니라.
맥스는 잠시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고민했다. 얼간이 같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빨리 생각해내지 못한 탓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헬렌의 의도는 노골적이었고 맥스도 그것을 진작 알아차렸다.
그는 원치 않게도 소위 말하는 ‘당돌한’ 여자들의 사랑을 종종 받았고 그녀들은 관계를 확실히 정립하기 전에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식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니 기실 그가 헬렌의 질문에 방어적으로 구는 것은 몇십 년의 습관 같은 것이다. 그는 그런 문제 앞에서 항상 똑같이 대응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헬렌은 다시 한숨처럼 웃었고 그게 그날 그녀가 보인 마지막 표정이었다.
헬렌은 그다음 날도, 다음 날의 다음 날도 잡화점으로 찾아왔다. 맥스는 자기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고 그녀는 매번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갔다. 곧 맥스는 그녀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그녀에게서는 어떤 열망이나, 노골적이고 갈급한 태도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만남에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 있다면, 분명 애비게일이었다. 헬렌이 눈에 띄게 자주 찾아오기 시작한 후로부터, 애비게일은 그녀와 맥스가 마치 꿀 같이 달콤한 비밀이라도 나누고 있는 듯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 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맥스는 헬렌과 대화하다가도 자리를 뜨는 애비게일의 동그란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곤 했다.
어느 날은 이런 적도 있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마주 보고 앉은 자리에서 애비게일이 헬렌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아침에 찾아왔던 그 아가씨, 천사처럼 예쁘던데요.
맥스는 애비게일이 직접 만든, 그러나 혼자 먹기엔 양이 다소 많은 으깬 감자 위로 포크를 멈추었다. 애비게일의 표정을 살피는 그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이미지의 연상부터 불경한 욕심까지. 그런 그에게 애비게일의 말은 언행을 좀 더 조심하라는 의도처럼 들렸다. 헬렌을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맥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에 푸른 눈 말이오?
맞아요. 맥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음흠.
애비게일은 말하기 전에 식탁 아래로 주먹을 꼭 쥐었다. 당신도 이제 슬슬 좋은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 해요.
맥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으깬 감자를 포크로 떠 입에 넣기 시작했다. 일련의 동작을 수행하면서, 그는 방금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당신, 헬렌과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좋은 여자처럼 보여요. 두 사람은 잘 어울려요.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아내가 생기는 것에 조금도 유감이 없어요. 이 말은 당신을 추호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뜻이에요. 그가 말이 없자 애비게일이 닦달했다.
그녀도 분명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맥스는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 대꾸했다.
난……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소. 그리고 그 여자가 홉킨스 부인처럼 생기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장 결혼 생각도 없고, 헬렌 양과 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오.
그 여자 이름이 헬렌이로군요.
애비게일은 기죽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맥스는 으깬 감자에서 손을 떼고 말을 계속 이었다.
그녀가 당신을 소개해 달라고 했었소. 당신이 매번 자리를 뜨길래 난 당신이 그녀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가 했는데.
그가 말을 맺자, 끈끈한 정적이 흘렀다.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소 열성적인 편인 홉킨스 일가의 식사 시간엔 드문 일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식사에 집중했지만, 애비게일은 열심히 만든 저녁 식사를 두 접시밖에 먹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이 역시 드문 일이었다.
식사한 자리를 정리하고 집안일을 끝낸 뒤 두 사람은 각자의 침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간은 밤이었고, 집 밖은 푸르게 어스름이 내려 있었다. 풀숲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밤 되길, 애비. 맥스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애비게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맥스?
응?
‘홉킨스 부인’처럼 생긴 여자는 어떻게 생긴 여자인가요?
그녀는 맥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애비게일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웃을 때 뺨이 올라오며 눈꼬리가 휘어지는 그녀의 표정을 상상해 보려다가 그만두고 대꾸했다. 그에게는 상상 속 ‘홉킨스 부인’을 묘사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대답은 다소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어쨌든 헬렌 양처럼 생긴 사람은 아닐 거요.
잠깐의 침묵 끝에 애비게일이 대답했다.
좋은 꿈 꿔요, 맥스.
당신도.
그리고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 위해, 또는 자신의 논리 비약적인 행동이 증명하는 인간적 불완전성을 한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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