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6화

카리타스 편

여름이 끝났다. 그늘에만 앉아있었는데도 땀이 흐르는 시기가 가버리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시도폰은 여름엔 귀리 파종을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가을이 오니 아마풀을 수확해야 한다며, 왜 농사 일이 끝나지 않느냐고 투덜거렸다.

노동도 하지 않고 신전에만 틀어박혀서 남들의 수고로움을 받아먹는 처지에서 차마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근육통이 심하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폰의 어깨와 팔을 주물러 주자,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다며 폰은 팔을 뺐다.


"3 왕녀께서 곧 신전으로 오실 겁니다."

"거주관으로 간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교황은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왕께서 그 사건을 들으시더니 친히 제게 왕녀의 신변을 부탁하시더군요. 오토 대주교와도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시도폰이 얀을 때린 사건 이후로 다른 아이가 칼에 찔리는 사건이 일어나자 거주관뿐만 아니라 신전도 발칵 뒤집혔다.

후자의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서로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길 원해서 밝혀지지 않았고, 시도폰도 그 이야기는 딱히 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숨길 수 없어서 왕에게도 그 이야기가 들어간 것 같다.

"3 왕녀께선 나이에 비해 신성력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왕께서 말씀해주신 것을 의심하진 않지만, 저희 나름대로 확인은 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웃으면서 말해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선해 보이지 않을 수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만 나왔다.

"성녀님, 3 왕녀가 신전으로 오게 된다면 당신의 자리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계승권에서는 한참 멀리 있기에 왕권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신전 내부에 영향을 끼치는 게 될 수도 있으니…."

나를 생각해주는 척하지만 결국 본인의 권력을 위한 제안이었다.

"북부로 가는 것은 조금만 더 고민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악마를 마주하고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 몇 년간은 그다지 큰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신께서 가신다면 북부 기사단의 부단장이 직접 모시러 올 겁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다 결정된 것 같아서 배려에 감사드린다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에 있던 차는 여전히 따스한 김을 밀어 올렸지만, 그 자리에 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3 왕녀는 여섯 살밖에 안 되었다. 나보다 세 살이나 적으니 지금 당장은 별 위험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4년 뒤에나 북부 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아이를 교황이 벌써 견제한다는 사실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권력이 그렇게 좋은가. 말 많은 동상들의 복도에 들어설 때쯤엔 머릿속에서 왕녀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신탁이 잘 안 내려오지?'

아일렌의 동상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옛사람들의 잔소리와 잡담을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빈도를 정확하게 기록해두는 건 아니었지만 몸이 너무 편해서 어색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마지막으로 신탁을 들었던 게 시도폰을 처음 만난 날이었으니 정말 오래전의 일이 맞았다. 폰은 나에게 행운만 가져다주는 것 같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리고 싶었다.

[너는 이번에 북부 수행에 참여할 생각인가?]

인상 나쁜 동상이 물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일렌을 제외하면 전부 나를 동등한 취급 해주지 않는데 나라고 굳이 존중할 필요가 있겠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직 사제로서 미숙해서 악마를 상대로 잘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고민하고 있다는 말에 무언가 반박하려던 동상은 이어지는 변명에 잠시 말을 골랐다.

[신께서는 의지를 높이 사신다. 악마를 막는 것은 순전히 네 의지에 달려있으니 나약한 소리는 집어치워라.]

[애가 무섭다는데 굳이 그런 말을 해? 나도 12살에 북부로 갔는걸. 난 아이가 조금 더 고민하고 가도 된다고 생각해.]

평소엔 말이 없던 석상이 의외의 말을 꺼내자 삽시간에 동상들 사이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딱히 내년 북부 수행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명분이나 이유는 없고 단순히 감에 기반을 둔 의견일 뿐이라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 아이도 올해 9살이라고 들었는데 내년 북부 수행에 참여한다던가요?]

아일렌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폰은 얀과 센 북부로 갔던 열두 살이 되기 이전에만 가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 내년, 아니면 내후년에는 가겠지. 그 아이를 지켜주려면 힘이 필요하니 나도 비슷한 시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근거도 없이 커져서 오히려 그 몸집이 근거가 되어버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북부로 가느냐 마느냐는 그 아이와 크게 상관없는 것 같아요."

[음…. 아니요, 제가 보기엔 당신과 그 아이는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쪽도 단순한 추측이지만 예언을 받았던 몸이니, 아 지금은 몸이 없지만요, 참고해서 나쁠 건 없을 거예요.]

중간에 농담이 하나 들어가긴 했지만, 아일렌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와 시도폰은 무언가로 연결된 걸까?


도서관을 닫을 시간이라는 서가장의 말에 책 한 권을 들고일어났다. 최근 10년간 북부에 파견되었던 수습 사제와 기사들의 수기를 모은 기록집인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아 자기 전까지 읽어보고 싶었다. 대충 훑어보니 얀과 센의 기록은 비교적 뒷장에 있었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해서 폰과 코지에게 알려주면 좋아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카리타스 님께서는 내년에 10살이 되시지요. 북부 수행에 참여하실 생각이신가요?"

온화한 인상의 서가장이 내가 손에 든 책을 봤는지 말을 걸었다.

"고민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간 가야 할 테니 미리 읽어두려고요."

"혹시 다과가 필요하시면 가져가셔도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많이 남았거든요."

감사 인사를 하고 과자 몇 개를 챙겼다. 도서관과 내 침실 사이의 거리는 꽤 되는 편이라 잰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말 많은 동상들도 지금은 잘 시간인지 침묵하고 있었고, 방에 도착하자 책 읽기 좋은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가 작게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책을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도서관에서 오래 이 책을 읽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혼자서 독서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과자도 받았고.

게다가 서문에, 이 글을 쓸 때는 높은 계급순으로 작성하고, 이미 북부 훈련을 마친 사람들은 그 해에서 5년 뒤까지 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해서인지, 뒷부분에 있는 글들은 날 것의 감정 그대로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다만, 어떤 경험들은 교회에서 문제라고 판단했는지 종이 몇 장이 뜯긴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종이가 뜯긴 우둘투둘한 경계를 만져보았다. 사라진 페이지는 아마 세상에 남아있지 않겠지. 내가 글을 쓴다고 하면 그게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북부로 갈 때 몰래 작은 노트를 하나 가지고 가야겠다.'

사망자 명단을 읽게 되었을 때는 그 장을 펼쳐놓고 잠깐 기도를 했다. 그러다, 아마 세 번쯤 기도하고 나서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도서관의 책장 사이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내가 앉았던 그 자리, 그 의자에는 내가 읽었던 수기 기록집이 펼쳐진 채 놓여있었다. 사람의 온기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인 공간에서 스산한 기운만이 느껴졌다.

달빛은 먼 책장에서 희미하게 비쳤다. 서가장이 말하기를, 책에 햇빛이 닿으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창문을 최소한으로 만들었다더니 정말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없었다.

"내가 언제… 여기 왔지? 아니 어떻게?"

신벌을 받을 때처럼 오싹한 냉기가 약하게 돌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온몸에서 힘이 다 빠진 듯한 이 감각이 문제였다. 아무도 없냐고 말해보아도 대답은 없었지만, 답이 있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바닥에 붙은 시야로는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리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온 팔로 상반신만 지탱해 일으켰다.

앉아서 둘러본 도서관은 내가 평소에 왔던 곳과 달랐다. 낮에는 햇살이, 밤에는 촛불이 밝히던 곳은 달빛만 파르라니 빛났고 그마저 빛이 약해 사물이 있는지 없는지만 간신히 분간 가능할 정도였다. 옆에 있던 아무 책이나 뽑아보아도 글자가 식별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책을 건드린 게 문제였을까? 스산한 느낌이 소리로 바뀌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람이 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정도의 소리였다. 어느 여름날에 폰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들었던 시원하고 다정한 울림과 비슷했지만 느껴지는 온도와, 그럴 리 없지만, 감정이 달랐다.

"-."

아. 그,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울렸다. 내 머릿속에서? 아니었다. 내 손에 들린 책이 발작하듯 떨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진동한다.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저 멀리 보이는 그 책뿐이었다. 각기 다르게 진동하는 책들은 비명을 지르듯 저마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몸을 지탱하던 손과 팔이 떨린다. 옆에 세워진 높은 책장들이 본 적도 없는 북부의 나무들처럼 보였다.

눈과 같이 하얀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곳, 아마도 어느 책의 삽화로만 봤을 풍경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황량한 눈밭에 꼿꼿하게 선 갈색 눈의 자작나무들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며 잎을 흔들다가 나를 본다. 아마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열려있을 리 없는 창문 사이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홀로된 나는 가루눈의 바람을 맞으며 사람을 찾지만 비명 비슷한 것만 들릴 뿐,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책끼리 부딪쳐서는 낼 수 없는 파열음이 종종 섞여서 들리고 바람은 약해지기는커녕 더 강하게 불었다.

찬 바람은 살을 베듯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있는데도 온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진동하던 책들이 종이를 뱉어내 바닥에 흩뿌린다.

하얀 눈밭이 점점 붉고 검게 변했다. 자작나무에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안 그래도 섬뜩한 눈알들이 피를 머금은 것처럼, 그래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오염된 대지가 여기까지 번져온다. 검붉은 손이 뻗어 나와 나를 잡으려는 모양새로 움직였다.

손은 내 발끝에서 멈췄다. 나를 잡으려던 게 아니었던 건가? 나를 중심으로 천천히 원이 그려진다. 빼곡한 손자국과 이름 모를 짐승의 발자국으로 완성된 원은 검게 변했다. 나가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도록 새까맣게.

의자와 책상은 발을 구르고, 꺼진 양초는 촛대에서 굴러떨어져 마구 바닥을 돌아다닌다.

변해버린 대지가 요동쳤다. 느껴지는 파동에 심장이 공명하듯 빠르게 뛰었고, 이러다 터지겠다 싶을 정도로 세차게 뛰던 심장을 비명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신벌을 받을 때와 비슷한 고통에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멈췄다. 아픈 것은 익숙하니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슬퍼서, 눈물이 나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그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펼쳐진 부분은 책의 가장 마지막 장, 나와 시도폰이 파견 간다면 이름이 적힐 그곳이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여전히 책이 지르는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집중해서 들어보아도 누군가의 비명, 들을수록 심장이 저릿해지는 통곡, 그 정도다.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것이 지상에 내려왔다. 강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정도의 존재. 변했던 대지가 하얗게 돌아오고 자작나무들은 눈물을 그쳤다. 비명도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것이 한곳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욱신거렸고 내 눈물도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곳으로 가야 했다. 슬퍼하느라 힘이 빠졌던 몸이 분노로 움직였다. 나는 무엇을 보았기에….

굴러다니던 양초가 발에 닿았다. 집어 들자마자 심지에 불이 붙었고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책들의 불협화음이 멈추고 성가대의 찬송가가 들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종잇장들이 밟고 가라는 듯 수기 기록집까지의 길을 만들었고, 길을 따라가 책을 집어 들었다. 불꽃은 그것만을 기다렸는지 내 팔을 타고 책으로 옮겨가 글자를 썼다. 신성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이름은.

"시도폰?"

나는 잠에서 깼다. 책에 파묻혀있던 머리를 들자 아직 달이 지지 않은 어두운 바깥이 보였다. 그건 단순히 꿈이었을까? 그럴 리가, 신은 시도폰에게 힘을 줄 생각이다.

그게 이용해먹기 위해서든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어서든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강해지면 교황도 손댈 수 없겠지… 그 애를 위해서다. 다음날, 나는 북부로 가겠다고 교황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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