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고독이여 안녕

한도윤 오인하 논커플링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가족애, 친애, 우애, 성애 등. 누군가를 소중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같지만, 애초에 이 감정들은 모두 성질이 다르다. 귤과 탱자가 다른 종인 것처럼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을 사랑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리는 것은 인류 최대의 태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터다.

정의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분류된 사랑은 그곳에 속한 다른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도윤과 오인하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에 굳이 이름을 붙이려 하지 않았다.

가족과는 거리가 멀고, 친구가 되기에는 서먹하며, 동지나 전우처럼 든든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성적인 끌림은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멸망한 세계에 타인이라고는 서로만이 유일하기 때문에 아낀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같은 종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애틋하게 여긴다.

그렇기에 한도윤과 오인하는 이 감정에 굳이 사랑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발견한 사람은 한도윤이었다. 한 팔에는 편의점에서 털어 온 통조림 무더기를, 한 손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돌아왔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도 구닥다리 유물이었던 카세트가 인제 와서 발견될 줄은 몰랐네.”

오인하가 놀라며 구경하자, 한도윤이 설명했다.

“사람 소리가 들려서 잔해를 파봤더니 나왔어.”

오인하는 왜 들고 왔냐고 묻지 않았다. 소리라고는 흉흉한 바람 소리와 두 사람의 목소리뿐인 이 세계에서 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카세트는 물론, 와이드 텔레비전을 들고 왔어도 환영했을 것이다.

카세트 플레이어 안을 확인해 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공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한 모양이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멸망 이전에 유명했던 팝송이 흘러나왔다. 고장이 났는지 노이즈가 끼고 이따금 소리가 늘어지기도 했으나, 가사가 들릴 정도는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최근 몇 년은 타인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기에 이 정도도 충분히 사치스러웠다. 한도윤과 오인하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중으로 느릿하게 퍼져나가는 음색을 감상하는 것이 먼저였다.

원래부터 한도윤과 오인하가 단둘이 있진 않았다.

살던 곳부터가 대전과 부산이었다.

만난 것은 멸망 이후.

대부분의 지방 사람이 그랬듯 서울이라면 대책이 있으리라 생각해 상경했고, 이규혁과 민주영을 중심으로 한 생존자 무리에 합류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같은 나이에 붙임성 좋은 오인하가 먼저 다가가면 한도윤도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혔다. 둘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지만, 곧 절친한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끝없이 걸어도 다른 생존자는 보이지 않아 절망한 서혜성이 무리를 이탈하고, 이규혁과 한도윤이 뒤를 쫓으면서 헤어지게 됐다. 그 일을 두고 오인하는 한도윤을 다시 만났을 때 화를 냈다. 정당한 분노였다.

한도윤은 이규혁과, 오인하는 민주영과 같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다시 만났을 때엔 둘 다 혼자였다.

빗물과 먼지와 흙 범벅이 되어 구질구질한 옷, 빨갛게 짓무른 눈가와 작은 빛조차 들지 않은 푹 꺼진 눈. 그 꼴을 보고 오인하는 한도윤을 매도했다. 한도윤 이 개새끼야. 너 이규혁 살리려고 나 밀었었지. 미친놈이. 그러고도 지금 혼자인 거야? 진짜 웃긴다. 영이 언니가 그런 상황이었어도 나는 너 안 밀었을 거야, 나쁜 새끼야.

한도윤은 이규혁을 위해 오인하를 배신했으나 결국은 이규혁과 헤어지고 오인하와 다시 만났다. 오인하는 한도윤에게 떠밀렸어도 죽지 않고 이렇게 한도윤을 다시 만났다. 이 세상에 유일, 아니, 유이한 생존자 둘은, 거리를 두고 같은 방향을 향해 걸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한도윤은 모닥불로 오인하를 불렀다. 오인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널 용서할게, 한도윤.”

둘은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세상에 서로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오인하는 민주영을 사랑한다.

한도윤은 이규혁을 사랑한다.

그러나 민주영도 이규혁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남은 것은 오인하와 한도윤뿐이다.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보통의 성욕을 가진 이 두 남녀는, 이제 이 세상에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없다. 사랑이 빈 자리를 우정이나 동료애와 같이 성애 없는 다른 사랑으로 대체하고자 해도, 애초에 다른 감정으로는 채울 수 없는 자리였다. 마치 모양이 다른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춰봤자 틈이 생기는 것처럼, 부재만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버리는 것이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는 끝도 없이 한 곡의 노래만이 되풀이되고 있다. 반파된 건물 뒤로 해가 떨어지자 순식간에 어둠이 몰려왔다. 오인하와 한도윤은 익숙한 동작으로 불을 피우고 통조림을 열었다. 건물 형광등도 가로등도 비행기 불빛도 없는 도시 하늘은 별이 대신 점령했다.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별빛은 언뜻 로맨틱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맨스라는 장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오로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노래만이 그것이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겨우 4분 남짓한 노래에 의존하기엔 밤은 너무 길고 무료하다. 노래가 몇십 번째 다시 재생되자, 오인하는 두 손을 맞잡고 쭉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리듬에 맞추어 몸을 까딱거렸다. 오늘 밤만을 위해 피운 작은 모닥불은 눈 부신 스포트라이트, 건물 잔해가 쌓여 다져진 땅은 끝없이 펼쳐진 무대가 되었다.

오인하는 길쭉한 팔다리를 힘차게 뻗는가 하면,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웨이브를 했다. 불빛이 일렁거릴 때마다 그림자가 오인하와 함께 춤을 췄다. 한도윤은,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오인하가 댄스 크루에 있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규혁과 민주영과 함께 있을 때 들었던 말이었다.

춤을 추기에 적절한 노래는 아닐 텐데도, 마치 처음부터 그런 안무였던 것처럼 오인하의 몸짓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높게 묶은 갈색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불똥은 컨페티처럼 까만 밤을 배경 삼아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한도윤도 입을 열었다. 불안정하게 음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맑은 고음이 밤 공기를 내달렸다. 오인하는 몸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너 락 밴드였다며.”

한도윤도 노래를 멈추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알바할 때 외웠던 거야. 다시 들으니 기억이 나네.”

그러고는 한도윤은 다시금 노래했다. 사랑 노래를, 아주 건조하고 평이하게. 오인하도 노래에 맞추어 춤을 췄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상대가 없는 두 사람.

쓸쓸하고 충만하고 외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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