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ecrétum (1) (23.11.15 재업)
프롤로그|현판AU
베른 세크리티아.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이름의 은발 자안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던 남자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니까… 여기가 한국이라는 거지, 칼리안.”
밤을 칠한 듯 새카만 흑발과 태양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 타인의 시선으로만 봐서 자세히는 몰랐는데 거울을 앞에 두고 보니 아이는 굉장히 잘생겼었다. 지키려던 아이의 몸에서 깨어난 것에 굉장히 당황스러워했지만 아이도 같이 왔다는 것을 알고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던 베른이 태평한 척 이게 열다섯 살이 맞나, 하고 중얼거렸다. 부끄러운 듯 뜨거운 감이 지나가고 필사적으로 혼잣말을 무시한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저씨 한국말 할 줄 아세요?’
“엉, 힘 센 나라들 말은 대충 알아.”
‘신기하네요. 저희 형님 같아요.’
“폴란드 온 이유였던 그?”
‘네. 형님께서 위험해지면 찾아오라고 하셨었거든요. 작년… 그러니까 올해 11월에 이사 갔었어요. 근데 연락처도 없고, 형님 부하한테서 폴란드로 가시고 연락 끊겼다고 들은 걸로 무작정 따라갔던 거여서.’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붉은 오러가 작은 바람처럼 소용돌이친다. 좋아, 능력은 멀쩡하고. 베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서 칼리안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기하다.’
“신기하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거 아니야.”
‘영광이네요!’
맑은 목소리에 베른은 작게 웃었다. 머릿속에 애가 있으니 성질 드러낼 수도 없겠다 생각했는데… 워낙 애가 귀여워서 그런가, 답답하긴커녕 머리가 맑아진다. 몇백 년을 살았어도 생소한 경험을 하는 중이라 멈춰 있던 머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리안,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할까?”
‘……’
“그 형님에게 갈까? 아저씨 사람 잘 찾는데.”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부터 찾아야죠!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하하! 그건 그러네. 그럼 어떻게 할까?”
‘음…… 잠깐만요.’
고민을 시작한 듯 아이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베른은, 솔직히 말해 걱정이 많기는 했지만 그 걱정을 전부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섞여서 살고 있듯 세상엔 온갖 비현실적인 것이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사니까. 이 일에 대해 도움을 요청할 구석도 거의 없고 아이가 이 이상 이쪽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우려되었다. 어차피 세상사는 순리대로 돌아가는 법이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베른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저 서랍 세 번째 칸에 있는 명함 지갑이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거기 보면 아르센 헤르츠라는 사람의 명함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에게 연락해요.’
“아르센 헤르츠? 그 사람이 누군데?”
베른은 순순히 세 번째 칸을 열며 물었다. 아 이건가, 하고 제법 고급스러운 지갑을 찾아 여니 열다섯 중학생이 갖고 있기엔 많은 명함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프레이야 씨 건가? 베른은 앞쪽에서부터 넘기다가 수월하게 아르센 헤르츠의 명함을 찾아냈다.
‘마법사요.’
툭.
명함을 떨군 건 고의가 아니었다.
❅
칼리안은 어색하게 설명했다.
‘그, 아저씨한텐 엄마랑 엄마 성으로 말하자고 말 맞췄었는데요. 사실 휘트린은 엄마 성이고 제 본명은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거든요.’
“카이리스?!”
‘엇, 아세요? 별로 안 유명한 나란데. 아무튼 제가 나름 거기 왕자라서……’
카이리스! 모를 리가 있나. 인간을 초월한 이들이나 인외의 존재는 그 나라에 대해 결코 모를 수 없었다. 세크리티아의 성을 가진 베른은 더욱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케르노의 숙명을 가진 이들이 아닌가. 어쩐지 이 애한테 비밀을 너무 쉽게 들킨 것 같더라, 고. 원래부터 거짓말에 소질이 없던 베른이 태연하게 유언비어를 떠올렸다.
‘사실 엄마랑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살아서 별로 거기랑 안 친하긴 한데요… 그래도 아버지랑 전화는 할 수 있으니까.’
“…음? 그럼 카이리스로 가서 형님께 전화해달라고 하면 됐던 거 아냐?”
‘형님 두 분 모두 집 나가셨거든요. 큰 형님은 연락은 하지만 작은 형님은 작년, 아, 그러니까 올해 3월부터 모든 연락을 다 끊고 사라지셨다고 들었어요.’
“아하… 찾고 있던 형님은 작은 형님이구나.”
‘맞아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멋져요.’
“몇 살 차이길래?”
‘작은 형님이랑은 열 살, 큰 형님이랑은 열네 살 차이 나요.’
“엄청 막둥이네.”
‘많이 뵙지는 못했지만요.’
아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티가 많이 나는 형님이랑 몇 년을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니까 그럴 만 하다 생각하며 베른은 떨어뜨렸던 아르센 헤르츠의 명함을 주워들었다. 옛날에 돌아가신 형님이 문득 떠오르는 것을 애써 지우며 밝게 물었다.
“그럼 이 마법사랑은 무슨 사이야?”
‘형님 부하예요.’
“아, 폴란드에서 연락 끊겼다고 말해줬던?”
‘네. 사실 앨런 마나실이라고 다른 마법사님도 아는데, 그분은 1년 전부터 중환자를 치료하느라 바쁘시다고 들어서요.’
“앨런 마나실은 나도 아는데. 이 맘쯤 바빠지시긴 했지.”
‘우와, 진짜요?’
“우리 알고 보면 옛날에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꼬마야.”
베른은 키득 웃으며 말했다. 뭐, 카이리스로 갔던 건 못해도 20년 전이 마지막이었으니 실제로 아이를 만난 적이 있을 리는 없었다. 만났다면 오히려 그 위의 두 형을-
…?
이상하게도 옅은 비취색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휘휘 날려버린 베른이 쾌활하게 휴대폰을 들었다.
“얼른 해치우자.”
‘네!’
❅
아르센 헤르츠와의 약속은 빠르게 잡혔다. '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라는 말로 전화를 받았던 그 마법사가 칼리안이라고 말하자마자 새벽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오겠다며 속전속결로 약속 시간을 잡고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래?”
‘음, 마지막으로 전화드렸을 때는 같으셨어요.’
칼리안은 아르센 헤르츠의 명예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그리하여 넉넉하게 오전 10시에 인근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둘-겉으로는 하나-은 비행기 타고 오겠다는 그 마법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본체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커피나 차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칼리안의 취향에 맞춰 톡 쏘는 에이드를 주문해 마시고 있던 베른 앞에 누군가가 쓰러지듯 다가왔다.
“깜짝이야.”
“칼리안, 왕, 자님…”
“진정하고 말하세요. 뛰어오셨어요?”
“왕자님께서, 기다리시게, 할 수는… 후우… 없지요. 칼리안 왕자님 맞으시죠?”
“맞아요.”
파란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대강 묶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하고 인사하는 눈이 마법사답게 어딘가 빙글 돌아 있는 것을 확인한 베른이 피식 웃었다.
“마법사다운 눈이네…”
“…예?”
“아뇨, 헤르츠 경 부른 이유 때문에.”
베른은 얼마 안 남은 에이드를 쪽 빨아 마셨다. 신 레몬 맛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다 마셨다는 게 조금 아쉬워서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빙의 비슷한 걸 하고 있거든요.”
“……예?”
❅
“미치셨습니까?”
“뭐.”
차가운 목소리에 누워있던 남자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가뜩이나 머리도 아프고 몸도 무거운데 이 자식은 또 왜 나타나서 시비인가 말하는 것이 분명한 서늘한 얼굴에 푸른 머리의 남자가 제 가슴을 쳤다.
“국장님께서 봐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프시면 그냥 누워 계시라고요. 일 벌이지 마시고.”
“못 믿겠는데.”
“그런 말이나 하실 거면 지금도 끊임없이 배송되는 발칸 놈들 러브 레터나 없애시죠. 편지함을 아주 꽉꽉 채워놨던데.”
“그게 뭐.”
“그렇게나 그놈들 홀려두셨으면 놈들 울 말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어쨌든, 그 몸으로 VRA요? 진짜 하시다가 도중에 가실 수도 있습니다.”
“너.”
“뭡니까, 몸 상태 나빠졌다는 말 하나 없이 휴직서인 척 가장한 사직서 내고 연락 수단 죄다 끊어버린 채 탈주하셔서 국장님께 죽도록 혼나고 치료받고 계신 한때 국장 자리도 앉아보셨고 여전히 부국장이신 왕자님.”
마법사는 가득한 불만을 불경한 호칭을 몇 배 더 늘이는 것으로 표현했다.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나가.”
“조용히 하겠습니다.”
하여간에 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아는 부국장 놈. 혀를 찬 남자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베개에 비스듬히 기댔다. 마법사가 서둘러 그런 그를 도왔다.
“정말 하실 겁니까?”
“왜.”
“진짜 몸에 부담 많이 갑니다. VRA가 뭡니까. Virtual Reality Actualization의 약자지 않습니까. 부국장님 그 몸 상태로 하시면 정신이 아예 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겁니다. 몸이 정신을 붙잡을 힘이 없으니까요.”
“……”
“그런데도 직접 하실 만큼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
남자는 느릿하게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며 대답했다. 슬슬 숨이 무거워진다. 서둘러 실행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한 머리가 요란스럽게 해야 할 것을 정리했다. 하지만 급한 머리와는 반대로 느리기만 한 몸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남자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려 노력했다.
이내 새근새근 얕아진 호흡을 들은 마법사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위험을 자처하는 건 정말 언제 봐도 멍청해 보입니다. 부국장님.”
받을 상대는 이미 의식을 잃어서 허공에서 흩어진 말을 마친 마법사는 몸을 돌렸다. 저렇게까지 해야 한다는데 뭘 어쩌겠나, 따까리는 얌전히 말이나 들어야지 하고.
물론 사고뭉치 부국장이 국장에게 혼날 것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
아르센 헤르츠는 예고 없이 떨어진 폭탄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니까… 왕자님 몸에 다른 사람 영혼이 들어왔다고요.”
“네. 정확히 말하면 제가 몸의 주도권도 더 많이 갖고 있고요. 꼬마는 안에 있어요. 어딨는지 찾고는 있는데 안 보이네요. 목소리는 들리는데.”
지금쯤 자고 있을 한 사고뭉치가 애지중지하는 막내 왕자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람이 태평하게 말했다. 귀신이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은 저런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없다. 아르센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말씀하시는 것 보니 인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인간 맞아요. 범주를 조금 넘어서 그렇지.”
범주를 넘었다면 왕실 서고에 기록되어 있겠지. 골치 아픈 일이 비교적 간단해질 기미가 보이자 아르센은 티 내지 않고 속으로 환호했다.
“이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원하게 대답을 내놓던 막내 왕자의 모습을 한 남자가 그 질문에 곤란한 듯 눈썹 사이를 좁혔다. 이런 반응은, 이름에 뭐가 있는 건데.
“어- 안 되겠는데. 내가 이래 봬도 세크레툼이라.”
하필.
“세크레툼…… 알겠습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아르센 헤르츠는 세크레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있나, 7년을 쫓아온 놈들이 그들과 손을 잡고 있었는데. 물론 놈들 쫓던 사람이 역으로 죽을 뻔하고 그냥 놈들 계획이나 망쳐버리겠다는 속셈으로 몸을 숨겨서 흐지부지될 뻔하긴 했지만.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크레툼이면 본래 외형도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는데,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을 법한 행동이 막내 왕자의 모습으로 하니 너무 어울렸다. 그 인간이 왜 애지중지했는지 알겠다.
“이렇게 쉽게? 놀랍네요.”
알고 있는 게 많으니 당연히 가타부타 말 얹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르센은 그런 말을 덧붙여서 상대를 진정시킬 시간이 없었다.
“저도 지금 도망 나온 거라 얼른 가봐야 하거든요. 한국에 발칸 지부가 있으니 일단 그쪽으로 이동하시죠. 그 인간이 언제 또 질러버릴지 모르니……”
지금쯤 자고 있을, 눈앞의 막내 왕자를 애지중지해 마지않는 사고뭉치. 결심 한 번 하면 아주 직선적으로 돌진만 하니 혼자 둘 수 없었다. 자살이나 다름 없는 걸 하려는데 한 번쯤은 더 말려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남자는 호기심이 많은지 고개를 기울였다. 막내 왕자의 얼굴로 저러니- 놀랍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역시 모든 것은 미(美)가 답이다.
“그 인간이요?”
“있습니다. 행동력이 번개 같은 미친 분. 왕자님 아닌 당신께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는 걸 봐주십시오.”
“상관 없어요. 꼬마는 궁금해하고 있긴 한데.”
막내 왕자에게 그 인간 상태 말하면 난 죽는다. 아르센 헤르츠는 더 급하게 랩 하듯이 말했다.
“사실 왕자님껜 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뭐 하는 사람이야.”
황당해하는 얼굴을 분명히 봤지만, 아르센은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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