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1차 BL
"네? 어....그게.....동네 서점에서...."
그 어리숙한 반응에 악마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비틀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본능적으로 불행을 사랑했다. 제 아무리 까칠한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 또한 젖 대신 불행을 곱게 다져 이유식으로 먹고 자란 평범한 악마였기에 불가항력이었다. 인장을 살피다 말고 갑자기 쪼개는 악마를 오스카는 떨떠름하게 바라봤지만 일부는 점점 불안해져 갔다. 곧 악마의 입에서 나올 말이 뭔진 몰라도 그게 오스카를 웃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자명했다. 눈물이 고일 정도로 웃은 악마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조롱하듯 불길한 목소리로 물었다.
"필멸자, 넌 저게 정말 인큐버스를 부르는 책이라고 생각한 거야?"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오스카는 벙찐 얼굴과 불안감에 흔들리는 두 눈으로 악마만 바라봤다. 악마는 그 멍청함이 너무 즐거워서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잘 들어라 모자란 놈아. 이 책은 인큐버스를 소환하는 책이 아니라 소환사를 저주하는 책이다."
악마는 제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그를 향해 걸어갔다. 오스카의 앞에 선 악마는 이번엔 눈동자만 따라 올리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그것도 실행하는 즉시 발동되는 아주, 아주 악의로 가득한 저주."
오스카의 머리엔 한계가 왔다. 더 이상의 초자연적인 이야기의 수용을 거부하는 머리는 악마가 아무리 세치 혀로 그를 조롱해도 그 어떤 말도 인식하지 못했다. 악마를 소환한 지 약 1시간 내에 오스카의 18년 인생보다 더 많은 드라마가 펼쳐졌다. 눈앞의 예쁜 악마는 초자연적인 외모만큼이나 성질머리 또한 그랬고, 세치 혀를 통해 흘러나온 저주는 언급만으로도 두려웠다. 오스카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태풍 속 버드나무처럼 주저앉았다. 오스카의 대표적인 고질병. 큰 키와 잘생긴 얼굴과 걸맞지 않게 찐따 같은 성격을 가진 오스카는 울보였기에 힘든 일이 있을 때 눈물을 참지 못했다. 중학교 때 3주 동안 사귄 처음이자 마지막 애인이었던 클레어 또한 그의 찐따 같음에 질려하지 않았는가? 덕분에 그 잘생긴 얼굴에도 오스카는 연애를 하지 못했다. 하긴, 애초에 찌질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런 번거로운 일 대신 X더 프로필이나 스와이프하고 있었을 것이다. 웅크린 오스카의 등이 조금씩 움찔거리며 아주 미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싱글벙글 웃는 악마는 오스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르지 않는 불행의 샘 앞에서 즐거운 악마가 그를 조롱하려던 찰나,
"으...킁....으에....."
오스카의 두 눈에선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그의 잘생긴 얼굴은 의사 표현 못해서 서러운 아기처럼 어그러졌다. 정말 아기처럼....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우는 오스카의 얼굴을 본 악마에게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다. 약간 질린 듯한 표정의 악마와 눈이 마주친 오스카는 자기가 울 때 얼마나 추잡한 찐따 같은지 알기에 얼른 후드를 뒤집어쓰고 끈을 꽉 조였다. 오스카의 눈물이 흐르는 방향대로 후드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악마는 입을 다물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오스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손가락을 튕겨 강제로 오스카의 후드를 벗겼다. 오스카의 퉁퉁 불어 터진 복어 같은 얼굴을 바라보는 악마의 얼굴은 점점 심란해졌다. 악마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용히 혼자 중얼거렸다.
"좆됐네......"
한숨을 가볍게 쉰 악마가 허공에 검지손가락을 뻗자 손가락 방향대로 공중에 은색 모래 같은 선이 생겨났다. 그는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이며 오스카의 앞에 '제 0의 서'를 그리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필멸자. 네 비참한 지능에 맞게 쉽게 설명해주지."
"이 책에는 저주가 걸려있다. 전부 알 순 없지만, 이 저주는 아주 악의적인 저주야. 이런 저주는 16세기 이후로 거의 쓰이지 않는 저주인데....흠."
악마가 주먹을 쥐자 책은 작은 번개를 맞으며 갈기갈기 찢겨 사라지고 곧 오스카가 피로 그린 인장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악마는 중지손가락을 까딱여 붉은 선을 만든 뒤 채점하는 선생님처럼 인장 곳곳에 X자를 쳤다.
"하지만 넌 운이 좋지. 왜냐? 멍청하거든. 넌 인장을 똑바로 쓰지 못했어. 완-전-히 틀렸다고. 만약 네가 제대로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악마는 검지 손가락을 휘둘러 허공에 오스카의 얼굴을 그려냈다. 그리고 옆에 그린 인장에 X자가 전부 사라지게 만들자 오스카의 피부가 바나나 껍질처럼 벗겨지고 뼈가 셀러리처럼 숭덩숭덩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스카의 그림이 절규하듯 입을 쩍 벌리며 모래가 우수수 녹아내렸다.
"즉시 피부가 갈래갈래 찢기고, 근육이 터지며, 뼈가 1인치씩 잘근잘근 부러지는 것을 느끼며 죽어갔을 거야."
"이런 저주의 고약한 점은 빠르게 죽이지 않는다는 거지...아마 24시간에 걸쳐 천천히 죽었을걸?"
악마는 손을 가볍게 털어 공중에 있던 그림들을 전부 날려 보내자 모래가 공중에서 불꽃놀이처럼 흩어졌다. 악마는 심해와 같은 눈으로 오스카를 똑바로 바라보며 불길하게 속삭였다.
"아주 아주 지독한, 단순한 살해 목적보다 질이 더 안 좋은 저주지. 보통 이런 저주는 저주가 목적이 아니거든."
오스카는 멍한 상태로 악마를 바라봤다. 악마가 귓가에 더블링을 친 것마냥 양쪽 귓구멍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 오스카는 잠시 귓구멍 직통 터널이 뚫린 건가 의심했다. 오스카는 재빨리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속삭임을 떨쳐내고 악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하지만 그런 게 왜 중고 서점에 그냥 굴러다니던 거죠? 그 정도의 저주라면 왜....."
악마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백한 손으로 무릎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악마는 오스카를 그냥 지나치며 소환진으로 향했다. 악마의 발 사이즈보다 큰 검은 거실 실내화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다락방에 울렸다.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멍청한 덕에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바보같이 살도록 해."
악마는 앞에 거슬리는 물건들을 발로 밀어내며 소환진 안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개판이 난 상황에서도 뒷짐을 진 악마는 얄미울 정도로 밝게 웃었다. 악마의 정수리에 주먹 한 방만 갈기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지만...또 너무 예뻤다. 오스카는 찐따답게 예쁜 애들 앞에선 맥도 못 췄다.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바라보며 오스카는 코를 훌쩍였다.
"원래라면 발목에 구멍 뚫어서 티백으로 만들었겠지만...재밌는 구경을 시켜줬으니 살려주지. 앞으로도 불행하게 살고, 응."
재밌는 얘깃거리를 하나 얻어 싱글벙글한 악마는 소환진 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지옥으로 돌아가기 위해 손가락을 튕겼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잠잠했다. 악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류? 가끔 시스템에 에러가 있을 때도 있었기에 악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러 번 더 손가락을 튕겼지만, 아무리 튕겨도 안락한 지옥으로 그를 데려다주지 않았다.
"뭐야?"
악마는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주문을 사용했지만 모두 반응이 없었다. 하다 하다 최후의 방법으로 리스크를 감당하고 비상용 강제 복귀 주문까지 외웠지만 그 어떤 신호도 발생하지 않고 조용했다. 여전히 먼지 가득한 다락방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멍청한 똥개 하나랑 이리저리 널린 허접한 도구들이 시야에 잡히자 악마의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제 웃음을 잃어버린 악마는 옷 더러워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소환진을 더듬었다. 미친 듯이 주문진을 더듬으며 살피는 내내 악마의 뇌 한구석에서 계속해서 재수 없는 날파리들의 하프 소리가 들렸다. 악마는 애써 불안감을 잠재우고 소환진을 꼼꼼히 분석했지만 악마의 머리 속에서 영광에 찬 하프 소리가 점점 더 커져서 머리 전체를 울렸다.
"씨발...파이몬이시여."
그 머리가 깨질 듯 울리는 하프 소리 속에서 마침내 결론을 낸 악마는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급해진 악마는 고개를 홱 돌려 오스카에게 쏘아붙였다.
"어디야?"
"네...?"
이런 상황에서도 오스카의 어벙한 얼굴은 악마의 심기를 긁기 충분했다. 결국 악마는 집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고함쳤다.
"그 서점 어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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