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연 삼국지화

[순욱시연] 荀令十里香

한나라 말에 크게 혼란하여 많은 산 사람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자연히 세상에서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순욱은 위 무제를 버리고 장차 누구를 섬기려고 하겠습니까?

- 자치통감 66권

 


건안 209년 초, 적벽에서의 대패 이후 조조 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삼국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연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조조의 앞에서는 그에게 굽실거리기 바빴으나 그의 뒤에서는 황제를 꼭두각시처럼 쓴 벌을 받는 것이라느니, 승상도 운이 다한 것이라느니 떠들어댔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의 조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삼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으므로 시연은 순욱과 사마의에게서 듣는 단편적인 이야기로 세상을 접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세히 캐물으려 하면 ‘뭘 그렇게 캐묻는 건가요?’ 라고 묻듯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욱과 ‘그런 거 물어봐도 대답 못 해준다고! 애초에 네가 이해는 할 수 있겠냐?’ 라며, 앙칼지게 소리치는 사마의 탓에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순욱의 처소를 드나드는 순욱의 ‘손님’들은 누구였을까? 조조와 순욱 사이의 미묘한 거리는 언제부터 유지됐던 것일까. 애초에, 조조와 하후연이 멀리 원정을 떠난 것이 그 유명한 ‘적벽대전’ 때문이었다는 것도 시연은 집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에야 눈치챘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조와 하후연이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돌아오고, 정원에서 조조를 만나 순욱에게 찾아온 ‘손님’들의 이야기를 조조에게 전하고, 화씨지벽을 조조에게 건네는 대신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거래’를 맺은 것은 거의 보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시연의 일상에 변화가 많지는 않았다. 먹 냄새가 짙게 배여 있는 순욱의 방에서 순욱의 일을 돕다 보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곤 했다. 순욱에게서는 독특한 향이 풍겼다. 순욱의 근처에서 맡을 수 있는 먹 냄새와 흐릿한 대나무 냄새는 사실 그가 죽간과 먹에 둘러싸인 채 공무를 보기 때문이었고, 순욱의 본연의 향은 조금 더 씁쓸한 향에 가까웠다. 씁쓸하고 무거웠으나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향은 아니었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서는 며칠 동안이나 흐릿하게 잔향이 남아있을 정도였기에, 사람들은 그 향을 더러 ‘순령십리향’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시연은 상서령의 ‘손님’들에게서 전해 들었다.

상서령, 순욱은 그런 사람이었다.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거닐었던 곳에 잔향이 남듯, 자신의 행동에는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 그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알 수 있는 일들이 꽤 많았다. 자신이 고른 자신의 주인을 위해, 자신의 나라를 위해 제 몸 하나 정도는 불사를 수 있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도, 나라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택보다도 나라를 위한 선택을 할 사람. 시연이 보기에 순욱, 순문약, 상서령이라는 자는 그런 자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시연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람이 돌아간다는데도 어떻게 한 번을 나와보지를 않는 거야? 우리,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연인’이니, ‘정인’이니 하는 말로 수식할 수는 없는 관계라고 해도 적어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연이 신수라고 주장하는 거북이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 동안에도 시연이 기다리는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다.

“에휴,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람…”

먼저 찾아오지도 않는 상대를 찾아가는 것은 자존심도 상하는 일일뿐더러, 순문약이라는 자는 자신이 멋대로 찾아가면 고운 얼굴을 찌푸리며 ‘뭡니까?’ 따위의 말이나 내뱉을 사내임을 잘 알았기에, 시연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침대에 몸을 조금 더 파묻었다.

시연은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인연들에 대해 떠올렸으나, 누군가를 추억할 수 있을 정도로 정을 쌓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순욱이 부르는 대로 그의 방에서 공무를 보거나, 그를 만나지 않는 날에는 종종 사마의와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순욱은 조조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언제나 시연을 두고 조조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자신이 미더운 것이냐며 시연이 화를 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라고, 순욱은 단 한 마디로 시연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근래 조조와 순욱이 만날 때면 온 성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시연은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순욱과 조조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 속에서도 시연은 순욱의 곁에 있기를 택했고, 순욱은 그런 시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시연은 가끔 생각했다. 그 보호가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순욱이 정무를 보는 동안 그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기에 시연은 그 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쩐지,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게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배제하는 느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연은 단 한 번도 순욱에게 묻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냐고. 이 나라는, 이곳은 당신이 선택한 나라인데, 어째서 나를 지키는 것이냐고.

“아, 모르겠다…”

대(大)자로 팔다리를 넓게 펼치고 천장을 올려다보던 시연은 언제 심란해했냐는 듯이 금세 잠들었다. 바보, 멍청이, 가지 말라는 말이라도 하던지, 원망 어린 목소리를 내뱉던 시연의 목소리는 순욱의 향기와는 달리 달빛에 섞여 사라졌다. 시연은 언제나, 진심으로 순욱을 원망했던 적이 없었기에.


“…네에에에!? 조 공님이요? 저를 부르셨다고요?”

당황스럽다는 듯 몇 차례나 똑같은 질문을 내뱉던 시연을 향해 질리지도 않고 ‘네, 승상께서 소저를 부르셨습니다.’라는 답을 하던 시비는 더 이상 시연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승상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인지 시연을 데리고 조조의 거처로 향했다.

“승상. 소저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라 하라.”

들어가시지요, 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시비에게 가볍게 인사한 시연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조조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조의 취향에 맞게 꾸며진 방 안에 서 있을 때마다, 시연은 꼭 먹이를 집어삼키기 직전의 뱀의 아가리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방 안에서 시연이 어쩔 줄 모르고 몸을 움츠린 채 눈치를 보는 것을 알아챈 조조는 피식 웃으며 시연에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을 붙였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군.”

“뭐, 뭇, 무슨 소리세요!”

“내 앞에서 감히 언성을 높이다니, 평소 같았으면 목을 쳐 군령을 바로잡았겠지만,”

실수했다…. 오늘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인데, 이런 식으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말실수 한 번 했다고!? 시시각각으로 창백해져 가는 시연이 재미있다는 듯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린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내려두며 시연과 눈을 마주쳤다.

“오늘만큼은 봐주지. 대신,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조조가 시키는 일이라고는 제 눈앞에 띄지 않게 비키라느니, 조용히 하라느니 하는 명령들밖에 없었기에 시연은 고개를 기울이며 조조를 바라보았다. 조조는 제 탁자 아래에서 각진 상자 같은 것을 꺼내 시연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순욱에게 건네주도록.”

“순… 상서령 님께요?”

“그래.”

“이게 뭔데요?”

“찬합.”

“찬… 아, 도시락이요? 갑자기 그… 찬합은 왜요?”

감히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고 묻듯이 조조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본 시연은 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또 날 선 말이 날아들 때까지 눈을 감고 있던 시연은, 이어지는 침묵에 의아함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을 뜬 뒤 보이는 것은, 찬합을 검지로 두드리고 있는 조조의 모습이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감은 채 침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기 전의 판사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시연은 그에게서 한 걸음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별일은 아니다. 그저, 그와 만날 일이 있다면 이걸 전해주면 된다. 요즘 몸이 허해 보이길래.”

“우와, 조 공님이 남도 걱정할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요.”

“말이 많군.”

“알, 알겠어요. 상서령 님께 전해드리면 되는 거죠?”

시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조는 만족한 것인지 나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시연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연은 쫓겨나듯 조조의 방에서 나왔고, 조조의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에게 순욱을 불러달라 부탁했다.

그 뒤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조조가 보낸 ‘선물’을 받은 순욱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나,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연이 떠나는 날, 그날은 온 도성이 소란스러웠다. 황룡이 승상에게 축복을 내렸다느니, 황룡이 택한 군주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난세가 끝나고 평안한 세상이 올 것이라느니, 저들 좋을 대로 떠들어대는 말들 사이에서도 순욱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조조의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를 보필해왔던 상서령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이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시연은 소란스러운 풍경을 보기 싫다는 듯이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순욱의 방에 있을 때는 눈을 감을 때마다 그의 몸에 배어 있는 먹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웠었는데,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시연이 가장 그를 필요로 할 때는 아무런 향도 맡을 수 없었다. 순욱에게서 나는 향은 다른 이에게서 나는 향들보다도 단연 독보적이라, 그의 곁에서 그의 향취를 가장 오랫동안 맡아본 자신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향에 섞여 그 향이 파묻혀도 알아챌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도. 그의 향은 맡을 수 없었다. 시연이 흐르는 눈물을 닦기 위해 소매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야, 시연은 순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의 옷에 남은, 며칠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그의 흔적을.


“……그래서,”

상서령, 아니, 이제는 시중(侍中)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니, 지절(持節)이니,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 따위의 직함으로 불리는 자가 느리게 말문을 뗐다.

“결국 떠났다고요.”

“네, 뭐.”

어물쩍 말을 얼버무리는 사마의를 보며 순욱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자신이면서도 타인의 입을 통해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영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순욱은 짧은 말을 마치고, 그 뒤로 입을 열지 않았다. 외려 시연의 귀향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순욱이 아닌 사마의 쪽이었다. 사마의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도 쉽사리 순욱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뭡니까. 할 말이 있다면 빨리하세요.”

“…상서령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그렇게 떠나는 걸 붙잡지도 않고!”

탁, 책상 위에 붓을 내려두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사마의는 윽,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으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뭡니까? 그런 분 아니셨잖아요. …듣자 하니, 승상께……, 하여튼, 그걸, 그렇게 받고 넘기시다뇨! 상서령께서는 한나라에 꼭 있어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말을 마치고 바라본 순욱은 인상을 미묘하게 찌푸렸을 뿐,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서간과 먹 냄새에 사마의가 인상을 찌푸렸을 때쯤, 순욱이 주먹을 꽉 쥔 채로 입을 열었다.

“제가 붙잡는다고, 이 난세가 끝난답니까. 그 여자가,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부러 이 나라에 대해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게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습니다. 돌아가야 할 사람이니,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안전하게 해주겠다고. 그녀가 승상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않습니까. 이 순문약이 한(漢)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한들, 승상의 나라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서령!”

사마의의 외침에도 순욱의 표정은 한없이 담담했다. 저 뜻을 누가 꺾을 수 있으랴. 순욱은 입꼬리 한쪽을 끌어올려 상대를 비웃듯이 표정을 삐뚜름히 만든 뒤 사마의를 바라보며 시연이 마지막으로 제게 주고 간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열어보시지요.”

덜컹, 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열리는 찬합의 안에는 정말로, 쌀 한 톨도 들어있지 않았다. 시연이 봤더라면 속 편한 소리나 늘어놓았을 테지만, 조조의 참모로서 오랫동안 보아온 그들은 이 ‘빈 찬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더는 나라의 봉급을 나누어 줄 이유가 없다고, 이 조조에게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자라고 말하듯 윤이 날 정도로 반짝거리게 닦아져 있는 찬합을 보며 사마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승상께서도, 너무하시지….”

“이 정도라면 자비를 베푸신 것 아니시겠습니까. 평소의 그분이었다면 진즉 제 목을 자르셨겠지요.”

“하지만…”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시연.”

갑자기 그 아이의 이름은 왜 꺼내는 거지? 사마의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순욱을 바라보았지만, 순욱은 무언가 먼 과거의 일을 생각하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욱은, 시연이 조조에게 화씨지벽을 넘기는 대신 무엇을 요구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바보 같은 여자라면, 이런 과거일랑 끊어버리고 편하게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저를 위해 조조에게 간청했을 것이라는 건 눈을 감고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시연은 ‘순욱을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니, 조조는 그의 뜻에 따라 이리 빈 찬합을 보낸 것이다. 자신은 죽음을 명하지 않았으니, 선택은 네 몫이라고 말하는 조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순욱은 헛웃음을 흘렸다.

“성격하고는.”

복잡해 보이는 사마의의 표정을 뒤로 하고 찬합의 뚜껑을 닫은 순욱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놓여 있던 붓에 먹을 찍어 바르고 죽간을 펼쳐 공무를 보기 시작했다. 괜찮다. 전부 각오했던 일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순욱은 그 말들을 속으로 되뇌며 붓을 움직였다. 적막이 가라앉은 방 안에서 한참 동안 순욱을 노려보듯 쳐다보던 사마의는 결국 제풀에 꺾여 먼저 몸을 일으켰다. 사마의가 순욱의 방을 나서려고 할 즈음, 뒤에서 나지막한 순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에 볼 때는, 이곳이 아닌 전쟁터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터요?”

“예. 승상께서 손권을 칠 때, 초(譙, 안휘성 박현)에서 군사들을 위로하라 하시더군요.”

순욱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다시 떨어트렸다. 사마의도 순욱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순욱에게 인사를 남긴 뒤 방을 나섰다. 아무도 남지 않은 방 안에서 순욱은 창밖을 바라본다. 시끄럽게 굴며 자신의 방 안을 기분 좋은 소음으로 가득 채우던 소녀는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삼스레, 그리움이라도 느끼는 걸까. 이제 와서 그런 감정을 느껴봐야 늦었을 뿐이다. 떠난 자는, 떠난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순욱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생각한 만큼 담담하게 모든 일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입 안이 썼다. 적막한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두 사람분의 숨소리도, 제게서 먹을 닮은 향이 난다며 재잘거리던 상대의 달짝지근한 향기도, 한나라를 위해 바쳤던 그 모든 시간도,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순욱은 전장에 나가는 사람답지 않게, 제가 지금까지 썼던 글이며 죽간들을 챙겨 여로에 올랐다. 그는 ‘명목상’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모인 자들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문관의 몸으로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충분히 기이한 풍경이건만,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조조의 최측근인 순욱이라는 것도, 전쟁터에는 어울리지 않게, 짐 덩어리가 될 것이 분명한 죽간을 챙겨 떠나려고 하는 순욱의 모습은 더더욱 기이함을 자아냈다.

“우리는, 초가 아닌 수춘으로 갑니다.”

“하지만, 승상께서!”

“승상께서 그리하라 이르신 일입니다.”

한눈에 봐도 제 덩치의 두 배쯤은 되어 보이는 자의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순욱은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말에 올라타 먼저 길을 떠났다. 잠시 말을 멈춰 휴식할 때면, 순욱은 자신이 챙겨온 죽간들을 모닥불에 하나둘 집어넣고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간간이 재가 폐로 들어가기라도 한 듯 쿨럭거리는 모습을 보며, 군사들은 그의 근처를 서성거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 막사 안으로 돌아간 그는, 조용히 겉옷을 벗어두고 누군가에게 말하듯 말을 이어갔다.

“내 일이, 구설에 오르는 것은 싫어한다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하면서도, 종달새처럼 조잘거리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순욱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자신의 ‘손님’들에 대해 조조에게 말하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시연이 이 나라에, 이 시대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고 한들, 자신에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조조와 뜻을 달리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아마도 조조에게 그 일을 이야기 할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어쩌면 ‘실수’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실수라고 해도,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다만 순욱은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다. 그를 자신의 영역 안에 집어넣고, 그를 비호하기로 선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조조로부터, 황제로부터, 전쟁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게 보호하기로 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호칭 하나도 모르는 꼴 하며, 지금이 몇 연도인지, 평민들도 아는 예의도 모르는 꼴을 보면, 그 누구라도 그녀에게서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선택했다.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두기로, 이 위험 부담을 모두 감수하고 그녀를 곁에 두기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순욱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한때의 충동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부터 이 모든 일이 뒤틀리기 시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다른 이들이 함부로 그녀를 건들지 않게 하도록 임시방편으로 입을 맞추었을 뿐이었다. 순욱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 행위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노라고. 단지 필요에 의한 행위였다. 필요에 의한 행위에 어찌 감정을 집어넣겠는가. 그녀를 보는 눈은 너무나도 많았고, 이 성도 안에는 위험분자들이 득실거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순욱은 태어나기를 문관으로 태어났다. 계책을 짜고, 누군가를 위해 열과 성을 바치며, 심지어는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는 자였다. 비록 선두에 서서 누군가를 베고 찌르며 죽이는 일보다는 무언가를 지키는 일에 익숙한 자였다는 뜻이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지켰으며, 그 길 위에서 어떤 희생이 따른다 한들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자였다. 그런 자가 한나라 황실을, 시연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맹목적이며,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고 바라며, 보답받지 못할 감정임을 알고도 그것을 마음에 품은 채, 상대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은 채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충심과 연정은 닮은 면이 있노라고, 순욱은 삶의 끝에 다다라서야 그리 생각했다.

“그러게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는.”

순욱은 체온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막사 안에 피워둔 작은 모닥불 안에 챙겨온 죽간들을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한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게 물들어가는 대나무들은 꼭 느리게 불타 사라지는 자신의 목숨과도 닮아있어서, 순욱은 드물게도 혼잣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내 인생에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한나라는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안다. 이 또한 부질없는 원망이라는 것을.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한나라는 몰락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나라에 든 망조는 지울 수 없다. 조조의 장자방이 그것을 바란다고 한들, 그는 그저 책사일 뿐 나라를 직접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니.

“당신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쓸데없는 잡념도…”

쌓여있던 죽간들이 점점 더 자취를 감춘다. 그래. 전부 잡념일 뿐이다. 쉽게 끊어낼 수 있는 잡념. 당신이 뭐라고. 나는 한나라를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 길을 걸으며 한때 나의 주인이었던 자와 대립하게 되는 것 또한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단 말입니다. 당신 같은 건, 내게 방해일 뿐이었다. 순욱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하고 소매로 입을 가린 뒤 기침을 토해냈다. 그 아릿한 고통 뒤에 남는 생각을 순욱은 애써 죽간과 함께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가능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가능성 따위는 절대로, 존재해서도 안 됐다. 한나라도, 당신도 구할 수 있는 선택지 따위….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진다.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미래도, 붙잡지 못했던 가능성도, 이루지 못했던 숙원도, 전부, 형체를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아마, 이제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순욱이라는 자는 타인의 입에서 묘사된 것으로만 기록될 것이며,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어떤 미래를 꿈꿨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기록이란 사람을 구성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순욱의 발자취를 기록할 수는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을 적겠지. 하지만 그들은 순욱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꿈꾸었으며,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그가 직접 모든 발자취를 지워버림으로써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주변에 가득했던 죽간들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수없이 오랜 시간 동안 차근차근 쌓아왔던 그의 기록들이 이리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는 것에 순욱은 잠시 실소를 터트렸다. 미련은 없었다. 이것은 그의 복수다. 어쩌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분풀이일지도 모른다. 순욱은 그것을 알면서도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끄지 않았다.

마지막 죽간이 재가 되어 사라질 때 즈음, 순욱은 제 겉옷을 벗어 모닥불 안에 집어 던졌다. 남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옷소매 안으로 파고들어 살결을 간지럽혔던 감각이 아직도 선연했다. 그는 단아한 몸짓으로 내의의 소매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더 이상, 먹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나는 냄새라고는 코를 찌르는 씁쓸한 쓴 내와 잿더미에서나 나는 냄새만이 이 방 안을, 순욱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이제 그녀가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는 기록도, 냄새도, 모든 것은 사라지고 다른 것으로 뒤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녀가, 아니, 그의 ‘주인’이 준 마지막 ‘선물’을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찬합 안에 넣어두었던 작은 병을 꺼내 단숨에 내용물을 삼켰다. 입 안에 가득 퍼지는 쓴맛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을 감추기 힘들어서인지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내 ‘영역’에서 나갈 거라면… 완전히 나가시길. 쓸데없이 미련을 남겨봤자, 당신의 그 멍청한 머리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몸의 말단 부분부터 천천히 굳어간다.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팔뚝을 타고 올라오며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순욱은 한숨과도 비슷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지우고, 태우고, 찢어 없애버리는 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것이자, 그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투정이었다. 당신이 억지로 떠넘긴 기억들은 떠안지 않겠다고. 당신은 나에게 단 하나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당신은 내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고. 애꿎은 분풀이 같은 생각을 이어가다, 순욱은 결국,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을 인정하며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신을…’


…조조의 군대가 유수(濡須)에 도착했을 때, 순욱은 병으로 수춘에 머물다가 근심 속에 죽었으니, 시호를 경후(敬候)라고 하였다.

- 《삼국지 정사 위서》, 〈순욱순유가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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