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플로이드 리치 드림
* 전력 드림 60분 신데렐라 [46회 주제: 클리셰]
햇볕이 따사로운 오전. 팔랑팔랑. 서늘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수건은 당장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잘 말린 세탁물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세제의 인공적인 꽃향기. 그 모든 게 참으로 평화롭지만, 아이렌은 이 순간을 즐길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걸린 거야!’
방금까지는 빨랫줄에 걸려있었지만 지금은 기숙사 앞 나무의 가지에 걸려있는 그 수건은, 마치 자아가 있는 생물처럼 제의 손길을 피해 가고 있었다.
운동신경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세탁물을 걷어가고자 나무를 오르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걸까. 그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름대로 진지하게 조언했다.
“꼬붕, 그러지 말고 다른 녀석들에게 부탁하는 게 낫지 않겠냣?”
“알아서 할 테니까, 말 걸지 마. 정신 사납잖아.”
“흥! 네가 둔한 걸 내 탓 하지 말라고!”
탓하는 게 아니라 정말 방해되는 거다. 아이렌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조차도 집중력을 흐리게 하는 일임을 떠올리고 입을 닫아버렸다. 무엇보다 제가 몸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저 말에 너무 울컥하는 건 자승자박일 뿐이겠지.
초조해진 와중에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하는 아이렌은 부디 수건이 다시 바람을 타고 날아가지 않길 바라며 다시 한 번 팔을 뻗었다.
‘이럴 때 마법을 못 쓰는 게 한이 될 줄이야.’
만약 제가 마법사였다면 간단하게 수건을 낚아챘을 텐데. 아니면 빗자루를 타고 날아올라 걷어갈 수도 있었겠지.
평소엔 느끼지 않았던 허전함이 불쑥 밀려들자 괜히 속이 쓰려온다. 아이렌은 답답함을 한숨과 함께 삼키고, 목표물인 수건에 신경을 집중했다.
“저기, 뭐 하고 있는 거야?”
조금만 더 하면 닿겠다. 손끝이라도 닿는다면, 어떻게든 낚아채 잡을 수 있다. 세뇌하듯 그 말만 중얼거리던 그는 귓가에 파고드는 물음에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림, 말 걸지 말라니까!”
“나 물범이 아닌데.”
“어?”
잠깐,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다르잖아.
정신이 번쩍 든 아이렌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 훈수를 두던 그림은 어딜 간 걸까. 대체 언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건 제가 가장 어여삐 생각하는 존재였다.
“플로이드 선배, 여긴 어쩐……, 헉!”
필사적으로 모은 집중력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자마자 긴장이 탁 풀린 아이렌이 대꾸하는 사이, 나무에 매달려있던 몸은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아. 이대로라면 넘어진다. 본능적으로 그걸 느낀 아이렌은 어떻게든 안전하게 착지하기 위해 손발을 움직였다.
잡히는 건 뭐든 잡고 발에 닿는 건 뭐든 딛어보려고 버둥거리는 사이. 무언가 제 손가락에 걸리는 걸 느낀 아이렌이 그걸 움켜쥔 순간, 그대로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으, 으아악!”
“윽!”
거의 동시에 들린 비명과 함께, 나무 아래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 높게 올라가지도 않았었지만, 아무래도 위치에너지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온몸이 잔잔하게 욱신거리는 아이렌은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제가 움켜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아야……. 으으, 그래도 수건은 건졌네.”
만약 수건도 못 잡고 떨어졌으면 억울함에 기절했겠지만, 이렇게 목표물이라도 잡았으니 넘어져도 아프지 않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는 점에 안도한 아이렌은 일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제가 넘어져 있는 곳이 땅이 아님을 깨닫고 숨을 삼켰다.
“헉.”
왜 제 비명 말고 다른 소리가 들렸나 했는데, 지금 보니 플로이드도 넘어져있지 않나. 그것도, 제 밑에서 말이다!
하필 그의 위에 넘어지다니. 이 무슨 러브 코미디물 클리셰인가.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이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당장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했지만, 막상 상황을 인식하고 나자 마주 닿은 몸의 굴곡이 점점 선명하게 느껴져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래진 거였다.
‘미치겠네!’
운동하는 사람의 몸이라 그런가. 아니면 남자의 몸이라는 건 다 이렇게 단단한 건가. 의식하지 않으려 해봐도 촉각이라는 건 차단할 수가 없는 거라, 속이 펄펄 끓어오른다.
당황해서 손난로처럼 점점 열이 오르는 아이렌과 달리, 플로이드의 반응은 덤덤한 편이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위의 후배를 가만히 보고 있는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상대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서, 선배?”
뭐지. 이거 무슨 상황이지.
근육이 붙은 단단한 팔이 제 몸을 감싸는 걸 느낀 아이렌은 밀려오는 상념에 혀라도 깨물 뻔했지만, 이내 천진한 플로이드의 반응에 금방 머리가 식어버리고 말았다.
“아기새우는 엄청 따뜻하고 말랑하네.”
“예?”
“방금까진 넘어져서 열받았는데, 으음, 뭐 됐나.”
마치 애착 인형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실실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고 뺨을 비비는 플로이드는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너른 가슴팍에 안긴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는 아이렌은 손에 든 수건만 꽉 쥐며 부끄러움을 참아야 했다.
‘그래, 내가 쓰레기지.’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108배라도 하고 자야겠다. 분명 행복해야 할 상황인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아이렌은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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