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6월 편
실버 드림
* 트친이랑 1년 장기 프로젝트(https://1yearcollabo2.creatorlink.net) 하는데 써서 냈습니다.
웅성웅성. 익숙한 이들의 말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디어솜니아 담화실에 앉아있다가 깜빡 잠들었던 실버는 제 근처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냥 주무시게 둬도 되지 않아? 바쁜 일 없다며.”
“잘 거라면 방에 가서 잘 것이지, 여기서 뻗어있는 게 맞냐는 거다!”
“쉿, 실버 선배 깨시겠어.”
아, 이 목소리는. 아이렌과 세벡인가. 세벡이야 여기 있는 게 이상하지 않더라도, 아이렌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실버는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바로 눈을 뜨지 않고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 보았다.
“매일 이렇게 늘어져 있다니. 말레우스 님을 모시는 몸으로서 조심성이라곤 없는지.”
“실버 선배는 수업도 성실하게 듣고 동아리 활동도 빠지지 않는데, 매일 늘어져 있는 거라고 볼 수 없지 않나? 누구처럼 수업을 빠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건 옳지 않다!”
“낮잠이 왜 얼빠진 모습이야? 깨어서 비몽사몽 하는 것보단 잘 자고 깨어있을 때 제정신인 쪽이 낫지.”
여전히 자신을 주제로 대화하고 있는 후배들의 목소리는 온도 차이가 심했다. 세벡은 언제나처럼 큰 목소리로 제 낮잠 습관을 못마땅해하고 있었고, 아이렌은 차분하게 논리적인 이야기로 대꾸하고 있었지.
마치 냉수와 온수를 양쪽에서 동시 붓는 것 같은 둘의 대화는 얼핏 들으면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실버는 알고 있었다. 저 대화에는 조금의 적의나 악의도 없다는 걸 말이다. 오히려 이 정도면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거지. 두 사람이 정말로 말싸움하는 걸 본 실버는 지금은 굳이 말리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 후 여운처럼 남은 졸음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실버 선배는 자는 모습도 예쁘니까, 오히려 좋다고 보는데.”
“예쁘다고? 저 녀석이?”
“응. 꼭 왕자님 같잖아.”
쿡쿡. 소리 죽여 웃는 목소리가 꼭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다. 눈을 감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지만, 분명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웃고 있겠지. 실버는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아이렌의 웃는 얼굴을 굳이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왕자님이라니. 제게는 조금 과분한 칭찬이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렌은 예술가 같은 표현을 쓰곤 하니, 직설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단 보기 싫지 않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자만하지도 자학하지도 않는 실버는 후배의 칭찬을 현명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벡은 이 칭찬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하, 콩깍지가 쓰인다는 게 이런 거군.”
“너도 입 다물고 가만히 자고 있으면 잘생겼을걸.”
“지금 말 다 했나, 인간!”
“말 다 했다, 인마.”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렌과 달리, 세벡은 속이 쓰린지 작게 으르렁거린다.
아, 이대로 가다가는 말싸움으로 번질 확률이 높다. 실버는 슬슬 정신을 차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행히 아이렌이 먼저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어쨌든, 그냥 깨우지 말고 주무시게 둬.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니 많이 졸리시겠지.”
아이렌이 먼저 꼬리를 내려서일까. 세벡은 더는 이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흘려넘길 수는 없는지, 끝내 상대의 말꼬투리를 잡았다.
“네 녀석은 그런 말은 어디서 들어오는 거냐.”
“거야 내가 살던 세계지.”
“하. 그냥 네가 깨울 수 없어서 말을 지어내는 건 아닌가?”
“내가 왜 못 깨워. 입맞춤만 해도 깨울 수 있는데.”
“뭐, 뭐라고?”
예상치 못한 해결 방법에 세벡이 크게 당황한다. 그리고 의아함을 느낀 건 실버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또한 반사적으로 손끝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는 후배들은 그 손짓을 눈치채지 못한 정도일까.
아이렌은 낯빛이 변한 세벡을 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라, 여기엔 그런 동화 없나? 잠이 든 미녀에게 키스하면 일어나는…….”
“그건 옛날이야기이지 않나!”
“나는 낭만주의자라서, 이런 걸 잘 믿거든. 어쨌든, 나는 이만 가볼게. 너도 선배 괴롭히지 마.”
세벡은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지만, 어쩐지 눈도 입도 떠지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잠이 깼는데도 여전히 잠든 듯 가만히 누워있던 실버는 세벡마저 자리를 벗어나고 나서야 눈꺼풀을 열 수 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담화실은, 놀라울 정도로 공허했다.
다음 날.
방과 후, 언제나처럼 복습을 위해 도서관에 있을 아이렌을 찾아온 실버는 창가 자리에 엎드려있는 익숙한 상체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아이렌?”
조심스레 호명했지만, 한쪽 팔을 베고 비스듬히 누운 고개가 자신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실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만 깜빡이다가, 슬며시 상대의 등 위에 오른손을 얹어보았다.
호흡할 때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몸은 체온 때문인지 볕에 데워진 천 때문인지 따뜻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도 느낄 수 있는 은은한 온기에 쉽게 손을 거두지 못하고 있자니, 어느새 불쑥 다가온 리들이 슬쩍 조언했다.
“내버려 둬. 잠을 전혀 못 잤다고 하더라고.”
“잠을 못 잤다고?”
“그래.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봤다가 무서워져서 뜬 눈으로 지냈다나 뭐라나.”
‘이럴 때 보면 애 같다니까.’ 평소엔 어른스러운 아이렌이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이 싫지 않은지, 리들은 빙긋 미소 지었다.
그 의견에 마음속으로 동의한 실버는 혹 제가 잠을 깨울까 걱정되어 손을 거두었다.
“도서관에서 자도 괜찮은 건가?”
“원래는 안 되긴 하지만, 잠깐은 괜찮겠지. 아이렌이 언제나 자러 오는 것도 아니고”
“흠.”
그러면 일단은 돌아가야 하나. 실버는 왼손에 들고 있던 책을 만지작거렸다.
리들은 아이렌을 가만히 바라보는 실버의 행동이 신경 쓰이는지 곧장 도서관을 나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이렌에게 볼일이 있어 온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전에 책을 빌려줬는데, 다 읽어서 돌려줄까 해서.”
“아하. 그러면 두고 가면 되겠네. 어떤 책이었어?”
“이거.”
실버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빌린 책을 내밀었다. 깔끔한 표지가 인상적인 교과서 두께의 책 하단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과연, 소설책인가.’ 처음 보는 책이지만 작가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던 리들은 흥미가 생긴 건지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재미있었어?”
“음. 평소엔 읽지 않는 종류의 책이라서 흥미로웠다.”
“그렇구나, 나도 다음에 읽어봐야겠는걸.”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리들은 도서관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나는 이만. 기숙사에 얼른 돌아가 봐야 하거든.”
“아, 조심해서 가라. 리들.”
가볍게 눈인사를 한 실버는 자신도 책만 두고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직도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렌을 살폈다.
평소 작은 소리에도 쉽게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시야에 뭐가 들어온다면 습관적으로 눈짓을 주는 예민한 그가 이렇게나 풀어져 있다니. 어디에서든 쉽게 잠드는 제가 할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떻게 이렇게 평온히 잘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푹 잠든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째서일까. 그저 곤히 자는 걸 보고 있을 뿐인데, 속이 미풍에 물결치는 호수 표면처럼 울렁거린다.
인연도 기반도 없이 낯선 세계에 뚝 떨어졌음에도 항상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이의 이토록 편안한 모습이라니. 마치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목격한 듯 낯설고 신비롭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를 지지해 주는 이 홍일점은 날카롭고 지독하게 굴 때는 있어도 결코 약한 면모는 보이려 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리 새근새근 자는 걸 보고 있자니…… 그 단잠이 불쾌하게 깨지 않게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렌도 이런 마음이었던 건가.’
누가 보아도 지켜져야 할 건 제가 아니라 상대 쪽 같은데. 언제나 제 단잠을 지켜 준 이 아이는,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챙겨주어서 고맙다며 빙그레 미소 지을까. 왜 빨리 깨워 주지 않았느냐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당황할까. 그것도 아니면, 아예 같이 자자며 곁을 내어줄까.
상대가 깨지 않는 이상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에 골몰하던 그는 상대가 좋아하는 동화 같은 방법으로 상대를 깨워보았다.
쪽. 가볍게 아이렌의 입에 제 입술을 겹친 실버는 미동도 하지 않는 상대를 몇 초 정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숙인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안 깨어나는군.”
역시 현실은 동화와 다른 법일까. 누군가가 했던 냉소적인 이야기를 떠올린 실버는 빌린 책을 조심스럽게 옆에 놓아두고 자리를 떴다.
툭. 책에 걸쳐진 아이렌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작은 소음을 냈지만, 앞만 보며 성큼성큼 걸어 나간 실버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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