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온라인 게임은 무법지대
3화
붉은 머리의 남자가 거칠게 나무통 안에 든 음료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 험악한 인상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흘끔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작은 주점 안, 구리 갑옷을 온 몸에 덕지덕지 껴입은 붉은 머리 남자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벌써 100명 넘게 죽었어.
이 거지 같은 게임에 갇히게 되고 2주가 지났다. 그 사이에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숨이 날아갔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게임 감각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몸에 남아있는 탓인지, 사람들은 순간 방심한 틈을 타 죽는다고 들었다. 마음만 같으면 그들을 전부 지켜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야만 하는 건지. 그들은, 우리 모두는 그저 게임을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남은 음료를 모조리 들이키고는 텅 빈 통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침 때맞춰서 남자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웅아~. 우리 웅이!”
말투는 친근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그보다 더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 신속배달은 그를 흘깃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궁상맞게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냐. 새끼, 뭐 술이라도 마시는 줄 알았더니 그냥 주스네. 재미 없긴.”
“혁. 여긴 어떻게 알았어?”
“야, 니가 갈 만한 덴 뻔하지. 게다가 여긴 뭐 놀거리도 없고. 여자도 없잖아.”
신속배달은 여전히 고개를 쭉 뺀 채 조금 전의 사색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혁이라 불린 남자는 이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뒤로 스윽 다가가더니 어깨동무를 걸쳤다. 신속은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흥에 맞춰줄 기분은 아니었다.
“네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좋은 소식이라고?”
“그래, 인마. 방금 전에 밝혀진 따끈따뜬한 뉴스다.”
혁이 신속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갔다.
“…조금 전, 1층 보스방이 발견됐다더라.”
“…! 뭐라고?”
신속이 격한 반응을 보이자 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신속은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았던 이 상황에 울분을 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소식이 사실이라면, 희망은 있다.
“내일, 보스전 미팅을 연다고 하는데, 어때, 너도 우리랑 같이 참여할 거지?”
“당연하지! 참여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새끼, 역시 변한 게 없구만. 네 마음 아주 자알~ 알지. 괜찮은 놈들 모아 왔으니까 파티 맺자.”
신속은 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만. 혁이 모아온 멤버들인 게 어째 영 찜찜했지만 파티플레이를 하지 않으면 위험한 세계다. 실수를 커버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심신이 안정되니까.
“알겠어.”
“그럴 줄 알았지! 이봐, 사장님. 술 두 잔 추가요!”
“난 안 마실 건데?”
“븅신아, 마셔도 취하지도 않는구만.”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톨바나 분수광장에는 제법 많은 인원의 사람이 모였다. 육안으로 보았을 때, 40명은 되어 보였다. 죽을 수 있는데도 이렇게 많이 모여준 것에 신속은 꽤 감사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다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광장 중앙에 선 사람은 어림잡아 190cm는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주황색으로 염색한 단발의 여성도 같이 서 있었다. 신속의 곁에 앉은 혁이 “오, 예쁜데.” 같은 말을 했지만 신속은 답하지 않았다.
“저희는 어제, 미궁구 최심부에서 보스방을 발견했다는 정보를 제공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저희는 하루라도 빨리 이 사실을 모두에게 공유하고 함께 보스를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죠. 여러분도 이에 동의하시기에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박수 소리. 깔끔한 인사였다. 발성도 좋고 목소리도 미성인지라 스피치를 하는 사람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모두들 사전에 배포된 책은 받으셨을까요?”
신속은 아까부터 손에 꾹 쥐고 있던 책자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제 1층 몬스터의 패턴이나 퀘스트, 보스 몹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네, 다들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빠르게 본론을 말씀드리자면, 보스의 이름은 일팽 더 코볼트 로드로, 총 HP 세 단 피통으로 변화구가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HP바 게이지가 붉게 변하면 무기를 탈와르로 바꿔 패턴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땐 광역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후방으로 대피하시면 됩니다.”
장신의 남자는 손에 든 책자를 두 번 두드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보스는 졸개 열 두 마리를 소환하기에 이를 견제할 파티 넷, 보스를 상대할 전위 파티를 셋 해서 만들까 합니다. 그럼, 파티를 짜기 전에….”
“예, 이 다음부터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단발의 여성이 남자와 자리를 바꾸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모두가 여성 쪽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앞서 말씀드린 정보는 전부 책자에서 얻은 것이지만, 이는 전부 베타 테스터가 제공해 준 정보를 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꽤 많은 베타 테스터들이 위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진 책자를 무료로 배포하기로 했으니, 그들의 노고를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곁에 앉은 혁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지만, 신속배달은 감격에 겨워 작게 박수를 쳤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좋은 사람은 분명히 있다.
“좋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네 명에서 여섯 명의 파티를 짜 주시길 바랍니다.”
정보 제공자로서 이번 미팅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없었다. 사실 그렇다기보단 자신이 참여하지 않으면 누가 참여하냐는 마인드에 가까웠다. 몇 명이 고고하게 앉아 있는 마린을 힐끔힐끔 쳐다봤으나, 그녀는 그들을 쿨하게 무시했다. 이어지는 정보들은 마린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지라 적당히 흘려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베타 테스터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내리 깔고 있던 눈을 똑바로 떴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럴 리는 없지만 일순 단상에 서 있던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성과 눈이 마주친 것처럼 느껴졌다. 정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정보를 공개하더라도 게임은 끊임없이 공략해 갈 것이고, 2천 오백 명의 플레이어들 중에서 가장 강할 테니까.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절대 아니었다. 마린은 어지간한 게임은 대부분 자신이 1등으로 공략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마린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좋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네 명에서 여섯 명의 파티를 짜 주시길 바랍니다.”
……넷에서 여섯 명의 파티.
마린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곁눈질로 훑어 보았다. 대부분 아는 사이였는지 각자가 파티를 맺는 모습이 보였다. 마린이 아무것도 못 하는 사이 벌써 리더를 정한 그룹도 보였다. 파티를 짜지 못하면 공략에 참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혼자?”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린은 몸을 흠칫 떨었다. 남자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딘가 많이 익숙했다.
“혼자?”
또 한번 같은 목소리로 들렸다.이번엔 뒤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렸다. 마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곱슬거리는 흑발, 투블럭. 공허한 눈동자. 밝은 곳에서는 처음 보았지만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다.
“……응.”
“그렇구나, 그럼 나랑 파티 맺자.”
“……….”
마린은 평소에 그토록 잘 돌아가던 머리가 단단히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누군가와는 파티를 맺어야 한다. 그렇다면 실력이 어떤지도 모르는 누군가와 파티를 맺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상대의 실력을 검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돈, 필요해?”
“뭐?”
“얼마, 없긴 한데.”
흑발은 반투명으로 빛나는 트레이드 윈도우 창을 띄우고는 무언가를 조작하려 했다.
“자, 잠깐.”
마린은 급하게 이를 말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뜬금없이 돈이람, 뉴비인가? 뉴비가 겁도 없이 보스전에 참가한다 이건가….
“당신 레벨은?”
“11.”
“……알겠어. 파티 맺자.”
마린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흑발 투블럭은 기쁜 듯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는 게 보였다. 타인과 어떤 쪽으로든 맺어진다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마린이 윈도우를 조작해 파티 신청을 보내고, 상대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왼쪽 상단에 자신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닉네임과 HP바가 나타났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 이름이…….
‘스테노…?’
“마린.”
이름이 불리자 마린은 어쩔 수 없이 동요했다. 이 게임에 갇힌 이래 이름을 불린 게 처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스테노는 손으로 단상 쪽을 가리켰다. 다 짜진 파티를 한 곳에 모아 이름을 등록하는 모양이었다.
“네가 해, 나는 갈 테니까.”
“가면 안돼.”
단호한 스테노의 말에 마린은 당황했다. 가면 안돼? 네가 뭔데.
“우리,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파티 맺었으면 알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너무나 정직한 그 말에 마린은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실전에 들어가기 전에 파티 멤버와 연계를 맞춰 보는 건 파티플의 필수였다. 아,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다릴 테니까, 네가 등록하고 와.”
“응. 기다려.”
스테노는 계단을 총총총 내려갔다. 마린은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두 명 뿐이라고?…다른 파티에 끼워달라기엔 6명씩 파티도 모두 맞춰졌고 말이죠….”
“안 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대신 두 분은 다른 파티를 엄호하는 형식으로 보스전에 참가하게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응.”
장신의 남자가 스테노와 마린의 이름을 G 파티에 기입하는 동안 누군가가 스테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요.”
“?”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슈크림이었다. 그녀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름이 스테노, 였군요.”
“응, 너도 말 편하게 해.”
“그, 그래도 되나요…?”
“응. 너도 보스전 참가해?”
슈크림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슈크림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둘 뿐인 파티가 있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이드 리더에게 다가가던 신속배달이 스테노와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내가 그 파티에 탱으로 가면 그래도 덜 위험할 것 같은데. 리더님, 제가…….”
“야야, 웅아. 개소리 말아. 그럼 우리 파티 탱은 어쩌려고.”
가까이 다가온 혁이 신속의 팔을 붙잡았다. 아차, 싶었는지 신속은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드 리더는 짐짓 고민하더니 기록장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신속배달 씨와 혁 씨가 속한 파티의 지원을 주두 분의 파티가 맡아 주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오, 그럼 되겠네.”
신속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슈크림과 스테노를 바라보며 “잘 부탁해"!” 라고 말하고는 광장을 벗어났다.
슈크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랑 스테노가 같은 파티라고 착각한 것 같은데.”
“아니라고 말해주고 올까?”
“아, 아니… 아뇨, 음. 굳이 안 그래도 돼.”
물음표를 띄우는 스테노에서 슈크림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보스전 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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