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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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텐.” 안으로 들어가니 참으로 엉망인 풍경이 렘브리안트를 맞이했다. 언제 왔는지 새플리가 탁자에 티세트를 차려놓고 텐이 옆에서 말을 걸고 있었다. “새플리 함장, 아버지에게 너무 디저트만 드리는 거 같지 않나요?” “렘브리안트는 이거 좋아한다고 하셨는 걸?”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아버지의 몸 상태를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파르페를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새플리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되새겨보았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초월적 존재들의 이야기도 아니니 그의 말 자체는 이해했다. 이해하고 말고. 다만 듣는 순간 받아들이지 못 하고 반사적으로 되묻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독립의 사전적 정의가 떠오르고 이어지는 말에 멍청한 소리로 다시 네? 하고 되묻는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는거지?” 그러니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이었다. 상대의 질문에 어향육사는 뭐? 하고 되물으면서 상대를 보았다. 세냥청이라고 했던가. 소주가 데리고 온지 얼마 안 된 녀석이었지. “내가 거짓말을 언제 했다고 그래?” “하잖아. 거짓말은 좋지 않은 일인데 어째서 하는거지? 왜 소주는 너한테 화내는 거 같은데 계속 만나는거지?” “거
눈을 뜨니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멍한 와중에 비소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다급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낯익은 공간이다. 차가운 벽과 텅 빈 실험대, 열탕기 같은 도구들과 독들이 널려 있는 책상과 책장까지. 궁의 자신의 실험체다. 하지만 비소가 쉬던 의자나, 화로가 없는 걸 확인한 민화인은 손가락을 한 번 뒤로 꺽어본다
A는 몇 십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의 풍경을 돌아보면서 추억에 잠겨 있었다. 집 안 어른의 장례식이라고 내려왔지만 그 어른의 얼굴은 거의 기억도 안 나고 일손을 도우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이 다 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한쪽 구석에서 멍청하게 서 있는 꼴이 되어 어릴적 일들을 떠올리고 있게 되었다. 하천에서 물고기도 잡았지. 공놀이 하다가 공을 잃어버려서 친구들끼
“-대협.”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더 자고 싶어서 무시했더니 목소리는 더 가까운 곳에서, 더 크게 들렸다. 자신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진다. “일어나세요, 문두 대협. 언제까지 길거리에서 자고 있을겁니까, 문두 대협. 당장 일어나세요.” 묘하게 서늘한 그 부름에 일어나니 그곳은 산길이었다. 안개까지 낀 숲길에서 자고 있었다고? 언제 잠든거람. “일어
아쿠아리움의 직원인 그는 행사 일정에 따라서 펭귄탈을 뒤집어 쓰고 어슬렁어슬렁 아쿠아리움을 돌아다니고 있다. 아무리 냉방을 빵빵하게 해도 인형탈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하나도 안 느껴진다. 대체 왜 아쿠아리움은 이런 행사를 개최한단 말인가. 특정 펭귄을 찾아서 도장 찍기를 시키다니 이게 뭐람.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바닥에서 구르고 싶다고 그리
혈마의 교주가 보란듯이 목덜미에 남겨진 붉은 문양은 지워지지 않는다. 목을 계속 가릴 수 없고 어쩌나, 서배희는 혼자서 옷을 입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어쩌다가 저런 재수 없는 자식 눈에 들여서 이 모양이 된건지 알 수가 없다. 이걸 천마한테 들키면 목이 날라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 같기도 하고 불쾌하기 그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 부분을 긁고 있었다. 차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날씨다. 모용주뢰는 잠시 하늘을 봤다가 정원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평소모습 그대라 기분이 묘하다.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정원의 나무 사이로 정자가 보이고,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나뭇잎들이 어울린다고 매번 생각하게 된다. 걸음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혈옥과 분리 되었다가 겨우 다시 돌아온 뒤 서배희가 한 일은 자신의 혼이 더 이상 혈옥과 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제대로 기우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혈교주에게 잡혀 있던 시간 동안 주워 들은 주술 지식과 마교의 서적실을 뒤져서 찾아낸 주술서적들을 모아서 겨우 할 수 있었다. “이상하군.” 그 결과가 이거다. 단단히 주술로 묶은 탓에 부영의 주술로도
무지개는 어느 시간대, 어느 세계든 똑같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려는 하늘을 보았다. 본격적인 여름은 아직 아닐텐데 벌써부터 쏟아지는 비는 마치 더위가 더 심해지기 전의 유예 같이 느껴졌다. 대한민국, 고향을 떠나 중국의 사천, 그것도 시간대도, 역사도 다른 곳으로 온지 몇년이 흘렀다. 이제는 제갈 려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당 려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졌고 쉽
간단한 의뢰 하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천룡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가던 토키를 만나 같이 돌아가고 있었다. 학교에 들려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는 토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걸어가며 사무실에 별 일 없으려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우의 손이 토키와 천룡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걸음을 세우게 하였다. “뭐 하는 거야?!” “뭐, 뭐, 화났어요
익숙하고 지겨운 천장, 그리고 익숙한 손길. 고개를 돌리니 늘 똑같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가 있었다. 바늘의 따금함을 느끼면서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을 기절 시킨 그 머리통이 공중에 떠서 자신을 보고 있다. 그 옆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지나간다. 어디선가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 중 하나, 남들은 보지 못하는 자
눈을 뜨니 나룻배 위에 자신이 있었다. 사공과 자신만 단 둘이 타고 있는 나룻배는 어둠을 가르고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푸르스름한 달이 검은 수면과 배를 비추고 있는 장소. 딱히 물어보거나 할 필요 없이 모용주뢰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일 아침 자신을 깨우러 올 시종의 놀란 표정을 상상하고 말았다. 자신이
습기로 가득 찬 공간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영장, 혹은 목욕탕이라고 할까 타일과 지직거리는 전등 그리고 물이 전부인 공간. 부대에서는 이곳을 무한한 수영장이라고 불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출입구가 무작위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곳, 계속 이동하는 출구를 찾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곳, 그래서 부대는 종종 사람을 보내서 혹시 있을지 모
성좌 명사 1. 별의 위치를 정하기 위하여 밝은 별을 중심으로 천구(天球)를 몇 부분으로 나눈 것. 2. 신성한 자리. 주로 성인(聖人)이나 임금이 앉는 자리를 이른다. 3. 신, 성인, 위인 등 하늘 위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 “후우.” 모용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제단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보았다. 초승달을 휘감은 뱀이 새겨진 손등. 성좌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힘차게 인사 해오는 낯선 이의 팔에 둘러진 완장에 새겨진 익숙한 그 길드의 문양에 천룡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고 했으나 토키의 손님이신가요? 물음에 겨우 참고 그는 안으로 손님을 들였다. 선물용 음료수 박스를 내려놓은 그는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토키가 내민 믹스 커피를 받았다. “고요와 같은 길드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제
“실례합니다, 합석 괜찮으실까요?” 조용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민화인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맞은편에 앉았다. 하얀 멱리로 얼굴을 가린 이를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얼굴을 마주했고 서로 무를 겨루었기에 쉽게 제압하기 힘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 추네.” 부채를 들고 조용한 음에 맞춰서 춤을 추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 가득하게 웃고는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 작은 미생물부터 생명을 가진 존재들 안에 섭리는 언제나 존재한다. 헤일로는 방금 건물 잔해에서 구한 임산부가 다른 히어로들의 부축 받아 떠나는 것을 보면 그 섭리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곁에 다가온 미테가 먹는 거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헤일로는 허기를 느낀다. “저 임산부 분이 맛있는 거 많이 드
그러보니 걔 이름 뭐였지?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왜 그 조걸이었던가? 있었잖아?" 그 말에 윤종은 곧 그를 떠올렸다. 있었지. 갈색 머리,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활발한 성격의 또래 친구였다. 분명히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점심 먹고 친구들 손에 운동장에 끌려가면 항상 거기 있었다. 축구를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아무튼 다같이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