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의마녀/라우구엘] 눈 내리는 날, 너와 & 형과 함께

눈 내리는 날, 함께 케이크를 먹어요.

프론트는 지구와 달리 계절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온도와 대기, 습도와 날씨 모두 인위적으로 조성되고 조정된다.

그런 프론트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드물게 하얀 눈이 펑펑 내렸다. 눈이나 비가 오는 시간은 정해져있고 일찌감치 고지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제어장치 고장으로 인해 눈이 쏟아지고 말았다.

 

제타크 헤비 머시너리의 CEO 구엘 제타크는 함박눈이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통창은 외부의 풍경을 여실 없이 비추고 있었다.

갓 내린 커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눈은 창밖으로 고정한 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자 쌉쌀하면서도 진한 커피가 입 안을 가득 메웠다.

"형, 밖을 보고 있었어?"

때마침 들린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옆에 다가온 라우더가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엘 역시 따라 입꼬리를 올리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응. 눈이 내리는 게 신기해서 말이다."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나 펑펑 내린다니. 좀처럼 드문 일이야."

라우더는 창틀에 기대 구엘이 하던 것처럼 시선을 밖으로 향했다. 우뚝 솟은 건물들이 하얀 눈을 뒤집어쓴 게 마치 장난감 같았다. 동생이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형의 시선은 동생에게 향했다.

 

형제가 공동CEO가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제타크를 상징하는 복장은 라우더에게도 잘 어울렸다. 라우더 역시 제타크이므로 당연한 일이도 모른다.

온몸을 팥색 정장으로 감싼 라우더는 풍성한 남색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지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는 것이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아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곤 하니… 어느새 형은 동생의 사소한 습관까지 꿰뚫게 되었다.

구엘이 몸을 움직이자 라우더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이 내리는 게 안 좋을 줄 알았는데, 나쁘지만 않은 거 같아."

"꽤 예쁘니까 말이야.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동생은 고개를 끄덕인 후 머리카락에서 손을 뗀 채 형을 바라보았다.

"형. 저녁에 외식하지 않을래? 모처럼 눈도 내리니까 말이야."

"좋아.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는 형이 먹고 싶은 거라면 다 좋아."

"흠- 일전에 미오리네가 추천해준 레스토랑이 있었던 거 같은데…"

구엘이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터치하자 라우더가 다가와 구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행동에 형은 의아하지만 따스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듯한 행동이었다.

"형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갔으면 해. 다른 사람의 추천이 아니라."

"그럼…"

잠시 고민하던 구엘이 쉽게 입을 떼지 못하자 라우더는 태블릿PC를 가져와 지도를 띄웠다. 지도에는 가고 싶은 장소를 저장해두었는지 별 모양이 찍혀있었다. 몇 군데 레스토랑을 제시하자 구엘이 손가락을 들어 한 가게를 가리켰다.

"그러면 여기는 어때? 마침 룸도 있으니 조용할 거 같아."

"좋아. 이쪽으로 예약해둘게."

태블릿PC를 거두는 라우더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라우더를 바라보던 구엘은 조금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과 가고 싶은 곳을 저장해두었을 동생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도 결국 라우더의 추천을 받고 말았네. 그러면 이쪽도 나서볼까.'

라우더가 잠시 다른 볼일로 자리를 비우자 구엘은 태블릿PC를 켜 검색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사그락 사그락 내리는 눈은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가로등 등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일렬로 늘어진 가로등이 일제히 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형제는 나란히 눈이 쌓인 거리를 걸었다.

날씨가 꽤 추웠기에 정장 위에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까지 무장한 상태였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람에 따라 코트자락이 휘날렸다.

"여기서 멀지 않아서 걸어가자고 했는데, 정말로 괜찮겠어?"

"물론이지, 형. 안 그래도 눈 쌓인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어."

라우더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신발 밑창에 뽀드득거리며 달라붙는 눈의 감촉은 낯설지만 꽤나 재미있었다. 쌓인 눈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형제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도심 속을 걸었다.

 

도착한 레스토랑은 빛나는 샹들리에가 고풍스러웠고, 안내받은 룸은 조용했다. 앤틱한 느낌이 드는 분위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따금 소리를 내어 웃기도 하고, 식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은 라우더는 오물오물 씹으며 구엘을 바라보았다.

'형이랑 이곳에 올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입 안을 가득 메우는 부드러운 식감과 향긋한 풍미, 그리고 제 앞에 사랑하는 형이 있다. 형과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몽글몽글해지는 라우더였다. 형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까?

구엘은 라우더를 향해 웃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부드럽게 아래로 휘었고, 눈물점이 반짝였다.

'그래-. 분명 형도 비슷한 생각을 할 거야.'

라우더는 갈색 눈을 반짝이며 식기를 고쳐 쥐었다. 맛있냐고 묻는 라우더의 질문에 구엘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든 라우더였지만 식사시간이므로 형과 손을 잡는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 잘 먹었다."

"그러게. 라우더, 네가 추천해줘서 그런가, 맛있었어."

만족스럽다는 듯 배를 통통 두드리자 구엘은 불쑥 라우더 옆에 나타나 말했다.

"그치, 그치?"

"미오리네가 추천해준 리스트에도 마침 그 가게가 있었거든."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 같던 표정을 짓던 라우더는 미오리네의 추천에도 있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금세 뾰로통해져버리고 말았다. 구엘은 당황하여 라우더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니, 아니. 유명한 맛집인가봐. 여기 이렇게 리뷰도 많잖아."

구엘은 진짜 보라는 듯 핸드폰을 내밀어 수많은 리뷰 수를 가리켰지만 라우더는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맛있었어.”

“흥.”

“미안해~ 기분 풀어, 라우더~”

라우더 주변을 맴돌던 구엘은 동생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라우더는 자연스럽게 어깨 위에 있던 구엘의 손을 자신의 손과 맞잡았다. 스르륵 손이 맞잡히며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라우더는 기분이 풀렸는지 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눈이 쌓인 도심을 걸었다. 이번에는 손을 잡은 채였다.

전광판에서는 오늘 밤중으로 날씨제어장치 복구가 완전히 마무리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이 와선지 어쩐지 더 설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형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아직 들어가고 싶진 않은데…'

조심스럽게 옆을 들어 구엘을 바라보자 구엘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마치 라우더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구엘은 때마침 입을 열었다.

"와인이랑 케이크 픽업하고 가자."

"와인? 케이크?"

라우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구엘은 무얼 그리 놀라냐는 듯한 얼굴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모처럼 눈이 내렸으니 말이다. 이정도 분위기는 낼 수 있잖아?"

"형…"

예상치 못한 형의 세심함에 라우더는 감동이라도 한 듯 잠시 멈추어 서서 구엘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구엘이 라우더의 볼에 콕- 손가락을 찔렀다. 여전히 한 손은 라우더와 맞잡은 채였다.

"형?!"

"왜 그렇게 귀엽게 바라보고 있었어. 장난치고 싶잖냐."

구엘이 소리 내어 웃자 라우더는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구엘과 닿은 자신의 볼을 감싸 쥐었다. 갑작스러운 구엘의 언행에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라우더의 뺨이 붉게 떠올랐다.

"형, 이건…"

"별로야?"

"그럴 리가!"

즉각적인 라우더의 대답에 구엘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란히 하던 둘이었지만 어느새 구엘이 라우더의 바로 앞에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양손으로 라우더의 뺨을 감싸 쥐었다. 맞잡은 라우더의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부드럽게 다가온 구엘은 살짝 고개를 숙여 라우더의 머리카락 위에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제 입술을 얹었다. 그렇지만 라우더 역시 알아차리지 못할 리 만무했다. 라우더는 눈을 깜빡이며 구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스라도 할 줄 알았는데 형은 가볍게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이, 이다음은 집에 가서 할 거니까…"

자신이 한 행동이지만 좀 부끄러운지 구엘은 고개를 들자마자 라우더와 나란히 선 후, 맞잡고 있던 라우더의 손을 뺐다. 팔로 붉어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라우더는 손을 뻗어 구엘의 팔을 잡고 내렸다. 힘을 주지 않은 손은 스르륵 라우더의 손을 따라 내려왔다. 아까처럼 형제는 다시 손을 맞잡았다.

"알겠어. 그 후는 집에 가서 할 거니까, 얼른 와인이랑 케이크 픽업해서 가자는 거지? 그렇게 하자."

"…그래."

눈이 와서 평소보다 날이 추워서 그럴까? 둘의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렇지만 서로의 온기로 춥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길을 나설 때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디저트가게에 들어서자 라우더는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진열장의 바로 가까이에 서서 케이크를 황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라우더가 디저트를 좋아하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던 구엘이다. 라우더는 어린 아이처럼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쇼 케이스 안의 진열된 케이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치즈케이크, 과일이 풍성하게 올라간 쇼트케이크, 진한 초콜릿 위에 하얀 파우더가 뒤덮인 쇼콜라케이크…

케이크 시트 사이에 딸기가 겹겹이 쌓인 생크림 딸기 케이크에 시선이 멈추었다. 구엘 역시 같은 딸기케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처럼 하얗게 덮인 생크림 위에 소복하게 올라간 딸기가 먹음직스러워보였다.

"주문하신 딸기 케이크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목소리에 라우더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케이크를 이렇게나 열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형, 딸기 케이크 샀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예쁘게 포장된 케이스를 들어보이자 라우더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다. 다른 한 손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와인 쇼핑백을 든 채였다.

"형, 와인은 내가 들게."

"부탁하마."

구엘이 건넨 쇼핑백을 든 라우더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가게를 나온 둘은 나란히 걸었다. 여전히 옅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 위에도 눈이 내려앉았다.

 

따뜻한 집 안, 테이블 중앙에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올려놓고 와인과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두 개의 포크와 두 개의 접시 역시 옆에 내려놓았다.

라우더는 자연스럽게 구엘이 앉은 자리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앉았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형제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케이크를 잘랐다. 순백의 케이크 안에 생크림과 딸기가 층층이 쌓여있었다.

"왠지 특별한 날 같다."

"특별한 날일지도 모르지. 눈이 왔으니까."

"그러게, 형의 말이 맞아."

고개를 끄덕이자 구엘은 케이크를 자르던 손을 멈추고 눈으로 라우더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으며 윙크를 하자 라우더는 살짝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자, 와인도 따를게."

코르크 마개를 뽑자 건조하면서도 산미가 높은 향이 올라왔다. 영롱하게 빛나는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자 오묘하면서도 은은한 연둣빛을 띠는 와인이 잔에 담겼다. 스파클링 와인은 잔 안에서도 뽀글뽀글한 기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볍게 잔이 부딪히면서 와인이 흔들렸다. 청량감과 산뜻함이 입 안에 감돌았다. 라우더는 포크로 케이크를 한가득 떠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구엘은 라우더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맛있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

“그래? 맛있다니 다행이다.”

정말 맛이 있는지 라우더는 입가에 생크림까지 묻히고 있었다. 손을 뻗은 구엘은 자연스럽게 라우더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응?”

“정말 맛있었나보네, 이렇게 묻히고 먹고.”

“형?!”

손가락에 묻어난 생크림을 혀로 핥자 라우더가 깜짝 놀란 듯 구엘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나, 놀리지 마.”

“네가 이렇게 묻히면서 귀엽게 먹잖냐.”

구엘은 다른 손을 뻗어 라우더의 왼쪽 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언제나 라우더가 만지는 앞 머리카락이다. 가볍게 머리카락을 만진 구엘이 손을 내려놓았다. 질 세라 라우더 역시 구엘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형. 형이 골라준 케이크라서 그렇지. 와인도 맛있는데?”

“다행이네.”

꼼지락거리던 손이 어느새 얽혀 깍지를 만들었다. 라우더는 손바닥 전체로 구엘의 손등을 감싸 쥐며 형의 손을 느꼈다. 잠시 머뭇거리던 라우더가 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나는 형이 있어 매일이 특별한 날이야.”

“나 역시 라우더, 네가 있어서 하루하루가, 매일 매일이 특별하고 행복해.”

“정말이야?”

“그래, 물론이지.”

푸른색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진실어린 눈동자를 바라본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구엘이 잔을 내밀자 라우더 역시 화답했다. 유리가 가볍게 부딪혔다.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술 내음이 스며들었다. 잔을 맞댈수록 케이크도 야금야금 사라지고 있었다.

“라우더, 또 입술에 묻히고… 음?”

구엘이 티슈를 들고 오자 라우더는 구엘을 향해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별안간 라우더가 구엘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자, 잠깐 라우더, 너…”

“이러면, 형도 생크림, 묻었지? 내가… 닦아줄게.”

라우더가 혀를 내밀어 생크림이 묻은 구엘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핥았다. 조금 당황한 구엘이 라우더를 밀어냈다.

“라우더, 너 취했어?”

구엘은 와인병을 들어 라벨을 확인하였다. 단맛이 돌지만 꽤나 도수가 높은 와인이었다. 자신은 아직 몇 입 대지 않았지만 벌써 몇 잔이나 비운 라우더는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형~ 아까 하던 거 마저 하자면서~”

“어, 응… 하기로 했지…”

“그럼, 뽀뽀해줘. 응?”

“자, 잠깐! 그건 침대에 가서…!”

잠시 투닥거리던 둘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프론트의 눈은 어느새 그쳤지만 여전히 건물 위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제타크 저택 역시 새하얀 눈의 세상 안이었다.

+ 사진 출처 : Snow on the Farm

https://www.flickr.com/photos/80121194@N08/50773189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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