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뱁새
실화
1.
꼬맹이 시절 일입니다.
저는 옆으로 누운 채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냥 게으름 피우던 겁니다)
보다보니 콧잔등 위에 유리창 얼룩이 있더라고요.
타고난 한량답게 그대로 얼룩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무리한 컴퓨터 사용으로 난시가 피어나던 상황.
한 점에 집중하자 그 주변 상은 초점을 잃고 흐려지며...
안 그래도 흐릿하게 보이던 저의 얼굴이 완전히 상을 잃고 사라진 겁니다.
얼굴이 없어졌습니다!
목만 남기고 머리가 없어졌어요!
유리창 속의 저는 참수를 당해버렸습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는데, 초점이 바로잡히니 얼굴도 제대로 보였습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저는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아까처럼 누워서 유리창 얼룩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얼굴!
으...으아아아악!!!
어렸던 저는 큰 공포에 빠졌습니다.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
하지만 그냥 시력이 나빠져서 생긴 현상 같은데.
아마 무서워 할 필요 없을 거야.
하지만 얼굴이 없어지다니 너무 무서워!
그렇다면... 잊자.
이 일을 생각하지 않는 거야.
다른 것들만을 생각하자.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정말 까맣게 잊었습니다.
평생 요긴하게 써먹을 저의 방어기제: 망각입니다.
그렇게 해결된 줄 알았는데... 이게 웬 걸?
그 이후로 거울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심지어 그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방어기제: 망각은 강력하여, 문제를 인지하지도 못하게 했던 겁니다.
한 1년인가 2년 지났나?
어느날 거울을 보려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 언제부턴가 거울을 못 마주치고 있지 않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거울을 똑바로 보려는데,
아...안 돼. 갑자기 너무 무서워!
못 보겠어!
한 며칠을 곰곰히 궁리하다가, 너무 어처구니 없는 원인↑을 떠올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런 적이 있었지!
그런데 정말 그딴 일 때문에 아직도 거울을 못 보고 있었단 말이야?
이렇게까지 쫄보일 일인가?
어쨌든 뭐 대단한 트라우마가 있던 것도 아니니, 저는 용기를 내서 거울을 다시 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울 속 저의 얼굴이 사라지지는 않을런지요.
뚜렷하게 잘 보이고는 있지만... 목만 남기고 사라지지는 않을런지요!
지금 붙어있는 얼굴도 정말 저의 것이 맞기는 합니까?
저는 지금 누구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겁니까?
왜 날 쳐다봐?
너 누구야?
으...으아아아악!!!
변명하자면 거울이 원체 무서운 물건이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원래도 사람이랑 눈 맞추는 걸 기피했거든요?
호달달...
그래도 꾸준히 들이박다보니 두 번에 한 번 정도는 제법 무난하게 거울을 쳐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과 싸우던 어느날, 어머니의 부름.
당시 모친께서는 간호조무사 자격을 악용, 집에서 불법으로 링겔을 놓고는 하였는데요.
셀프로 본인 팔에 직접 하려고 주삿바늘을 넣고 뺄 보조를 호출하였던 겁니다.
어? 내가 하라고?
주삿바늘을... 빼고... 새로운 바늘인지 뭔지를 재빨리 연결하라고?
내...내가?
호달달 떨며 주삿바늘을 뽑아내는데, 바늘 끝에 말랑말랑한 혈관이 걸린 겁니다.
그렇게 뽑아내자...
피분수 파티!!!
으...으아아아악!!!
후들후들 떨면서 다른 주삿바늘을 간신히 연결하려는데,
잘 안 됨!
손 끝에서 여전히 선명하게 느껴지는 흐늘낭창한 혈관의 단면!!
이어지는 피분수!!!
새어나오는 링겔 영양제!!
아악!! 으아악!! 아아아아악!!!!
간신히 연결하고 나니 바닥에 어머니의 피가 흥건하였습니다.
어머니 왈, 똑바로 좀 해라.
나, 다시는 시키지 마.
아니 그런데 계속 시켜.
이미 주삿바늘 꽂아서 해야한다고 강제로 자꾸 호출함.
이번엔 잘 될까?
어림도 없지 피분수 파티!!!!
아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악!!!
혈관!! 혈관!! 혈관을 관통하거나 아예 꿰메듯이 들어가버리는 주삿바늘!!
선명하게 그려지는 말랑말랑한 혈관의 형태, 단면, 모양,
삐끗하면 찢어지는 연약한 피의 도로.
바늘구멍으로 쉴 틈 없이 힘차게 뿜어져나오는 새빨갛고 따끈하고 신선한 피, 피냄새, 뚝뚝 떨어지는 영양제, 피, 피, 피, 혈액, 혈액, 혈액, 혈관, 혈액, 혈액 속 영양분, 쓰레기처럼 낭비되는 영양분, 인간의 혈액, 피, 피, 피!!
피분수!!
목구멍에서 뛰노는 심장, 입 안까지 치밀어오른 신물, 미끌미끌한 혈액 범벅이 되어 통제가 되지 않는 손 끝, 현기증, 제멋대로 수축하고 이완하는 뇌 속 혈류.
흑....
흐으으으윽...흐어엉어엉.ㅇ.ㅡ허어으헝.흐어.ㅇ.ㅇ..ㅇ...
매번 엄청나게 질색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저를 조수로 쓰는 것을 그만두었지만은,
자꾸 뭔 직원혜택받고 공짜로 피검사 하자고 온 가족 피를 뽑거나 혈관에 뭘 주사하거나 사방팔방 링겔을 놓거나...
어느날은 냉장고를 열었는데 계란 보관하는 곳에 제 피를 담은 시험관? 같은게 떡하니 있길래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나 거울 공포증 잘 극복하고 있었는데,
이러기야?
3.
시간이 해결해줄거라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뭐 제가 전장에 있던 것도 아닌데... 피를 멀리하고 정신력을 회복하는 일상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놀라는 정도가 줄어드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지요.
맥빠지는 결말이지만 사실이 그런걸 어쩌겠습니까.
그러고보면 공포라는 건 정말 개인적인 것이고 뜬금없는 계기로 생겨나기도 하는 것 같네요.
미취학 아동 시절 생애 첫 악몽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피부가 벗겨져 근육이 그대로 드러난 집채만한 거대 아기가 파란색 피를 뚝뚝 흘리며 저에게로 기어오던 꿈이었습니다.
뭐야? 써놓고 보니까 지금 봐도 무섭네?
아마 뭐 과학 교육용 3D 인체 해부 영상 같은 걸 레퍼런스로 삼은 것 같은데...
하여튼 난데없이 그거 꾸고 엄청 기겁하여 며칠은 엄마한테 매달려 잤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에 비해 무서운 영화를 보고 놀란건 제법 개연성이 있네요.
미이라 시리즈 어느 편인가에, 악당이 지옥 구덩이로 떨어지는 장면이 있어요.
누런색 구덩이 벽면에서 수많은 손들이 뻗어나와 여기서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미지입니다.
어릴 적에 그걸 보고 얼마나 무섭던지!
그래도 뭐 모두 단발성인데다가 심각한 일은 하나도 없긴 하지요.
악몽, 무서운 영화, 난시, 야매 링겔...
모두 어른이 되고나서 극복했습니다.
크하하. 공포증 별 거 없네!
처음부터 뭐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아!
어른새,
난 이제 무서운 게 없다!
4.
피부가 벗겨진 거대 아기가 나타났습니다.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이 뭔지는 짐작했습니다.
머리가 없어지겠죠.
시야 바깥에서 초점을 잃고 스르르 사라져 몸통만 남기는 겁니다.
그런데 예상이 조금 빗나갔습니다.
머리가 몸이 뚝 하고 분리된 겁니다.
그렇게 분리된 머리가 파란색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바닥이 갑자기 훅 꺼지더니 지옥 구덩이가 되었습니다.
아기의 거대한 머리통이 그 싯누런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머리통을 향해 수많은 죄수들이 덧없이 팔을 뻗으며 허우적댔습니다.
그런데 구덩이가 이상하게 요동치는 겁니다.
흐물흐물 물렁물렁, 말랑말랑하게.
엄청나게 연약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주삿바늘이 떨어지던 아기의 머리통을 꿰뚫며 지옥의 단면을 관통하였고,
찢어진 자리에서 시뻘겋고 미끌거리는 피분수가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그 아기 얼굴,
피부가 들어나 근육만이 있던 그 아기 얼굴,
앨범에서 보았던 저의 갓난아기 시절 얼굴이었습니다.
제 얼굴이었어요.
5.
새벽에 식은땀 범벅으로 깨어났습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출근 스트레스가 저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있던 공포를 깨운 듯 했습니다.
다 극복한 줄 알았는데,
공포증 종합 선물 세트가 나와??!!?
아주 생을 아우르며 골고루 쳐나와???!?
아니... 아니... 장난쳐??
왜 뜬금없이 이러는거야?? 미쳤어??
그때 제가 느꼈던 배신감이 도대체 누구를 향했는지는 지금 생각해봐도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장편 원고 마감할 때도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끝났다 개XX들아!!" 하고 소리치고는 합니다.
그것도 대체 누구를 향해 외치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 종합선물세트 악몽이 공포증 파이널_최후_진짜마지막_최종_최종의최종.jpg 어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꿈을 꿨는데도 그것들이 무섭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아마도 공포증을 없애는 마무리 작업이 아니었을까,
어른이 되어 감당할 수 있게 되자 나름대로 무서움에 결말을 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듭니다.
아닌가?
무서웠던 일들을 되새기며 글을 쓰는데 어어 잠깐만... 날개가 왜 떨리지? 속이 왜 안 좋지?
하긴 저는 새인데,
새가 새가슴인게 문제가 되진 않지요.
6.
몇 번 말했듯이 차기작은 호러물입니다.
정확히는 가짜호러이긴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호러에로개그물이 아닐까...
그야 저는 호러와 에로와 개그를 구분하지 못하니까요.
다 섞어먹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세 장르 모두 잡지 못 한 어중간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요즘에는 그게 무섭습니다.
그리고 마감 못 맞출 것 같아 그것도 무섭습니다.
작작 쳐놀걸...
왜 자꾸 놀게 될까요?
꼬맹이 시절, 옆으로 누워 한가하게 유리창이나 쳐다보던 때부터 싹수 색깔이 영 좋지 않았지요.
발등이 활활 타오르고 나서야 글을 좀 써보려는데,
공포...공포라... 공포증 뻘글이나 쓸까.
이러고 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무서워 해야 할 건 저 무슨... 뭐시기들이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으흑흑...
몰라 일단 졸리니까 잘거야.
악몽을 꿀지도 모르지만?
음...
방어기제: 망각 발동!
몰라!! 다 까먹었어!! 다 까먹을거야!!
누울거야! 쉴거야! 계속 누워있을거야!!
계란만한 뱁새가 떼쓰며 떼굴데굴 굴러가는 걸 상상해보세요.
그게 저입니다.
이게 어른새의 언행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만 줄이고 쳐자겠ㅅ브니다. 슬슬 눈꺼풀이 감김...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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