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즈 홀 1부

그 많던 바나나는 누가 다 먹었을까

거기 앉아. 들어봐. 다 말해줄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아무도 체셔캣한테서 내용 없는 엽서가 왔을 때 부터가 좋겠지.

엽서는 비어있었지만 나는 체셔캣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어. 때가 온 거지. 꽃을 한 아름 챙겨서 체셔캣을 찾아갔어. 체셔캣은 공동묘지를 거닐다 리리의 무덤 앞에 앉은 채 귀를 축 늘어트리고 있었거든.

리리, 아론, 시우… 내가 알고 네가 아는 그 애들은 전부 죽고 나와 체셔캣 단 둘만 남았으니까. 꽃들을 무덤 앞에 하나씩 놓고 있는데 체셔캣이 눈물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자기는 파이터즈 홀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거야. 이 '캐릭터'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대. 그야 그렇지. 게임이잖아. 누가 '진짜로' 죽으면 안 된다고. 한 번 졌다고 다시는 그 캐릭터를 못 쓰면 그건 격투 게임이 아니지, 현실이지….

내가 이 게임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 게임은 현실이 된 거야.

파이터즈 홀에 빨려들어간 인간들은 소원의 돌을 얻기 위해서 서로 진짜로 죽여버렸던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나는 파이터즈 홀 세상을 사랑하니까, 서로 죽이게 놔둘 수 없었어. 그래서 서로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였어. 하나하나 목 매달아 죽인 다음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을 땅 믿에 묻었어. 한 명도 놓칠 수 없었어… 나랑 체셔캣 둘만 남을 때 까지.

체셔캣이 먼저 나한테 소원의 돌을 내밀었어. 가지라고. 자기는 근원의 악마도 뭣도 아니고, 그냥 이 세계에 종속되어 만들어진 생명체인 걸 알았으니까 이젠 필요 없대. 그리고 뛰어내렸어.

세상에 한 명만 남으니까 파이터즈 홀이 붕괴하면서, 그제야 소원의 돌이 활성화가 되는 거야.

혼자만 남았는데 내가 무슨 소원을 빌겠어. 시간을 되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지. 여기서부터 복잡해져. 타임 패러독스가 터져. 터졌어. 터질 거고. 터지고 있거든. 무슨 시제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게, 소원의 돌이 착착 알아서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나와 소원의 돌이 일체화 되어서, 나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거였어. 무슨 차이인가 싶겠지. 그러니까… 파이터즈 홀 세상을 새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준 거야. 나를 근원의 악마로 만들어 준 거지.

나는 파이터즈 홀이 만들어지기 전의 시간대로 되돌아왔어. 거기서, 내가 아는 파이터즈 홀 세계, 내가 가장 좋아하던 그 게임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냈어. 도트로 찍혀있던 그 맵 그림을 떠올리면서 빌딩을 세우고 모래를 깔고 구름을 배치했어. 체셔캣도 내가 진흙 뭉쳐서 만들어 낸 거야. 죽기 몇 년 전에 샀던 '쉽게 만드는 피규어 첫걸음' 에 뭐라 써있었는지 간신히 떠올리면서. 다행히 악마가 되고 나니까 없던 손재주가 생겨나더라. 진짜 고생했어… 최애캐인데 허투로 만들 순 없지.

체셔캣은 악마인 내가 만들었지만, 다른 애들은 악마가 만들었단 설정이 아니잖아? 그래서 여러 우주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아는 그 캐릭터들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데려왔어. 당연하지만 비슷하다 해도 완벽하게 똑같진 않아. 예를 들어 분홍색 호랑이 수인 같은 건 어디를 뒤져봐도 없더라. 그래서 뭐… 염색 좀 하고. 기억 좀 손보고. 팔이 몇 개 더 달려있으면 자르고, 아가미로 숨쉬면 틀어막고… 아! 특히 이름은 전부 바꿨어. 제각각 다른 세상에서 건져오는 데 고생 좀 했지. 악마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야. 나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죽일 아이들… 죽였던 아이들….

그리고 너.

원룸 아파트에 틀어박혀 종일 게임하던 너 말야. 외출이라고는 파이터즈 홀 행사밖에 안 나가던 너!

나는 이미 근원의 악마가 되어버렸으니, 새로운 '주사랑'이 필요해.

어차피 너도 내가 애써 만든 파이터즈 홀 세상을 망치고 캐릭터들을 다 죽여버릴 테지만 말이야…!

주사랑, 내가 너를 만들었어. 내가 알던 그 외관대로 너를 고치고 이름도 바꾸고 기억도 손 볼 거야. 지금 나의 외관도 이전의 내가 만든 거거든. 내가 나를 만들었어. 내가 나를 낳은 거지. 최초가 없어. 영원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만들어…. 우린 시간 속에 갇힌 거야.

너를 완성하고 나면, 나는 힘이 다 해 소멸하겠지. 소원을 이뤘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너는 영문도 모른 채 자다가 죽어서 이 세상으로 완전히 빨려들어 오겠지.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 처럼 한 명 한 명 죽이고 혼자 남아 근원의 악마가 되어 다시 세상을 만들거야. 우리가 이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숫자로 셀 수는 있는 걸까? 이 자기완결적 테라리움 속에서….

"음."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내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미소년을 쳐다봤다. 전체적으로 겨울 톤을 의식한 듯한 신비로운 백발 벽안 미소년…. 머리에 바보털이 하나 삐져나와 있는데 그게 그의 기분에 따라 휘어지고 구부러지는 듯 했다. 생김새에서 익숙한 느낌이 난다. 파이터즈 홀 4편 즈음에 신캐가 출시된다면, 딱 저런 모습일 것 같다. 내가 애지탈로스 회사의 메인 원화가 취향을 잘 알거든.

그래서 미소년이 뭐라 말하는 동안 거의 얼굴만 감상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곧 알게 될 거야."

미소년이 웃었다. 이름이 뭐랬더라? 쟤 아까 자기 입으로 자기가 근원의 악마라 하지 않았나?

나는 심각하게 팔짱을 끼웠다.

"근데 네가 말하는 도중에 눈치챈 건데, 이거 꿈이지?"

"후후."

"나는 그… 자각몽이라는 걸 꾸고 있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깨고 나면 잊을 테니까."

"아니, 꿈이면, 뭐랄까… 예를 들어 하늘에서 돼지가 비처럼 쏟아진다던가, 그런 일이라도…."

말을 끝내자 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돼지가 비처럼 쏟아졌다. 분홍색 아기돼지들이 우루루 볼풀공 쏟아지듯 말이다. 아기돼지들은 탱탱볼 마냥 어딘가에 부딪치면 띠용 하고 튕겨나갔고, 졸지에 돼지 세례를 받게 된 미소년이 당황하면서 떨어지는 몇 마리를 받았다.

"얘네, 얘네 뭐야? 너 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어? 나는 과거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어."

"자각몽이 맞구나."

아무거나 할 수 있는 건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을 움직여 봤다. 무중력 상태처럼 약간 붕 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다. 나는 돼지들을 헤치며 미소년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소년의 동공이 하트 모양이다. 확실히 꿈이 맞다. 사랑스러운 미소년이 돼지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쩔쩔 맸다.

"얘들을 어쩌지? 전부 살아있잖아! 내가 창조하지 않았어. 키워야 하나?"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곤란해하는 얼굴이 귀엽다. 나는 흐흐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꿈이라면… 너를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겠지?"

"응?"

갑자기 미소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이건 내가 과거에 했던 일이지. 너의 욕망은 잘 알고 있어."

"그래?"

미소년이 돼지를 버리고 팔을 벌렸다.

"자, 죽여. 마음껏 난도질해봐. 늘 피와 폭력에서 흥분을 느꼈잖아. 수천, 수만번의 '내'가 모두 그랬듯이 말이야."

"뭔 소리야? 메이드복을 입어라!"

마법 주문 외치듯이 외치자 미소년의 복장이 귀여운 스포티 패션에서 순식간에 씹타쿠의 메이드복으로 변했다. 커다란 프릴이 잔뜩 달린 미니스커트, 장식이 과도한 오버 니 삭스, 그리고 무엇보다, 메이드 업무에는 하등 쓸모가 없는 레이스 머리띠!

몇 달 후에 나올, 5개 한정판 체셔캣 메이드복 ver. 피규어 디자인에서 따왔다.

참고로 요즘 그거 사려고 돈 아끼고 있다.

백발 벽안의 미소년이 자기 옷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야!"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린다. 슬슬 자각몽에서도 섹스가 가능한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이 미소년은 알고 있을까? 실은 그 피규어, 치마가 탈착된다는 사실.

"치마여, 벗겨져라!"

신난 나머지 좀 기묘한 주문을 외쳤는데 이것 또한 훌륭하게 먹혀 들어가서, 미소년의 치마 허리끈이 툭 끊어져, 바닥으로 훌렁 내려갔다. 그러자 미소년의 불룩한 고간을 수줍게 가리고 있던 하얀색 레이스 팬티가 드러났다. 미소년이 치마를 주워다가 급하게 팬티를 가렸다. 아까 미소년이 피와 폭력이 어쩐다 했는데, 사람을 착각한 것 같다. 나는 미소년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에서 흥분을 느낀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멈춰라!"

헐떡대며 주문을 외쳤다. 미소년의 사지가 우뚝 굳었다. 입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모, 몸이 안 움직여."

"으흐, 으흐흐, 으흐흐흐흐……. 손 들어."

미소년이 치마를 떨어트리고 뻣뻣하게 두 손을 들었다. 이 미소년은 이제 불룩한 팬티를 가릴 수 없다. 이게 바로 자각몽을 즐기는 방법이다. 평범한 섹스는 현실에서도 할 수 있다. 나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할 것이다. 말 한 마디로 미소년을 조종하는 일 말이다.

미소년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말도 안 돼. 나는 악마고, 너는 아직 일개 인간인데. 게다가… 나는 이런 변태였던 적이 없어! 나도 그렇고, 내 이전도 그렇고, 단 한 번도! 루프가 어디서 일그러진,"

"네 손으로 직접 팬티를 내려라."

"싫어!!!"

갑자기 주문이 깨진 듯 미소년이 주먹을 쥐더니, 내 명치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그리고 귀청이 터지도록 커다란 알람 소리가 나를 놀래켰다. 그렇게 퍼뜩 잠에서 깼다.

"……."

요란한 핸드폰 알람, 암막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 반쯤 날아가 있는 이불…….

진짜로 맞은 것도 아닌데 왠지 명치가 아픈 기분이다.

미소년의 팬티 안… 보고 싶었는데….

다음에 보지, 뭐.

"…?"

무슨 다음? 꿈이 덜 깼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이라는 게 다 그렇듯, 씻고 아침밥을 먹을 때 즈음에는 무슨 꿈을 꿨었는지 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몇 달 후 자다가 죽어서 파이터즈 홀 세계로 빨려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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