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십이곡
발할라 퇴계 이황의 사색
오늘의 주인공은 퇴계 이황! 이황이 발할라에서 할 것 같은 생각을 그의 가사 <도산십이곡>을 가져와서 이야기해보았어요!
연하(煙霞)에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사마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病)으로 늘거나뇌.
이 듕에 바라난 일은 허므리나 업고쟈. (도산십이곡 2)
(현대어 역: 안개와 노을로 집을 삼고 바람과 달로 벗을 삼아/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에 자연을 사랑하는 병으로 늙어가니/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이 살고자 하네.)
이퇴계. 그의 소망은 호에서부터 드러났다.
퇴계 ‘이황’은 창틀을 넘어 바람에 실려오는 매화 향기에 잠이 깼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그 시작을 알리는 매화가 그의 처소 앞마당에 피어난 모양이었다. 동이 다 트지도 않은 시각, 그는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것도 잠시 금세 잠을 깨우고, 몸을 씻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기 정돈의 마무리로 그는 늘 입던 대학점퍼를 입었다. 언뜻 캐주얼해 보이는 옷이었으나 그가 입었을 때는 어째서인지 대학자로서의 품위가 묻어났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새벽, 아직 달과 별이 빛나고 해는 동쪽에서 은은한 빛을 세상에 두르고 있었다. 섬세한 바람은 터질 듯한 꽃봉오리의 향을 실은 채 계속 불어왔다. 그 모든 풍광을 조용히 바라보던 이황은 자신의 가사 일부를 읊었다. 이곳은 자신이 원하던 삶을 주었다. 65세의 나이에 지은 시와 다른 점은, 지금은 병이 없다는 점이었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신체의 상태를 가지고, 학문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 처음엔 발음조차 힘들었던, ‘발할라.’
그는 ‘산야의 기질’이었다. 무자비한 권력에 형이 죽는 걸 보았다. 그의 시대는 또한 사화의 시대였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괴로웠다. 젊어 잘 몰랐을 때엔 관직에 나갔으나 점점 자신에게 맞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물러나는 것이 길이다 싶어 사직을 청했더니, 허락은 떨어지지 않고 거꾸로 관작과 품계만 계속 올라갔다. 주변은 “경호의 이번 행차도 소득이 적지 않았군!” “물러남을 구해 나아감을 얻고, 작은 벼슬을 사양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고 빈정댔다. 그가 원했던 방향이 절대 아니었는데도. 그는 실무행정보다 책을 읽고 산책하는 삶을 사랑했다. 그는 사색하는 인간이었다. 행동적 인간이 아니라.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 해를 바려 두고
어듸 가 단니다가 이제사 도라온고
이제나 도라오나니 년듸 마삼 마로리. (도산십이곡 10. 이하 계속; 중세국어는 현대국어로 적당히 바꿔썼습니다.)
(현대어 역: 그 당시에 학문에 뜻을 두고 실천하던 길을 몇 해나 버려 두고/어디에 가서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당시에 여던 길’은 진정한 학문의 길이다. 그걸 내버려두고 관료의 길에 빠졌는데, 결국 본령의 학문의 길로 돌아오고 나서 쓴 글이었다. 다시는 벼슬길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인간에 어긋나고 하늘과 짝하는 사람, 그것이 이황이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진실로 그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인(古人)도 날 몯보고 나도 고인 몯 뵈
고인을 몯 봐도 녀던 길 알패 잇내.
녀던 길 알패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도산십이곡 9)
(현대어 역: 고인도 날 못 보았고 나도 고인을 못 뵙네/고인을 못 봬도 그분들이 행하시던 길이 앞에 있네/가던 길이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고인과의 만남을 삶의 평생동안 고대하고 있었다. 금세에 사람이 없어 그는 옛 사람들을 연모했다. 그들에게 개인적 만남을 청하기 위해 그는 서책으로, 문장으로, 파고들었다. 특히나 그에게 주자는 가장 큰 스승이자 동지였다. 47세 무렵 그는 그를 꿈에서 만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주자서>를 일자 일구도 빠뜨리지 않고 체화시키고자 하였으며, 철학,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 사건, 주고받은 말, 그의 감회, 그의 상소까지 그 모든 것을 섭렵했다. 그런데, 죽고 나서 온 공간에 그가 계셨다.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自然)이 듣디 됴해.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됴해.
이 듕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몯하얘. (도산십이곡 4)
(현대어 역: 그윽한 향기의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자연이 듣기 좋구나/흰 구름이 산에 걸려 있으니 자연이 보기 좋구나/이러한 중에 저 아름다운 한 분을 더욱 잊지 못하는구나)
여기서의 미인이 바로 주자였다. 좀 더 넓게 해석하자면, 성현이었다. 언뜻 듣기로 후세 사람들은 이 ‘고온 니믈’ 임금을 가리킨다 해석하는 자가 많다 들었다. 그러나 이황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자신을 정철, 그 자와 헷갈려서 나온 해석이었다. 그의 미인은 임금이 맞다. 그러나 이황은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전하를 그리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주의: 이 해석은 한형조 교수님의 해석입니다. 공교육 교과에 나오는 해석과는 다르니 적당히 받아들여주세요.) 그는 단순히 주자를 공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의 애정은 도산십이곡에도 묻어난다. 주자에게 <관서>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반 이랑 네모진 연못이 거울처럼 열려 있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어울려 오가네.
묻노니, 그대 어찌 그리 맑을 수 있는가.
아득한 샘에서 싱싱한 물이 솟아 오기 때문이지.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 問渠那得淸如許 / 爲有源頭活水來.)
그리고 그의 도산십이곡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萬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萬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ㅣ사롬과 한가지라.
하말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늬 그지 이슬고.(도산십이곡 6)
(현대어 역: 봄바람에 꽃이 산에 가득 차고 가을밤에 달빛이 대에 가득하다/사계절 아름다운 흥이 사람과 마찬가지다/하물며 물고기가 뛰고 솔개가 날며 구름이 그림자를 만들고 하늘에 빛이 비치는 광경이야 언제 그칠 줄이 있으랴)
천운대(天雲臺) 도라드러 완락재(玩樂齋) 소쇄(蕭洒)한듸
만권생애(萬卷生涯)로 낙사(樂事)이 무궁(無窮) 하얘라.
이 듕에 왕래풍류(往來風流)를 닐어 므슴할고. (도산십이곡 7)
(현대어 역: 천운대를 돌아서 완락재의 기운이 맑고 깨끗한데/많은 책을 읽으며 한평생을 보내는 삶의 즐거움이 끝이 없구나/이러한 중에 오고 가는 풍류를 말해 무엇할까)
‘운영천광’과 ‘천운대’는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어울려 오가네 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온 것이다. 구름과 하늘빛이란,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비친 풍경이다. 그는 자연을 빌려 내면을 읊었다. 그리고 그 완성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실인지 그는, 사후세계로 보이는 곳에서 그 모든 성현들을 마주했다. 상상과는 조금 많이 다른 모습이시긴 했지만, 자신 또한 모습이 바뀌었는데 그분들도 바뀌셨겠지. 주자님을 마주했을 때, 무례하게도 몇 번이나 되물었던 것 같다. 주자님이 맞으시냐고. 제가 아는 그 주자님이시냐고. 너무 큰 영광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 주자님께서는 껄껄 호탕히 웃으시곤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꽤나 귀여워해 주시는 듯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얼떨떨하긴 했다. 이곳에서 벌써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주자님이라니. 진짜 주자님이라니! 내가 주자님께 직접 아낌을 받고 있다니! 때때로 벅차오를 때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심호흡했다. 그러나 차오르는 자부심과 감격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매일의 행복을 혼자 시조나 가사로 남기는 수밖엔. 누군가에게 너무 좋다고 야단법석하기도 머쓱하지 않은가.
자연 속에서 성현과 함께하는 삶. 발할라의 삶은 그야말로 소망한 그대로였다.
다른 자들은 이곳을 못마땅히 여기거나, 정체에 대해 논쟁하거나, ‘관리자’의 기준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 또한 학자인만큼 관리자의 의중이 수상히 여겨지긴 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 큰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때때로 율곡과 논쟁하고, 다산이라는 후학과 이야기하고, 서책을 깊이 파고들다 의문이 생기면 선학에게 바로 가서 여쭐 수 있는 이곳이 퍽 맘에 들었다. 열심히 살아온 포상인걸까? 게다가 자신이 모르던 세계의 사람들 또한 있고, 처음 듣는 사상들 또한 알게 되는 것은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했다. 여기서 내가 새로이 깨달은 바를 후세에 전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인데. 그는 자주 생각했다.
생각에 잠겨있는 이황의 앞으로 슬슬 떠오르는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아직 초봄이라 해가 낮게 떠, 처마 아래로 해가 들어오는 일이 잦은 철이었다. 다리에 느껴지는 온기에 그는 사색을 멈췄다. 생각에 빠져서 매화향이 더 짙어진 것도 몰랐다. 꽃봉오리는 결국 터져 해를 받으며 피어나 있었다. 그는 미소짓고는, 한 시구를 더 읊었다.
이런달 엇더하며 뎌런달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곳텨 무슴 하료.(도산십이곡 1)
(현대어 역: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고 어떠한가/더구나 자연을 버리고는 살 수 없는 마음을 고쳐 무엇하겠는가)
아이고~ 소재가 떠올라서 썼는데 거진 고전문학 해설집이네요.
발할라로 가을과 겨울을 많이 써뒀는데 봄이나 여름에서 쓸 거 없을까 고민하다 문득 이황의 도산십이곡이 생각났습니다. 이황의 인생과 사색을 따라가보는 글을 써봐도 재밌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황의 주자 덕질 경력을 고려하면 발할라 와서 주자님 뵈었을 때 너무 좋아했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고요!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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