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러스 7
공포 6913
T는 사람들과 대판 싸우고 있었다. 물건을 던지고 몸싸움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싸움은 성립하는 법이다. 세상에는 말싸움이라는 것도 존재했으니까. T는 꽤 고상한 언어로 상대를 상종 못 할 빡 대가리로 취급했고, 상대는 정중하게 T를 너무 똑똑한 나머지 사회성이 모자라고 싹 바가지 또한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 말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는데 같은 공간에 존재해야 했던 사람들은 어째 한참 전에 먹은 식사가 체해서 실려 나가거나, 창밖의 건물 수를 필사적으로 세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기는 묘기를 부리거나, 시계를 3초에 한 번씩 보며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깨닫는 중이었다.
한 명 정도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P였다. P는 지루하게 싸움을 지켜보다가 쓸만한 욕설에 맞장구를 치거나 T의 의견이 받아들여 질 쯤에 반론을 내놓아 싸움이 영원히 이어지게 만들었다. T로서는 논쟁 상대보다 더 짜증 나고 더 힘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최근에 유토피아에서 올라온 민원에 대한 안건이었다. 세상에 실로 완벽한 낙원은 없었고, 사람 사는 곳에는 어떤 방향이든 불만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가게가 너무 일찍 문을 닫는데 언제 가게에 들르라는 겁니까? 아니 내가 가게 문을 일찍 닫고 쉬고 싶다는데 뭔 상관이죠? 길거리에서 소음공해 일으키는 자식들이 너무 설쳐요! 거기 이보쇼, 음악이 없는 거리가 무슨 유토피아입니까? 당연히 무음이 유토피아지! 락은 지옥에나 있는 거라고! 애초에 다른 곳 많은데 왜 우리 거리에서 하죠? 여기가 사람이 많잖아요! 여기는 사람이 너무 적어서 문제인데 누구 놀려요? 이쪽에 유동 인구 사람 좀 늘려주세요. 에헤이, 뭔 소리야? 여기는 사람 없어서 딱 좋은데 어딜 늘려? 사람은 됐고 여기 차가 너무 많아서 자꾸 길이 막혀요. 차 규제 좀 해주십시오. 댁이 역세권으로 골랐으니 당연히 차가 많겠지! 잠깐만, 지금 내 차를 규제하겠다는 거야? 니들이 무슨 권리로?
기타 등등. 어쨌든 유토피아에서는 이 민원들에 대해 대책위원회를 설립해서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세상이란 복잡해서 이유를 안다고 해결책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속은 더 복잡하게 꼬여있어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물론 갈등을 내려놓고 회의나 진행하는 쪽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세상살이를 잘 아는 어느 회의론자가 둘을 만류하려고 했다. 아마도, 그런 의도로 말한 것 같다.
“자자. 그만 싸우고 진정들 좀 하세요. 어차피 우리는 종래에 어떤 식으로든 전부 망할 테고, 인간군상이란 죄다 글러 먹었습니다. 댁들도 나도 전부. 삶은 어차피 이따위니까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 써봐야 기력이나 빠져요. 머리카락도 같이 빠지고.”
그리고 그 말은 열심히 싸우던 T와 열심히 딴지를 걸던 P 두 사람의 신경과 자존심을 전부 건드렸다.
“뭐라고요?”
“하, 그거 무슨 소리인가요?”
둘의 대답이 겹쳤고, 둘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같은 주장을 동시에 했지만, 둘이 동조하는 순간이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P는 입술을 악물었다가 제 머리를 작게 찰랑여보며 말했다.
“글러 먹었다니. 그럴 리가. 나는 완벽한 사람이에요.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예를 들어 저 T-”
P가 비아냥거리려는 찰나에 말을 끊고 T도 반박했다.
“지금 세상이 저 사람처럼 글러 먹은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에요. 나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거든요. 내 가치를 저 사람이랑 같이 평가하지 말아요.”
P는 제 말이 잘렸음에도 너그럽게 웃으며 T에게 물었다.
“하하, 뭐라고요?”
“제가 틀린 말 했나요?”
“아뇨? 합당한 말이었어요. 확실히, 내 가치와 T의 가치가 같을 수는 없지요. 너는 나와 비교하면 좀 낮죠.”
“낫다고요?”
“낮다고요. 가치가 떨어진다고요. 21세기에 비트코인이 폭락했을 때 가격처럼요”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아까의 회의론자가 끼어들어 말을 더 얹었다.
“두 분 다 맞아요. 사실 사람에게는 가치가 별로 없거든요. 이루었다고 생각한 것도 죽으면 다 끝이지요. 돈이나 명예나 업적이나 마찬가지지요. 여기 유토피아에 있는 사람이라고 뭐 다른가요?”
회의론자는 취한 채로 떠들고 있었다. 알코올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비관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취한 사람은 겁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만일 겁이 난다면 그건 그 사람이 덜 취했다는 뜻이다. 고로 그 사람은 공포에 물들지 않은 채 계속 우울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P? 에, 그리고 그쪽? T? 라고 했나요? 어느 쪽이든 사람은 거기서 거기에 다들 글러 먹었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저희 사이좋게, 제때 죽지 못하고 남아버린 여생을 추모하며…….”
“맙소사! 선생님, 미쳤어요?”
회의론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회의론자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서류뭉치로 그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기 때문이다. 그 용자는 같이 회의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영혼을 저 하늘 어딘가에 출타시켰다가 방금 막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어쨌든 팍! 하는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회의론자가 쓰러졌고 흰 종이들이 팔락이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 용자는 흡사 살해 현장을 발칵 당한 범인처럼 창백한 얼굴로 굳어있다가 P와 T에게, 그리고 졸지에 함께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고 있게 된 대책위원회 전원에게 변명했다. 아니, 변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이분이 원래 이런 사람이 맞지만,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까지는 안 구셨는데 아마 지구에서 이송되는 과정에 잠시 충격을 받으셨는데, 히익! 방금 제가 이 말 했다는 거 비밀이에요? 아시겠지요? 이 사람 성격 진짜 꼬장꼬장해서 자기 이야기 했다고 저번에 세 시간씩이나 사람 붙잡아두고 훈수를, 히이이익! 이것도 비밀이에요! 아악! 이번에야 말로 잘리는 거 아니야? 나 몰라. 어떡해, 미쳤나 봐. 대체 내가 선생을 왜 이딴 인물로 골라서!”
변명은 패닉이 섞인 중얼거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 용자의 영혼이 또 빠져나가려고 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재발견했다.
“헉! …… 아직도 다들 거기 계셨어요? 혹시 들으셨어요? 아냐, 대답하지 마세요. 그냥 나가요. 다 나가요! 나가세요! 자, 잠시 휴식합시다! 휴식이요!”
그는 그렇게 축객령을 내리며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의외의 상황에 불쾌해하기보다는 해방에 기뻐하는 표정으로, 혹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멍한 얼굴로 사라졌다. 토론을 빙자한 말싸움에 장장 다섯 시간을 시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
“하, 짜증 나네.”
T는 자판기 앞에 서서 캔 음료를 하나 뽑는 대신 누가 버린 캔을 힘껏 찼다. 어조는 제법 차분했지만, 발에 실린 힘은 상당히 강해서 찌그러진 캔은 세게 날아갔다.
“저기, T. 그 캔이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 같은데요?”
“착각이겠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T는 그냥 하나 더 찼다. 이번에는 묵직한 돌이었다. 평소에는 그런 힘을 내지 못하지만, 이번에는 분노의 힘으로 세게 보낼 수 있었다.
“이번에 내가 맞았는데요?”
“착각이라니까요? 왜 괜히 거기 서 있으면서 그래요?”
P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지만 T는 무시하고 하나 더 찼다. 안타깝게도 마음속 겹겹이 축적된 분노는 고작 그 정도로 풀리지 않았다.
“악! 맞았다고요! 역시 나를 향해 차는 거 맞잖아요!”
T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역시 진정으로 분노를 푸는 것은 돌이나 차는 행위가 아니라 원수의 목에서 뽑아낸 비명이었다.
“후, 이제 좀 진정이 되네.”
“이봐요, T. 일부로 맞췄지요?”
“우연이라니까 그러네.”
발목을 감싸 쥐고 주저앉은 P를 내버려두고 T는 근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엉망진창이었던 아까의 ‘토론’에 대해 되짚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멍청하기 그지없을까요?”
P는 낑낑대다가 T가 앉은 벤치에 앉았다. P라고 T와 가까이 있는 행위가 달갑지는 않았지만, 발목이 아파서 멀리 갈 수가 없었다. P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서 비아냥거렸다.
“너에게 자기 지능을 비하하며 자학하는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그럴 리가요, 난 수재가 맞고요. 다만 세상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멍청해서 도무지 못 견디겠네요. 왜 내가 저들과 이런 지루한 말싸움을 해야 할까요? 내 방식이 그것들이 내세운 방법보다 효율적인데, 왜 그들은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걸까요?”
“글쎄요? 음, 나는 전혀 모르겠네요.”
P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T는 잊지 않았다. 방금 토론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T의 의견에 딴지를 걸었던 것이 P라는 걸. T는 P의 등짝을 세게 한 대 쳤다.
“악! 너 진짜!”
P는 짧게 앓는 소리를 냈고 T는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자판기 앞을 거닐었다. 즉, P가 반격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벌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이상한 작자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인간들은 다 글러 먹었고 쓰레기 같은 여생이나 영위하고 있어요. 유토피아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네요.”
발목이 아파서 빠르게 다가갈 자신이 없었던 P는 이를 악물며 딴지를 걸기나 했다.
“거기서 난 빼줘요.”
“글쎄요. 가장 헛된 삶을 사는 게 당신인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뭣 하러 꾸역꾸역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하 씨…….”
P가 T의 수명을 똑같이 깎아주고 싶었지만, 부상의 문제로 그러지 못하고 노려보았다. 그동안 T는 좀 더 걸어가서, 즉 안전거리를 더 확보하면서 말했다. 아직 마음이 답답해서 자판기 앞을 한참을 왔다 갔다 했다.
“역시 내가 최고 권한을 가지고 뒤흔드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빠를 텐데. 이렇게 지지부진해서는 결론을 대체 언제 내려요? 유토피아 다 망하고 나서? 그 안에 되면 다행이겠네요! 이곳에서 쓰레기, 아니 피라미 같은 녀석들이나 상대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P에게 대꾸할 힘은 그래도 남아있었다.
“방금 당신 다른 사람들한테 쓰레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증거 있어요?”
“내가 증인이지요. 이 말을 당신이 업신여기는 피라미들에게 전해주면 어떨 것 같아요?”
P가 발목을 열심히 문지른 끝에 일어나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T는 뻔뻔했다.
“아, 그럼 당신한테만 한 말이니까 걱정마세요.”
“뭐요?”
“정확히 당신이 쓰레기라고요.”
T는 P에게 저벅저벅 다가와 멱살을 잡았다. P에게는 다소 갑작스럽게 여겼지만, T는 갑자기 이리 구는 것이 아니었다. 만인에 대한 분노가 눈앞의 P에게로 정리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 전부 빡치기는 하는데, 잘 생각해 보니 개중에서 제일 짜증 나는 상대가 P였다. 조금 전에 회의를 가장 망친 사람이 누구던가? 제 의견이 채택될 순간에 딴지를 걸어서 전부 무로 돌린 사람이 누구던가? 그 분노가 몇 대 치는 정도로 해결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중대한 일을…… 다시 생각해 보니 별로 중대하지는 않군요. 어쨌든 방해하다니! 당신 제정신이에요? 여기가 그 미로였으면 당장 함정 장치 속에 끼워 넣는 건데.”
P는 맥없이 잡혔다. 갑자기 멱살을 잡힌 통에 아까 발목도 접질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할 말을 못 하지는 않았다.
“물론 제정신이지요. 당신 같으면 안 했을 것 같아요? 고상한 척 굴지 말아요. 우리 서로 피차 싫어하잖아요.”
정확히 그 지점이 T가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이다. T는 더 힘을 주어서 P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백안이 싸하게 빛났다.
“제가 당신을 싫어하는 건 맞지만 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을 그깟 감정으로 말아먹는 일은 저지르지 않아요. 저는 진짜로 이상향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니, 만들어낼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경고하지요, 사피르. 그깟 사적인 감정으로 날 방해하지 말아요. 제 의견을, 그리고 저를 자꾸 잘못된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요.”
P는 두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손을 부딪쳐 손뼉을 쳤다. 그걸 보는 T의 눈이 확 일그러졌다.
“이건 무슨 뜻이지요?”
“당신의 장광설이 끝난 것 같아서요. 연설이면 이쯤이 예의상 박수를 보낼 타이밍이잖아요? 아, 혹시 아직 안 끝났나요? 나는 너무 늘어지지 않고 이쯤에서 끝내는 걸 선호하는데요.”
T는 기어코 폭발했으나 P도 이 정도 도발을 하면서 아무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P는 들어 올린 손으로 T를 밀쳐 멱살 잡은 손에서 벗어났고, 도망을 쳤…….
아차, 발목.
잘못 내디딘 발목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P는 결국 넘어졌다. 도발하면서 이후에 대해서 생각은 했는데 그 생각이 완벽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P는 넘어진 채로 숨을 죽였고 T가 다가가 P를 내려다보았다.
“제 말이 장광설 따위로 들렸다는 건가요?”
“……그, 아주 조금만? 그러니까, 일부만?”
P가 위압을 느꼈거나, 그 때문에 갑자기 비굴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P는 갑자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추어 더 없이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을 뿐이다. 암, 그렇고말고.
T가 모난 눈으로 P를 노려보며 이 자식을 어디로 분리수거해야 하나, 분리수거가 가능하기는 한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까 회의하던 건물에서 아까 휴식을 결정한 사람, 즉 회의론자의 머리를 내려친 용자가 큰 소리로 외치며 사람들을 불렀다.
“여러분, 다시 오세요. 선생님은 제가 처리했어요. 회의 다시 진행 가능합니다.”
처리? P가 그 단어에 의문을 가지는 사이 T는 쳇 소리를 내며 건물로 돌아갔다. 여전히 P에 대한 분노는 여전했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돌아가서, 답답한 회의에서 또 싸워야 했다. 비록 더 나은 환경을 위한다는 말은 자기 증명의 수단에 불과할지라도. 그런데 그때 P가 뒤에서 말했다.
“저기, T?”
“뭔데요?”
“그, 내 발목의 인대가 좀 늘어난 것 같은데, 사람들 좀 불러주시겠나요?”
“…….”
“T? 무시하는 거 아니죠?”
“…….”
“T? 저기요? T? 내 말 안 들려요?”
이번 회의는 아까보다 훨씬 쾌적하게 진행될 것 같았다. 뒤에서 뭐가 좀 시끄럽게 구는데, 신경 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T는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세상은 밝았고, 만물은 아직 쓸모 있어 보였다. 참 아름다운 유토피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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