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았던 휴일, 그 이후
채이진
고도 험난했던 여행에서 돌아온 이진은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있었다. 지금 뿐만 아니라 이후로는 더욱이 지칠 예정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길어진 일정으로 인해 밀린 일정과 공부가 두 달치는 되었으니까.
바쁜 나날을 보내는 이진에게 잡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 그랬어야 할 터였다. 집중해서 해야 할 일들을 끝내도 모자랄 판에 잡생각은 무슨. 허나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자꾸 떠오르는 어느 한 사람 때문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진은 결국, 날을 잡아 제대로 고민해보기로 했다. 내가 왜 이러는가. 무엇 때문에 일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 딴 생각만 하는가.
자, 처음부터 생각해볼까. 어느 즈음이 좋으려나. 그래. 이상한 빌라로 이사갔던 때부터 시작하자.
솔직히 그때는 그다지 기억나는 게 없다. 이상한 인형이 집 앞에 있었고, 그걸 치우기 위해서 손을 댔다가, 그대로... 결국은 유진이랑 한결, 에녹이 나를 구해줬지. 고맙다는 말밖에 할 게 없네.
그러면 그 다음. 이번에도 이사를 잘못 갔었어. 테이블을 옮기다가 지하실을 발견했고, 살펴보러 들어갔다가 과거로 가버렸지. 몇 번이고 죽고, 나가기 위해서 주변을 살피고. 그 뒤에는 어째선지 애들도 따라들어온 모양이었지. ...내 탓이었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지금은. 유진이랑 한결은 울고 있었고, 에녹은 놀란 것처럼 보였어. 그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러겠지. 살면서 진짜 죽음을 겪는 인간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다기엔 내 주변에는 벌써 넷이나 더 있지만. 이때 에녹에게서 특이한 점이 있었나? 음, 잘 모르겠다.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또 다음. 에녹이랑 여행 갔던 때. 별장으로 갔고, 이후는 식사. 식사하던 중에 차고에서 큰 소리가 났지. 알렉스가 먼저 살펴보러 갔고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헬렌이 달려갔어. 그 뒤를 따라 가니까 알렉스가 차에 치여 죽어있었지. 헬렌은 벌써 자정이 지났냐며 총을 꺼내서 들이밀었고... 나는 에녹 뒤에 있었지. 에녹이 나를 뒤로 끌어당겼으니까. 보였던 건 에녹 등이랑 머리카락 정도였을까. 겹쳐 서있지 말라고, 하나면 된다 그랬는데...
나는 에녹이랑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나?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될 수 있을까? 우습게도 나는 이 질문의 대답을 알아, 그렇지? 나는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그렇다면 에녹은 왜 그랬을까. 헬렌의 총이 나가지 않았던 건 그저 운이었는데. 맞고 죽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넘어가자. 지금 당장 답을 낼 수 있는 고민이 아니야, 이건. 그 별장에서 우리는, 많은 일이 있었지. 가장 궁금한 건, 에녹이 왜 나에게 알아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는가. 에녹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음, 어쩐지 이건 답을 알 것 같아. 말해봐야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아마 에녹이 나한테 말했다면 나는 에녹이 다치는 걸 신경 쓰느라 제대로 다른 것을 살피지 못했겠지. 신경 썼을 거고, 미안해하느라 바빴을 거야. 에녹의 판단이 맞았다고밖에 볼 수 없네, 이건. ...그치만 그러다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런 걸 마냥 고맙게 여길 수는 없는데, 난.
별장에서 나오고 두어 달, 경찰 조사를 받으러 다녔어. 그러다가 하룻밤 묶어갈 곳을 찾기 위해서 모텔에 갔고, 묘한 일에 휘말렸지. 생각해보니까 참 많이도 죽었네. 열 번은 넘을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그때도 에녹은 날 뒤로 보냈네. 그렇게까지 지킬 필요 없는데. 그러다 정말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럴까. 내가 도움이 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분명.
에녹이 사람 하나를 죽였고, 그 마체테를 나에게 줬고, 돌아보다가 내가 위험할 것 같거든 또 도와줬네. 폭 안겨버렸었지, 아마. 이렇게 보니까 번번이 도움 받은 기억밖에 없어. 난 뭘 한 걸까.
자책은 하지 말까. 지금 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 뭐. 가장 중요한 건, 아마도 그때 그 댐에서 있던 일이겠지. 에녹은 마을 사람 수십을 죽이고 나를 살리는 걸 택했어. 왤까? 내가 마을 사람 수십보다 먼저라서? 내가 그들보다 가치 있다고 판단해서? ...내가 뭐라고. 마을 사람 수십보다 나를 우선한 이유가 뭘까. 에녹은, 왜 그랬을까... 단순히 친하다고 사람 수십을 죽이지는 않았잖아. 그걸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걸.
자, 그럼 이번에도 바꿔서 생각해보자. 내가 에녹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이건 고민을 하기도 전에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에녹이라면 애초에 나한테 그런 선택을 맡기지 않았겠지. 내가 수십을 죽일 틈도 없이 자기 멋대로 신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거야. 나는 에녹한테 판단을, 선택과 책임을 떠넘겼는데. 그것도 선택지 하나는 끝에 가서야 말했지. ...비겁하다, 정말. 왜 그랬을까, 나는.
결국 에녹이 나를 선택하고 마을 사람 수십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는 한참을 고민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제대로 답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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