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영화는 어때?
bjyx 단편
*5천자 분량의 아주 짧은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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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하려면 곱게 취할 것이지.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가게 앞으로 찾아왔던 날, 기억해? 그때 나는 햄버거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었잖아. 하루 종일 기름 찌든 내를 맡고 말도 안 되는 고집쟁이 손님들을 상대하면서도 일주일 후에 있을 토익 시험과 부족한 월세비를 걱정했어. 그곳에서 일하며 좋았던 건 추운 겨울에도 따듯했다는 거야.
바깥엔 차디찬 눈이 내렸고 둘러싼 목도리는 내 가난한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작은 구호물품이었어. 날씨에 비해 얇은 점퍼를 입고 나간 내 앞에 네가 보이더라.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는데 넌 몸을 작게 흔들거리며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지.
왕이보.
우연히 마주친 거라 생각했지만 네 이름을 부르니 이 추위를 녹여버릴 것 같이 해사한 웃음을 보이며 나에게 다가왔어. 두 발자국 정도 되는 거리를 경쾌하게 뛰었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다르게 진한 알코올 향을 풍기면서.
형, 이제 끝났어요?
네가 처음 뱉은 말이었어. 어찌나 고민 한 티끌 묻어있지 않은 목소리던지, 너와 이 정도로 친했던가 잠깐 의아함이 들 정도였다니까? 그때 내 표정이 어땠길래 그렇게 웃음을 터트렸나 물어보고 싶어지네.
근데 그거 알아? 붉게 상기된 너의 얼굴에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떨어져 녹는 게 예쁘더라. 나는 너를 잘 모르는데, 속눈썹에 붙어 한쪽 눈을 감는 걸 보고 왜 만져보고 싶었을까. 나는 이런 감정이 꽤나 당황스러웠어. 새하얗게 덮인 세상은 정신을 좀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아.
술을 마셨냐고 물어보니 너는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려 조금이라고 상투적인 손짓을 했어.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너는 바람에 흔들리는 부들처럼 조금씩 좌우로 움직였으면서. 나는 네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어. 물어볼까, 그저 인사를 하고 지나가야 할까 갈등했지. 우린 겨우 강의실을 오가며 인사하던 게 고작이었으니까. 아, 그래, 복학하고 첫 대면식 술자리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는 것 정도가 더 있구나. 그날 몇 마디를 했던 것 같기도 해. 술에 취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어.
저 형 기다렸어요.
내 기억의 종이배가 동동 다른 곳으로 떠내려갈 때 네가 건져올리며 한 말이었어. 겨우 인사 정도 하던 사이인데 어떻게 내가 알바하는 곳까지 알았을까 궁금했지. 고작 그런 게 말이야. 그땐 너도 답답했었나 봐. 왜 찾아왔는지 안 궁금하냐고 먼저 물음을 던졌잖아. 그 떡밥을 덥석 물어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말이야.
궁금해.
짧은 대답에도 투털 한 번 없이 씨익 웃으며 너는 말했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무척 당당하게 내뱉은 말은 오히려 내 귀를 의심하게 했지. 우리가 그런 사이인가? 보고 싶고, 그래서 무작정 찾아올 정도의 사이 말이야. 번호도 모르면서. 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질문들을 보란 듯이 짓밟으며 네가 내 차가운 손을 잡았던 걸 어떻게 잊을까. 당황할 새도 없이 내 손을 끌어당겨 걸었잖아.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나는 잡힌 손에 시선을 빼앗겼으면서도 네가 할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말이길래 이 눈 속을 뚫고 찾아왔을지, 얼마나 비밀스러운 말이길래 이 추위를 이겨내고 기다렸을지 기대됐거든. 정말 이상하지? 뭘 기대하고 왜 긴장했을까. 그리 빠른 걸음도 아니었는데 왜 심장은 점점 세게 뛰었던 걸까.
저 멀리 혼자 달음박질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아야 하는데 너는 뒷말이 없었어. 결국 꾹 닫혀있던 내 입에서 그게 뭐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지. 너의 대답은 내 상상과는 많이 달랐지만.
형, 저 이제 곧 죽어요.
장난을 치는 걸까? 너는 왜 자꾸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번 건 잠시도 참지 못하고 되물었지. 어? 하고 짧게. 그렇게 반응하고 나서도 내 머릿속에선 네가 이런류의 말장난을 하는 아이였나, 혹시 지금 너무 취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가, 뒤따라가지 못하는 요즘식 유머인가 하는 심각하고 진지한 답을 내보려 애쓰고 있었어.
대로변을 지나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오자 너의 발걸음은 조금 차분해졌어. 잠시 눈 밟는 소리만 흐르다가 네가 돌아봤지.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어서 역시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안심할 틈도 안 줬잖아.
"정말이에요. 삼일 남았나."
핸드폰으로 시간까지 확인하며 말했지.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네가 장난을 치는지, 진심인 건지 가늠해 보려 했어. 또다시 딱풀로 붙인 종이처럼 입이 열릴 줄 모르자 느렸던 걸음이 아예 멈췄어. 그때의 네 표정이 어땠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건 가느다란 내 마음에 확신을 주는 얼굴이었어. 나를 보는 시선 속에 처음으로 담겨있던 씁쓸함과 서글픔 그리고 애틋함.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속에 맴도는 문장들을 꺼내지 못했어. 나는 가끔 궁금해, 그때의 내 얼굴이 어땠는지, 나의 반응을 보며 너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가.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라도 생겨서 죽을 날을 알게 됐다는 건 비현실적이려나. 삶이 팍팍하고 숨쉬기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아니겠지? 과묵한 입과는 다르게 생각은 수다스러웠어.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해?"
비정한 물음이려나. 놀랍게도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그런 대답이었어. 너는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유쾌하게 웃어버렸지. 말을 하고도 초조했던 내가 그 반응에 안도했다는 걸 너는 알까?
말하고 싶었어요. 형한테.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유를 몰라. 네가 끝까지 숨기고 가버리는 바람에 나는 늘 궁금해해. 혹시 널 잊지 못하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면 성공이야. 인정해, 완전히 녹다운 시켰으니까. 그런데 이 게임은 계속해서 플레이돼. 나는 이유를 찾고, 너는 답을 말해주지 않지. 그래 포기한다, 어차피 이유는 알 수 없어. 이렇게 ko 상태로 있다가도 불쑥불쑥 다시 네가 생각나서 의미 없는 스타트 버튼을 눌러. 이건 미로 게임 같기도 하고 추리 게임 같기도 해. 스토리가 진해되는 게임이라면 좋을 텐데, 회사가 망해서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는 게임을 붙잡고 있는 유저 같아.
너는 그날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고 내가 끈기 있게 캐묻지 않은 탓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 그래, 그저 잘 가라는 말, 잘 자라는 말, 내일 보자는 말. 그런 평범하고 영양가 없는 대화만 나눴지. 만약 이유를 물었다면 대답해 줬을까? 무슨 일 있는 거냐고 끈질기게 붙잡았다면 상황이 바뀌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런 것들이 궁금해. 아니, 후회돼.
신발 밑창이 가려질 만큼 눈이 쌓여있던 바닥엔 우리 둘의 발자국이 찍혀있었어. 너의 운동화 자국 옆에 조금 더 작은 신발자국이 빌라 앞까지 길을 만들었고, 나는 그 큰 발이 홀로 뒤돌아 가는 건 보지 못했지.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3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복도에 나있는 창문으로 너를 봤거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더라. 한 번쯤 올려다볼 법도 한데 내가 들어간 현관 입구에만 시선이 고정돼있었어. 머리 위에 쌓인 눈이라도 털어주고 올 걸 그랬나. 날이 추우니 어서 가라고 창문 밖으로 손이라도 내저어 줄 걸 그랬나. 나는 왜 그날 일만 생각하면 후회뿐인지 모르겠다.
그만 들어가요. 잘 자고요. 내일 봐요, 샤오잔.
형형 거리더니, 너는 용감하게도 내 이름을 부르더라. 그 짧은 세 가지 중에 우리가 했던 유일한 약속은 왜 지키지 않았니? 난방비 아끼자고 냉골에 이불 둘둘 말아 누워서 코끝 시리도록 잠들지 못한 그날 밤의 고민을 너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게. 너는 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잖아. 감쪽같이 사라졌잖아. 아무도 너의 행방을 모르더라. 왜 하필 나를 찾아와서 그런 말을 했을까. 그건 나를 묶어두는 저주 같기도 하고 끊어낼 수 없는 미련 같기도 해. 너는 정말 죽었을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사람들은 그저 행방불명 됐다고만 했었지. 그러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소문으로 죽어버렸고.
너는 정말 그들의 가벼운 안줏거리처럼 삶을 끊어냈을까. 쌓이는 풍문만큼 나의 죄책감도 함께 몸집을 부푼다는걸, 그때의 너는 상상도 못했겠지. 벌써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뜩 너를 떠올릴 거라는 사실을 그때의 내가 몰랐던 것처럼.
오늘도 이렇게 발치에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너를 그리워하잖아. 그래그래, 인정했어. 나는 너를 그리워해. 후회와 죄책감, 궁금증, 미련 그런 것들이 결국엔 그리움으로 바뀌더라. 아니, 어쩌면 다른 감정들에 덮여 숨어있던 것이 뒤늦게서야 보인 걸 수도 있어.
일이 끝나고 동료들이 한잔 하자는 약속을 거절했어. 오늘같이 눈이 오는 날엔 네 생각이 더 짙어져서 웃으며 술자리를 즐길 수가 없거든. 거짓 감정으로 그곳에 앉아있고 싶지 않아. 많이 변했다고? 맞아, 너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는 더 이상 숨기고 누르며 살지 않기로 했어. 그래야 어떤 상황이 마지막이라도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지하철을 반대로 탔어.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너를 떠올리며 혼자만의 게임을 했지. 업데이트도 되지 않는 그 무의미한 게임 말이야.
퇴근할 때 떨어지던 눈송이는 어느새 쌓여 하얀 길을 만들었어. 한때 매일같이 누비고 다니던 거리를 걸으니 정돈되지 않은 발자국들 사이로 제대로 형체도 보이지 않는 내 발자국이 찍혀. 잊을만하면 오는 대학가는 그때와 많이 변했어. 아마 네가 보면 길을 헤맬 거야. 나도 올 때마다 처음 보는 건물들이 꼭 하나씩은 들어서 있거든. 건물의 모양에 따라 길도 변했어. 나는 가끔 네가 이곳에 왔다가 길을 찾지 못하는 상상을 해. 그러다 우연히 나를 만난다면 예전과는 다르게 활짝 웃고 반갑게 안부를 물어보는 것까지도.
복잡하고 시끄러운 대로변을 지나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왔어. 이 정겨운 골목을 쭉 걸어가면 10년 전의 빌라가 나와. 너와 딱 한 번 같이 걸었던 그 골목이야. 날은 그때만큼이나 춥지만 지금의 난 목도리 하나에 의지하지 않아. 마음까지 가난했던 시절과는 달라졌어.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있잖아.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져.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어느새 달리고 있어. 바닥에 찍힌 발자국 하나가 쭉 이어져있거든. 나의 발보다 조금 더 큰 발자국 말이야. 푹 눌러진 눈 위로 아직 새로운 눈송이가 쌓여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 남아있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희망 같은 것이 나를 이끌고 있는걸. 어서, 너를 놓치기 전에 더 빨리 달리라고 말이야. 다시 미련과 후회가 남기 전에 이 발자국의 주인을 찾고 싶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마침내 걸음을 멈췄어. 숨을 따라 하얀 연기가 뭉글하게 뿜어져 나와. 나는 빌라 앞에 서 있고 골목의 발자국은 둘이야. 숨을 채 진정시키지도 못했어. 하지만 나는 빌라 앞에 서 있는 실루엣을 향해 걸음을 옮겨. 왕이보, 네 이름을 부르자,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는 멈춰있던 게임이 다시 진행되기를 원해. 말해 봐, 너의 이야기를. 십 년동안 멈췄던 스토리를. 앞으로 진행될 우리의 이야기를. 장르를 바꿔도 용서할거야. 아니아니, 과거의 게임은 아예 삭제해도 좋아. 새롭게 시작될 그 어떠한 거라도 나는 기꺼이 참여할거야.
게임은 지겹다. 로맨스 영화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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