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LLEL WORLD
[D-5]
도영은 쇼핑은 이쯤이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시현을 데리고 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현은 여전히 회색정장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비싼 옷이라서 신경쓰여 죽겠는데 그걸 왜 여러 벌이나 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박도영씨, 이제 가는 거에요?? ”
“네. 가는 겁니다. 갈 때까지 푹 쉬세요.”
푹 쉬라고 그래도 이미 마음은 저세상 불편함이다. 지금은 괜찮지만 이따가 또 어떻게 될지 시현도 물론 도영까지 모를 일이다. 도영은 계속 시현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시현은 왠지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몸까지 돌려 제 걱정을 하는 도영을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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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호텔 연회장 또한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해 있었다. 아니, 다같이 건물 올릴때 연회장은 맨 윗층에 올리자고 말 맞췄나…. 왜 죄다 맨 꼭대기 층에 있는 거야….
수련 호텔은 KW호텔처럼 막 화려한 느낌은 아니었다. 심플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 이름처럼 우아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치 미술관에 온 느낌같았다. 조용하고 아늑하면서도 우아한 것이 꼭 전시회에 온 것 같아서 시현의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시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 둘 드레스 코드를 맞춰입고 들어오는 알파, 오메가들로 추정되는 인물들이다. 다들 시현과 똑같이 심플한 드레스 또는 수트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시현은 저도 모르게 도영의 팔깃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도영은 시현이 신경쓰이는 듯 그냥 자신의 팔에 시현의 팔을 올려 마치 팔짱끼는 자세처럼 되어버려 시현의 당황스러움이 배가 되었지만 도영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그런 시현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남남 커플은 흔한 일이라서 놀랍진 않았지만 처음 보는 얼굴들의 등장에 눈길이 쏟아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나보다.
도영과 시현이 엘레베이터로 걸어갈 때마다 그들을 따라 다른 알파, 오메가들의 시선이 모두 쏠려 있었다. 시현은 긴장감이 다시 올라오려는 듯해 팔짱 낀 도영의 팔을 꽈악 힘주어 잡았다. 도영은 제 왼쪽에 말없이 떨고 있는 베타를 잠시 바라보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시현을 차단시키기 위해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이 가엾은 베타가 얼마나 힘주어 자신을 붙잡고 있는지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결국 도영은 몸을 살짝 틀어 시현과 마주보는 상태로 시현의 시선을 가리는 방법을 택했다. 시현은 제 앞에 지는 그림자에 올려다 보았을 땐 도영이 살짝 찌푸린 얼굴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대로 팔 세게 잡아서 기분이 나빴나…. 시현은 저때문에 도영이 화가났나 싶어 괜히 도영의 눈치가 보여 도영의 시선을 피했다.
- 띵.
하고 들리는 엘레베이터 음성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그제서야 시현의 숨통이 트였다. 지금 이곳에서 베타는 저 혼자뿐이다. 도영이 옆에 있다하더라도 시현의 옆에 있는 도영역시 우성알파라고 불리는 자다.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제아무리 알파와 오메가들 무리 속에 있다고 한들 시현이 베타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고개를 세차게 돌려가며 정신차리자.
주문을 외듯이 말하는 시현을 도영은 제법 대단한데?라고 생각했다. 계급의 중심지에 와있는 거나 다름없는 일인데 저럴 정신이 있다니. 역시 재밌단 말이지.
-
“실례지만 누구… 신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처음뵙는 분이라서요.”
“박강우 회장 아들입니다. 옆에는 제 파트너구요.”
이 연회장의 주인공은 따로 없었으나 주인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영이 박강우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도영의 옆에 있던 시현은 절망했다.
이런 걸 말할 거면 미리 상의를 하시라구요…!
시현은 한손으로나마 얼굴을 가리려다 이건 도영에 대한 매너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간 사이만 살짝 긁고서는 손을 내렸다. 도영과 팔짱낀 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실과 바늘처럼 연회장 내내 붙어다녔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이 갔을 터였다.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커플, 그것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커플이다. 근데 그 커플의 주인공이 박강우 회장의 아들이라니. 이보다 더한 이슈거리가 없다. 너도나도 이 엄청난 이슈에 입이 근질근질한듯 도영과 시현이 지나가는 자리에서 저마다 한 입, 두 입 이 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영감이 알면 엄청 난리난리하겠네.
도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뭐가 날아올지 상상했다. 말 없이 이 초대되지 않은 파티에 멋대로 온 것은 분명 오늘 안으로 박강우 회장에게 말이 들어갈 것이다. 듣는 귀도 많고, 보는 귀도 많기 때문에 그 소문은 더 빨리 퍼질테지. 그러면 시현에 대한 이야기는 반드시 나올 것이 분명했다.
“현시현씨.”
“네?”
“아마 오늘 이후로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꽤 많이 올 겁니다. 그 전화들 절대 받지 마세요.”
“…왜 요?”
“박강우 회장의 전화일 거라서요.”
아 그렇구나…. 시현은 헙. 입을 다물고서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저번에 말한 박강우 회장한테 지켜준다, 막아준다 어쩐다 하던 이야기가 이 얘기였구나…. 저번에 보니까 진짜 무섭던데….
“걱정하지 마세요. 직접적인 영향은 없을 겁니다.”
“그, 그럼….”
간접적인 영향은 있다는 말이잖아요…. 시현은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앓으면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뿜었다. 이렇게 말없이 이러는 법이 어디있어요 박도영씨….
이렇게 또 조용히 사고를…. 조용히가 아니구나. 대형사고를 친 덕분에 앞으로의 시현의 앞날은 깜깜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이 제안을 진짜 돈만 보고 받아들인 내 죄지. 어떡하겠어….
계획은 머릿속으로 설계하고 혼자만 실행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있냐구요. 적어도 같이 애인 대행이라고 하면 파트너한테는 알려야 되는 게 예의 아니냐고…. 시현의 불만은 턱 밑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지금 여기서 한 마디라도 얹었다간 더 큰 이슈로 이어져 나가면 어떡하나 싶었다. 시현은 그저 입을 다물고 도영이 하는 행동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시현은 간곡하게 말했다. 눈빛으로. 더는 입을 열지 말라고. 하지만 그 간절한 눈빛은 도영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나보다.
저와 마주친 사람들에게 메크로처럼 또는 수식어처럼 ‘박강우 회장 아들 박도영입니다.’를 내뱉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아,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소개가 늦었군요. 제 파트너입니다.”
그야말로 핵을 쏘아올린 거나 마찬가지다. 시현도 그대로 놀라 턱이 빠질 뻔했다. 잠깐. 알파, 오메가 사이에서 파트너 의미가 뭐였더라? 곰곰히 생각하느라 시현은 도영이 저를 쳐다 보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들에게서 파트너라는 의미는….
“네. 제 약혼자 입니다.”
약혼자라는 의미였다.
미친 거 아니야? 시현은 도영이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고 싶었다.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으나 도영의 일을 망칠까싶어 일단 꾹 참았다. 이 일이 박강우 회장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시현은 자유로운 한 팔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꽈악 쥐었다 폈다.
내일부터 쏟아질 기사들과 박강우 회장으로부터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찔해져 온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순식간에 지독하게 얽혀버린 관계 속에 시현은 어디로 빠져나가야할지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다. 실제로 사람들의 시선들에 숨이 막혀올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도영은 시현의 이상 증세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시현의 팔을 잠시 떼어낸 뒤 자신의 자켓을 벗어 시현의 얼굴을 감싼 채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엘레베이터 근처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힌 뒤 무릎을 꿇어 시현의 상태를 살폈다.
자신의 일을 강행하기 위해 무리수를 던진 것은 자신도 인정하고 있고, 그것을 시현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으니 적잖이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부터 속여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약혼자라고 이야기 한다고 했다면 시현은 이 자리에 오지도, 올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돌아다니지도 못 했겠지.
“괜찮으신가요?”
“박도영씨라면…. 지금 제가 괜찮을 것 같아요?”
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도영을 노려보자 도영이 나름 미안하긴 했는지 시현의 시선을 피한 채 시현에게 덮어 씌운 자신의 자켓을 시현을 가렸다. 아무리 연회장 밖을 나왔다고 해도 이 곳은 연회장이 있는 층이므로 사람들 시선이 아직까지 있을 것이다.
이미 볼 사람들은 보았을테지만 약혼자라고 말하지 않았을 때는 최대한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도록 했다. 박강우 회장의 숨겨진 아들이라니. 제법 이슈 될 이야기이지 않는가. 그리고 나중에 시현의 존재를 밝힌 뒤 얼굴을 가리고 나오면 아무리 눈썰미가 좋다할지라도 시현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걸로 오늘 중으로 소문은 찌라시가 되어 박강우 회장의 귓가에까지 퍼지게 되어 있을 것이다. 이번엔 컵이 아니라 재떨이가 날아오게 생겼지만 그건 별 거 아니었다. 도영은 박강우 회장의 흠짓이었으므로 박강우 회장이 제 아무리 날뛰며 숨겨도 그 흠은 이미 커질대로 커져 버린 터였다.
그래도 이 떨고 있는 베타에겐 사과라도 하는 것이 옳은 도리겠지.
“먼저 미안합니다. 현시현씨.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빨리도 사과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저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 있기 때문에 시현은 도영에게 크게 뭐라고 하진 못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기라도 했었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거다. 너무 놀라서 지금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집엔 어떻게 가라고 이런 옷을 입혀두고 그런 발언까지 해서 박강우 회장에게 얼굴 도장도 찍히게 생겼다.
“그래도 진짜 너무했어요. 적어도 저한텐 알려줬어야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요했던 거였어요.”
시현은 도영의 자켓으로 얼굴을 더더욱 감싼 채 도영을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숙여 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집까지 모셔다 드리죠.”
“당연하죠. 지금 다리에 힘도 안 들어 간단 말이에요. 너무 놀라서.”
아무리 천하의 우성알파 박도영이라 할지라도 받을 건 받아야겠다. 라고 생각한 시현은 도영의 제안을 성큼 받아들이며 도영을 따라 움직였다. 도영은 따라 오려는 이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노려보았고 엘레베이터에 탈때까지 시현의 얼굴을 감싸쥔 채 최대한 시현의 노출을 막았다.
“아니, 답답해요. 박도영씨.”
“이러고 있는 편이 현시현씨에게 도움이 될 거라서 그래요. 답답해도 참아요.”
시현은 도영의 품 안에서 알파와 오메가들을 견제하는 도영의 눈빛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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