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IUM

Mission 2

834194 by 경위

※ 유혈 및 상해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가족이자 멘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조언이 있다. 그건 단지 흔한 공식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무기가 널려 있는 중앙에는 발도 들이지 말고 반대편으로 달려가. 희망에 현혹되면 안 돼.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 나도 그 빌어먹을 확률에 한 몫 걸어보게. 아마도 그는 자신이 기른 소년의 죽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24분의 1. 어쩌면 평생의 행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확률. 확률이 놓인 게임판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두 번의 요행은 없을 것이라고. 75회 헝거 게임에 자진해서 손을 든 순간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동등한 무게의 타인을 짓밟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유리관에 홀로 갇힌 채 무념한 태도로 만들어낸 계획이었다. 케일럽 윈터는 자신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관이 위로 상승한다. 닥쳐오는 인공 햇빛에는 이질감이 없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 움푹 들어간 땅. 둥글게 세워진 조공인들. 여기까지는 이미 겪어본 적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반대편 너머 저 먼 곳에서 일렁이는 물그림자는 아니었다. 불어온 바람에 짠 내가 훅 묻어나는 공기까지 아주 낯설었다. 아레나 안에 이유 없는 조형물은 없다. 이유가 없게 만들어졌더라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자신이 수영을 할 수 있는가?

짧은 의문에 고개를 가로젓는 순간 든 생각은 쓸만한 날붙이나 로프, 둘 중 하나는 있어야 살겠다는 것이었다. 기실 선뜩한 은빛으로 내걸려 있는 무기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제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중앙으로 뛰어서, 손에 맞는 무기 하나쯤을 집어 가는 일은 예전보다 쉬울 수 있었다.

자신이 위치한 곳부터 가장 가까운 무기고를 보던 중 코뉴코피아 위에서 홀로그램이 터졌다. 주노 아이리스가 보내는 메시지였다. 카운트다운에 다시 집중했지만, 그 5초를 세는 동안 실낱같은 희망이 흔들린다. 혁명이라고까지 입에 담지 않았나. 그러니 주노 아이리스는 반군이어야 한다. 아무렴 이 모든 사람을 도로 사지로 내몰 리는 없다.

그러니 어쩌면, 그가 말한 때까지만 버티면,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남는다면. 징이 울린다. 모든 이들이 달려간다. 넘어지지 않는 법 정도는 일찍이 깨달았다. 신발의 밑창이 돌에 부딪히고 짓눌렸다 떨어진다.

조공인들이 형성한 커다란 원은 점차 작아지면서 하나둘씩 와해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찌릿한 긴장에 손끝이 차가워질 때쯤이면 비로소 무기가 내걸린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코뉴코피아에 도착한 조공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무언가를 붙잡는다. 빠르게 좌우를 살핀다. 가장 먼저 도착하지는 못했으나, 다행히도 빠져나갈 길이 없을 만큼 늦은 것도 아니었다.

빠져나가서, 식수를 찾고, 은신처를 마련한다는 생각의 순서가 무색하게도… 목덜미가 섬찟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 아주 작았지만 기이하게 선명했다. 뒤이어 무언가가 공기를 가른다. 선명하고 형형한 눈빛, 그것을 왜 더 빠르게 직감하지 못했는지!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몸을 비틀기가 무섭게 옆구리가 관통하듯 찢어지고 붉은 피가 터진다. 헉, 짧게 허공을 삼키며 손을 댔던 은색 창을 붙잡았다. 무기 진열대가 흔들림에 따라 기우뚱하고 쓰러져 온통 엉망이 된다. 고통은 늦고 한기는 빠르다. 새파란 눈과 마주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푸른 빛을 본다. 장면이 빠르게 되감긴다. 이미 그와는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티토 칼리하우어와 한 여윈 청년이 날을 맞댈 때 가벼운 소란이 일었던 것을 기억한다. 작은 출혈이 있었고, 과열된 전의가 있었다. 이후 트레이를 들고 등장한 이들은 의료 지원팀이 아닌 무성인 직원들이었으니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냉병기가 철컥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흔들리는 물에 파동이 일듯 붉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매서워졌다. 케일럽 윈터가 훈련장에서 먼저 집어 들곤 했던 것은 창이다. 그럴듯한 전투 기술이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용케 그 무기가 가진 리치를 이용할 줄 안다는 것도 이미 공개된 바라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적이 있다. 대련의 여파였겠거니 생각했으나 만약 그 눈에 비치던 것이 특정한 무기에 박혀버린 어떤 과거였더라면 케일럽 윈터의 각오는 아주 부족한 것이었으리라.

가브리엘 히스! 뒤늦게 들려오는 르네 라이징의 외침으로 그 청년의 얼굴과 이름을 합쳐낼 수 있었다. 가브리엘 히스, 10구역……. 어둡고 창백한, 붉은 털가죽의, 어줍잖게 크기만 한 짐승을 잡아먹을 늑대. 이대로라면 여기서 죽는다. 그에게. 두어 발짝 뒷걸음치다 나뭇가지를 밟는다. 몸이 뒤로 기울어진다. 케일럽 윈터는 그대로 미끄러지는 대신 창대를 공중으로 던졌다. 밑을 붙잡고, 위로 올려 찌른다. 눈이면 좋다. 목의 중앙이어도 좋다. 아무리 앞뒤 가리지 않는 맹수라 한들 가는 목 따위 충분히 관통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검을 든 단단한 팔이 밀려 들어와 막아내지 않았더라면. 가브리엘 히스의 창백한 피부에서 유독 색이 짙은 상처의 궤적 위로 다시 핏방울이 튄다.

“케일럽, 이걸로 충분해!”

르네 라이징의 단언으로 핏빛 공황이 끊긴다. 창대가 중검으로 밀려나며 웅웅거렸다. 그러나 이미 창날에는 타인의 피가 묻어 손목까지 주르륵 흘렀다. 붉은빛을 보자 뒤늦게 통증이 밀려왔다. 케일럽은 빈손으로 허리를 틀어막으며 상체를 옹송그린다. “어째서?” 어째서 르네 라이징이 자신에게?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시 챙! 커다란 금속음이 울렸다. 가브리엘의 단검이 르네의 중검과 형형히 맞부딪혔다 떨어진다. 그들은 동맹이 아니었나? 동맹이 자신으로 인해 와해되었나? 아니다. 르네 라이징은 그저 언제나와 같은 본인이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가브리엘 히스는 공평한 자애에 이빨을 드러낸다. 필요하지 않다는 윽박지름이 들린 것도 같았다.

주변의 소란은 점차 커진다. 물자를 빠르게 챙겨 도망하는 사람도, 몇 번씩 합을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케일럽만이 처음 생각보다 한참은 지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는 절대 저 둘과 겨룰 수 없다. 겨루기는커녕 3초 뒤 새로운 무기를 맞고 그대로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빠르게 바닥을 훑어본 케일럽은 르네가 가브리엘을 막아내는 사이 무릎을 굽혀 가장 가까이 놓여 있던 배낭을 붙잡았다. 복부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무게였다. 그리고 완전히 등을 보이는 대신, 두어 걸음 물러나다 옆으로 뛰기를 선택한다. 케일럽이 알아내지 못했던 두 번째 사실. 10구역의 가브리엘 히스는 양손을 모두 쓴다.

다시금 바람을 찢어내고 칼날이 날아온다. 작은 단검이 손등을 찢고 떨어진다. 하필 창을 쥐었던 손이다. 케일럽 윈터는 수년간 이런 고통을 잊은 채 살아왔다. 반사적으로 손을 펼쳤다가 유일한 무기를 놓친다. 빌어먹을! 르네 라이징의 낯에 순간 난처함이 휘몰아쳤다. 반면 가브리엘 히스는 창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케일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를 짓씹었다. 돌아갈 수 있을 리 없었기에 그는 배낭을 손에 감은 채로 코뉴코피아와 평행으로 뛴다. 적어도 이번 회차의 조공인들이 어떤 대형을 이루었는지는 파악해야 이 선택이 수지에 맞았다. 몇은 도망하고 몇은 대치를 이어간다.

짧은 확인을 마치고 숲으로 꺾어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뒤에서 무언가 날아와 무릎 뒤에 처박혔다. 벼락같은 통증에 기우뚱할 뻔했지만 적어도 고꾸라지진 않았다. 몸을 숙이고 뒤를 돌았다.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제마이마 윌커스. 특이한 반항을 시각화한 듯한 선글라스 렌즈를 빛내며, 무대의 붉은 커튼을 걷어내는 자. 직접 만난 적은 없어도 그의 주변은 늘 소문으로 무성했다. 안경테의 바로 아래, 가로로 길게 그어진 흉터는 저에게도 아주 익숙한 모양새로 붙어 있었으나 그것까지 포함해서도 히죽이는 광대 같은 이. 역시나 그는 터무니없이 짓궂은 짓을 선사한 이 순간에도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흥미롭다, 라. 죽음을 앞두고 도망하는 이 상황이?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케일럽은 이를 으득 물고 면도칼의 손잡이를 붙잡아 빼냈다.

코뉴코피아의 소란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뭇가지를 헤쳐 나가면서 달렸다. 겨우 얻은 배낭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입은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같은 걸 생각할 새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뛰어 냇가를 발견하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상황이 황당하고 허탈하여 헛된 입김만 여러 번이었다. 손바닥으로 꾹 누르고 있었던 상처는 여전히 혈액을 울컥거리며 내뱉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가볍게 시야가 흔들린다 싶었는데 과다출혈의 기준점은 일찍이 충족했으리라. 조심스럽게 물을 떠올려 엉망이 된 손부터 씻어냈다. 가져온 배낭을 열어낸 것은 그다음이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물자는 고작해야 로프와 단검 하나뿐이었다.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히 눈에 익은 약초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맥이 탁 풀렸다.

케일럽은 여태 뛰어왔던 길을 돌아본다. 부상이 생긴 몸으로 다른 이들만큼 뛸 수는 없었다. 아마 이 냇가는 중앙의 지근거리에서 그쳤을 것이다. 홧홧하게 오르는 열에도 더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이 치솟았다. 사실 이미 생각의 수준도 아니었다. 연신 옆구리를 짓누르며 나무 기둥을 짚고 몸을 기대며 더 먼 곳으로 걸었다. 거기까지가 그의 마지막 의지로 한 일이었다. 


사박거리는 발소리를 듣고 혼미해졌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어디까지 왔지? 적어도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숲의 어드메에서 벗어나지 못했겠거니 생각했다. 나무 밑동에 애매하게 기댄 몸은 꽤 오랜 시간 구겨져 있었는지 온통 삐걱거렸다. 어둠 속에 채 적응하지도 못한 눈이 완전히 뜨이기 직전 뺨을 쓰는 손가락이 있었다. 엉성하게 어둠을 헤매던 눈도 그 기이한 감촉에 번쩍 뜨였다. 즐거워하는 허수아비마냥 코뉴코피아에 기울어 서 있던 남자가 코앞에 있었다.


“혹시 여기서 생을 마감할 계획인 거야?”

일견 자비를 베푸는 어른 같은 목소리에 케일럽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으키려고 했다는 말이 조금 더 가깝다. 복부에 힘이 완전히 들어가지 않아 어정쩡하게 무릎만 굽힐 뿐이었고, 나무를 짚는 손바닥의 뒤축만 껍질에 긁혔다. 이 모든 동작은 이윽고 킬킬 웃는 제마이마의 발짓에 무산되었지만.

“하지만 객기는 죽지 않을 만큼만 부려야지."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처를 입은 채로 비슷한 체구의 우승자를 쓰러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앞에서는 차라리 객기를 부리는 편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소매 안쪽에 숨겨 두었던 면도칼을 꺼내려는 찰나 수통이 내밀어져 케일럽은 혼란하고 갈급한 와중에도 말문을 잃는다. 제마이마가 호통을 치고서야 실제로 그가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뭇거리다가도 곧 마른 혀와 입술을 축이고 돌려주면 그는 혀를 차듯 말을 잇는다. “방금 일어나서 정신없는 건 알겠다만. 생각이란 걸 좀 해 봐라. 내가 널 죽일 거였음 내 창으로 찔렀지, 힘들게 물에 독을 타서 내밀겠냐고." 그러나 해결되는 의문은 없었다. 

“...우린 아마 아는 사이가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아. 케일럽 윈터. 난 네 이름하고 네가 우승했던 회차의 방송 내용 정도밖에 몰라.”

방송 내용이라도 알고 있다는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가? 하지만 경기의 내용만이 그가 내게 호의를 베푸는 쪽으로 돌아설 이유가 되는가? 케일럽은 한참 생각했다. 하지만 제마이마 윌커스의 마음가짐 같은 것을 케일럽 윈터가 알아낼 리 없었고,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


“그럼 왜 이런… 도움을 주시는 겁니까?"

“너 이거 공짜 아냐. 대가는 다 받아낼 거다."

심지어 제마이마 윌커스는 케일럽의 상처를 지혈한다. 그가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물거나 팔 안의 면도칼을 힐끔거릴 때마다 제마이마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꼴에 엄살은, 내지 그 면도칼이 누구 것이었다고 생각하냐? 같은 말들은 정말로 당장 숨통을 끊으려는 시도와 멀었으므로. 케일럽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의욕을 잃고 팔을 늘어트린 채로 고통을 견뎠다.

“붕대도 한 번쯤은 갈아야 할 텐데 그건 대충 알아서 해."

붕대 한 통까지 발치에 굴러온 다음에서야 이 일방적인 거래의 조건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빚을 ‘만들어 내’ 지워둔 것이었다. 뻔뻔한 작자라고 생각했지만 빚을 남겨둔 상태로 추후 재회하는 것보다야 마음이 나았다. 묵묵히 배낭을 열어 받은 것을 갈무리하고 나면 정신을 잃기 전 확인했던 단도가 보인다. 질 좋은 가죽으로 날을 숨긴 서바이벌 나이프였다. 그것을 꺼내 들어도 제마이마 윌커스는 여전히 이 상황이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케일럽은 몸을 반쯤 돌려 등 뒤의 나무껍질을 사선으로 긁어낸다. 11시 방향부터 만들어두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중앙 거점을 들르게 될 테니까요. 순순한 것은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가 가져갈 만한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하리라는 안일함도 있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으나 이내 수긍한다.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묻혀 사라질 때까지 케일럽은 그를 보고 있었다.

난봉꾼이라는 인상에 비해 혀가 날카로운, 그가 등장하는 프로마다 주변인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캐피톨인이나 구역 출신, 그따위 분류는 제마이마 윌커스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공평한 유쾌함과 더 공평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었으므로. TV 프로그램 안에 그와 함께 떨어지자 케일럽은 정말로 그가 어려웠다.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색도 않고, 즐거울 수 있는가?

그리고 날이 밝고, 케일럽 윈터는 유쾌의 단상 위에 오른 사람을 하나 더 만나게 된다.


“오, 그렇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 바다는 단지 미적 효용이나 식용 생물들의 거주지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이 조공인들의 걸림돌이 되겠다고 말하며 풍요의 뿔을 향해 억척스러운 손을 내뻗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두 번째 날의 정오부터요. 헝거 게임 안에서 시간은 천금이라 제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런 장관을 예상하고 내뱉을 재주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하!”

거센 물살에 몸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로프가 휘감긴 손목은 까질 듯 아파왔다. 케일럽은 물살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반대편으로 달렸으나 무릎 뒤를 다친 상태에서 거친 파도에 휘말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마이마 윌커스는 짓궂은 사람이었고, 그의 지혈은 오로지 상체의 큰 상처에 한했다. 이쯤 되면 케일럽은 그가 자신에게 어떤 시험을 부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꼈다. 머리끝까지 처박혔다 겨우 숨을 쉬기 위해 머리를 들었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손을 뻗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큰 나무의 기둥을 휘감아 붙잡고 나서야 가쁜 숨이 터졌다. 간신히 위로 기어올라 상처를 입은 부위만큼은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그나마 요행처럼 몸에 감아 두었던 로프를 같이 감아 묶은 것이 조금 전의 일이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던 중 허공의 녹색 눈과 마주치며 들려온 말이 저것이다.

어떻게 해낸 건지 모르게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있는 티토는 교묘하게 프레임 속에 잡혀 있었다. 보아하니 주변의 어떤 카메라도 티토의 흙 묻은 신발 밑창이나 계속된 물살로 젖은 바짓단을 볼 수 없는 구도였다. 그는 과장된 어투로 해일의 시작 시점부터 읊기 시작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아아, 까마득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늙은 티토 칼리하우어가 수영으로 우승한 4구역의 세네카나, 빽빽한 자작나무 숲에서 나무타기와 투척으로 우승한 쥴리 오터스와 같은 축복을 지닌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오로지 이 한 몸 무사하다는 것만이 다행이죠. 저 어린 케일럽 윈터를 보고서야 드는 생각입니다… 그가 가진 무기가 이전 성공적인 우승자로서의 데뷔의 순간과 다르다는 점만은 아주 슬픈 일이군요. 만약 긴 창이 있었다면 대포가 울린 이후 제가 가져가 아주 잘 쓰지 않았겠습니까. 아, 사회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나요? 힘 내요, 케일럽 윈터!”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케일럽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는 파티의 불청객으로 만나 자신이 허락받지 못한 회의실에 초대된-그 안의 분위기가 어찌 되었든 간에-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친분이라고 말하기에는 모자랐으나, 기실 이번 회차의 조공인들과 다 말을 섞어본 것이 아니므로 티토 칼리하우어는 그나마 안면이 있는 축에 들었고, 하물며 그는 자신에게 ‘조언’ 을 건네지 않았나? 그러나 그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인 제 목숨을 위협하지도 손을 내밀어 돕지도 않은 채 스크린을 하나 만들어낸다. 그의 눈빛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멀찍이를 넘겨보며 사회자 행세를 하던 그 시선이 다시금 케일럽에게 닿았다. 그는 과장되게 입을 벌려가며 말한다.

“이런, 8구역의 케일럽 윈터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군요. 저 거대한 통나무에 직격으로 부딪혔다가는 기절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아니나 다를까, 둘 중 하나의 결말이 그를 기다리겠죠. 부상의 과다 출혈이 도로 시작되어 빈혈로 쓰러지거나, 물살에 휩쓸려 고대하던 첫 대포를 울리거나!”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 전면의 시야를 가린 나뭇가지를 밀어내고 보면 실제로 커다란 나무 하나가 뽑혀 쓸려 내려오고 있었다. 황급히 티토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닥친 위험에 대해서는 영문도 모른다는 얼굴로 케일럽의 행동을 기다릴 뿐이다. 지체하지 않고 품 안에서 단도를 빼내어 나무의 위쪽에 박았다. 힘들게 몸을 끌어올려 위로 기어오른다. 그럼 티토는 잠깐의 침묵이 무색하게도 다시금 떠들썩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윽고 물에서부터 완전히 몸을 빼냈을 즈음, 매섭게 주변을 두들기며 통나무가 지나간다. 이어 내려오는 돌과 나뭇가지의 잔해들 역시 날카롭고 위협적이다. 티토는 다른 방향의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내젓는다. 그리고 캐피톨에서 기다릴 케일럽의 팬들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오, 그가 또다시 살아남은 것에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지긋지긋한 말이다. 아주 오랫동안 들어왔던 것처럼……. 어렴풋이 학습된 공포가 입매에 서린다.

어쨌든, 케일럽의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는 와중이었다. 그는 티토에게 어떠한 상호작용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기장의 작은 사회자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먼 곳으로 유도하며 또 다른 조공인들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유추하기 시작한다. 자그마치 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을 때까지 목소리는 끊기지 않는다.

티토 칼리하우어는 조공인들이 엉망이 된 자신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그리 인기 있는 광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광고를 보고 오시겠다며 커트하는 손짓을 했다. 헝거 게임에서 자연재해에 가까운 이벤트가 일어난 후에는 그야 광고가 삽입되는 일이 많았으나, 경기장 안의 한 조공인일 뿐인 그가 말하는 대로 광고가 들어갈 일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앞에서 날아다니던 카메라가 수풀 속으로 휙 몸을 숨기는 것을 보면 딱 알맞은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른다. 능수능란하게, 입맛에 딱 맞을 볼거리를 선사하는 조공인의 요청을 굳이 거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케일럽은 이 시기를 노려 허리를 붙잡은 채 조심히 내려왔다. 철퍽, 물에 양발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면 녹색 눈이 이쪽으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이런. 그냥 가는 겁니까?”

대꾸하는 대신 짜증스러운 얼굴을 만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방금은 뭐였는지, 이 ‘이벤트’ 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하나하나 따지고 싶은 마음만은 울컥거렸으나 어떤 말도 급하지 않았다. 케일럽 윈터는 그저 입을 다물고 절뚝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통증이 먼저였다.


비교적 물이 없는 곳을 찾아 헤매다 보니 코뉴코피아 근처였다. 케일럽은 그제야 이 지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물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낮아지는 형태겠구나 싶었다. 멀찍이서 코뉴코피아 근방을 살펴보았으나 특별히 자리를 잡고 점거한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지금의 그에게 필요할 물자가 착하게 놓여 있을리도 없었기 때문에 케일럽은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숲속으로 들어간다. 나무껍질을 긁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사실 어느 순간부터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적당히 고요한 곳에 배낭을 풀어두고 엉망으로 젖은 붕대를 풀어 헤친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되어 있던 상처 위가 흙먼지로 젖어 다시금 피가 배어나 있었다. 당연하게도 감염이 시작되었는지 피부에서 열이 나고 푸릇푸릇한 혈관이 드러나 보였다. 이를 악물며 다시금 붕대를 감아 고정했다.

수풀이 들썩이며 뜻밖의 얼굴과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들고 경계했으나 펠리시아 미첼은 별달리 응수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는 어쩐지 지친 기색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죽이거든 주머니에 있는 연고는 챙겨요. 값 좀 나가는 거 주웠다고 손해 볼 건 없잖아.”

 “……당신도 다쳤습니까?”

그 신랄한 목소리를 듣고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그를 걱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부상을 낱낱이 밝히는 꼴이었기에 케일럽은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연고통을 후원받을 정도라면 꽤 심각한 부상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펠리시아의 경우 맹목적으로 ‘응원하는’ 스폰서들이 많은 쪽이리라.

여기 앉아 봐요. 안 써먹고 싶어요? 그렇게는 안 가르쳤는데. 그는 참 태연히도 가르침을 말했다. 그러나 케일럽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언젠가 모든 조공인들에게 선사하고야 말 배신의 순간을 최대한 멀리하고 싶었다. 

“호의를 베풀어주신다면야 저도 보답은 하겠지만…… 당신을 이용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되도록 이것이 거래였으면 했다. 솔직한 중얼거림에도 펠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처 위로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통증 사이로 열이 가라앉는 감각이 얼어붙을 정도로 선명했다. 완전히 애원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 전 케일럽은 말을 돌렸다.

“…동행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있었는데, 버렸어요. 난 이용을 잘 해요.”

그래서 당신한테도 그러라고 했잖아요. 이어지는 말은 직전에 했던 말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오래전 첫 가르침을 주었을 때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작해야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있을 만큼의 과거임에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릴 적의 일이다. 그때에서부터 케일럽이 처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나-이 둘이 그 토크쇼의 자리에 함께 설 일이 영영 없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 더 나빠졌으리라- 적어도 가족과 함께 살아남아 있기는 했다. 처음으로 성공적이었을 그 토크쇼 이후로 그는 우승자로서의 생활에 곧잘 순응하며 후원자들과의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캐피톨이 이룩한 질서에 엇나가지 않았다. 라리에나 샌드와는 다르게. 펠리시아 미첼과 닮게.

그러나 펠리시아 미첼은 새롭게 말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용하기 위해 순응하는 일 말인가요.”

내리 깐 눈과 기민한 귀, 둘은 아주 쉽게 주변의 렌즈들을 알아챌 줄 아는 재능이 있었다. 캐피톨의 모두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 입이 말랐다. 왜 이제는… 그다음 질문을 쉽사리 이어낼 수 없었다. 펠리시아 미첼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는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펠리시아는 캐피톨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케일럽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당신이 가르친 행동들이 저를 지켜왔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이네요, 그건.”

일견 건조하게도 들리는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자진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가 어떤 방식으로 공기 위에 얹어지는지는 이미 질리도록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순간의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케일럽은 아연해진다. 또한 조급해진다.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고, 펠리시아 미첼의 바싹 마른 잎새 같은 목소리를 숨기고자 했다. 그런 채로도 부디 자신을 납득시켜주었으면 했다.

“당신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만두려고 하는 겁니까?” 


……케일럽. 펠리시아가 입을 달싹이다가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어라, 동행이 있구만? 사이좋게 대화하시는데 이거 내가 방해를 했나.”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지. 안 그래? 케일럽은 맹세코 이런 대치에 놓일 것이라는 생각만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물자를 되돌려 줄 약속을 한 것도 자신이고, 이곳까지 오는 길을 표식으로 남겨둔 것도 자신이었기에. 결국에는 깊은 상념에 빠져 이전의 일들을 잊어버리고 만 본인의 잘못이었다. 이틀 차가 되었으나 여전히 케일럽이 가진 것이라고 해봐야 젖고 닳은 로프의 절반과 흔한 단검, 제마이마가 주고 간 붕대, 그리고 펠리시아가 건넨 연고통 뿐이었다. 그럴듯한 거래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펠리시아 미첼이 둘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제 게 쓸 만할 걸요. 저 인기 많은 거 아시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팔을 붙잡았으나 그는 도리어 고개를 저었다. 뜻밖이라는 듯한 얼굴의 제마이마와 펠리시아를 한 번씩 보고서는 뒤로 물러났다. 그들도 할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내 말 따윈 무시할 수도 있었겠는데, 약속을 지키다니!”

조금 뒤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온 제마이마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다가왔다. 손에는 약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깜짝 놀랐지 뭐야. 넉살 좋게 덧붙이며 웃는 얼굴에 어쩐지 이유 모를 답답함이 일었다. 제마이마가 파악하기 어렵잖은 낯이었으리라. 그는 길게 목을 울리다가 장난스럽게 쿡 찌르듯 말했다.

“왜, 내가 꿈에 나와 괴롭히기라도 할 것 같았나?”

“당신은 그때 저를 죽일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당신 같은 사람과 다시 마주치는 일이 있다면 빚은 없애두고 싶었습니다.”

“빚이 없다고 다음번에도 순순히 살려줄 생각은 없는데?”

이봐, 나를 잘 피해 다니라고. 네 상처가 얼마나 나았다거나 하는 걸 내가 신경 써줄 것 같냐? 그는 퉁명스러운 기색의 케일럽과는 달리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하며 웃고, 아무렇지 않게 위협적으로 들릴 만한 말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케일럽은 제마이마 윌커스라는 사람의 앞에서 찌푸려지는 얼굴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런 것을 굳이 신경을 쓸 사람이 아니리라 생각하기 때문도 있었다. 

“적어도 제 마음의 빚은 없지 않습니까? 두 번은 마주치고 싶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뒤의 대화들은 빠르고 작게 오간다. 그러니까, 적어도 케일럽 윈터에게는 그렇다. 제마이마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평소와 같이 지껄인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벌써 이틀이 지났습니다. 고작 이틀이지. 그리고 곧 나흘째 밤이 올 겁니다. 뭔 소린지 모르겠다만? 4일째 밤에 중앙 코뉴코피아로 돌아갈 생각이 있냐는 겁니다. 그 지시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당신 역시 계획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제마이마는 몇 번의 가짜 기침으로 목을 골랐다.

“글쎄다. 어쨌든 나흘 동안은 목숨줄을 붙여 놓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잖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인터뷰 때 이번 게임을 기대하라고 잔뜩 지껄여 두었거든? 이래서야 거짓말쟁이가 따로 없는 꼴이야. 아주 큰일이야, 큰일이라고.”

왜냐면 다른 조공인들도 꽤나 몸 사리고 다닐 테니까. 네가 그랬듯이. 케일럽은 그 걱정스럽다는 표정에 무어라 답할지 모르는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었다. 작은 모닥불 따위의 광원에도 화려한 핑크빛을 두른 선글라스 뒤에서 그가 무슨 눈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는 그렇기에 앞으로도 다른 녀석들까지 들쑤셔 볼 참이며, 누가 얼마나 살아 있을지 궁금하기 때문에 중앙으로 돌아가 볼 것이라 답했다. 그리고 무언가 묻고 싶은 기색으로 입을 들썩이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넌 말하기 싫겠지? 네 계획을 알면 내가 쫓아올 테니까?”

“쫓아오지 않으셔도 분명 마주칠 겁니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를 보내려는 찰나, 어울리지 않게도 잠시간 망설이던 그가 질문한다.

“그런데 말이다, 너… 르네 라이징과 친해?”

코뉴코피아에서의 마찰을 보았나? 케일럽은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진한 선글라스 렌즈 너머를 들여다보고자 하다가 실패한다. 르네 라이징. 자애롭기에 무정한, 어쩌면 이 작은 공간 안에서 가장 강인할 자. 그가 가진 미온과 중용은 간혹 울분에 찬 이들에게 허용되지 않았기에 라리에나는 그가 반군이라는 사실을 한동안 몰랐었다. 그러나 과거가 아닌 지금, 새로운 물결이 숨통 끝까지 북받친 상황에 와서도 르네 라이징이 행동하지 않고 있을까? 케일럽은 이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았지만 적절한 답을 내기는 그보다 어려웠다.

“그 사람을 잘 알 정도로 가까워?”

“잘 안다는 말에는 여러 뜻이 있죠. 그분이 저를 아는 만큼 저도 그분을 압니다. …당신도 그렇기 때문에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까?”

어설프게 떠보듯 질문을 되돌리자 제마이마는 그저 히죽히죽 웃으며 목소리를 길게 끌었다.

“난 그 사람의 비밀을 한 가지 알지. 그가 트레이닝 센터에서 나한테 직접 실토했거든.”

단지 그렇다고만 할까? 수상한 말을 남긴 제마이마는 되물을 새도 없이 물기 어린 풀숲을 밟아가며 사라졌다. 케일럽은 묵묵한 얼굴로 서 있다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고 싫은 사람이다. 그와 전면으로 맞닿으면 속절없이 패배하게 할 것이 뻔한 사람. 영 기분이 나빴다. 고개를 돌려 펠리시아 쪽을 바라보았다. 사과할 시간이었다.


케일럽은 진심으로 미안했다. 누구에게도 동맹을 권하지 않은 이유, 어떤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모두 배신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일로 모조리 망친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열여섯의 소년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듯 쩔쩔매며 자신이 줄 수 있는 하나하나를 내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이는 펠리시아의 옆얼굴에 차차 고요해졌다. 펠리시아 미첼은 그저 타오르는 모닥불과 떨어지는 잿가루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케일럽은 무심코 다시 묻는다.

 “당신에게는 이제 필요치 않을까요?”

아무리 괴롭다고 한들 삶을 포기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같은 것을 금수 된 처지로는 몰랐다. 살아남고자 다짐한 시점부터 언제고 자신을 제외한 23명이 22명이 되는 순간이 있다면 안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유가 있다면 듣고 싶었고, 때가 있다면 기다리고 싶었다. 포기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뼈저리게 깨달은 탓이었다.

펠리시아 미첼은 익숙한 미소로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자행한다. 손바닥이 겹치고 다른 온기가 섞인다. 자연히 손등 위로 시선이 꽂힌다. 딱 붙는 경기복의 소맷단 아래, 팔뚝의 그림자가 어쩐지 흉터처럼 보였다.

“위해줘서 고마워요.”

목 안이 응어리졌다.

 “그동안 내 말을 귀담아 들어준 것도 고맙고요. 하지만,”

케일럽은 곧 이것이 예견된 슬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 내가 가르쳐준 사는 법은 구걸에 가까워요.”

앞으로는 스스로 살아볼 수 있겠어요? 이어지는 속삭임에 케일럽은 고개를 들었다. 이 기이하도록 화려한 세상에서, 안전하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 그런 것 따위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펠리시아 미첼은 단지 외나무다리 위를 한 방향으로 걸으며 천막 뒤의 공백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묻지 못했을 말이 불현듯 확신처럼 떠오른다. 당신, 펠리시아 미첼, 캐피톨의 꽃병 안, 가장 사랑받는 모양의 우승자… 탄식한다.

 “……한 번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군요.”

이어지는 헛된 바람에 펠리시아는 작게 웃었다.

 “……이래서 스타일리스트도 내게 우승할 거란 기대 없는 의상을 줬나 봐요!”

그렇게 케일럽은 따스한 졸음에서 뒤늦게 깨어난다. 타오르던 마른 가지와 잎새 위로 젖은 풀을 덮어 작은 불을 죽인 다음에는 주변을 헤매었다. 펠리시아라면 일찍이 떠나 이 근처에는 없을 것도, 어떤 흔적을 남겼을 리 없을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보이는 나무마다 그은 흔적을 내 표식을 숨기고 주변을 돌아본 뒤 모닥불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는 어떤 착각이 완전히 깨어졌음을 알았다.

케일럽 윈터는 그의 어딘가가 탁월하거나 좋은 수완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우승자가 아니다. 그가 선택하고 학습한 우승자의 방식이 정확히 안전했기 때문에 라리에나 샌드가 다른 샌드들과 달리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케일럽은 예전부터 운이 좋을 뿐이었고, 라리에나는 전혀 별개의 짐을 짊어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런 생은 생이 아니야. 너와 같은 생도 생이 아니지.” 언젠가 라리에나가 속삭였다. 그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슬픔과 죄악을 토로했다.

살아남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 자신이 태어난 땅을 밟고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저 구름 뒤에 당신이 가르친 별이 있다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남을 해치고 피를 흘려낸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가장 처음, 사람이 아닌 짐승의 길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케일럽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동이 트는 것을 보았다. 어떤 돌풍이 휘몰아치든 간에 그는 일상처럼 냉담한 얼굴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유일하게 지닌 장점이었다.


다시 한 번의 쓰나미가 지났다. 뜻밖의 조우를 마친 후-케일럽은 여전히 가브리엘을 코뉴코피아로 데려가려는 르네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청년의 목숨을 힘들여서 손수 끊어줄 이유도 찾지 못했다-, 한 번쯤 마주치면 좋겠다고 여긴 오세트 파텔까지 만난 시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조공인들이 넷째 날 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세트는 주노 아이리스를 무턱대고 신뢰하지 말라는 입장이었고 케일럽도 그에 동의하였으나, 최악보다는 희망을 갖고 싶은 것이 진실이었다.

그리고 넷째 날 오후. 티토 칼리하우어는 이전과 다르게 썩 익숙한 낯으로 여상한 인사를 건넨다. 그가 구태여 인기척을 죽이지 않았으므로 케일럽은 이 만남이 적어도 피를 부르지는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가던 길목을 막아선 티토는 케일럽이 별다른 답을 내어주지 않고 시선만을 돌려주자 흠, 목을 울리며 손톱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만인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라더니A friend to all is a friend to none. 우리의 재회가 꽤 궁색한 모양새이긴 했죠.”

그러나 머테이션이란 같은 루트를 돌곤 하지 않습니까? 말을 이어가는 티토는 한 손을 쥐었다 펼치는 동작을 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어떤 짐승의 발을 흉내를 내는 듯 과장되었던 몸짓은 쉽게 포기된다. 주변에 두른 무게가 기묘하게 무거웠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대치 아닌 대치를 하는 동안, 티토는 케일럽의 핏자국 남은 붕대가 눈속임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케일럽은 티토가 막아선 길목에서 불길한 발굽 소리를 들었다. 머테이션 떼가 한바탕 지나간 후에 케일럽은 조용히 물었다.

“티토 씨는 이 근방에서 머무르셨던 모양입니다.”

“말하자면 그렇지요. 음, 어디로 가는 길이었습니까?”

케일럽은 말하지 않고 중앙, 코뉴코피아가 위치할 방향을 가리켰다. 빛나는 녹색 눈은 구태여 오늘을 언급하지 않아도 청년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차렸으리라.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케일럽 씨와 웬일로 마음이 맞는군요.”

“저 뿐만이 아니라 아마 모두가 그럴 겁니다.”

짤막하게 대꾸한 케일럽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 보았다. 해는 금방 질 것이고, 케일럽은 머테이션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눈 앞에는 티토 칼리하우어가 있다. 꺾이지 말하라 말하던 이. 그라면 자신이 살의를 결심하는 순간마저 예측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케일럽은 입을 열었다.

“함께 움직이시겠습니까.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나쁠 것 없지요.”

그는 가볍게 양 손바닥을 마주 부딪고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나서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뜻밖의 동행을 간편하게 얻게 된 케일럽은 잠시 멀거니 서 있다가, 거리를 두고 상대를 좇는다. 상대는 낭랑하게 말하면서 걸어간다. 어차피 동행할 거라면 잠시 다리라도 쉬게 둘까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 전구가 아직까지도 쌩쌩하니 말이에요……. 아주 잠깐은 쉴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잠깐은요. 티토 칼리하우어의 말은 늘상과 같았으나, 케일럽 윈터는 이를 진심으로 바라는 기저의 공허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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