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

아스타리온 X 타한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가 바닥을 치다 못해 창문까지 두드렸다. 주점으로 들어오는 이들 모두 한마디씩 욕설을 내뱉었다. 어디 비의 신같은 건 없나? 있으면 저 불경한 놈들에게 벌을 내리고 그러는 김에 내 기도를 들어주면 좋을 텐데. 아스타리온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싸구려 와인 한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와인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고 잔소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그는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려는 쓸데없는 짓은 금방 관뒀다. 떠올려봤자 이미 사후세계에 갔을 테니.

그는 비를 피해 주점으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일행에 없어 보이면서 당장 누군가과 합석할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을 골랐고, 새 와인을 받아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달링,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데 혼자 주점에 온 거야?”

“같이 올 사람이 있어야지. 오늘 막 도시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이따위가 될 줄 알았겠어?”

“하하, 운도 없지. 심심하면 나랑 시간을 보내도 좋아.”

아스타리온은 와인잔을 살짝 밀어 그에게 권했다. 이미 두 잔이나 맥주를 비웠던 그는 흔쾌히 잔을 들었다. 과거의 누군가 아스타리온에게 지적한 것과 아주 똑같이, 그도 와인을 한번에 털어마셨다. 바 너머의 주점 주인이 작게 한숨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숨의 대상이 된 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자연스럽게 그와 거리를 좁혔다.

“잘 마시네. 달링.”

“근데 넌 왜 자꾸 달링이라고 불러?! 우리 방금 처음 봤다고!”

“하하-! 글쎄, 왤까?”

괜히 의미심장하게 대답한 아스타리온은 상대를 향해 미소만 지었다. 여행길은 힘들었고, 날씨는 안 좋고, 술에 취했고,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외지인은 쉽게 그의 타겟이 되었고, 아스타리온의 예상대로 그는 술기운에 이성을 맡기고 아스타리온이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서 몸을 붙이는 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스타리온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루한 잡담이 오가는 동안 미소와 함께 호의적이고 상냥한 태도를 유지했고, 회유의 마지막엔 늘 이렇게 말했다.

“밤이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자고가는 게 어때? 윗층에 여관이 있어.”

술에 취한 외지인은 아스타리온이 자신을 부축해서 계단을 오르는 것도 사양하지 않고 고분고분 따라왔다. 방금 도시에 도착했는데 뱀파이어에게 사냥당한다니. 정말 운도 없지. 아스타리온은 몇 시간 뒤면 자르 성의 지하로 끌려갈 사람에게 몇 초 정도 안타까움을 가져주었다. 이 사람과는 아침해를 함께 보지 못할 것이다. 깊게 마음을 둘 필요는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 아스타리온은 며칠 후면 베르기아 성으로 불리게 될 자신의 성에서 눈을 떴다. 졸았나? 시야에 보이는 건 자신의 서재였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어설프게 걸쳐져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가 책을 읽다가 잠들다니? 아스타리온은 황당하다는 듯 허- 하고 짧은 한숨을 쉬고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페이지를 들춰봤지만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꿈을 꾼 것 같지만 기억나는 건 없었다. 뭔가 시끄럽고, 복잡하고, 어지러운 장소를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가끔씩 창문까지 두드렸다. 차가운 바다 공기를 막기 위해 성벽은 두꺼웠고, 창문은 그만큼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데도 비가 들이쳐 창문에 닿으며 소음을 내는 것이다. 정원의 꽃들이 걱정이었다. …꽃은 시들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정원을 관리하는 하인이나 조금 울상이 되겠지. 그는 불필요한 걱정을 거두고 읽다 만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티 룸으로 향한 그는 하인을 부르지 않고 직접 티팟에 찻잎을 넣었다. 타한이 좋아하던 것으로 골라 넣은 찻잎에서 기분 좋은 향이 퍼져나올 즈음, 아스타리온은 타한의 침실로 향해 작은 테이블에 티타임을 준비했다.

“타냐, 일어나야지.”

캐노피를 거두자 포근한 침대에 파묻히듯 잠들어있는 타한이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굿모닝. 부드럽게 소근거리며 아침을 알렸다. 나중에 침실에 들어올 하인이 자신의 오전 업무를 빼앗은 주인을 보며 기겁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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