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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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감상하는 법은 작품을 만드는 법으로 배운다. 태초에 작품이 있었고, 그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창작의 뒤를 잇는 일이기에 그러했다. 논리적으로 타당한 창작과 해석의 역사에서 청자이자 관객, 소비자는 대부분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쉬이 이야기한다. 이런 작품을 볼 때엔 이런 시선이 올바르고 저런 작품을 볼 때엔 저런 시선이
1강. 쾌락의 불가능 쾌락은 단독적이다. 이는 주관적이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불가하느냐, 그것은 소통이다. 소통은 언어를 통해 가능하고 쾌락의 언어는 바로 욕망이다.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는 어휘가 다르다면 소통이 불가하다. 화자와 청자의 언어가 달라도 마찬가지로 소통이 불가하다. 들으려하지 않고, 말하려 하지 않아도 소통이 불가하다.
한가한 일요일 오전, 느긋한 햇살을 받으며 극히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색과 크게 다르지 않은 파자마를 걸친 채 실내용 구두로 주방을 향해 걸었다. 오로지 제 손길만이 묻은 식기와 테이블을 더듬으며 뜨거운 커피를 내리고, 그것이 식을 때까지 채광 좋은 대리석 테이블에 그저 두었다. 수려한 잔에 담긴 커피에선 이따금 햇살에 반짝이는
이 구두가 어울리는 분으로. Evening sandals by Andre Perugia, 1928-29,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156346
아침 러닝도 잊은 3월 17일의 오후, 뉴인치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한 대리석 외관의 고상한 갤러리 건물 최상층에는 <라베른 갤러리>의 주인인 에드가가 따스해진 햇살이 들이치는 와중에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필시 서류라도 들여다보다 농땡이라도 피우고 싶어진 것이다. 지금 자신이 프랑스에 있었다면 이 햇살을 만끽하며 남편 상사가 초대한 연말 파티에서 춤추던
2022.04.12. 근황 :: 자유로운 망령 제임스는 신분이 무의미한 망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낮의 삶을 그리 탐하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유령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본인의 정체성은 흐릿해졌다. 버틀러라는 이름은 그를 따라다니지 않으며, 그를 괴롭게 했던 아버지의 유언도 ‘작품이 되었기 때문’이라며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심야
2022.04.08 "입에 안 맞아?" 맞은 편에서 스테이크 나이프를 놀리는 메리가 물었다. 제 접시 위로 놓인 것은 겉면을 빠르게 불에 스치기만 했을 뿐에 가까운 레어 스테이크. 그리고 곁들여진 파인애플이다. "입 안이 자꾸 헐어서. 조금 불편하네." "익혀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파인애플을 한 쪽으로 밀어두고선 그
2022.03.26 스콜세시에게선 언제나 안개 속에 가려진 연꽃의 향이 난다. 그 연못의 축축한 물기, 그 밑으로 깔린 자갈이 끄트머리로 밀려나고, 그것 사이 사이에 이끼가 껴 습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향. 수련이지만 결코 정적이지 않고, 그보다 더한 꽃내음이지만 결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제 모습 하나 수면에 비춰보지 못하는 수
2022.03.15 " 데려가 줘. " 이런 핏빛 미소를 보고 아름답다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중 자신은 꼭 포함될 것이었지만 그 수가 많진 않기를 무심코 바랐다. 자칫 불길한 미소를 나름의 시선으로 포용하며 마주 웃는다. 붉은 입술, 그보다 붉은 미소, 그리고 미스티를 바라본다. 우연히 주어진 두 번째 삶,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다 생각하
이름이란 족쇄. 평생 뒤를 따라온 이름. 그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걸맞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림의 본질, 자신을 댓가로 까마귀의 배를 가른다. 내장이 아닌 붉은 물감. 그것이 발치를 서늘하게 적셨고, 마치 자신의 배를 스스로 가른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 비명 하나 지를 수 없는 격통이 단전을 가로질렀다. 그림에는 어떤 생명도 없다. 그러니
10년 전 하고도 꼭 닷새 전, 레미니센 저택을 걷다 마지막 꽃잎 한 장이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색깔조차 희미했던 장미꽃이 떨어지는 감각. 그나마 품을 수 있다 생각했던 무른 주석 색 꽃잎이. 잠시간 그 자리에 우뚝 서고 싶었다. 그나마도 활발하지 않았던 심박이 먿는다. 그러나 생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걸었다. 어차피 일이
"당신은 글을 써야 돼." "제임스…." 20분 가량을 말다툼만 했다. 칼리지 졸업을 앞둔 메리는 이제 절필하고, 직장을 찾을 것이라 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제임스는 차분히 마음을 굳힌 메리의 앞을 서성이며 절박한 투로, 그럼에도 특유의 정중함을 잃지 않은 채 졸라댔다. '글을 써, 메리 고드윈!' 떼를 부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메리도 제
"차이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언제나의 눈웃음. 미스티가 싫어하게 된 단정한 미소로 대답했다. 누군가와 닮기라도한걸까, 짧게 의문을 띄우곤 어깨에 얹은 발을 쥐어선 제 허벅다리 위로 얹었다. 미스티는 신장이 크니 다리를 계속 쥐고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발목을 틀어 안쪽으로 부드러운 정강이가 제 쪽을 바라보도록 방향을 고쳤다. 핏기없
버틀러 가의 로비에는 커다란 나무 조각상이 있다. 가주의 모양을 따라 만든 조각상. 1800년. '그 날' 여왕에게 받은 것이라 했던가. 그 조각상의 모습은 마치 저주처럼 모든 가주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200년 동안 대물림 되어온 형상. 항상 반으로 넘긴 머리, 섬세하게 빛나는 안경, 단정한 정장. 흐트러짐 하나 없는 완고한 모습. 그것은 버틀러
"[사랑하는 이]래요!" "제가…,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생각보다도 대답이 먼저 나갔다. 제목에 혹한 것이겠지. 바로 직전에 그림 속 낚싯줄에 묶여 고초를 겪은 것은 금세 잊은 뒤였다. 붉은 커튼을 젖히고, 그 안의 것을 확인하려 시선을 두자 그림 속엔 나의 사랑해 마지않는 이가 있었다. 붉은 머리칼, 쾌활한 주근깨, 명확한 목표를 향해 빛나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길, 인생이란 어린시절 발한 빛이 보잘것 없음을 깨닫고, 하루하루 퇴색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로 사람의 인생은 시간이 쌓여가는 것만으로도 빛이 난다. 사람의 가치란 빛나는 유일한 재능, 수려한 외모, 큰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몸에 새겨지는 이야기에 있다. 그러니 무채색으로 깜깜한 그가 투박하니 당당한 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