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조각글

[미완] 인피니토 도입부 끄적

인피니토

곡식창고 by 비달
5
0
0

사이렌이 복도에 울려퍼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그는 조그마한 창에 발을 딛고 웅크린 채 그들을 바라본다. 그의 오른손에는 천으로 된 가방 하나가 들려있다. 쇠창살이 구부러진 채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건물 안 쪽에서 울음소리인지 비명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움찔하며 건물 안 쪽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이내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린 뒤 6층 높이의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두 쌍의 날개가 촤르륵 펼쳐진다. 그의 크고 새카만 날개 두 장이 달빛에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 밑의 작은 청록빛 날개 두 장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긴장한 탓이다. 목에서부터 고통이 전해져온다. 그의 초커가 부르르, 떨리고 있다. 쿡쿡 찌르는 듯한 고통이 어깨를 파고든다. 강도는 점점 거세졌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는 참았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그를 뒤쫓으려 날아올랐다. 점들이 무리지어 나는 모습이 시체에게 달려드는 파리 떼와 같다. 그는 비행에 속도를 가했다.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높게 날아올랐다가 활강하고 숲 사이를 이리저리 날았다. 그렇게 그는 사흘간 쉬지 않고 날았다. 대부분 체력 탓에 떨어져 나갔지만 어느샌가 그들은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역시 이거 탓인가.'

이 개목걸이와 같은 초커 역시 저들이 그에게 부여한 것. 위치를 추적하는 기능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는 허공에 멈춰 날개를 한 번 휘둘렀다. 파장이 일고 그를 뒤쫓던 무리가 땅으로 떨어진다. 그는 그들이 추락한 것을 확인한 뒤 좀 더 멀리 날아가 착지했다. 발에 감각이 없는 탓에 그는 잠시 휘청였다. 그는 그 감격을 온전히 느낄 틈도 없이 생각한 바를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왼손을 들어 초커를 끊으려 세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 물체는 계속하여 살을 찢는 듯한 고통만을 전해줄 뿐, 끊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씨름하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그는 입술을 앙 깨물고 왼손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마력이 날카롭게 형상화 되더니 폭발음과 함께 초커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켁켁거리며 손을 털었다. 목과 뒤통수에 길게 상처가 남았다. 붉은 혈이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명이 울려퍼진다. 그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치유에 마력을 쏟았다. 이명이 멈추고 뒤통수의 상처가 서서히 아문다.

"저기 놈을 찾았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치유를 멈추고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목의 왼편의 상처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 허공에 날린다. 찌릿한 고통에 당장이라도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그들을 따돌렸다. 역시나 초커에 위치 추적 기능이 있었던 건지 그들은 다시 따라붙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밤이 되었다. 피를 많이 흘렸고, 사흘을 쉬지 않고 날았던 탓에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지금껏 정신력으로 버텼던 그는 그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내 날개 두 쌍이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그는 추락했다.

"난 이만 가볼게. 다들 수고해."

전체적으로 새카만 색이지만 말단부는 붉은 색과 하얀 색이 섞인, 독특해 보이지만 이곳에선 흔한 머리색을 지닌 장신의 사내가 다른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언듯 보면 사나운 인상을 주는 날카로운 눈매가 둥글게 휘어진다.

"네,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선배라 불린 그 남자의 이름은 라온. 지금은 사정이 있어 무대에 오르지 못하지만 불과 재작년까지만 해도 연극계의 샛별이라 불리던 젊은 배우였다. 그는 다음달 무대를 서는 후배들의 연습을 돕기 위해 잠시 들린 터였다. 물론 그보다 훨씬 오래 이곳에 발을 담군 선배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쁘고 라온은 한가하였기에 그가 이렇게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온은 이렇게라도 연기를 계속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 같았다.

라온은 나가기 전 거울 앞에 서 머리를 풀었다. 새하얀 머리 끝이 어깨에 닿아 찰랑인다. 그는 머리를 도로 묶으려다 거울을 빤히 바라본다. 찬란한, 전성기의 그가 거울에서 어른거린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분명 연극계의 주목을 받던 시절이었다.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지만 오를 수 없다. 라온은 고개를 흔들어 과거의 환상을 지워버렸다. 그는 머리를 묶고 밖으로 나섰다. 그의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

밖에 나서자 달이 라온을 맞이해주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푸르른 보름달이다. 그 푸른 달빛에 라온의 하얀 머리 끝과 날개가 푸른빛을 띈다. 라온은 스산한 공기에 아침에는 더워 벗었던 겉옷을 다시 걸친다. 그는 겉옷의 끈을 동여메고 날개를 펼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역시나 밤공기는 찼다. 한참을 날던 라온은 집에 거의 다오자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쿵.

무언가 묵직한 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라온은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의 생명체가 3m 남짓 되는 나무 아래서 꿈틀거린다.

"음…?"

라온은 그것이 어떤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생명체일 거란 생각 때문에 무시하고 제 길을 가려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그 생각이 스쳐지나가자 라온은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곤란한 사람을 보면 선행을 베풀라고 배워온 그였다. 사람이 크게 다쳐 저리 된 것이라면 분명 응급실에 데려다 주어야 할 것이다. 라온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며 그것에게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 곳에는 흑발의 사내가 누워있었다. 추락하며 나무에 긁힌 것인지 옷 여기저기가 찢겨져 있고 살에도 잔성처가 가득하다. 다음으로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랗고 새카만 날개가 한 쌍, 조금 작은 청록색 날개가 한 쌍. 총 두 쌍이다.

 "…사람이 맞나…?"

그도 그럴 것이 두 쌍의 날개는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라온과 같이 깃털 날개를 가진 사람들, 아비에는 날개를 한 쌍만 가지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비닐막 날개도 아니고 깃털 날개인데도, 그 의문의 사내는 날개가 두 쌍이었다. 사람의 형태를 한 몬스터일까? 라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이 자신을 공격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라온은 천천히 그것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것의 작은 날개 한 쪽이 부러져있다. 그 고통에 쉽게 일어서지는 못하리라.

라온은 응급실에 연락을 하기 위해 창을 띄웠다. 반투명한 스크린이 허공에 떠올랐다. 저 이의 정체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자신은 응급대가 오기 전까지 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될테지. 그 순간에 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연락… 하지 마…."

라온은 놀라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사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쁘게 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이 정도… 스스로 치유… 수 있습니다. 내버려두고 갈 길 가…랍니다…."

 "사람이에요?"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후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나무에 기대었다. 그는 호흡을 정리하려는 듯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더니 다시 말을 잇지는 못했다. 라온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사내를 빤히 보았다. 첫 마디부터 위협적인 어조. 라온은 그 탓에 겁을 먹었다. 라온은 돌아서 제 갈 길을 가려다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다친 이를 모른 채 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라온은 사내 앞에서 손을 휘저어보았다. 그럼에도 사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라온은 그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뭐야?"

사내를 업은 채 집에 돌아온 라온을 보자 그의 아내, 네블리가 한 첫마디였다.

"음~ 다친 사람?"

"그러니까 다친 사람이 왜 네게 업혀있고, 왜 우리 집에 있냐는 거지. 그것도 난생 처음보는 사람이. 네 친구 중에 이런 사람 없었잖아. 아니야?"

"나도 오늘 처음 본 사람이야."

"처음 본 사람을 왜 데리고 돌아온 건데?"

"지나칠 수 없었어."

"응급대를 불렀으면 됐잖아."

"그럴 수 없었어."

네블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그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쫓아낼까 걱정이 되었다. 네블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라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손님방에 눕혀. 네가 다 사정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뭐."

그는 라온을 거실에 둔 채 방으로 쏙 들어가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너 거실에서 자."

방문이 닫혔다. 저 말은 네블리가 라온에게 화가 났을 때 하는 말이다.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지도 않은 채 집에 돌아와서 화가 난 걸까. 하지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었단 말이지. 라온은 그리 생각하였다. 그는 한 번 끙, 앓더니 사내를 손님방으로 옮겨 눕혔다. 사내는 이제 잠들었는지 규칙적으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라온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찢겨나간 옷이 신경 쓰였다. 응급처치도 하고 갈아입히기도 해야할까? 그러나 라온은 왜인지 깨름칙하였다. 수상한 사내의 몸에 손을 댈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결국 라온은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방을 나왔다. 그는 손님방 문을 살포시 닫고 침실의 문을 두들겼다.

"저… 네블리?"

응답은 없었다. 라온은 다시 한 번 끙, 앓더니 거실의 소파로 가 드러누웠다. 라온은 사내가 누워있는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잘한 짓인가 모르겠네."

라온은 저 사내를 내일 어찌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잠에 들었다.

 "왜 떠났어요?"

흑발의 사내는 뒤돌아보았다. 그의 동료가 서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 혼자 살자고 떠난 거에요?"

"아니, 아니다. 절대 아니다."

회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의 동료는 사내를 보며 울먹였다.

"그리도 이기적인 사람이었군요. 한 때 형을 따랐던 것이 후회되네요."

"아니다. 나는…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눈 앞이 아득해진다. 사내는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의 동료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눈이 떠진다. 낯선 천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도무지 이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잃고 추락했지. 그리고… 키가 큰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어딘가에 연락하려는 것 같아 제지했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사내는 그제야 이 곳이 어딘지 유추할 수 있었다. 익숙한 곳이 아닌 것을 보니 결국 남자는 연락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곳은 그 남자의 거처일까? 사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 왼쪽과 오른쪽 작은 날개가 욱신거린다. 그는 스탠딩 거울 앞에 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꼴이."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사흘을 쉬지 않고 날아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떨어지며 긁힌 것인지 찢어진 옷 사이로 잔상처가 보였다. 그 스스로 내고서 미처 치유하지 못 한 목덜미의 상처는 딱지가 덕지덕지 앉았다. 분명히 흉이 질테지만 치유하기엔 늦었다. 그리고 작은 날개는 추락하며 꺾였는지 부러져있다. 사내는 억지로 날개를 펴보려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어 그만두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어제 보았던 그 남자, 라온과 화려한 생김새의 남자다.

"아, 일어나셨네요."

라온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병원을 가는 것은 꺼려하시는 거 같아서 치유에 능한 친구를 데려왔어요. 이 정도는 괜찮으시죠?"

사내는 라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멋드러지게 올린 주황빛 머리와 둥글고 큰 눈을 가진 라온의 친구, 앙뇨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음… 반가워요. 치료를 해드리려고 왔어요."

사내는 앙뇨가 내민 손을 빤히 보더니 시선을 돌려 자신의 허리를 살펴보았다. 앙뇨는 머쓱해하며 손을 집어넣고 침대에 자리잡고 앉았다. 라온과 앙뇨는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사내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앙뇨가 그를 부르며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사내는 그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도로 거울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저…."

라온이 작게 사내를 불렀다.

"도움은 필요없었습니다. 이 정도는 혼자서도. 금방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제 그 곳에 두고 왔어도. 난 멀쩡했을 겁니다. 너의 행동은."

사내가 라온을 올려다 본다.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내의 청록색 눈동자가 싸늘하기만 하다. 라온은 그 눈빛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라온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라온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다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자신의 큰 날개를 조금 펴보았다 접더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주위로 푸른빛이 피어오른다. 안 그래도 큰 앙뇨의 눈이 더 크게 떠진다. 사내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살랑이더니 잔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상처가 아물고도 한참동안 빛이 피어오르더니 목덜미 상처의 딱지가 다 떨어지고 새 살이 돋았다. 그 자리에 흉터가 길게 남았다. 빛이 사그라든다. 사내는 작은 날개를 조심스럽게 펼치더니 만족스러운 듯 다시 접는다.

"…치유술을 쓸 줄 아시는 군요?"

앙뇨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답했다.

"완전히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둡시다."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망토. 어디에 있습니까?"

"아, 답답해 보여서 그것만 벗겨 따로 두었어요. 지금 빨래 중이에요. 그리고 이거는 제 옷인데 당신 옷이 너무 지저분해서… 갈아입으시라고 가져왔어요."

"망토. 망토를 돌려줬음 합니다."

 "아… 아직 물빨래 중인데…."

사내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앙뇨는 놀라 움찔하였다.

 "…돌려 받을 때까지만 여기에 있을 겁니다."

라온은 옷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사내가 그를 올려다 본다.

"당신은 이름이 뭐에요? 어쩌다 그런 상처가 생긴 거에요? 당신은… 시빌의 구성원인가요?"

앙뇨가 긴장한 표정으로 라온을 올려다 본다. 아까 집에 들어오기 전 라온과 자신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앙뇨."

"오, 무슨 일이야? 뭐길래 전화까지 했어."

"집에 환자가 있어."

"에엥. 그럼 병원에 가면 되지 왜 굳이 멀리 있는 나한테 전화를 해."

"…일단 와 줘. 오면 설명해줄게."

그리하여 앙뇨는 라온의 집에 오게 되었다. 그가 도착하자 라온이 그를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시빌의 단원인 거 같아."

"뭐?"

어제 소파에 누워 골똘히 생각해 본 라온이 내린 결론이었다. 공공기관에 연락하기를 꺼리는 모습. 여기저기 다친 모습. 신문에 자주 등장하던 시민 혁명단, 시빌이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 기관인 뷔에르의 불합리한 대응들에 반항하는 단체. 그리고 그들을 잡기 위해 뷔에르는 날을 잔뜩 세우고 있다. 만약 그 사내가 시빌의 단원이라면 왜 외부에 연락하는 것을 꺼리는지 이해가 되었다. 병원에 간다면 뷔에르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무슨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라온은 조심스러워졌다.

"알잖아. 난 그런 거에 연관되면-"

"알아. 하지만…."

앙뇨는 라온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더이상 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로서, 그의 아픔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앙뇨였다. 비록 밀리고 한없이 스러져가는 혁명 단체였지만 그들에게 희망을 거는 라온을 짓밟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알았어. 상태 좀 보자고." 

앙뇨가 조금 웃으며 답했다. 혹자는 그리 말할 것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이 뛰어들면 될 것을 왜 라온은 멀리서 그들에게 희망을 걸기만 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라온은 이미 두 차례의 좌절을 겪은 이였다. 그렇기에 마음이 무너져 있는 그에게 혁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악독한 일이었다. 이렇게라도 작게 도움을 주는 것이 지금의 라온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의 편이니까요."

라온이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피식, 웃더니 답했다.

"내가 그 자들이랑 같다고 하는 겁니까? 그들은 오합지졸에. 한 가지밖에 모르는 멍청이들입니다. 그런 이들과 한 패라고 여겨졌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라온의 표정이 굳어진다. 사내는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뭐, 일반인들에게는 그 정도 정보가 전부이겠지만 말입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내가 뭐 하나 보여주겠습니다. 이걸 보고 나면. 분명 그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겁니다. 그들은 멍청이일 뿐이라는 것을."

사내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어갔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뭐, 날 도와준 보상이라 해둡시다."

사내는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다가 라온을 보았다.

"…내 가방 어딨습니까?"

"그…런 건 본 적이 없는데요."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못 봤습니까? 어제. 못 봤습니까? 푸른 천으로 된 가방인데."

"네."

사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기요… 이제 일어나시는 게…."

"말 걸지 말았으면 합니다."

사내는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있다. 벌써 10분 째다. 라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사내에게 말했다.

"유라온이라고 해요. 그 쪽은…?"

사내는 침대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이다. 그는 라온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를 하는 것인지 라온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갖고 나왔는데…."

"찾는 거 도와드릴까요?"

라온이 말했다. 앙뇨는 깜짝 놀라며 라온의 팔을 붙잡았다.

"위험한 일이면 어쩌려고 그래?"

"날 그렇게 보고 있던 겁니까."

사내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뭐. 위험하다면 위험한 사람은 맞지만. 그래도 좀 서운합니다."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서운하다 하는지. 먼저 차갑게 대한 게 누구인데. 앙뇨는 그리 생각하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인지 라온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튼. 도움은 필요없습니다. 혼자 찾을 수 있습니다. 망토나 주었으면 합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에 젖어 축축한 망토를 들고 돌아왔다. 그는 망토를 펼쳐 들었다. 라온의 주위로 미풍이 분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더니 망토를 휘감았다. 바람은 금세 잦아들었고, 망토는 깔끔하게 말랐다. 사내는 다 마르자마자 라온에게 빼앗듯이 망토를 받아들고 자신의 몸에 걸쳤다. 사내는 팔을 들어올려 제 망토의 냄새를 킁, 한 번 맡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뒤 라온과 앙뇨를 보며 말했다.

"짧지만 고마웠습니다. 그럼."

사내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현관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러다 후다닥 도로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아아. 깜빡했습니다!!!"

라온과 앙뇨는 얼빠진 표정으로 급히 뛰어들어오는 사내를 바라봤다.

"이 꼴로 돌아다녔다가는 분명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겁니다. 옷, 옷을 빌려줄 수 있습니까?"

라온은 픽, 하고 웃으며 방바닥에 내려놓았던 옷을 들어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1시간. 그 사내가 떠난 지 1시간이 지났다. 앙뇨와 사내 모두를 보낸 라온은 대충 청소를 하고 집 밖을 나섰다.

"아, 깜짝이야."

라온은 현관문을 열다가 아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문 옆에 1시간 전 떠났던 사내가 망토를 돌돌 말아 그 속에 얼굴을 파묻은 채 기운 없이 쭈그려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내는 라온을 발견하고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 때마침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네?"

"이 동네."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잿빛 망토가 흔들린다.

"지리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디부터 찾아봐야 할 지 난감합니다. 도움… 주실 수 있습니까?"

뻔뻔하기 짝이 없다. 아까는 도움 따위 필요도 없다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의 선한 라온. 그는 웃으며 사내에게 답했다.

"아, 오늘 딱히 일정도 없었어요. 아까 도와드린다고 할 때는 왜 거절하신 거에요?"

"더 빚지기는 싫어서…."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웅얼거렸다. 라온은 그런 사내를 보며 다시 한 번 웃더니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이름은 뭐에요?"

둘은 어제 라온이 사내를 보았던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라온은 사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칼로. 일단 그렇게만 불렀으면 합니다."

"나이는요?"

"…지금이 몇 년도입니까? 날짜를 신경 쓰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아, 월성 661년이요."

"그러면 스물넷…?"

"시빌도 아니라면 하는 일이 뭐에요? 아, 이건 말하기 그런가…."

"그저. 뷔에르를 싫어하고. 이 나라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누군가. 그렇게 기억했음 합니다."

시빌과 비슷한 일을 하는 걸까. 그렇지만 자신을 칼로라 소개한 사내는 그들을 바보 취급하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그들보다 아는 게 더 많다는 걸까?

"찾으려는 물건이 뭐에요?"

"자료. 내가 있던 곳과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료입니다. 그걸 들고 나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앞에 서있는 사람들 치우려고 마력 탈탈 쓰고. 추적 따돌리느라고 체력도 탈탈 다 쓰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아무나의 손에 들어갔다면…."

칼로의 어깨가 축 처졌다.

"유라온이라 했었습니까."

"아, 네."

"성은…."

"아아, 유가 성이에요."

"성을 앞에 붙인다라. 독특합니다."

"좀 그렇죠, 아무래도."

"그 쪽은 이름만 이야기했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성이…."

"쉿."

칼로가 오른손을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잠시. 가만히 있어라."

칼로가 낮고 위협적인 명령조로 말했다. 라온은 그 위압감에 멈칫하였다. 칼로는 망토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멀리를 응시하였다.

"…카테르다."

카테르. 카테르라 함은 국립연구소 아닌가.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를 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 연구소의 사람들을 칼로가 경계하는 이유를 라온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는 과학과 마법 연구에 인생을 걸은 연구원들만 가득한데.

"그런데 왜…?"

"조용히 하라.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고도. 나중에 설명을…."

순간 칼로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그는 몸을 뒤로 빠르게 뺐다.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칼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져 버리고 잠시 뒤, 정장을 빼입은 여자가 라온에게 다가왔다.

"잠시 뭐 좀 물어도 될까요?"

새하얀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를 지닌 그는 라온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렇게 생긴 남자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칼로의 사진. 라온은 왜인지 거짓을 말해야 할 거 같았다. 그 여자의 눈빛이 매서웠던 탓인지, 아니면 칼로가 두려워한 탓인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분명 이리로 온 거 같았는데. 아, 실례했습니다."

여자는 빙긋, 웃고는 라온을 스쳐 지나갔다. 라온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칼로는 다시 나타나 라온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옛 친구라고 해두겠습니다."

칼로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라온은 칼로가 온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이는 그저 말없이 떠난 친구의 행방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날 찾는 겁니다. 다만 그이의 소속이… 카테르가… 접촉했다가는 그이에게도 무슨 일이. 무슨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 뿐입니다. 그이는…."

칼로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꾹꾹 눌러댄다. 라온에 비해 작은 키 때문에 칼로에게는 큰 옷의 소매가 팔을 따라 흘러내린다. 눈을 천천히 깜빡이더니 제 날개를 한 번 보고 여자가 사라진 길을 한 번 본다. 

"…미안합니다. 아까 좀 거칠게 말한 듯 합니다. 마음이 조금 급했습니다."

칼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라온을 본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약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또 두려운 나머지 그랬습니다. 그들이 날 잡으러 올까. 날 해치러... 하지만 가까워졌을 때 익숙한 향이 나 조금은 안심했습니다. 히아신스. 그이의 웃음과 닮은 그 아름다운 꽃의 향이 훅 끼쳤습니다. 안심도 찰나. 방금과 같은 이유로 몸을 피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그이는 대체 어디서 그 지독한 냄새를 달고 온 걸지. 그게 몹시 걱정됩니다. 애초부터 그이도 카테르의 소속이기에 그 냄새를 갖추었건만. 너무나 가까웠기에 그 향에 취해 느끼지 못했던 걸지도 모릅니다. 나는…."

원래 말이 많구나. 라온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 정도로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 것을 보면 칼로에게 있어서 방금 스쳐 지나간 여자가 굉장히 가깝고 또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라온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칼로는 친구라고 소개하였지만 어쩌면, 연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라온은 생각하였다.

"아, 말이 길어졌습니다. 미안합니다. 한 번 말이 트면 끝없이 늘어놓는. 버릇이 있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 이쪽이에요."

라온은 괜찮다는 듯 칼로를 보며 씩 웃고는 길을 마저 안내하였다. 3m 남짓의 나무와 그 주위를 에워싼 덤불들. 주택가와는 조금 동떨어진 한적한 길가. 칼로는 나무 밑에 쭈그려 앉더니 열심히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망토와 키에 맞지 않는 긴 바지가 땅에 끌린다. 칼로가 몸을 움찔하더니 주변으로 푸른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파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찾았다."

라온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쉬익, 하고 거센 바람이 불더니 칼로가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거 참 요란하게도 비행을 하시네."

라온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칼로가 다시 돌아오겠거니,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본 뭉치를 꺼내들어 읽으며 기다렸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그 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