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세계관

스피알피 로판 AU (제국군 탈영하고 재수없는 마탑주와 얽혀버렸다)

밤밤님 커미션

스피넬 코발트블루는 알피노 르베유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은근히 상대를 하대하는 듯한 말투. 연구원들을 새벽까지 부려먹는 거만한 태도. 부자라는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한 차림새. 친할아버지인 대현자 루이수아를 똑 닮은 은백색 머리색에서부터 보이듯, 영웅의 명성을 등에 업고 잘난체하는 꼬락서니까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피넬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내 비록 그의 밑에서 일을 하고는 있으나 절대로 그의 뜻대로 바보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리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그는 마탑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알피노를 고깝게 생각하는 스피넬도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실력이었다. 최연소 마탑주에 오른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종류의 마법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발동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알려면 우선 마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곳 중부대륙에서 마법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진정으로 해독해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단지 대부분 마력이 매우 적어 변변찮은 마법도 구사할 수 없을 뿐이다. 개중에 드물게 특별한 재능과 마력량을 타고난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평생에 걸쳐 지고의 마법을 갈고 닦는 곳이 바로 마탑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법이 기동하는 근본적인 기제를 규명하려고 몇백 년이나 노력했으나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여러 논문과 다양한 가설들이 있지만 하나같이 입모아 말하는 것은 근본 명제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마법이란 술사 개인의 몸을 매개로 삼아서 여러 종류의 힘을 축적 내지는 발산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마법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마법은 수식에 가깝다는 점이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쓰기 전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해당 마법을 구성하는 점과 선을 잇는 정신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고난도의 마법일 수록 그 작업은 복잡하고, 단 하나의 실낱이라도 꿰는 데에 실패하면 술법은 발동되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려면 그 점과 선의 구성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그래서 알피노가 대단한 것이다. 그 많은 마법의 구성 논리를 완벽하게, 순식간에 구사할 수 있으니까. 알피노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마법 실력으로 최연소 마탑주에 올라섰다. 스피넬은 그러한 사실이 알피노를 더 오만하게 만들었다고 짐작하고 있다. 다들 대단하다, 대단하다고 등을 떠밀어주니까 뵈는 게 없는 거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스피넬이라고 해서 이름 없는 일개 연구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연합국의 옛 유적을 탐험하던 시절, 누구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위험천만한 동굴 끝자락에서 그는 소환 마법에 대해 적힌 오래된 기록을 발견했다. 소환 마법은 오래 전부터 구전으로 존재만이 전해져 내려왔던 특별한 마법이다. 스피넬은 그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마탑에 들어가 연구원이 되었다. 따라서 자신이 발견한 고대 문서를 해독하는 것이 스피넬의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함께 작업한다면 연구의 진척이 훨씬 빨라졌겠지만, 지독한 인간 불신에다가 생활 지반이 남들보다 훨씬 불안한 그가 자신의 공적을 남에게 조금이라도 양보할 리 없었다. 개개인의 연구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마탑의 전통. 불만은 있어도 납득하며 물러나는 동료들이었다.

한참을 집중해서 고어와 현대어를 비교 분석해 번역하던 도중,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옆자리 동료가 스피넬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가 반사적으로 언제라도 내리칠 수 있도록 펜을 주먹으로 꽉 쥐고서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그의 푸른색 반묶음머리가 커튼처럼 빙그르 의자를 스쳐지나갔다. 스피넬보다 더 놀란 것은 그를 부른 동료였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을 껌뻑이고는 “마탑주가 소집했어. 어서 가자고.” 라는 말만 남기고 나머지 동료들과 함께 부산스럽게 자리를 떴다. 

하아, 스피넬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이었는데 방해를 받아 짜증났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소환 마법에 대해 알아내면 알아낼 수록 금지된 영역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스피넬은 스산한 공기의 계단을 올라가며 약간의 온기를 찾아 자신의 양팔을 문질렀다. 

성별 나이 불문 모든 마법사들이 모인 강당, 그 높은 단상에 알피노가 서있었다. 꼴불견. 스피넬은 곁눈을 뜨며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알피노는 더할 나위 없는 지도자의 모습이었는데도. 모두가 모인듯하자 알피노가 무슨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 듣기 위해 다들 말을 삼가고 귀를 기울였다. 강당이 완전히 조용해질 무렵, 알피노가 멋진 목소리로 맥없는 말을 웅장하게 터트렸다.

“마법을 다루는 일은 지극히 까다롭다네.”

연구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일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각종 마법에 정통한데다, 보다 고차원의 마법에 도전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런 말은 "사람은 숨을 쉰다" 와 다를바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알피노는 그런 반응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잠시 마법의 정의를 이렇게 가정해보세. 술사의 신체를 통해 고유의 수식 법칙을 거쳐 비일상적인 힘을 다루는 논리적 행위라고. 헌데 우리에게는 그 마법을 유기체가 아닌 물체를 매개하여 정착시키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연구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다. 세상에는 마법이 가진 효능과 힘을 물리적으로 저장하는 스크롤과 마석이 존재한다. 스크롤은 마물의 가죽을 벗겨 만든 특별한 양피지. 마석은 정령의 핵을 조합한 결과물이었다. 이 도구들은 얼핏 보면 편리해 보이지만 제조법도 용법도 술사마다 제각기 다른데다가, 세대가 지나면 여러 사정으로 은닉되고 잊혀져서 생각보다 다루기 까다로운 마도구임이 틀림없다. 이 나이 어린 마탑주는 그 마도구를 두고 무슨 도전을 하려는 걸까. 연구원들이 긴장하는 가운데, 알피노는 도전적으로 미소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것을 초월해, 모든 논리 법칙을 뛰어넘어, 모든 종류의 마법과 여러 사람의 마력까지 모두 흡수하여 자유자재로 해방시키는 마도구가 있다면 과연 어떠한가?"

이쯤 되면 연구원들의 흥분은 겨울을 향해가는 늦가을의 서늘한 날씨도 한여름의 정오처럼 뜨겁게 달굴 정도였다. 알피노가 말한 그것은 그야말로 꿈의 마도구 아닌가? 정말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역사의 한 획을 그을 발명품을?

“우리가 그걸 만들어 보이세. 마탑의 위용에 걸맞는 마도구를. 지원자는 있는가?”

많은 이들이 손을 번쩍 들었고, 손을 들지 않는 자들 중에 상당수는 당장 급한 연구가 있는지 안절부절 아쉽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그늘진 구석, 스피넬은 알피노의 열정어린 연설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않았다. 팔짱을 단단히 끼고 벽면에 기대어 홀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환 마법. 아직 모든 단어를 번역하는데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단 한 마디는 확실하다. "끌어당긴다." 그 단어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스피넬 코발트블루.” 

“……예?”

갑작스레 이름을 불린 스피넬이 깜짝 놀라 대답하자,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당황한 스피넬이 사태를 파악한 것은 이미 늦은 후였다.

“고맙네, 그러면 이번 프로젝트에 지원한 것으로 알겠네. 자네는 잠시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내 작업실로 와주겠나.”

“아, 아니…… 저는…….”

시기, 선망, 짜증, 설움. 알피노가 먼저 자리를 뜨자 동료 연구원들이 낮춘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왜 하필 스피넬이 마지막에 끼냐고. 아무 접점도 없고, 일말의 사교성도 없으며, 직접 지원조차 하지 않은 그가 왜 뽑힌 거냐며. 아무리 능력이 된다 한들 과연 그가 마탑주의 직할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느냐며. 스피넬은 그들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으나 강당을 벗어나자마자 가슴 속에 남은 공기가 한 줌도 없을 만큼 특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왜?

스피넬은 알피노의 작업실 앞에 당도해 노크했다. 노크라기보단 주먹으로 때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틀림없이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방 안의 알피노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평온한 목소리로, 어떻게 듣자면 상냥한 목소리로 "들어오게."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알피노의 작업실은 수없이 많은 자료와 실험 소재가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정돈되고 깔끔하여 그의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피넬은 있는대로 없는대로 빈정이 상해 그것 또한 재수없다고 느꼈지만. 

“와줘서 고맙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알피노는 잠시 턱에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지만, 스피넬은 최상위 상관과의 개인 면담 같은 건 빨리빨리 해치우고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자네는…… 제국인이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스피넬의 온몸이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언제든 마법을 쏘아 내려칠 수 있도록 머릿속의 논리 법칙을 되새기고, 언제든 뛰쳐나가서 격투술로 그를 제압할 수 있도록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너무 그러지 말게. 나는 그저 이야기를 하려고 오라고 한 것 뿐이니.”

알피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보이도록 양손을 머리께 높이로 들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그렇다고 한들 스피넬의 날카로운 시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설령 그가 당장은 공격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정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등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 있는 법. 도대체 어디서 샌 거냐. 스피넬은 제국에서 연합국으로 갓 망명했던 시기에 만났던 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누구 하나 믿어선 안 됐는데.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선 안 됐는데.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상대는 마탑주다. 무슨 속셈일지 알 수 없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스피넬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되물었다. 

“들어는 보았을 걸세…… 텔레지 아델레지.”

알다마다. 그자는 연합국의 큰 손이자 어두운 골목의 지배자. 손을 대지 않는 사업이 없다는 탐욕의 현신이었다. 항간에는 그가 돈의 힘을 이용해 세계재패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누군가는 그가 돈을 손에 쥐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저주에 걸렸다고들 했다. 반대로 손바닥에서 돈이 샘솟는 축복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나, 모두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의견이었다.

“그자는 자신만 그 정보를 안다고 생각하겠네만, 우리측에도 첩보에 능한 정보원이 있거든.”

알피노가 점잖게 말하자 스피넬은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나는 빼주었으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가 완만하게 호를 그렸던 알피노의 눈매가 진지하게 변하고, 이내 그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그런 눈이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네.”


알피노 르베유르는 스피넬 코발트블루를 인상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마탑 밖에 나가서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고, 그 결과물로 전설적인 소환 마법의 실마리를 들고 오는 것은 절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마탑에 들어왔을 때를 알피노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느 정도의 마력이 없으면 열리지도 않는 마탑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아무나 붙잡고 총책임자를 만나겠다는 모습이 어찌나 거칠고 박력 넘쳤는지. 본래라면 정식적인 서면과 행정적 절차를 밟은 뒤에야 가능한 것이 마탑주와의 대면이건만,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간 공격당할 것을 확신한 연구원들은 잔뜩 기가 죽어서 ‘안전 요원이 함께한다면’ 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으로 마탑주와의 면접을 잡았다.

알피노가 전령의 마법으로 급하게 소식을 들은 것은 스피넬이 방문을 퉁퉁퉁 방문을 두들겼을 무렵. 알피노는 짐짓 침착하게 그를 맞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려 본 스피넬의 모습은 급하게 온 태가 났다. 청량한 푸른색 반묶음 머리는 반쯤 풀려 있고, 옷매무새는 허름하고 느슨해져 있었다. 스스로를 보듬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없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의 외견에 관심이 없는 걸까. 그보다는 그런 거겠지. 알피노는 짐작했다. 외모 같은 건 신경쓸 겨를도 없이 최대한 빨리 나를 찾아야 했다는 거겠지. 어쨌든 그의 눈에는 이글이글 불꽃이 일고 있었다. 그것이 분노인지 증오인지 열정인지는 처음 만난 알피노로서는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뜨거운 눈빛에 비해 차가운 무표정으로 말없이 고문서 한장을 꺼내 보였다. 알피노는 그것을 전해 받아 독 마법과 같은 해로운 마법이 걸려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색무취의 스포이드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스피넬은 알피노의 그런 태도가 짜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건네준 자신이 멀쩡한 시점에서 문서는 안전하다는 뜻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알피노는 약물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문서의 필적을 확인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문서를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흥, 당연히 그래야지. 스피넬은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마탑주가 이 정도의 반응이라면 나머지 연구원들은 완전히 뒤집어질 게 뻔했다. 그 문서는 너무 오래된 언어로 적혀 있어서 곧바로 해독할 수는 없었으나, 현존하는 거의 모든 마법에 정통한 알피노가 알아보지 못하는 수식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문서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마법의 기록일 것이 틀림없었다. 마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이 독학한 제국 출신 스피넬이 마력으로만 감지해도 대단한 물건인 것이 뻔한데.

“자네, 이름이?”

“스피넬. 스피넬 코발트블루입니다.”

그것으로 그의 마탑 입성은 결정되었다. 그 문서가 다름 아닌 전설적인 소환 마법의 기록이라는 것이 공표된 건 그보다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알피노가 느낀 스피넬의 첫인상은 당당하고 대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알피노가 그의 정체를 안다고 말하자마자 일변한 태도. 날카롭게 벼린 검날처럼 사나운 전사의 분위기는 실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마법 실력이 좋다 한들 마탑 안에 있는 누구도 지금 이 상태의 스피넬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네.”

알피노의 말에 스피넬 무서운 무표정에 팔짱을 끼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어디 지껄여 보라는 듯이. 확실히 마탑의 최고 권위자에게 보일 몸짓은 아니지만 알피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듯이 말했다.

“약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세. 긴장 풀어도 좋아.”

그가 이 상황에서 퍽이나 긴장을 풀겠는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팔짱 낀 두 팔의 힘을 더욱 세게 주면서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알피노는 이내 포기한듯 다시 진중한 태도로 돌아갔다.

“오늘 내가 한 말을 들었는가?”

아니. 하나도 안 들었는데. 스피넬의 무언을 감지한 알피노가 알기 쉽게 그때의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마법과 마력을 자유자재로 흡수하고 발산하는 세계제일의 마도구를 만들 걸세.”

“그건…….”

“불가능하다고? 아니.”

알피노는 마치 이쪽으로 건너 오라는 듯, 정중하게 손바닥을 펴서 스피넬을 가리켰다.

“소환 마법만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아.”

스피넬은 혼란스러웠다. 텔레지 아델레지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 그로부터 알피노 역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것, 듣도 보도 못한 최강의 마술구 제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몇 달 동안 붙어 있었어도 단 한 단어밖에 해독 못 한 소환 마법을 언급하기까지. 이 모든 게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그가 들은 구전의 내용이 제법 자극적이었던 모양일세.”

사용자에게 무한한 힘을 부여하는 마법, 이를테면 세계를 단숨에 정복하는 일 정도는 손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마법이라고나 할까. 알피노가 중얼거렸다. 결과적으로 텔레지가 소환 마법을 연구하는 스피넬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캐냈다는 것이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몇 명이나 죽고 부상 당했을지, 스피넬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문을 품은 ‘정보원’이 알피노에게 귀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도구를 만드는 건 정확히 텔레지 아델레지가 원하는 것 아닙니까?”

“맞는 말일세. 그래서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알피노는 손을 내리고 책상 위의 서류들을 쓸어 흐트러트렸다. 중부대륙 각국의 서한들이 시국의 서탑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제국과 연합국의 거친 전쟁에 시국의 마력을, 마탑의 마도구를 보태라는 요구 서한이었다. 전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만 갔고, 줄곧 중립을 유지했던 시국은 이제 곧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될 시기가 올 것이라고 알피노는 생각했다

“우리에겐 그 마도구를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네. 시국과 마탑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하지만 그대로 만들기만 한다면 꼼짝없이 텔레지 아델레지의 손에서 놀아나는 꼴이 되겠지. 세상을 초토화시키는 막강한 무기로만 쓰일 걸세.”

알피노는 고개를 떨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도 세게 쥐는 바람에 관절이 점점 하얘졌다. 스피넬은 그 모습, 하얗게 쥔 주먹에서 무력감과 한심함을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는 곧장 자신의 직감을 일축했다. 그 대단하신 마탑주가 무력감을 느낀다고? 거봐, 스피넬은 생각했다. 이내 알피노는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똑바로 스피넬을 마주했다.

“거기서 자네가 활약해주었으면 하네. 마도구가 악용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어. 마법을 무효화하는 제국의 기술을 이용해 보호 역장을 펼치는 마도 장치를 만들어주게. 부탁하네.”

스피넬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 '부탁'은 부탁이 아니었다.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텔레지 아델레지를 막기 위해, 마탑의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해 독립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스피넬의 마도 장치 기술력은 필수불가결했다. 이걸 거절하면 제국 출신이라는 불리한 입장인 자신은 물론, 온 세상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는 "언제든 빠져나가도 좋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마탑주들은 이런 걸 부탁이라고 생각하는가? 스피넬은 속으로 분을 삭히고 있었다. 알피노는 그가 거절하면 자신의 능력과 인맥을 총동원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생각이었지만, 스피넬이 그걸 알 리 없었다. 

스피넬은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거대한 파도의 휩쓸려, 그대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겨우 따돌렸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망령이 어느덧 눈앞에 다시 나타난 기분이었다. 제국. 만감을 교차하는 그 단어. 그 장소. 그 기억. 질척한 늪지대를 지나가든, 무성한 정글을 헤쳐가든 어김없이 발길을 붙잡고 옭매는 그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는 팔짱 속 주먹을 꽉 쥐었다. 무표정을 가장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분노와 한탄이었다. 결국 스피넬은 그 계획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알피노는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렇다고 해도 작업실 이전은 아니지 않습니까?”

잡동사니와 서류철이 담긴 목제 상자를 책상에 떨어트리며 불평하는 스피넬이었다. 사정은 마도 장치 개발이라는 극비 사항이 유출되지 않도록 알피노가 ‘프로젝트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인재를 가까이 둔다’ 라는 핑계로 스피넬을 자신의 작업실로 데려온 것에 기인했다. 안 그래도 남의 이목을 끄는 중이라 한숨만 나오는데, 알피노는 이쪽의 사정은 손끝만큼도 봐주지 않았다.

“아, 잘 왔네. 이것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손이 부족해서 말이야.”

지금도 그랬다. 이사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작업 보조를 시키니 말이다. 스피넬은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면서 알피노가 마법 스크롤을 만드는 과정을 곁에서 도왔다. 확실히 신선하고 효율적인 방식을 도입한 제작법이기에 곁에서 쳐다만 보아도 제법 많은 공부가 되는, 고차원의 조합이었다. 그래도 말이지, 스피넬은 화를 꿀꺽 삼켰다. 이사하라고 시켰으면 마저 이사하게 내버려 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부대륙은 마력과 마법이 흔한 곳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마법사를 수용하는 장소는 마탑만이 아니었다. 단지 마탑은 개중 가장 뛰어난 자들이 모이는 곳일 뿐. 연합국 각지에도 마법사는 존재했고, 그들에게서 여러 문의와 의뢰가 쏟아져 들어오는 형편이었다. 그 문의와 의뢰는 술사의 기술력에 따라 적절하게 배당되어 처리하도록 정해져 있다. 즉, 스피넬도 소환 마법 연구나 마도 장치 개발뿐만이 아니라 다른 서류 작업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탑 연구원들은 기본적으로 바쁜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도 부탁하네. 오늘 중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군.”

하지만 알피노는 구태여 스피넬이 분담하지 않은 일까지 넘기며 업무를 과중시키지 않은가. 스피넬은 열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애초에 다짐하지 않았는가. 저 재수없는 인간의 뜻대로 바보 인형처럼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으리라고. 그냥 때려 치자. 스피넬은 그렇게 결심했다. 약점? 그런 건 어떻게든 하면 돼. 세상? 알 게 뭐야.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먼 길을 떠난 스피넬이었다. 

“그만두겠습니다.”

알피노는 눈을 크게 뜨고 얼떨떨하게 사직서를 받았다. 스피넬은 그대로 등을 돌려서 겨우 몇 주 전에 풀었던 이삿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알피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둥거렸다.

“잠깐만! 왜… 뭐가… 무슨 일인가?”

스피넬은 이미 관두기로 정한 몸, 물불 가릴 것이 없었다. 손을 멈추지 않고 얼음처럼 싸늘한 무표정을 한 채로 알피노를 째려보았다.

“갑질도 작작이십니다. 마음대로 아랫사람 휘두르는 버릇 못 고치면 얼마 안 가서 전부 관두게 될 겁니다. 저처럼.”

그 말에 알피노는 망치 마법으로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거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확실히, 그의 행동들을 돌이켜보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자연스럽게 명령하던 기억만이 있었다. 천재인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남들에게도 똑같은 수준을 요구한 탓일까, 어린 나이에 너무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알피노는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어떻게든 이 사람을 붙잡아야만 했다. 이번 이중 프로젝트는 결코 실패해선 안 됐다. 그리고 스피넬이 없으면 둘 중에 어떤 것도 성공할 수 없었다. 스피넬은 그야말로 마탑의 핵심 인재였던 것이다. 그랬던 그를, 알피노는 가차없이 ‘굴렸’다. 가차없는 과로에 불만을 품고 사직서를 내민 것도 알 만 했다

“저기……!”

알피노가 스피넬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채 다가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구었다.

“미안하네. 내 잘못일세.”

스피넬은 목제 상자에 필기구와 개인 소지품을 넣던 손을 멈추고 한쪽 눈썹을 의아하게 올리며 알피노를 돌아보았다. 이 양반이 바로 사과할 줄은 몰랐는걸. 자기가 대단한 줄만 아는, 콧대높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피넬은 그에게 사과 받는 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직서 수리는 잠시 유예하도록 하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협의했다. 어디 얼마나 달라지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알피노는 그날 밤새 작업실을 떠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서 그동안 이사니 조합 보조니 하는 등의 이유로 밀리고 쌓였던 스피넬의 서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마탑주 정도 되는 사람이 할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어떻게든 그것을 끝냈다.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곯아떨어져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스피넬은 무표정을 가장하고 짜증을 듬뿍 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게, 아침에 출근했더니 마탑주 양반이 그가 수리해야 할 서류 뭉치를 깔고 엎드려 디비져있는 게 아닌가. 오늘 오후까지 제출해야 되는 건데, 지금부터 작성을 시작해도 빠듯하건만. 스피넬이 터벅터벅 가까이 다가가 알피노를 깨우려던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서류의 공백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는 건, 이 마탑주 양반이 하찮기 짝이 없는 서류 업무에 손을 댔다는 거 아닌가? 어제의 말은 정말 빈말이 아니었나?

“……끙.”

스피넬은 눈을 감고 양쪽 관자놀이에 중지와 엄지를 올려 누르며 남들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는 언제부터인가의 버릇이었다. 다시 한 번 알피노를 보았다. 잠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깨어 있을 때보단 밉살스럽지 않고, 지쳐 잠든 앳된 얼굴이 조금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랫사람에게 예의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말투로 지적받고는 그날 바로 야근해서 반성의 행동을 실천에 옮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고마운 기분을 느끼게 되는 스피넬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출근하자 마자 이 인간 뒤치다꺼리라니. 스피넬을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자신이 쓰던 담요를 찾아 책상 서랍을 뒤졌다. 겨울이 가까이 오고 있기에 방한 대비로 사놓은 신상 담요였다. 촘촘한 뜨개실이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이 절로 기분 좋아지는 종류다. 그걸 개시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알피노라니, 나름 기대했는데. 스피넬은 궁얼궁얼 짜증내면서 조심스럽게 알피노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오늘 분의 업무에 손을 뻗었다.

알피노가 깨어난 건 아침이라고 부르긴 애매하고 정오 쯤이라고 부르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켜 멍한 얼굴로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다가, 그런 자신을 스피넬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한손으로 애써 덮었다. 연구원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마탑주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스피넬은 알피노가 얼굴을 처박아 꺼낼 수 없었던 서류들을 마침내 회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알피노는 얼마나 급했는지 문도 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세면대에서 찰박찰박 세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눌린 머리는 당장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필사적으로 바람의 마법을 부리는 소리도 들렸다. 알피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게 정돈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을 보며, 스피넬의 솔직한 심정은 “가지가지한다” 였다. 알피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마탑주로서 체면을 차리는 것도 중요하다.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란 그런 거니까.

“좋은 아침일세.”

“네, 좋은 ‘아침’입니다.”

시치미 뚝 떼고 인사를 건네는 알피노. 대놓고 지적할 수는 없도록 은근하게 빈정대는 스피넬. 알피노는 그것을 무시하고 이미 늦어버린 오전 업무에 착수했다. 스피넬 역시 그에게 흥미를 잃고 알피노의 품에서 뺏은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왜 굳이 자기 일을 해놨는지 불만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의뢰한 대륙 어느 마법사가 답변서를 받아봤을 때 일개 연구원이 아닌 무려 마탑주 님의 서명이 써있는 걸 보면 졸도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걸 자신이 다 베껴서 다시 써야한다는 뜻 아닌가. 에휴, 내가 무슨 업보가 있어서. 스피넬은 잠깐 멈칫하고 자신을 돌아봤다. 음, 따지고 보면 업보가 없는 건 아니구나. 

그러나 알피노가 대필한 서류의 내용은 생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본받을 점이 많을 정도였다. 글씨가 단정하고, 전개도 깔끔하고, 서술도 논리적이며, 단어 선택도 세련됐다. 스피넬은 자신이 이런 정도의 서한은 쓰지 못한다고 깜짝 놀랐다. 그가 반쯤은 인맥을 뒤로 업고 마탑주에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마탑주에 오르기 이전부터 공부에 힘쓴 티가 여기서 나는구나 싶었다. 업무에 있어서도 확실히 처음부터 바닥부터 스피넬 혼자 하는 것보다 알피노가 한 것을 베끼는 게 훨씬 시간이 덜 걸리기도 했다. 

알피노는 손으로는 바쁘게 깃펜을 놀리면서 속으로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어제는 급하게 떠나려는 스피넬을 잡으려고 성급하게 반성하고 성급하게 야근까지 하느라 미처 생각에 이르지 못했지만, 나, 알피노 르베유르, 마탑주라는 제일의 권력자이자 대륙 최고의 마법사에게 업무 상으로 그렇게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이유와 동기는 무엇일까? 솔직한 호기심이 앞섰다. 

그날 점심을 먹는 내내 스피넬은 억지로 짜증을 참느라고 체할 지경이었다. 알피노가 힐끗거리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제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사람 성질 돋구지 말고. 이렇게 외치고 싶지만 남들 앞에선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작업실에 올라가서도 또 그래 봐. 가만 안 둬, 그냥. 

스피넬은 원체 타인에게 벽을 치고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다. 기존에 쓰던 작업실에서도 동료와 노골적으로 멀찍이 떨어져 지내곤 했다. 그나마도 다인실이라서 나름대로 자중했던 것이었는데, 알피노랑 단 둘이 있다보니 자중의 끈이 점점 풀려서 조금 더 감정을,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게 잦아졌다. 알피노도 그와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그의 무표정에서 조금씩 감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무표정 밑에 가려진 건 짜증이 대부분이었다. 희한도 하지. 스피넬의 짜증은 곁에 있기에 불쾌하지 않았으니. 알피노는 모른 척 업무에 집중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되어야 말이다. 알피노는 잠깐 정신을 놨다가 차려보면 서류 구석에 스피넬의 두상 스케치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림 같은 기억력에, 실제로 그림을 잘 그리는 그가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게 들키면 스피넬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같은 종류의 서류를 폐기하기를 몇 번, 그 모습을 참다 못해 스피넬이 성을 냈다.

“집중 좀 해줍시다, 예?”

촉이 좋은 사람이구나. 알피노는 아랫사람에게 대놓고 꾸중을 당했음에도 화나기 보다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 

스피넬이라는 특수 사례와는 달리, 본래 마탑주는 개인 연구원과 접촉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런 그와 확실하게 대면할 수 있는 때는 프로젝트 시연과 마법생물 최종심사였다. 오늘 오후 늦게 예정된 일정으로는 후자가 있었다. 알피노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책상 앞에 붙어서 제 할 일하던 스피넬이 그를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은 몹시 의외였다. 

오늘 심사대에 오르는 마법생물은 엄밀히 말해 사역마였는데, 그것도 마력을 얼마 소모하지 않는 단순한 종류였다. 마법생물은 술사가 마법을 사용해 만든 생물로 술사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고 알아서 자립하는 개체이며, 반대로 사역마는 술사가 마법으로 만든 생물이라는 점에서 마법생물 속에 속하지만 술사의 의도대로 움직이며 명령을 따른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이 밖에도 여러 차이가 있는데, 이곳에선 생략하도록 하겠다. 

처음 그 사역마에 대해 알게된 것은 마탑주의 작업실에 막 이사왔을 무렵, 알피노의 무차별적인 과중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대신 처리해달라며 받아낸 서류 중에는 오늘 심사할 사역마의 기안서가 들어 있었다. 근방에 있는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는 사역마라고 하였다. 악용될 여지가 작고, 건물의 방범용으로 쓰기 적합하다고 서류에 쓰여있었지만 스피넬은 달리 생각했다. 약점이 잡힌 입장에서 언제 어디서 생명에 위협이 올지 모르는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역마라고.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 최하층으로 향했다. 마탑의 계답은 특별하다. 목적지 층수를 한 번 입밖으로 크게 말하고 딱 한바퀴를 오르거나 내려가면 바로 도착해있었다. 몇 백 년 전 마탑주가 만든 마도구라고 하는데, 제작법은 철저하게 은닉되어 세상에 둘도 없는 마법 계단이었다.

“그럼 시작해보세.”

마탑 외곽의 시연장에 자리를 잡고 서서 알피노가 위엄있게 말하자, 긴장한 것이 눈에 선한 연구원이 눈을 감고 손을 뻗어 마력을 집중시켰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퐁! 그의 손에는 먼지를 굴려 뭉친듯한 잿빛 털북숭이 공이 튀어나왔다. “성공했다.” 연구원이 기쁜듯 말했지만 알피노는 억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아.

“기능을 시연해주겠나?"

연구원이 손바닥에 얹은 사역마를 공중에 가볍게 던지자 더도 않고 덜도 않게 딱 중간의 허공에 정지했다. 그리고 털뭉치에는 눈도 귀도 입도 없는데 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사람이 있니?” 

“그렇다.” 

“최근방에는?” 

“주인 근처에 서 있는 두 사람.” 

“그보다 더 멀리는?” 

“건물 밖에 십 여명, 건물 안에는 삼백 여명.”

알피노는 품안에 들고 있던 기안서와 품의서를 그들의 대화와 함께 비교해서 훑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예상 결과와 정확히 맞는 것 같군. 이리 주게. 등록을 해야 할 테니.”

마탑의 연구원들의 성과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은 마탑주만의 권한이었다. 주인의 지시에 따라 털뭉치가 알피노에게 느릿느릿 날아갔다. 그는 그것을 양손에 감싸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해본 작업이기에 익히 아는 구성 논리였다. 점과 선을 이어서…… 그때 스피넬이 연구원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질문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스피넬이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알피노를 제외하고는. 

그때 집중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마력이 과도하게 흡수되었다. 주먹보다 작았던 공이 단숨에 어린아이만큼이나 커져서 멋대로 시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사역마가 주인의 명령을 거스르고 폭주하는 것은 마물이 되는 가장 흔한 경위였다. 스피넬과 연구원이 뛰어와 대처하기도 전에 알피노는 거의 본능적으로 머릿속 구성 논리를 중첩하여 잿빛 사역마를 제압했다. 빛의 띠로 끌어당긴 뒤에 과중력을 부여해서 움직임을 막고 전격 마법으로 사역마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지 못하도록 충격을 줬다. 이 모든게 하나의 동작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니, 스피넬과 연구원은 말로만 듣던 마탑주의 실력에 아연실색했다. 정작 알피노는 멀쩡한 얼굴로 “등록은 완료됐네.” 라고 말할 뿐이었다. 

스피넬은 알피노와 작업실로 돌아오면서 짜증을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그건 뭡니까? 오늘따라 왜 그러십니까?”

“……잠을 푹 자지 못해서 그럴 걸세.”

그 말에 스피넬은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기 위해 밤을 꼴딱 샜으니. 알피노로서는 스피넬이 잘 속아 주어서 다행이었다.

그날 마지막 업무는 정령의 핵을 사용해 여분의 마석을 만드는 일이었다. 몇 번이나 해본 작업이었는데도 알피노는 좀처럼 집중이 안 돼서 평소보다 진척이 느렸다. 그 ‘평소’의 속도를 지겹게도 잘 알고 있는 스피넬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너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게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알피노는 “알겠다” 라는 뜻으로 어색하게 웃고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그가 집은 것은 물 정령의 핵이었다. 눈을 감고 구성 논리를 연결해 마력을 담아 마석으로 변환시키면…… 그 결과는 누군가를 꼭 닮은 푸른색이었다. 그래, 코발트블루. 알피노는 노을에 받아 더욱 짙게 빛나는 마석을 쥐고 엄지로 쓰다듬었다. 


마도구 프로젝트는 난항이라고 부르기에 딱 알맞았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획기적인 발상의 물건이기에 참고할만한 전례도 없었으며,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마탑주의 작업실에서 스피넬이 해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소환 마법의 비밀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스피넬에게 부여된 책무는 보통 이상이었기에 많은 부분이 알피노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는 편이었다. 마침내 알피노가 스피넬과 함께 실제 구전에 따라 소환 마법이 ‘무엇을’ 끌어당긴다는 것인지 알아냈을 때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다. 사실은 스피넬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개인 연구를 지연하기 위해 모든 협력을 거부하고 은닉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오로지 연구 지원금을 위해서

처음 마도구의 제작을 제안했을 때 외쳤던 말을 기억하는가. ‘모든 종류의 마법과 여러 사람의 마력까지 모두 흡수하여 자유자재로 해방시키는 마도구.’ 소환 마법은 정확하게 그런 마법이었다. 마력에 관한 것이라면 욕심 많은 짐승처럼 무엇이든 불어들이고 마구 끌어당기는 종류의 마법. 연구원들이 어떻게 이것을 미리 알 수 있었느냐고 묻자, 알피노는 스피넬이 굳이 나설 필요도 없도록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곤 굳센 푸른 눈이 잘 보이게 백색의 앞머리를 검지로 사선을 긋고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 구전을 비교 분석한 결과지. 설마 내가 아무런 근거도 자신도 없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했는가.”

설마 내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말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만 같아서 그들은 꼬리를 말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탑주의 실력을 모르는 사람은 이 마탑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스피넬을 탓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일소됐다.

마법이 어떤 작용을 하는 지 알아도, 그것을 마도구라는 물질 매체에 정착시키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였다. 암호처럼 흩어진 논리 구조와 퍼즐 조각처럼 쪼개진 수식을 이어붙이는 것은 일반 프로젝트원의 일이었다. 스피넬이 자료의 현대어 해석이 끝난 뒤에 마도구 연구보다는 마도 장치 제작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알피노의 배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부 대륙에서 마법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진 마도 기술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스피넬 말고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알피노의 대처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단지 그뿐이라고 하기엔 조금, 아주 조금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인지하지 못했다.

“자네는 제국의 기술자였군.”

“그렇지 않았으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스피넬은 여러번 땀을 닦는 바람에 얼굴에 푸른색 청린수를 덕지덕지 묻힌 채로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안 그래도 사무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제국민이었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연히 마도원까지 가서 마도 과학을 배워버리는 바람에 이 고생을 하는 건데.

“애초에…….” 

스피넬은 그 시점에서 눈을 질끈 감고 사고를 억지로 멈췄다. 이대로 가다간 최악의 기억을 떠올려 버리고 말 테니까. 그가 눈을 떴을 땐 알피노가 의자를 돌리고 갑자기 말을 멈춘 그를 약간이나마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스피넬은 그 눈빛을 전혀 모른 체 하고 다시 스패너를 들어 작업에 열중했다. 어차피 알피노는 모르는 일이라고, 동정 같은 건 할 수조차 없다고, 가슴이 뛰는 자신을 그렇게 타이르면서. 알피노는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스피넬이 더는 이야기할 의지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깃펜을 들었다.

마도구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꽃이나 리본이나 황금비율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법 세계의 아름다움이란 실용성이다. 혼자의 힘으로도 사용하기에 편하고 활용하기에 적합해야 뛰어난 마도구라는 뜻이다. 얼마 전 먼지뭉치 사역마를 예로 들어볼까. 그 마법사는 마력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마법 실력도 뒤처지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사역마를 소환하는데에 오래 걸렸다. 그것은 사역마를 구성하는 논리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그만큼의 성능을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지만, 그가 조금 더 연구를 거듭했더라면 더욱 아름다운 사역마를 만들 수 있는 게 가능했을 지도 몰랐다. 

알피노는 이번 소환 마법 마도구 프로젝트에도 그런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방대한 마력을 축적하려면 그만큼 거대하고 질 좋은 마석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크기로는 혼자의 힘으로 자유로이 사용하는 데에 제약이 걸린다. 크기를 줄이는 연구가 필수다. 그리고 그정도의 마석을 만들만큼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는 공교롭게도 이 마탑엔 알피노가 유일했다. 오늘도 알피노는 마석 작업에 열중이었다. 물 속성의 정령 핵을 마석으로 변환할 때마다 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추는 걸 스피넬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마도구 설계도의 윤곽이 잡히고, 어느 정도 시제품의 완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 때 마도구에 이름을 붙여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소환 마법 마도구’라고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피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뒤에 손가락을 접은 채로, 검지만을 턱에 대고 고민했다.

“우리의 마도구는…… 그래, 하우리에제는 어떤가.” 

흡수하다는 뜻의 고어를 담은 이름은 마도구가 목표하는 성능과 일치했고, 부드러운 어감이 마탑주 알피노의 성정과도 잘 어울린다는 평가였다. 

연구원들은 하우리에제를 만들기 위해 먼저 알피노가 작업해놓은 최상급의 마석을 한데 녹였다. 특수한 약물을 섞어 빚어내면 기존의 마석보다도 훨씬 작고 밀도있는 막대가 하나 만들어진다. 이 막대기에 마력을 끌어들이는 소환 마법의 술식을 새겨넣을 예정이어서, 이번 마도구에서 가장 중요한 파츠 되시겠다.

그 다음은 마력을 발산하는 파츠를 만들어야 했다. 여러가지 형태가 제안됐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앞에서 보면 얄쌍한 타원으로 보이고 옆에서 보면 초승달처럼 보이는 모양새였다. 위아래 끝과 끝에 막대를 고정시키면 한손으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마도구가 되는 것이었다.

알피노는 날카로운 눈으로 검수를 시작했다. 소환 마법의 수식이 제대로 새겨져 있는지, 마력을 낭비없이 효율적으로 발산하는 수식이 잘 정착돼 있는지, 그 외에도 파괴 목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어느정도 버틸 수 있도록 내구도를 높이는 마법이라든가, 오랫동안 방치해도 마법의 성능이 녹슬지 않을 보전 마법이라든가,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미세한 마력을 흘러넣어 논리 구조를 살펴보았다. 과연 이 작은 도구에 온갖 강력 첨단 마법이 깃들어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알피노가 그렇게 집중해서 마도구를 확인하고 있을 동안 프로젝트의 일원으로서 함께 호출된 스피넬은 가빠지려고 하는 숨을 꾹 누르고, 내장을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참고 있었다. 이대로 마도구 하우리에제의 시제품이 알피노에게 합격하고 나면 곧바로 실험장에서 성능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렇게 되면, 하우리에제의 마력 포탄을 막아내야 할 자신의 마도 장치도 동시에 실험대에 오르게 된다.

“다들 잘했네. 이 정도면 실험해 볼 만해.”

알피노가 그렇게 명언하자 대다수가 안도와 기쁨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피넬은 달랐다. 하얀 낯빛으로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의 방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알피노가 그의 등 뒤를 눈으로 좇으며 가까이 다가가려던 찰나,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와 질문 세례를 해대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마력 인증을 하고 방에 들어선 스피넬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벽에 기대어 놓은 사각 방패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성능은 문제 없었다. 마도 과학에 있어 자신도 있었다. 다만…… 그래, 그는 두려웠다. 소환 마법의 연구자가 어째서 마도 장치를 들고 실험에 참여하는 건지, 그 의문에 대답해야 할 상황이 곧 닥칠 테니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은 마중물처럼 기억을 퍼올렸다. 

“사피루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스피넬은 그만 양쪽 귀를 꼭 막아버렸다. 

“사피루스! 마도 리퍼의 청린수 정비는 어떻게 됐나!” 

귀를 막아도 교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롭게 스피넬을 괴롭혔다. 들키면 안 돼. 중부 대륙에 도착한 이후부터 그의 마음에 못질한 각오였다. 그 각오가, 지금 삭아 없어지려고 한다.

“코발트블루 씨! 내려오시라고 하십니다!”

누군가 방 밖에서 큰 소리로 스피넬을 부르는 즉시 그는 펄쩍 뛰며 크게 놀랐다. 스피넬은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지금의 나는 코발트블루. 스피넬 코발트블루다. 사피루스가 아니야. 그리고 스피넬은 이렇게 망령에 사로잡혀 덜덜 떨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곧추 일어나 방패를 쥐어 들고 방을 떠났다.

마탑 바깥에 위치한 실험장은 벌써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든 하지 않았든 수많은 동료들이 기대에 부풀어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입구 가까이에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마법사가 당당하게 마도구 하우리에제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스피넬은 방패를 양손으로 들고 반대편 끝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웅성였다. 마석이라곤 흔적도 보이지 않는 딱딱한 금속에다가 흑색과 적색의 조화. 저건 말로만 듣던 마도 장치가 아닌가? 갑자기 실험장에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알피노만이 태연하게 기록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자네의 장치는 뭐라고 이름 붙일 셈인가?” 

“이름말입니까?"

땜질을 하던 도중 알피노가 부르는 참에 보호구를 벗고 의아하게 되묻는 스피넬이었다. 작업하기 편하도록 곱슬거리는 파란 머리는 하늘색의 끝을 느슨하게 묶어놓았고, 늘 입는 연구원 유니폼은 벗어서 의자에 걸쳐놓은 상태였다.

“그래. 마도구는 결정됐으니까. 자네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스피넬은 고민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청린수가 묻은 검지로 볼을 찔렀다. 최근 스피넬의 얼굴은 항상 청린수 투성이였다. 알피노가 그것을 지적하고 손수건을 빌려주면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거, 작업 중간에는 필요없습니다” 라고 거절하는 탓이었다. 알피노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스피넬의 그런 냉정하고 효율적인 모습을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스피넬은 인두를 작동시켜 하던 작업을 마저 계속했다. 알피노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을 하면서 깊게 고심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별 말없이 그를 기다렸다. 이름이라. 스피넬이 지금 만드는 것은 방패다. 강력한 마법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역장 방패. 그렇다면 지켜준다는 뜻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지키고, 마탑을 지키고, 무엇보다 스피넬 자신을 지키는, 그런 방패가 되어줬으면 했다

“프루히베오는 어떠십니까?”

알피노는 입속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하다라는 의미의 고어. 마도구와 짝이 맞는 울림. 그는 즉시 그 이름을 채택했다. 다른 것도 아닌 그 이름이라면 문제없을 거라면서.

그러나 프루히베오는 접전 끝에 산산이 부서지며 실험장 바닥에 청린수의 푸른 자국을 남겼다. 온몸으로 마도구 하우리에제의 위력을 받은 스피넬은 그대로 튕겨져 나가 실험장의 결계에 부딪혀 붉은 피를 쏟았다. 만일을 위해 준비한 치유 전문 마법사가 황급히 뛰어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알피노 역시 그러고 싶었으나, 폭발이 일어난 즉시 주변에 있는 자들이 마탑주를 감싸고 지켜준 바람에 그들에게 길이 막혀서 그럴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피를 흘려 어지러운 시야로 느릿느릿 상황을 파악하던 스피넬에게, 불신과 혐오의 시선이 꽂혔다. 스피넬은 몸에 남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덜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텔레지 아델레지는 천성이 상인이었다. 대대로 상거래를 하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으로 거래다운 거래를 해본 것은 약 6세. 또래 아이들과 장난감을 교환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부모를 흉내내어 작은 것으로 보다 큰 것과 바꾸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 느낀 만족감이란, 양친에게 칭찬을 받을 때보다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의 가슴을 꽉 채웠다. 그 순간부터 그의 세계는 내놓는 것과 얻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해 판단하는 저울의 삶으로 변모했다. 상대의 흥미에 따라 내놓는 것을 다양하게 바꿔나가며 유리한 흐름으로 이끌어 나가는 법을 배운 그는 타고난 감각을 이용해 상인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 느꼈던 만족감은 해가 가면 갈수록 충족될 줄 몰랐고, 밑 뚫린 탐욕은 끊임없이 그의 악행을 부추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고 싶은 것은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줘야 하는 것은 적을수록 좋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가장 적은 것을 내놓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이를테면 세상 그 자체를 손에 넣고 싶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한 저울 놀음 도중 고대의 소환 마법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어쩌면 운명일까. 

마도구 하우리에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작 십여 명의 마법사가 저장한 마력을, 갈색 머리의 여성 단 한 사람의 조절 하에 발산한 결과가 이정도다. 방패가 깨져 거대한 마력을 맨몸으로 맞부딪힌 스피넬은 허공을 날아 실험장의 투명한 결계에 처박혔다. 옷의 일부가 불타올라 피부는 화상을 입고, 뼈는 부러져 그의 팔이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알피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런 결과는, 미리 계획한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알피노는 스피넬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프루히베오 방패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번 건은 너무나도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모든 경우의 수를 상정해야 했다. 그걸 대비해서, 마도구에 의해 스피넬이 다치지 않도록 출력률을 치밀하게 계산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순간적으로 치료 전문 마법사가 서둘러 그에게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치료사가 어떻게 스피넬을 다루는지 스피넬이 의식을 잃었는지 따위의 자세한 모습은 휘하 마법사들의 등에 가려 볼 수 없었다. 알피노는 서둘러 그를 가로막는 자들을 억지로 헤쳐나가 선두에 서서 스피넬을 보았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고, 치료사는 심한 상처를 입은 오른쪽 팔에 마력을 기울여 치유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스피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알피노의 어깨를 잡아끄는 사람이 서너 명. 개중엔 마도구를 작동시킨 갈색 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안 됩니다, 마탑주 님.”

그들의 붉고 푸른 눈에는 타오르는 증오와 차디찬 불신이 번쩍이고 있었다. 알피노가 저항하자 그들은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면서 마탑주 정도 되는 사람이 저따위 존재에게 가까이 다가가선 안 된다고 엄중하게 쏘아붙였다.

“저따위라니, 말이 심하지 않은가……!”

“보시고도 모르겠습니까! 방금 장치는 분명 제국의 마도 장치!” 

“저 자는 더러운 제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스피넬에게도 그 외침이 닿았을 것이었다. 그는 바득 이를 깨물며 오른팔을 감싸쥐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술사가 무리하지 말라며 애타게 그를 저지했지만 소용없었다. 코발트블루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알피노가 스피넬을 처음 만난 그때의 눈이었다. 알피노는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스피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양쪽의 사나운 시선에게서 서로를 지키듯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아닐세, 그는……!”

이번에는 스피넬이 알피노의 어깨를 잡았다. 잡았다기보다는 기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알피노가 스피넬을 돌아보자, 스피넬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알피노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는 비록 심하게 다쳤어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기로 약속한 것이다. 스피넬과 알피노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제국의 기술자였군.”

알피노가 며칠 전 그렇게 말했을 때, 스피넬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는 무심코 말을 이으려고 하다가, 뜬금없는 순간에 입을 굳게 다물고 말았다. 알피노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스피넬 개인에게 있어 제국의 기술은 마법과 비교하면 어떤 인상을 주는지, 제국의 마도 과학 기술서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학술서를 입수할 방법이 있을지. 그런 순수하고도 학구적인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극도의 빙산에 어설프게 다가가선 동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걸 아는 이상, 알피노도 섣불리 묻지 않고 물러섰다. 겨우 호기심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을 할퀴어선 안 된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이미 그도 많이 당한 게다. 대현자 루이수아의 손자라는 이유로. 

한동안 작업실에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 차작차작 땜질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러다가 하나의 소리가 멎었다. 그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스피넬이 목소리를 냈다. 

“제국군의 기술자, 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알피노는 역시, 싶었다. 그의 정보원은 우수했다. 여러가지 소문이 알피노의 수중에 들어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밤과 낮의 하늘이 섞인 색상의 장발 여성이 회적색의 군복을 누더기로 가린 채 골목을 달리고 있더라는 뜨내기의 증언이었다. 군복의 계급장은 거칠게 뜯어져 실밥이 덜렁거리고 있었으며, 그 절박한 표정이란, 마치 육친의 죽음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전장의 인간처럼 창백했다고들 했다.

“그래서 불만이십니까?”

스피넬은 청린수 기관을 만지며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나직하게 말했다. 왜일까, 어째서 짜증나는 마탑주 같은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 같은 비밀을 밝혀버리고 만 것일까. 충동적으로 행동했다기엔 머릿속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했고, 계산적으로 굴었다기엔 얻는 이득이 없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스피넬은 뒷소문에 익숙했다. 마도 과학원 시절부터 그랬다. 순수 갈레안족 혈통을 잇지 않은 이방의 민족 출신으로서, 수도없이 악의에 노출되어 견뎌야만 했던 그 시절. 그는 단체에 소속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뛰쳐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이 홀로 모험을 떠난 일이었으니, 제 한 몸 위험에 빠트려서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발견한 마법의 고문서. 단체라면 진절 넌더리가 나지만 이번에는 고문서라는 대가를 준다면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보호는 혈혈단신으로 연합국에 망명해온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익숙하다고 해서 상처 입지 않는 건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업적을 남기기 위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물이 단지 연구 지원금을 위한 속임수라며 매도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스피넬은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자신은 떳떳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자들에게 당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때 알피노가 앞에 나선 것은 의외였다. 알피노가 그를 감싼 이후로 소문은 가라앉고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렇구나, 처음이었구나. 스피넬은 생각했다. 그리고 스피넬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비밀을 자신의 입으로 알려주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것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만이라니."

스피넬이 문득 작업대에서 눈을 떼고 몸을 돌리자, 의자를 완전히 그의 방향으로 향한 채로 상체를 기울여 팔꿈치를 무릎에 기대고 있는 알피노가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스피넬을 부드럽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대로 가세나. 솔직하게.”

마도 과학은 흑색의 강철과 적색의 윤활제가 아니면 최대의 효율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특성 때문에 스피넬이 만든 마도 장치는 얼핏 보아도 제국의 기술로 탄생한 것이 명백해 보였다. 실험장에 그런 방패를 들고 나오면 스피넬의 출신에 대한 의문은 당연히 제기될 터. 스피넬이 단지 ‘제국의 기술자’라고만 말한다면 제국의 기술자라고 발표하려 했지만, 스피넬이 본인을 ‘제국군의 기술자’라고 솔직하게 밝힌 이상 그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옳았다.

그들은 마탑원들에게 통보할 설명을 협의했다. 스피넬은 한때 제국군에 몸 담았으나 지금은 탈영하여, 제국의 야욕으로부터 시국과 연합국, 통틀어 중부 대륙에 이바지하려는 마법사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실험장에서 그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한 무리의 발자국 소리가 한가득 실험장을 메웠다.

“어디서 고약한 악취가 난다 했더니, 여기 있었군. 쥐새끼 같은 제국놈이.”

텔레지 아델레지. 알피노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것을 들은 스피넬 역시 눈빛을 바꾸고 사병을 거느린 라라펠 남성을 노려보았다. 텔레지는 여유롭게 웃으며 뒤에 서있는 군졸들에 45 게 극적으로 외쳤다.

“다들 알고 있나? 이 녀석은 제국의 황제를 섬기는 밀정에 불과해. 그리고 오늘의 행각은 타락한 마탑주와 저 자가 손을 잡고 저지른 실험. 마탑의 마도구가 제국의 방어 병기를 상대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보려고 한 거다! 마탑의 모두가 한 통속이야!”

마지막 말을 맺자마자 텔레지의 병사들이 창검을 뽑아들고 제자리에서 쿵쿵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텔레지가 지령을 내리자 마자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나갔다.

“저놈들이 황제에게 정보를 넘기기 전에 모조리 잡아들여라!”

이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침착하게 머릿속의 마법 논리를 꺼낼 수 있었던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으나, 갑작스러운 전투 상황에 당황해 발이 꼬여 넘어지거나 하는 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포박되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거리낌없이 베였다. 청린수 웅덩이가 맺힌 실험장 바닥에 피가 튀었다. 그 중앙에 알피노와 스피넬이 있었다. 텔레지의 사병이 그들에게 달려들자, 알피노는 재빨리 전격 마법으로 그들을 마비시켜서 길을 텄다. 그리고는 스피넬의 왼쪽 손목을 쥐고 마구 뛰기 시작했다. 마탑 근처의 숲을 향해서.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왜 나를 끌어들였습니까!”

성치 못한 몸으로 어떻게든 달려나가면서 스피넬은 쥐어짜내듯이 화를 냈다. 그 말을 들은 알피노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실험을 실패로 이끌었고, 스피넬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마탑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탓인지 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겨우 멈춰섰을 때 스피넬은 다친 오른팔을 감싸쥐고 턱끝까지 올라온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알피노가 스피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것은. 스피넬은 작게 숨을 삼켰다.

“미안하네. 마탑의 이권을 위해 자네를 끌어들인건 분명히 날세. 그러나 지금은 마땅히 사죄할 수도, 배상할 수도 없네. 이곳에선 그럴 여유가 없어. 그러니 날 믿고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나.”

그가 꺼내든 것은 스피넬이 그의 작업실에 막 이사왔을 무렵에 함께 만들었던 마법 스크롤. 무슨 마법이 정착되어 있는지 알피노의 말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을 이동시키는 대규모 전송 마법이구나.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할 텐데. 알피노는 스피넬의 걱정을 꿰뚫어 보고 흐리게 웃었다. 

“내게 맡겨주게.”

알피노가 손을 내밀었다. 스피넬이 보호를 구해 들어간 마탑은 무너졌다. 자신은 다치고 지친 사냥감에 불과했다. 원망스럽고도 원망스러운 알피노의 손을 잡는다, 그것밖엔 선택지가 없었다.

스피넬은 알피노의 손을 맞잡았다. 알피노는 마법 스크롤을 절반으로 찢었다. 마법 스크롤은 푸른 불꽃을 뿜어내며 허공으로 타올랐고, 두 사람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시야가 총천연색으로 어지러이 번쩍였다.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는 듯이 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고통은 없고 위화감만이 가득했다. 마치 자연의 섭리가 인간에게 허락한 적 없는 상태에 빠진 것만 같았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어 두 눈을 꽉 감은지 수 초, 평소와 같은 감각으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피넬은 안심하며 눈을 떴지만, 안심은 커녕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알피노와 스피넬, 두 사람은 낙법이 통하지 않을 만큼 아득한 허공에 떠있었던 것이다. 

곧장 수직 낙하는 당연지사. 경악과 공포의 비명이 스피넬의 목구멍 안쪽에 꽉 막혀 갇혔다. 이럴 때는 어떤 마법을 써야 하지?! 서둘러 머릿속을 뒤적였지만 당황 속에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그 대신 알피노가 조치를 취해주었다. 그들이 바닥에 부딪히기 몇 초 전, 바람의 마법을 사용해 투명한 안전막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들은 잠시간 무릎 높이에 둥실 떠있다가, 갑작스럽게 마법의 효력이 다해 준비할 새도 없이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인간을 이동시키는 대규모 전송 마법은 웬만한 마법사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마력을 잡아먹는 마법이다. 그래서 이해는 한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텔레지 아델리지의 병졸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먼 거리일 거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동 좌표값을 설정하는 것이 어려웠을 게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좀 제대로 하면 덧나는가. 스피넬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땅에 떨어진 충격 때문에 부러진 팔의 뼈가 요동치는 듯한 격통을 받은 것이다. 스피넬이 군대에서 고통을, 정확히 말하면 고문을 견디는 훈련을 받지 않았으면 그대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으리라. 

스피넬이 신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면, 알피노는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마탑주가 방대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큰 마력을 연속으로 방출하는 건 희대의 천재라고 해도 부담이 컸다. 온몸이 과부하를 알리듯 이상 작용을 보였다. 마력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두 개로 보였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이 상태는 지나갈 테였다.

먼저 수습하고 일어난 것은 스피넬이었다. 말없이 주저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알피노의 상태를 대충 짐작한 스피넬은 그의 팔을 끌어당겨 부축한 뒤 근처의 나무 둥치로 이끌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기대 앉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안도이기도 하고 낙담이기도 했다. 

조금 휴식을 취한 뒤의 일이었다. 시야에 무언가가 불쑥 들어오자 스피넬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낚아채어 사납게 노려보았다. 알피노의 손이었다. 무엇을 하려는 심산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쏘아보냈지만 알피노는 굴하지 않았다. 벌써 몇 달을 그런 눈빛을 받으며 함께 작업해온 사이였으니까. 알피노는 천천히 마력을 기울여 스피넬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주었다. 

스피넬은 코를 찡그리며 알피노의 팔을 밀어내려 했다. 알피노는 마력 소모로 스피넬보다 안색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치유 마법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포기한 것은 스피넬이었다. 그게 알피노 나름의 사과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얌전히 치료를 받았다. 치료 전문 마법사보다는 못했지만, 스피넬의 통증을 식혀주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알피노는 한계까지 마력을 쓴 뒤에 이마에 맺힌 땀을 마탑주 제복의 소매로 훔쳤다. 그것이 뭐라고 스피넬을 놀라게 하는지.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품속에 고이 간직한 고급 손수건을 꺼내 톡톡 닦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여긴…….” 

그제서야 알피노가 주변을 둘러보며 피곤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흘렸다. 빨리도 알아채신다. 스피넬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빽빽한 숲 속 한복판에 있었다. 일반적인 나무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보다는 수 만 년을 살아남아서 얼마나 높은지 가늠도 되지 않는 거대 수목들이 인상적이었다. 

“어디로 전송하려 하신 겁니까?” 

“내 고향일세. 북해 제도의 소도시.”

알피노는 약간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럴 만도 하다. 도저히 도시라고는 볼 수 없는 곳이니까. 스피넬은 그에게 이런 특징적인 숲이 어드메에 있는지 물었으나 알피노는 고개를 저었다. 도시 밖은 거의 나가본 적 없다는 것이었다. 북해 제도는 섬이 세 군데나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느 섬일지도 모른다니. 스피넬은 자신의 이마를 철썩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다, 알피노의 이마를 때리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실험 준비를 시작한 것은 정오를 조금 지난 때였다. 실험이 시작되고, 실패하고, 텔레지 아델레지의 습격이 일어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었다. 곧 해가 지고 저녁이 될 것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밤을 맞으면 큰 문제다. 스피넬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았다. 손삽, 방수포, 밧줄, 전투식량, 정수제…… 어느 것 하나 없이 이 양반과 밤을 지낼 생각에 스피넬은 한숨만 나왔다.

“우선 불을 피웁시다.” 

겨울을 앞두고 있는 계절이다. 쌀쌀한 밤기운에 몸이 얼지 않도록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 마력은 많이 썼지만 체력은 남아 도는 알피노와, 마법을 충분히 쓸 수 있지만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스피넬. 어느 쪽이 무엇을 맡아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스피넬은 알피노에게 주변을 둘러보며 장작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랬다간 또 찾아야 하니까, 귀찮은 일이 늘어나니까.

스피넬은 마음을 가다듬고 적당한 양지에 왼손을 맞댔다. 다음 순간 그의 앞에는 발이 잠길 정도의 얕은 구덩이가 파였다. 모닥불을 피워 넣을 구덩이가 이정도라면 바람이 세게 불어도 안심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가지를 품안 가득 들고 돌아온 알피노가 입을 쩍 벌리고는 성큼성큼 구덩이에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마법을 썼는가?”

그의 열의에 깜짝 놀란 스피넬은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환 마법 고문서를 들고 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스피넬은 몰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술식을 거의 모두 꿰고 있는 마탑주 알피노에게 ‘새로운 마법’이란 가슴 한 구석을 꽉 채우고 있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그가 찾아왔을 때 침착할 수 있었던 건 단지 이전부터 전승을 접했기 때문에 불과했다는 것을.

“어…….” 

스피넬은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가 쓴 마법은 단순한 바위벽 마법. 땅을 일으켜 방벽을 만드는 실로 기초적인 마법이었다. 그 마법은 땅이 위로 솟는데, 이건 거꾸로 땅이 파였지 않느냐며, 그럴리가 없다며 믿지 않는 알피노에게, 스피넬은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논리 구성을 역전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 대답에 알피노는 눈을 크게 뜨고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마법사들이 생각치도 못한 발상. 스피넬이 정식으로 마법을 배우지 않아서, 나름의 방법으로 마법을 익혔기 때문에 그만큼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일어난 일이었다. 스피넬은 그런 알피노를 내버려두고 그가 주워온 장작을 살폈다. 

이게 웬걸. 

“그것보다 이것 보십시오. 어째 죄다 못 써먹을 것들만 골라 주워오셨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스피넬도 짜증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핀잔 가득한 말투로 알피노를 꾸짖었다. 장작이라고는 전부 이슬에 젖었고, 갓 꺾었고, 불이 붙기엔 너무 큰 것들뿐이었다. 이 도련님을 이대로 둬선 내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 생각으로 스피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알피노의 손목을 잡고 수풀 사이로 끌고 갔다. 

“아시겠습니까? 장작에 적합한 것은 활엽수, 그중에서도 떡갈나무 같은 참나무입니다. 이파리 모양을 보시면 됩니다. 도토리가 열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마른 것으로, 이정도의 굵기를 찾으셔야 합니다.”

그들이 힘겹게 장작을 모아 구덩이에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붉은 노을이 내려와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장작을 줍는 교육 뒤에는 불을 붙이는 교육이었다. 무작정 화염 마법을 쓰려는 알피노를 기겁하고 말리는 스피넬이었다.

“화염마법을 쓰면 기껏 모은 장작이 잿더미가 되지 않습니까!”

알피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마탑이 아니고, 자신은 마탑주의 권위를 행세하지 못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스피넬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알피노는 얌전하게 스피넬이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하라는 것, 시키는 것만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 장작을 줍고, 불을 피우고, 풀을 엮어 그것으로 덫을 놓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을 구분하는 등 생존술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마법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알피노는 자신이 마법을 꽤나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생각했다. 능숙하다의 좀 더 높은 차원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었다. 기존의 세계에서 마법은 정밀 마법과 파괴 마법으로 이분됐다. 정밀 마법은 전령을 보내거나 잠긴 문을 여는 등의 섬세한 효과를 보는 데에 의의가 있고, 파괴 마법은 마력에 따라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이며 적을 무찌르는 공격적인 효과를 보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괴 마법도 때로 섬세한 위력의 응용법이 존재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만으로 이번 여정은 큰 수확이었다. 스피넬은 전혀 공감하지 못할 테지만.

“아.”

나흘째 행군을 계속하던 즈음, 알피노가 한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앞서 가던 스피넬이 뒤를 돌아보았다. 알피노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쉬고 싶다면 쉬고 싶다고 말을 하면 될 것을. 스피넬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알피노는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려 팔을 내밀었다. 손에는 풀꽃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이건?” 

“스페스로’라고 하는 꽃일세.”

스피넬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얇은 초록 줄기에 작은 꽃망울이 촛농이 떨어지듯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여럿 매달려 있었다. 

“다행히 여긴 도시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모양이야. 이 꽃은 본섬의 남쪽에만 피거든.” 

그래도 무작정 걷는 것보다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낮동안 나무가 적은 초원 지역을 찾아 헤맸고, 그곳에 야영지를 꾸린 뒤에 밤을 기다렸다. 별하늘이 빛날 무렵에는 방향과 경로를 정하기 위해 필요한 별자리를 읽어낼 수 있었다. 갈레말이 이곳과 비슷한 경도에 위치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걸 어찌 아느냐 묻자 알피노는 마법약 조합에 쓰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정말이지, 이 인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들은 확실하게 북쪽으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빨랫줄을 걸어놓은 외딴 민가가 한 채 있었다.

민가의 주인 여성은 홀로 살면서 숲에서 약초를 따다가 멀리 도시에 내다 파는 약초꾼이었다. 고급 제복이 헐고 헤어져 더럽고 이상한 걸인들을 난데없이 마주한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긴장한 눈빛을 쏘아보냈다. 그때 스피넬이 기막힌 거짓말로 주인장의 의심을 무마했다. 

“우리는 외지에서 온 식물학자입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서 며칠을 고생한 참입니다. 몹시 지쳤으니 부디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스피넬의 주장에 뒷바침하듯 알피노가 스페스로를 꺼내 보여줬다. 약초꾼과 스피넬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주인 여성은 이렇게 희귀한 꽃을 잘도 찾아냈다며, 스피넬은 그게 그렇게 희귀한 꽃이었냐며. 그들은 스페스로를 주인장에게 넘겨주는 대신 하룻밤 숙박을 얻어냈다. 크게 아쉬워 하는 알피노를 스피넬이 나무라듯 째려봤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개운한 기분으로 거실에 나왔을 때, 스피넬은 멈칫했다. 벽난로 위에 작은 곰의 형상을 하고 있는 푸른색 유리 장식이 있었다. 주인장은 스피넬의 시선을 알아챈 듯 자랑스럽게 그것에 대해 소개했다.

“동생이 얼마 전에 다른 섬에 나가서 선물을 사왔어요. 너무 귀엽죠.”

얼음을 연상케하는 그 유리 세공품은 북해 제도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장식이었다. 그러나 스피넬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갈레말 제국은 대륙의 북쪽, 모든 것이 얼어붙은 대지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얼음은 그 자체로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하는 추위를 상징한다. 꺼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튿날 두 사람은 떠날 채비를 하고 도시가 있을 방향을 안내 받았다. 알피노는 약초꾼의 살가운 보살핌에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시국의 금화를 지불하려 했으나, 스피넬이 크게 놀라 허겁지겁 알피노를 말렸다. 눈 돌아갈 만한 가치의 화폐를 턱턱 내놓으면 다시 의심하지 않을리 없다. 대신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박박 긁어 중부 대륙의 은화를 건넸다. 녹여서라도 팔면 돈이 될 거라고 덧붙이면서.

스피넬은 도시로 걸어가는 내내 알피노에게 경제 관념에 대해 잔소리를 했다. 알피노는 어려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스피넬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대단하신 천재니까 척하면 척이겠지만은.

마침내 도시에 도달했을 때, 알피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몇 발짝 앞으로 뛰어가서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양팔을 크게 벌려 외쳤다. 그 모습은 흔치 않게도 젊은 나이에 걸맞게 순진했다.

“샬레이안에 잘 왔네!”

얼씨구. 스피넬은 속으로 피식거렸다. 고향에 온 게 그렇게나 좋을까. 만약 내가 그랬으면 전혀 그렇지 않을 텐데.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참 이상하지. 도시 안으로 들어와 거리를 걷는 내내 그들을 향해 시선이 모이고 있으니. 아닌가, 도리어 당연한 건가. 마탑주 되는 사람이 격에 맞지 않는 헌 옷을 입고 도시를 배회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빤히 볼 수밖에 없는 건가. 

“여기서도 유명인이십니까.” 

“그 정도까진 아닐세.”

알피노가 겸연쩍게 웃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도 곁을 스쳐 지나간 행인이 깜짝 놀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상황인데,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스피넬은 감회가 새로웠다. 며칠 전만 해도 군중의 이목을 끈 것은 자신이었다. 살을 에는 불신의 시선, 제국의 첩자를 바라보는 혐오의 시선이었다. 지금은 알피노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를 향한 시선은 호기심, 내지는 경외감에 가까웠다. 이렇게도 다르구나. 그와 자신의 처지를 새삼 다시 실감했다. 그것이 분하지는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들은 도시의 동쪽에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섰다. 알피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청록빛 휘취은과 은백색 대리석으로 고풍스럽게 멋을 낸 대문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열이 끓는 비장함이 있었다. 그를 통해 스피넬도 알았다. 이곳이 승부처구나.

그들이 직접 문을 열기도 전에 일렬로 정렬한 집사들이 일제히 알피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스피넬은 깜짝 놀랐다. 무슨 기관인 줄 알았더니 이 대저택 통째로 그가 사는 집이란 말인가?!

그들은 현관 근처의 대기실로 안내됐다. 스피넬은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부자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감탄했다. 그러나 알피노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여느 때 같으면 집사들이 다과실로 그들을 데려가서 신속하게 따뜻한 차를 내놓을 텐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이 빈 탁상에 덩그러니 방치된 것이다. 불청객을 맞이할 때마냥. 알피노가 무릎에 양손을 내려놓고 긴장하는 분위기에, 스피넬 역시 꿀꺽 침을 삼켰다.

“왔느냐.” 

“아버님!”

멀대 같이 큰 사내가, 닿으면 상처를 입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하고 방 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알피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피노와 꼭 닮은 흰 머리를 어깨 길이까지 땋아 내린 그는 스피넬을 힐끔 보고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 당한 그는 못마땅하게 팔짱꼈다. 어디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나 두고 보자고.

“아버님, 이번 상황은……” 

“잘도 얼굴을 들이밀었구나.” 

“네? 저는…….”

알피노의 아버지는 냉담한 푸른 눈을 내리뜨고 무기질적으로 알피노를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알피노는 명백하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북해 제도는 그 어떤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지식의 편찬자는 역사의 관찰자로 머물라, 너도 우리의 신념을 모르는 바는 아닐 텐데.” 

“아버님, 아닙니다. 들어주십시오,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대체 뭐냐! 생명을 앗는 전쟁 무기마저 만들다니! 그러기 위한 마탑이 아닐 텐데!”

그가 크게 호통치자 알피노는 어깨를 떨었다. 그랬다.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너에게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구나.”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냉혹한 한 마디 한 마디가 허공에 남아 알피노의 가슴을 찢고 침입했다. 그는 심장이 멎은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 집사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라며 그들을 인도하기 전까지. 

눈앞에서 대문이 쿵 닫혔다. 알피노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스피넬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땅만 보고 따라가는 알피노를, 스피넬이 무작정 이끌었다. 도시 바깥으로, 인적 드문 외곽으로 망설임 없이 걸었다. 걷고 걷다 보니 하얗게 파도치는 바닷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꽃핀 절벽, 위태로운 바위둘레에 두 사람은 걸터앉았다.

“……미안하네.”

그 사과는 이전의 것과는 달랐다. 몇 달 전 스피넬이 프로젝트를 관두려고 할 때, 알피노는 그를 붙잡기 위해 사과했다. 그건 진심이었으나 이해타산적이고 계산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며칠 전 큰 소동이 일어나 도망칠 때, 알피노는 스피넬 앞에 무릎 꿇고 사과했다. 그때는 철썩같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 ‘믿는 구석’이 방금 박살난 상태다. 지금의 사과는 깊이 가라앉은 선박의 닻처럼 부동의 무게가 있으면서도, 살이 에는 겨울날 한숨처럼 한없이 허무했다. 난생 처음 겪는 패배감과 굴욕감에 그는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스피넬은 그것을 빤히 보았다. 피 냄새가 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스피넬은 지금 알피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런 모습의 알피노는 처음이었다. 스피넬은 그게 싫었다. 알피노는 잘난 체하고 명령투에 멋대로인 사람이어야 한다. 일류 마법사로 이름을 날린 것치고는, 마탑 바깥 세상의 물정이라고는 전혀 몰라 어리숙하고, 스피넬이 고향 땅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유독 좁아보이는 그의 어깨가 스피넬은 낯설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 종종 만나곤 하던 악령이 그에게도 달라붙어 있었다. 동정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동질이다. 스피넬은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알피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알피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스피넬은 약간 망설였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 뻐끔거리길 두어 번. 며칠 간 함께한 여정 동안 거칠게 상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제국군에 복무했던 건 양친의 강요 때문이었으니, 원래부터 제게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생각해왔습니다. 사실은 압니다. 그럴 듯한 변명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갈레말 본토에서도 제국의 횡포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이 있는데, 저는 현실에 순응하고 명령을 따라갈 뿐이었습니다.”

알피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스피넬을 바라보았다. 스피넬은 절벽 아래 해변에 시선을 고정했다. 철썩대는 파도는 일정했고, 갈매기가 낮게 날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한데, 두 사람만이 상처 입고 여기에 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감정을 숨기고, 가리고, 감추고, 덮기만 하던 스피넬이 그 말을 하면서 눈을 꽉 감고 미간을 좁혔다. 미세하게나마 분하고, 서럽고, 억울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마법이라는 연구 분야에 대한 열정도 아니고, 시국의 현실에 대한 공헌도 아닌, 오로지 자기 보전을 목표로 한 결과였습니다. 지금껏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행동했다는 겁니다. 저는 그저 그 정도의 소시민입니다.”

“자네…….”

스피넬의 자괴감 어린 말에 간절히 제동을 걸고 싶었던 알피노였다. 하지만 스피넬은 개의치 않고 말을 마쳤다

“이런 저와는 다르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위해 행동한 것이 선한 영향을 미치는 당신과는 달리, 저는 정반대입니다. 텔레지 아델레지는 분명 악인이지만, 그의 말이 꼭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실제로 황제를 섬긴 적이 있으니까. 그러니 제가 마땅히 감내해야 할, 과거의 죗값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 만감을 교차하는 그 단어. 그 장소. 그 기억. 겨우 따돌렸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망령이 스피넬을 덮쳤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핥고 지나가 절망과 무력감을 선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때 먼 거리에서 마주보고 적대하던 알피노가, 지금은 가까이 나란히 앉아 함께하고 있다.

“……과연, 제국군으로서 사람을 해치려던 것은 분명 잘못일세.”

알피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부드럽고 여려서 굳게 뭉친 마음을 감싸고 녹이는 따스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강제하여 국가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패권주의 제국의 잘못이 더 크다네. 개인의 잘못만을 따지는 건 옳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스피넬은 오랫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추가 와르르 쏟아져 내려가 바닥을 때린 기분이었다. 쌓이고 쌓여 딱딱하게 굳은, 한스러운 슬픔이 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깨졌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도대체 이런 기분을 몇 년 만에 느끼는지

알피노는 스피넬의 손에 자신의 손을 덮어 얹었다. 스피넬은 손을 빼지 않았다.

“처음으로 서로를 이해한 것 같네요.”

스피넬의 어투에 변화가 일은 것을 느끼며, 알피노의 눈이 다정하게 호를 그렸다.


알피노는 있는 힘을 다해 꼬옥 스피넬의 손을 쥐었다가,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양손을 싹싹 비비고는 자신의 무릎에 얹었다. 알피노의 눈에 생생한 빛이 돌아와 있었다. 그래, 이게 훨씬 낫네. 스피넬은 생각했다. 의욕이 생겼다면, 의지를 되찾았다면, 남은 건 앞으로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의논뿐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해보고 싶나? 마도구를 되찾아야 하는데.”

선뜻 스피넬에게 먼저 발언권을 넘겨주는 알피노였다. 스피넬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도구 제작을 제안, 이라기보다는 강청했을 때와는 정반대였으니까. 명령만 할 줄 알던 그 알피노가 맞아? 그래도 그게 싫다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것 아니겠는가. 스피넬은 군사 훈련을 받은 뇌를 핑핑 돌리며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가 즉석에서 건의했다.

“몰래 접근하는 방법 뿐입니다. 전력 차이를 감안하면 이게 옳아요. 자칫 들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그만. 목격자가 없으면 잠입 성공이니까요. 안 그래요?”

알피노는 스피넬의 솔직한 의견을 듣자마자 푸흐 웃음을 터트렸다. 스피넬이 자신의 말 어디가 무엇이 그렇게 웃기느냐고 따지기도 전에, 알피노가 그의 불만을 빠르게 일소했다. 

“아니, 너무 자네다운 방식이어서 그만.”

물론 일부는 스피넬의 친근한 말투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인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칭찬에 가까운가. 스피넬은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하는지가 관건이겠군…….”

스피넬은 알피노에게 군사 작전 시에 기습의 조건과 방법론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알피노는 그것을 잠자코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네. 요컨대 적의 눈에 띄지 않고, 인기척을 죽이고, 의식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거겠지.” 

“그렇게 되네요. 그런 기적 같은 마법이 있나요?” 

“만들 수는 있겠지.”

즉석에서 마법 수식을 새로 만들어낸다고? 아무리 정규 절차를 밟지 않고 독학으로 마법을 배운 스피넬이라 해도 그게 지극히 어렵다는 것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참나, 천재라지만 이건 너무 천재 아닌가. 그는 숙면을 위해 발명된 근거리 음소거 마법과 마석의 특수 성질을 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품에는 스피넬의 눈색과 똑 닮은, 깊고 짙은 물빛의 마석이 여럿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챙겨놓길 잘했네.”

그렇게 말하는 알피노에게 스피넬은 괜히 툴툴댔다. 마탑주라고 뽐내는 거냐면서.

“무슨 소리인가. 숲에서 자네가 기발한 발상을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괜히 추켜세우지 말라고 쏘아붙이며 스피넬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아’ 소리를 내며 다시 멀쩡하게 알피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마탑에 마도구가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수많은 마법 도구를 보관하고 정리하고 연구하는 마탑의 특성상, 그곳은 세상 그 어느 장소보다도 마법구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최적화 되어 있다. 아무리 욕심 많은 텔레지 아델레지여도 실험을 실패하여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완성작을 마탑 밖으로 반출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알피노의 예측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스피넬이 봐도 그럴 듯한 추론이었다. 

북해 제도에서 르베유르 가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배를 타고 중부 대륙의 시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그렇게 마탑으로 향했다. 모든 게 멎어버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밀도 높은 새벽녘이었다. 알피노와 스피넬은 미리 합의한대로 각자 조용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알피노는 직접 구성한 대로 그들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감추는 투명 마법을. 스피넬은 얼마 전 배운 대로 근방의 인적을 확인할 수 있는 먼지뭉치 사역마를. 마탑 근처를 지키는 경비병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그토록 중요한 마도구를 마탑에 두었다면 지금보다 두어 배의 경비병을 더 배치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꺼림칙한 기분으로 계단을 오르는 스피넬이었다. 마탑주의 작업실까지. 

문을 연 그곳에는 작업도구가 여럿 약탈당해 엉망진창이 되어 있으며, 가장 중요한 마도구 하우리에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스피넬이 무미건조한 얼굴 뒤에 감정을 숨기고 깨진 비커 조각을 발로 밟아 바작거리는 소리를 낼 동안, 알피노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를 참지 못해 이를 깨물었다. 텔레지 아델레지가 이렇게까지 아둔한 줄은 몰랐다. 언제든지 폭주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휩쓸려 죽을지도 모르는 불완전한 마도구를 바깥에 가져가다니. 욕심에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한편 마탑주의 이성이 펄펄 끓는 그의 머릿속에 찬물을 끼얹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텔레지 아델레지 혼자서는 아무리 중부대륙의 마법사를 고용한다 하더라도 그 강대한 마술구를 다루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실험 당일 실패를 유도하고, 텔레지의 군졸을 유도하여, 현재도 하우리에제를 손수 안정화시키고 있을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적과 내통하는 배반자의 존재. 마탑주 알피노는 쓰라린 가슴을 꾹 눌러 진정시켰다.

“여기 없다면 가장 가까이, 직접 손에 쥐고 있을 겁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수단일 테니까.” 

“그 자의 저택 말인가?” 

“나라면 그럴 거예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지 아델레지가 중부 대륙 남쪽에 살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 지방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큰 저택을 소유한 것을 떵떵거리며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라하게도 마차 짐칸을 빌려 여러 번 갈아타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갈 수록 건조하고 후터분해지는 가운데, 북해 제도에 맞춘 겉옷은 몹시 더웠다. 더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팔을 바짝 걷어붙여도 땀이 뚝뚝 흘렀다. 스피넬과 알피노는 두터운 재킷을 떠돌이 봇짐장수에게 팔아치우는 대신 목표로 하는 사택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 야음을 틈타 다시 한 번 마법을 발동해 텔레지의 집에 잠입했다.

그의 저택은 마탑과는 다른 의미의 방어 마법이 겹겹이 전개돼 있었지만 최연소 마탑주 알피노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는 술사에게 어떤 알림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신중하게 마법 수식을 해독하고 해제해 나갔다. 그동안 스피넬은 사역마를 통해 기민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사역마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고하지 않았다. 차근차근 함정의 마법을 비켜 나가며 샅샅이 수색에 나선 그들은, 마도구 하우리에제의 특이한 마력 파동을 저택 최상층에서 느꼈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였다. 직접 올라가서 회수하는 것. 알피노와 스피넬은 조용히 눈짓만으로 의견을 맞추며 앞으로 나아갔다.

잠긴 문을 마법으로 조심스럽게 열자 눈앞에 보인 것은 초승달처럼 기운 하우리에제가 두터운 마법 방벽에 갇혀 허공에 떠있는 모습이었다. 스피넬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고 사역마에게 마력을 쏟았다. 역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없었다. 스피넬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알피노는 눈을 감고 양손을 마도구에게 가까이 대어 마법 수식을 읽어내고 무의 형태로 풀어내는데에 집중했다. 스피넬은 빠르게 없어지는 방호벽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알피노의 실력에 감탄했다. 알피노를 상대하다 보면 항상 깜짝 놀라게 되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법에 대해서는 최고의 능력을, 생존에 대해서는 최악의 무능을. 그 모순에 스피넬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스스로에게 놀라 입을 가렸다. 

후우, 지친 한숨을 내쉬며 알피노가 손을 거두었다. 마법을 모두 해제한 것이었다. 이제 이것을 가져가 무사히 도망치기만 하면, 혹은 안전하게 부수기만 하면, 최악의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있을 테다. 알피노는 스피넬의 눈치를 보듯이 눈을 마주쳤다. 스피넬은 알피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피노는 다시 한 번 긴장 어린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마도구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그것을 되찾는 순간……. 

알피노는 그들의 투명 마법이 돌연 바람에 날아가듯 벗겨졌다고 느꼈다. 스피넬 역시 비슷했다. 멀리서 달려오는 사병들의 발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복병에 당했음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부터 사역마까지 망가트린 것인지, 스피넬은 분한 마음을 애써 삭히며 전투를 앞에 두고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언제든지 파괴 마법을 쓸 수 있도록 긴장하는 두 사람에게, 갑작스레 머리 위에서부터 마법 그물이 쏟아졌다. 감싸인 상대가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는, 본디 죄인에게 쓰이는 마법이었다.

"텔레지 님. ‘그들’이 왔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전령의 마법을 날렸다. 동료들에게 지극히 무심했던 스피넬에게보다, 마탑의 모두를 잘 알고 있던 알피노에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마도구 실험에서 직접 하우리에제를 발동시켰던 장본인, 갈색 머리의 여성이었다. 알피노는 경악스럽게 그물에 매달려 크게 외쳤다.

“아네모네……! 어째서 자네가!”

그 이름 아네모네. 마도구의 첫 실험자로 선택할 정도로 알피노가 신뢰했던 마탑의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잔혹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마탑은 철저한 실력주의. 누가 먼저 그 신뢰와 전통을 깨트렸죠? 아무 근거도 없이 더러운 제국인 코발트블루를 중용한 건 누구였느냔 말이야? 난 인정할 수 없어. 그런 마탑 따위는, 내가 다시 만들면 돼요.”

아네모네의 차가운 말들이 알피노의 목을 옥죄였다. 일부는 사실이다.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알피노가 반박하려는 순간, 방을 가득 채울만한 사병들과 함께 텔레지 아델레지가 그들을 찾아왔다. 낄낄거리며 웃는 입가에 비열과 유열이 함께 흘러나왔다. 

“이거 이거, 예상대로군. 이 강력한 마도구를 제국으로 가져가서 황제에게 진상할 네녀석들의 흉계를 우리가 모를 것 같았나?”

스피넬은 텔레지가 그 주장을 정말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그 마도구를 이용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한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그는 간장을 끊을 기세로 고함쳤다. 

“나는 제국군 복무를 강요당했을 지언정,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국의 침략을 진정으로 옹호한 적은 없었어요!”

모두가 스피넬의 폭발적인 항변에 주목하는 순간, 알피노는 스피넬이 알려준 방식으로 마법 그물의 수식을 반전시켜 해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어떻게?!”

아네모네가 비명을 질렀다. 알피노는 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스피넬의 손에, 마탑이 전투 마법사들을 전장으로 보낼 때 쓰는 비상용 마법 스크롤과 마도구 하우리에제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의 마법을 부려 모두를 쓰러트렸다.

“어서 가게!”

그 어느 때보다도 박력 있는 호통이었다. 바람은 끝도 없이 불었지만 스피넬에게만큼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아네모네가 그의 마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마도구를 잃을 것이고, 세상은 파멸을 맞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를 떠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 술렁술렁 일렁였다. 스피넬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서!”

알피노의 재촉, 귀가 멍멍하도록 바람과 바람이 칼처럼 맹렬하게 부딪치는 마법 전투, 균형을 찾은 텔레지의 사병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일촉즉발의 상황. 스피넬은 끝내 스크롤을 찢었다. 그가 흐려지는 시야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안심하며 미소짓는 알피노의 얼굴이었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겨우 몇 주 전에 느꼈던 바로 그 느낌. 눈을 감고 있어도 명멸되는 시야와 이곳서 저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이한 체감이 “아, 또 이거구나” 라는 감상을 자아냈다. 마법 스크롤을 찢고 공간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저번과 다른 점은 까마득히 높은 허공에서 눈뜬 것이 아니라, 적당한 높이감으로 무사히 낙법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이전 알피노가 사용한 것과는 달리 이 스크롤은 이동 좌표값이 정해져 있어서 이렇게 마력의 소모도 줄인 채로 안정적으로 이동되었다고 스피넬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은 이해와는 정반대였다. 공기에 긴장이 스며들고, 스릉 검을 빼잡는 소리와 활사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소리가 났다. 무리도 아니었다. 허공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튀어나온 것이다.

마법 스크롤은 귀하고,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적다. 마탑의 일원 정도나 되어야 겨우 쓸 수 있을까.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마탑의 시국과 연합국의 알력이 심화되면서 오랫동안 병력 지원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입 병사는 이런 사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곳은 연합국과 제국이 맹렬하게 전투를 벌이는 국경선의 최전방, 연합국 본대 사령부였다.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기싸움만 하는 가운데, 보다 못한 하사관이 모든 소업을 내려놓고 느닷없이 나타난 경계인물 스피넬을 붙잡으라고 소리쳤다. “이야아!”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그들을 스피넬은 본능적으로 회피하며 가벼운 전격 마법으로 거리를 벌렸다.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소란을 피우자 그것을 경질하기 위해 달려온 장교는 뒤늦은 보고를 전해들은 뒤 스피넬을 직접 확인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산전수전을 겪은 고참 장교는 과거 전장에 갑자기 나타나는 마법사를 종종 보곤 했다. 마법 스크롤의 조건도 대강은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니 저 사람이 마탑과 관계가 깊을 거라는 유추는 금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피넬은 마탑 연구원이 입는 흰색 연구복도, 전투 마법사들이 입는 검은 제복도 아닌 허름하고 초라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나마 마탑의 권위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가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물건뿐. 그것은 갖가지 속성의 마석이 균일하게 박혀 있고, 빼곡하게 마법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를 지언정 분명 훌륭한 마도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도구를 사용하기는커녕, 무표정으로 눈 하나 까딱 않고 극히 단순한 마법으로 달려드는 병사들을 제압할 뿐이었다. 장교는 곧 깨달았다. 이쪽을 봐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저항하는가. 저 자의 정체는 뭐지? 연합국 소속이 아닌 자, 그렇다고 연합국을 적대하지는 않는 자, 그리고 마탑의 소속도 아닌 자, 동시에 마탑 소속원과 다를 바 없는 마력을 지닌 자. 그러면서도…….

“저건 제국군 아니야?!” 

“첩자다!”

최전방의 병사들이기에 익숙했다. 총검이 난무하는 백병전을 치르는 그들이었기에 몰라볼 수 없었다. 마법을 사용해 병사들을 해치우는 사이사이 보이는 절도 있는 움직임이 제국 병사의 그것과 똑닮은 것이다. 비록 순수 제국민은 본질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제국 내의 식민지인은 얼마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는 법. 병사들이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멈춰야 한다. 더 이상 소란을 피웠다간 제국놈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만다. 장교는 그렇게 판단하고 총을 들었다.

핑! 총알이 스피넬의 발 근처의 땅에 박혔다. 스피넬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지만, 그의 눈빛은 생생하니 불타올랐다. 장교는 다음 탄알을 장전하며 스피넬을 위협했다

“얌전히 따라오시지.”

그제서야 병사들은 스피넬에게 접근해 그의 팔을 붙잡고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스피넬은 끝까지 마도구만큼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녀석, 놔!” 병사가 소리치며 손가락을 떼려고 했지만 끈질기게 놓지 않았다. 장교는 그대로 놔두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그들은 저항을 멈춘 스피넬의 팔을 붙잡고 장교의 천막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래서. 네놈은 제국의 밀정이냐?” 

“아닙니다.” 

“그럼 뭐하는 놈이냐?” 

“…….”

스피넬은 진심으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시선을 흐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그는 검게 갇힌 마음 속을 헤엄치고 허우적거렸다. 내가 누구인가, 그 질문을 짧은 순간 몇 번이고 자문했다. 스피넬은 문득 이렇게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 차분하게 정리해 본 적도, 제대로 숙고해 본 적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모든 곳에 마탑주 알피노 르베유르가 함께하고 있는 것 역시, 지금에 와서야 알 수 있었다.

마탑은 그에게 있어서 어떤 장소였는가. 처음에는 고단한 망명 생활에 안정을 찾아 이용할 뿐인 수단에 불과했다. 단체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를 고립시켜 홀로 몇 년을 보냈다. 그리고 몇 달 전, 알피노가 강당에서 자신의 이름을 호명했을 때 모든 게 달라졌다. 그동안 참 많이도 짜증나고 속터지고 천불이 끓어도, 결국 알피노는 그런 그대로의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걸 왜 알지 못했을까. 

이윽고 스피넬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대답했다. 

“나는 마탑 소속 연구원 스피넬. 스피넬 코발트블루입니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제국에서 망명한 병사라는 것, 연합국에 들어와 탐험 끝에 마탑에 입성한 것, 마탑주와 함께 공동 연구를 한 것, 제국의 기술을 사용한 마도장치를 만든 것, 실험이 실패한 것, 텔레지 아델레지 일당에게 쫓기게 된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다소 자조적이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절박하기도 한 이야기였다. 장교는 그 모든 것을 잠자코 듣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네가 바로 소문의 그 사람이군. 제국의 황제에게 비기를 바치려고 한다는.” 

“아닙니다!”

장교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스피넬이 비명지르듯 외쳤다.

“저는 5년 전, 그때 이후로 전쟁이 지긋지긋합니다.”

스피넬은 지금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은 마도구 하우리에제를 꽉 쥐었다. 그의 진심이 시각적으로 현현하자면 붉은색. 그것도 갓 터진 피처럼 새빨간 붉은색이었을 것이다.

“그런 전쟁을, 타국민의 행복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에게, 조금이라도 득 될 행동은 결단코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은 스피넬의 결의요, 결단이요, 영혼이었다. 감정이 고양되어 어깨를 들썩이고 씩씩거리는 스피넬을, 장교는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예리한 눈이 스피넬의 의지를 읽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제국의 편이 아닌 걸 증명해 보아라.”

장교는 총부리로 까닥 마도구를 가리켰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건 굉장한 무기라고 했지? 못 쓸 게 뭔가.”

스피넬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증명하라고 했겠다. 좋아, 증명해주지. 마도구에 약간의 마력을 흘려넣자 마석 하나가 살짝 빛났다. 장교는 씩 웃으며 상급 병사 소대 하나를 감시 겸 보조 역으로 그에게 붙여주었다. 스피넬은 어느 때보다도 적대적인 시선이 사방에서 칼처럼 꽂히는 것을 느끼면서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성큼성큼 전선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5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는 제국에게 강제로 마도 총기를 떠맡고 죽음만이 기다리는 아수라장으로 내몰렸는데, 지금은 반대로 전쟁이 지긋지긋하다면서 마도구를 들고 제 발로 그곳에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과거의 스피넬이 지금의 광경을 보고 있다면 기가 막혀서 웃을지도 몰랐다. 뒤로 했다고 생각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게, 어찌나 우스운지. 

하지만 스피넬은 싸워야 했다. 지금이라면 싸우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장은 일보 전진하면 일보 후퇴하는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곳에 스피넬이 서 있다. 해저의 빛깔 끝에 새벽의 하늘이 어린 장발을 흙먼지 속에서 흩날리며, 손에는 마력이 빛나는 마도구를 붙잡고, 군세의 흐름이 가장 잘 보이는 고지대에서, 곧고 푸른 눈동자를 번뜩이며.

스피넬은 싸워야 했다. 지금이라면 싸우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대륙을 지켜야 자신의 진정한 고향 ‘시국’이 건재할 것이고, 그래야만 그 안의 ‘마탑’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만히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내 실내에 틀어 박혀서 햇빛이라곤 못 본 새하얀 피부, 눈만 마주치면 싱긋 웃는 다정한 눈매. 눈을 비스듬하게 반쯤 가린 앞머리와 꼬리처럼 가느랗고 길게 묶은 뒷머리는 눈처럼 새하얀 백발. 자신이 무어라 비꼬고 툴툴거리는 말투를 써도 참을성 있게 대꾸해주는 입술. 전부 알피노 르베유르였다

그런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곁에 없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이제야 스피넬은 깨달았다. 대신에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 텔레지 아델레지의 저택에 인질로 잡혀 있을 것이었다.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리라. 이 모든 것을 헤치고 나아가 그 사람의 곁에 가리라. 걱정할 것 없다. 스피넬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마도 장치 프루히베오랑은 달리, 스피넬이라는 안전 장치는 쉽게 깨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으니까. 

그는 높은 바위 절벽 위에 서서 상급 병사들의 감시 속에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마도구에는 알피노의 마력이 느껴졌다. 떠나기 직전 알피노가 사용한 바람의 마법을 흡수한 모양이었다. 스피넬은 그 따뜻한 마력에 기대는 느낌으로 자신의 것을 더더욱 기울였다. 하우리에제의 마석이 총천연색으로 사납게 번쩍거렸다. 병사들은 경이로운 빛을 넋 놓고 바라봤다.

“갑니다.”

스피넬이 충전된 마도구를 적진에 겨냥하며 말하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방어 마석이 박힌 방패를 꺼내 진을 쳤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스피넬은 아무도 안 들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며 마법탄을 쏘았다. 일전에 그가 실험장에서 맞았던 포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화력이었다. 그것을 발사한 스피넬의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구체의 마력은 제국군 좌익에 충돌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병사들이 기뻐하는 것도 잠시, 제국군은 금세 궤도를 역계산하여 스피넬과 병사들을 노렸다. 마도 포탄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상급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올려 스피넬을 지켰다. 아무래도 마법사가 직접 방어 마법을 펼치는 게 아닌, 일정 규모의 마법을 정착시킨 마석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기에 포탄을 전부 방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소대 전원이 스피넬을 지키는 대신 제각기 살을 파먹는 청린 화상을 입고 말았다. 스피넬은 저게 얼마나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음 마력탄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력을 쓰려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더 이상 쓸 마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파들거리는 무릎을 간신히 세웠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지. 그는 늘 가지고 다니는 단검을 꺼냈다. 피를 바쳐서 마력을 끌어올리는 금지된 마법. 단숨에 하우리에제가 필요로 하는 연료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생명을 깎는 마법이기에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알피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단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저기 봐!” 

누군가의 외침을 듣고 멀리서 가까이서 병사들이 위를 올려다 보았다. 검고 퀴퀴한 기공포 매연이나 섬뜩하게 빛나는 청린수 연기와는 달리, 마음껏 헤엄쳐도 좋을 높고 푸른 하늘. 그곳 한 점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일그러지며 수축했다. 스피넬은 알았다. 저건 그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동일하게 나타났을 현상이다.

전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다. 현 시점에서 창검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난입할 마법사는 더욱 적었다. 그럴 만한 사람은 이미 그곳에 있을 테니까. 그만큼 이 마법사는 간절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방대한 마력을 소모해서 화포가 오가는 전장에 와야 할 이유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스피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절벽을 미끄러져 내려가 뛰고 있었다. 화상을 입고 신음하던 병사가 만류했지만 거칠게 뿌리쳤다. 방금까지 마력 고갈로 몸을 가누기조차 버거웠던 사람이 맞기나 한 건지, 한 발짝 한 발짝 강하게 박차고 나아가는 발자국이 진흙탕에 움푹움푹 파였다. 

곧이어 전이 마법으로 허공에 나타난 마법사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고공에서 나타난 그는 깃털이 떨어지듯 천천히 강하했다. 돌연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마법사에게 당황한 제국군과 연합국 군사는 무차별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안 돼!”

스피넬의 목에서 절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마법 포탄이 강타하기 직전, 마법사는 방어 마법을 차린 듯했다. 그의 몸을 반투명한 결계가 둥글게 감싸고 있었으니. 그러나 계속되는 공격에 마법 결계가 조금씩 금가기 시작했다. 공격에 연이어 가속도를 얻은 그의 몸이 위태롭게 추락했다.

“그만둬!”

전력으로 나아가며 스피넬은 소리쳤다. 비록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 어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짖었다. 필사적으로 억눌렀던 불안과 공포가 부풀어올라 몸속 표층부 아래에 남아 있던 마력을 마중물처럼 끌어올렸다. 스피넬은 숨이 차오르도록 달리며 방어 마법이 깨지기 전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어떤 마법을 쓰는 것이 옳은 건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럴 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 그 사람이라면. 

스피넬이 갑작스럽게 멈추자 땅바닥에 지익 줄이 그어졌다. 하늘을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손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머릿속의 점과 선을 연결시켜 마력을 세상에 방출시켰다. 거센 바람이 마구 불어쳐서 비명지르는 병사들을 멀리 밀쳐 쓰러트렸다. 과연 바람이 일으킨 흙먼지에 가려진 표적을 공격하는 것은 제국군도 어려웠을 것이다.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추락하던 마법사도 동일한 마법을 사용했다. 바람과 바람이 짝을 이뤄 얽힌 한가운데,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운 교차점이 그를 포근하게 받아주었다. 스피넬이 뻗은 팔에 자신의 것을 엮으며 그는 사뿐히 지상에 발을 디뎠다.

“스피넬."

흐드러지게 듣고 싶었던 음성이었다. 왜 이 사람이 간단히 인질로 붙잡혔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스피넬은 그의 팔꿈치를 꾹 잡아당겼다. 이 사람은 최연소 천재 마탑주. 그 대단하신 알피노 르베유르인데.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는 바깥의 소란과 소음을 차단하여, 이곳은 잠시 그들만의 세계. 그 중심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시선을 맞추었다. 스피넬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알피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스피넬. 나는 마탑을, 시국을 지키기 위해 자네를 끌어들였네.” 

물 속성 마석을 꼭 닮은 눈동자가 깜빡였다. 

“그 결과 자네는, 우리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고.”

스피넬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당신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과거의 죄를 안은 그 자신의 책임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였다.

“나는 마탑을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네. 만든 뒤에 그것을 막는 제어 장치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알피노는 스피넬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젠가 꽃 피어난 바닷가 절벽 위에서처럼. 스피넬은 그 손아귀가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플 것은 없었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그게 아니란 걸 아네. 너무나 잘 알아.”

살풋 웃는 그의 얼굴은 언제까지고 보고 싶은 종류였다.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이 감정은, 불안이나 공포의 그림자는 온데간데 없이, 물 번지듯 스며드는 환희였다. 스피넬은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의 베일을 아주 조금만 벗고 미소지었다.

부여한 마력이 다하면서 바람이 점차 멎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경계를 다진 병사들이 창과 화살을 겨누고 서서히 접근하자 알피노가 위엄 있게 허리를 펴고 우렁차게 호령했다.

“나는 마탑주 알피노 르베유르! 지금부터 전투에 임한다!”

명령에 익숙한 사람의 발성과 자세였다. 이에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반응해 꼿꼿이 섰다. 몸부터 움직인 직후에 머리가 굴러갔다. 마탑이라면 분명 연합국의 동맹인 시국의 핵심이었다. 마법으로 별안간 등장한 그는 명실상부 뛰어난 마법사이며,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알피노를 적대시하는 걸 곧장 멈추고 지휘관의 일원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잘 듣게.”

그는 아득한 상공에서 바라본 적군의 진형을 가르쳐주었다. 스피넬이 무너트린 제국군 좌익의 진형 뿐만 아니라 연합국이 우위를 차지한 우익, 거기에 더해 본디 꽁꽁 숨기고 있을 적진 사령부의 정확한 위치까지. 한 병사가 기겁하며 장교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뛰어갔다. 알피노는 그것을 무시했다. 장교들이 움직이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낼 작정이었다.

“저희 포탄은 거기까지 닿지 않습니다.”

병사들이 곤란하게 직고하자 알피노와 스피넬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연합국의 기공포탄은 그렇겠지만, 하우리에제의 마법탄은 다를 것이었다. 스피넬은 품에서 마탑의 마도구를 꺼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무지갯빛 마석에 마력의 잔향이 넘실거렸다. 알피노가 눈썹을 내려당기고 스피넬의 기색을 살폈다. 무리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보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건지가 중요하죠."

알피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떨림. 투명 마법, 하우리에제 결계 해제, 아네모네와의 결투, 거기에 전이 마법에 바람 마법까지. 웬만한 마법사 같으면 치사량 급의 마력 사용이었다. 아무리 알피노가 대단하더라도 그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주먹을 꽉 쥐면서 무엇이 최선일지 계산했다. 선택지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스피넬은 알피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눈치챘다. 그도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알피노의 손을 쥐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펼쳤다. 작은 단검이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스피넬.” 

“안 돼요.”  

“들어보게.” 

“안 된다니까요."

생명력을 바치는 금단의 마법은 많은 피를 요구했다. 이 전장에서 치유 전문 마법사는 너무나 바쁘고 귀한 존재였다. 알피노가 제때 제대로 상처를 처치받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스피넬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알피노가 스피넬의 턱에 검지를 걸고 위로 조심스레 당겼다. 감정이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는 누구의 것이었나. 

“우리가, 우리 마탑이 만든 도구로. 꼭. 제국에게 맞서 싸워 이겨 보세.”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 마법의 논리 구조를 연결시켰다. 선명한 빛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그의 팔을 깊게 베고 지나갔다. 하우리에제의 단면에 피가 뚝뚝 떨어졌으나 흘러내리지 않고 그대로 흡수되었다. 마석들이 붉은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네가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스피넬은 자신에게 눈물을 단 한 방울만 허용했다. 그 이상으로는 감상에 젖어들 수 없었다. 부풀어오른 마력을, 이번에야말로 남김 없이 마도구에 쏟아부었다. 마석 안에서 자신의 마력이 알피노의 것과 뒤섞여 반발 없이 화합을 이루는 것이 느껴졌다.

더 많은 마력은 더 강력한 힘. 더 멀리 쏘아질 수 있는 힘. 제국군 사령부 위치는 알피노를 통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위력 역시 방금 전에 직접 확인했다. 남은 건 믿는 것뿐이었다. 스피넬이 바친 자신의 마력을, 알피노가 생명력을 치환해 쏟은 마력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론을 짜내어 만든 마탑의 노력을. 스피넬은 충전된 마도구를 겨냥한 뒤 이글거리는 마탄을 쏘았다.

희다 못해 푸르게 약동하는 에너지 덩어리가 하우리에제의 끝에서 발사됐다. 어마어마한 열기였다. 그것이 닿는 길마다 겹겹이 쌓여 있던 마도 방패는 여름의 얼음처럼 녹아내리고 모래성처럼 부서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마법탄은 스피넬과 알피노, 그리고 중부 대륙 모두의 희망이었다. 날아가고 날아가다가 이윽고.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폭발음이 터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 휘우듬 쓰러지는 스피넬의 몸을 알피노가 간신히 받아내 충격파에 그가 휩쓸리지 않도록 감쌌다. 스피넬은 알피노의 팔에 기대어 확신했다. 명중했다고. 

한 차례 파동이 지나가고 제국군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순간에 우두머리를 잃은 들개무리는 헤매였고, 일사불란한 연합국 군사에게 깡그리 쓸려나갔다. 끝내 버틸 수 없었던 그들의 전령이 백기를 들고 찾아왔다. 제국이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뜨거운 승리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그것을 식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알피노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늘하늘 내려온 눈송이가 그의 손바닥에 다다라 금방 녹아버렸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스피넬은 전쟁을 끝난 영웅이 되었다. 그러니 그의 누명은 당연히 벗겨질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시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다시금 내뻗은 손바닥에 눈송이가 내려앉아 맑은 물로 스며들었다. 아아, 그렇구나. 마탑도 아니고 시국도 아니었다.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 한가운데 찾아온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스피넬을 구하기 위해서였구나. 알피노는 눈송이를 감싸듯 손을 쥐었다

“스피넬.”

급격한 마력 소모로 휘청이는 스피넬의 몸을 알피노가 지탱해 주었다. 그의 품안에서 스피넬은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맞닿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피노는 피에 젖지 않은 팔을 올려 그를 끌어안았다. 알피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마법의 구성 논리가 들어 있다. 이론도, 지식도, 정보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이 기분을 온전하게 표현하고 구현할 수 있는 마법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이 사람의 소중함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넬은 좁은 틈새로 까치발을 들어 알피노의 볼에 입맞췄다. 깜짝 놀란 알피노가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입술에 자신의 것을 포갰다. 알피노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자연스레,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이 옳다는 듯이, 스피넬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손길에 묻어나오는 사랑스러움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었다.

지복의 교감은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기력을 다해 자리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두 사람은 부양감을 느꼈다. 들것에 들려 치유 마법사들이 분주하는 후방으로 실려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스피넬과 알피노는 미소를 나누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므로. 사랑하기 시작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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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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