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K

[블텽] 돌고 돌아서

※ 캐해는 잘 모르겠고 보고 싶은 걸 씁니다. ※

※※ 본문은 펜슬 내에서만 감상해주세요 🫶 ※※

  또다. 쟤는 정말 자신이 티가 다 나는 걸 모르는 걸까. 나름 숨기려는 게 보여서 악의가 아닌 건 알겠지만. 인기도 많은 애가 왜 같은 남자인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웬만하면 그냥 모른 척 할 텐데 하도 적나라한 탓에 재밌는 일 같으면 사족을 못 쓰는 타인들이 나서서 유난을 부렸다. 야, 태영이가 너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이 정도면 좀 받아줘라! 그 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었다. 이제는 노이로제까지 걸릴 지경이었다. 제발, 내가 왜 김태영을 받아줘야 하는데 재민아. 애초에 김태영은 티가 나는 것뿐이지 내게 고백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김태영을 그런 감정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렇게 설명해 봤자였다. 말이 길어질수록 듣는 사람은 없었고, 그 애의 마음을 진심이라고 여기지도 않으면서 다들 본인 할 말만 장난처럼 던지고 사라졌다. 님은 한 번 말하겠지만 저는 열 번 듣거든요. 억지로 부추겨지는 게 얼마나 기분이 개떡 같은지 당해봐야 알지. 태영의 티읕만 나와도 스트레스 받아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럼 또 화살은 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그 말을 듣게 만든 당사자, 김태영에게로.

  다소 충동적이었다. 말 한마디도 계획하고 계산하는 나답지 않게. 사실은 내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거면서,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척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내미는 김태영에게 불쑥 물었다. 

  "너 나 좋아하니." 

  "...!"

  "하... 정신 차리고 너 좋다는 여자 애들 만나."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 정곡을 찔린 표정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놀라 토끼눈을 뜨던 김태영은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아.. 우네. 내가 뭐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설마 스물 한 살 남자 애가 울 줄은 몰랐기에 진짠가 싶어 손을 뻗자, 뒷걸음질로 피한 김태영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해버렸다.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 내가 누굴 생각해줄 처지인가. 솔직히 나 스트레스 안 받는 게 더 중요하지.

  그 날 이후로 김태영은 나를 눈에 띄게 피해다녔다. 좋아하는 것도 못 숨기더니 피하는 것도 못 숨겼다. 어쩔 수 없지. 전보단 낫네. 김태영이 나를 따라다니지 않으니 내게 김태영에 관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굉장한 착각이었지만. 김태영은 다른 물음으로 또 내게 따라붙었다. 네 껌딱지 김태영, 걔 요즘 안 보이던데 어따 두고 왔어? 진짜 환장하겠네. 한숨과 함께 대충 둘러댔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걔랑 길게 대화해 본 적도 없어. 정말 정신 차리라는 말 했을 때가 가장 길게 대화했을 때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부터 시간이 좀 지나 흥미가 식은 듯 김태영 관해 들어오는 질문이 확연히 적어진 때였다. 김태영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내가 좋아 죽겠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김태영은 전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사람을 건강해 보이게끔 하는 구릿빛 피부도 그 수척함을 가려주지 못 했다. 빤히 내려다 보자 입술을 꾹 깨문 김태영이 입을 열었다. 말할수록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형 그만 좋아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는데 어떡해요..."

  결국 또 김태영을 울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저절로 머리를 짚게 했다. 정말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멋대로 좋아해서. 슬슬 이 의미없는 눈물 쇼가 귀찮아졌다. 단전 깊숙이서부터 올라와 내쉬어진 한숨 소리에 김태영의 눈이 더더욱 젖어들었다. 근데 어떡하냐. 나는 더 울리면 울렸지 네가 원하는 답 못 해주는데.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

  내 대답에 김태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좋아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 말은 꾹 삼켰다. 이미 충분히 알아듣게 말했고, 입밖으로 내뱉는 건 정말 내 스스로도 쓰레기 같아서 생각으로 끝냈다. 김태영의 커다란 눈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잔뜩 상처 받은 눈이 날 원망하듯 바라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듯이. 내 탓도 있다는 듯이.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좀처럼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하얘지도록 꾹 깨문 입술이 문득 안쓰러웠다. 짝사랑이 다 그렇지만서도. 그래서 나답지 않은 질문을 던진 거다.

  "하......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사귀어줬으면 좋겠어요... 한 달만." 

  별로 놀랍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울면서 말하느라 다 뭉개진 발음으로도 원하는 바가 똑똑히 들렸다. 분명 나는 꼭 들어줄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닌데. 그럼 애초에 물어보지 말아야 했나. 아무래도. 생각하느라 말이 없자 거절이라고 생각했는지 김태영이 다급히 덧붙였다.

  "그럼 포기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알겠다는 대답을 내뱉었다. 무슨 생각으로 받아줬냐 하면 김태영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래, 한 번 만나보자. 그럼 포기 되겠지. 왜냐하면 우리의 사이가 무엇으로 새롭게 정의돼든 내가 네게 가지는 감정은 변한 게 없으니까. 너도 알게 되겠지.

***

  포기 될 수도 있댔지 포기 한다고 한 적 없는데. 야심차게 딴 마음 먹고 시작한 형과의 연애는 생각만큼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형이 정말 날 포기 시키려고 마음 먹은 것처럼 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딱 평소처럼 굴었다. 사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조금 달라진 거라고 하면 연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듯 내게 쓰는 시간이 늘었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타인에게 관심 없는 형을 알기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같이 카페에 앉아 있으면 대화가 아닌 인터뷰가 시작됐다. 나는 인터뷰어고, 형은 인터뷰이. 형은 무슨 음악 좋아해요? 무슨 음식 좋아해요? 좋아하는 영화 있어요? 나는 기쁘게 형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차곡차곡 머릿속에 집어 넣는데 형의 머릿속에는 내가 쌓이지 않았다. 바닥에 쌓이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진눈깨비처럼. 형이 먼저 물어본 적도 없고, 말해줘도 기억을 잘 못 했다. 형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형은 대답했다. 음... 없는데. 나는 별다른 반응을 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형의 표정이 일부러 못 되게 말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한 게 없다는 표정이어서.

  아직 며칠 안 됐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처음부터 0 : 100의 마음으로 시작한 연애임을 알기에 나는 형을 이해했다. 지금이 그 마음의 온도를 올리기 위해 주어진 한 달이니까. 형이 강의실 앞에서 기다려주거나 주말에 보러 가기로 한 영화를 미리 예매해 놓았을 때, 넘어지려는 걸 잡아줬을 때, 형한테 얘기하며 걷다 앞을 못 봐 이마 부딪칠 뻔한 걸 막아줬을 때 나는 다 괜찮아졌다. 

  그 정도야 친구는 물론이고 덜 친한 사람마저도 할 수 있는 짓이라는 사실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걸 누가 해주냐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됐고, 형이 내게 함으로서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고 느끼게 했다. 말도 못 하고 꾹 삼킨 서운함 금세 녹아내리고 눈동자가 하트 모양이 됐다. 내가 형을 꼬셔야 하는데 나만 형한테 더 꼬셔지는 기분이었다. 결국엔 끝을 모르고 부푸는 일방적인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형에 대한 내 마음을 정리하기로 마음 먹었다. 덜컥 두려워진 탓이다. 나는 갈수록 형이 좋아지기만 하는데 형이 내게 넘어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게 향한 것만으로도 마냥 기쁘던 형의 의무적인 다정은 오히려 나를 힘들게 했다. 아니, 다정보다는 친절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했다. 나를 대하는 형을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구절이 떠올랐다. 친절과 호감을 헷갈리면 안 된다는 말. 나름 애써 봤지만 내가 뭔짓을 해도 결국 그 정도였다.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확신만 더해질 뿐이었다. 

  호감이었으면 하는 형의 행동들이 그저 의무적인 친절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나는 내 패배를 인정하고 그만하기로 했다. 찰나의 행복에 취해있기엔 예견된 추락의 맛이 쓰다는 걸 알았다. 지구를 세로질러 반대편까지 떨어지지 않으려면 미리 대비해야 했다. 죽어도 안 될 것 같던 포기가 사귀고 나서야 됐다. 이게 형이 바라던 거였을까. 진짜 가망 없구나. 그 말이 내 사랑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것마저도 볼품없었다.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건 공부에 한정된 얘기였나 보다. 가망 없는 걸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데 나는 사랑에 관해선 멍청해서 기어코 이렇게 상처를 받고서야 포기가 됐다.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포기하고. 이기적이라 해도 할 말 없었다. 그런데 형, 나도 내가 덜 아픈 게 중요해. 

  형과의 시간을 줄여나갔다. 마침 시험 기간이 가까워져 오기도 했다. 같이 있으면 집중이 안 된다는 이유로 형과 만나지 않았다. 그 거리에 이제 다시 익숙해져야 했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쉬웠으면 진작 포기했지. 이럴 거면 한 달만 사귀어 달라는 말 하지 말 걸 그랬네. 초코라떼 마시다가 에스프레소 마시니까 더 써. 그래도 형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다 보니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눈치 보고 감정을 속으로 삼키던 형의 연인인 내가 아니라 밝고 솔직한 예전의 나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약속한 한 달이 되기 이틀 전, 형의 마지막 시험이 끝난 날. 형에게 그만 하자고 말했다.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무언가 걸려있는 듯 답답해서 조금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붉어진 귀끝으로 나는 형이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한 달 안 됐는데..?"

  "포기했어요. 더한 시간 필요 없어요."

  "...넌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게 쉽게 포기 돼?" 

  형의 질문에 대한 의중을 알 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이건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왜 그러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나 두드리고 갈 길 갈 줄 알았는데. 도무지 형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올라오는 건 당연했다. 쉽게, 라니. 함부로 말하네. 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밤들을 지샜는데. 노기 섞인 헛웃음이 샜다.

  "쉬워 보여요?"

  "......"

  "형이 그럴 수 있게 해줬잖아요. 가망없다고 느끼게. 그래서 포기한다는데 왜 그래요? 형이 바란 거 아닌가요." 

  "......"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맙고, 그동안 내 억지 생떼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한달뿐이지만 그래도 사귀고 헤어진 거니까 우리 아는 척 하지 말기로 해요." 

  내가 느낀 외로움과 무력감을 입밖으로 꺼내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형이 맞고, 내가 틀렸어요. 형이 정답을 알려줄 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틀린 걸 알면서도 기회를 준 형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부 쏟아냈다. 이런 상황에도 형은 아무 말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꿀먹은 벙어리가 된 형을 지나쳤다. 포기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음이 아렸다.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붙잡는 손길에 걸음이 타의로 멈췄다.

  "야, 내가 너 좋아졌다면 어떡할 거야?"

  우뚝 선 몸이 굳었다. 심장이 쿵 낙하했다. 눈을 깜박였다. 줄곧 듣고 싶던 말. 너무 늦어버린 말. 기쁘긴커녕 도리어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 와서...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나. 식어버린 감정의 온도가 싸늘했다. 천천히 형을 돌아봤다. 형의 눈은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흔들림에 동했을 텐데. 나는 내 팔을 잡은 형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 손은 곧 처량하게 허공에 떨어졌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

  형을 바라보는 내 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나마 채워진 거라곤 불신 뿐. 한 단계 높아진 호칭으로 말하지 않아도 내 답을 알 수 있을 테다. 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탓에 형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형이 내 등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

   까만 고양이 키링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키링은 인터넷을 보다가 문득 태영이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서 급하게 일본에 가서 사온 거였다. 일본에서만 판다기에 당일 비행기로. 굳이 그 날 바로 갈 필요도 없는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그렇게 급할 거면 하루만 더 일찍 급하지. 다음 날 주머니에 넣어둔 키링을 언제 줄까 고민하는 사이 태영인 내게 이별을 고했으니까.

  내게 태영이가 스며들었다는 걸 깨달은 건 한 달이 끝나기 이주일 전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귀찮기만 하던 태영이 어느 순간부터 귀여워 보였다. 태영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긴커녕 너무 빨리 달아나 아쉬울 지경이었다. 시험 기간이라는 이유로 보지 못 하는 날이 늘수록 보고 싶어서 애가 타고 그 애의 하루가 궁금했다. 

  내가 태영이에게 처음 느꼈던 감정을 생각해 보면 놀랍기 짝이 없었다. 내가 틀렸다. 왜 내가 태영이를 좋아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 걸까. 태영이 한 달만 사귀어 보자고 한 진짜 이유를 알았다. 날 포기하려던 게 아니라 내 마음을 가질 자신이 있던 거였어. 태영의 자신감은 제 몫을 다 했다.

  태영이 날 좋아하는 걸 안다. 나도 태영이 좋아졌다는 걸 알았다. 자연스레 다음 수순으로 고백을 떠올렸다. 태영은 이미 나를 좋아하니 내가 내 마음만 알린다면 더할나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한 달의 기간이 끝나는 날 고백하려 했다. 마지막 날이 되기 이틀 전 태영의 구정모 포기 선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말을 하고 멀어지는 태영의 등이 미련 따위 없어 보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하니 서서 낯선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문득 깨달았다. 태영은 내게 돌아선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는 걸. 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한 달 동안 미친놈처럼 넋 빼놓고 태영의 생각만 했다. 당시엔 다 흘려들은 줄 알았는데 잘도 남아있는 태영의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익숙한 평이 무색하게 뜬금없이 그냥 걷다가 눈물이 흘렀다. 목도리로 닦으려고 보니 이것도 태영이 커플템이라며 슬쩍 건넸던 목도리였다. 결국 답지 않게 길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버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큰 소리로 오열했다. 힐긋거리는 주변 시선도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 했다.

  한참 후폭풍에 휘둘리고 있을 때쯤 내 귀에 들려온 건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구정모 껌딱지 걔, 여친 생겼대. 하도 구정모 쫓아다녀서 게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누구한테 진위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태영이 어떤 여자 애와 웃으며 걸어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멍하니 보다가 이대로 보내면 정말 끝일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무작정 길 가던 태영일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당황한 태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도 행동이 생각보다 앞서 잡고나서야 상황을 인식했다. 팔을 붙잡고 말없이 가만히 있으니 태영이 못마땅한 듯 입을 열었다. 말투에서부터, 아니 표정에서부터 거리감이 느껴져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너는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은 티가 역력했지만, 태영아 말했지.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이기적이래도 상관 없어.

  "무슨 일이세요?"

  "잠깐 시간 좀 주라. 할 얘기 있어." 

  "전 없는데요." 

  "제발, 태영아..." 

  절박하게 애원하다시피 말하니 도리어 옆에 있던 여자 애가 자신은 괜찮으니 얘기하라며 자리를 피해줬다. 마지못해 나와 독대한 태영이 바닥을 보며 말을 툭 던졌다. 무표정한 얼굴,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에도 나는 아랑곳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무슨 일인데요."

  "태영아, 나 진짜로 너 좋아해. 그만 좋아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는데 어떡해." 

  익숙한 문장, 역전된 상황에 태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도 내가 나쁘다는 걸 알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태영의 입에서 그때의 나처럼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눈가에 열이 화악 오르는 게 느껴졌다. 머뭇거리던 태영이 입을 열었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봐 줘."

  "......"

  네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똑같이 되돌려받는 문장이 아팠다. 그럼에도 태영을 놓칠 수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음에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 순간 난 현 대통령보다 뻔뻔할 자신 있었다.

  "사귀어줬으면 좋겠어. 한 달만." 

  "...선배, 나 선배 덕에 정신 차렸어요. 선배도 정신 차리고 선배 좋아하는 여자 애들 만나세요." 

  "그럼 포기 될 수도 있잖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자 태영이 동요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물기가 차올랐다. 꾹 다문 입술. 부들거리는 주먹. 태영은 화가 나 보였다. 나는 형 안 좋아해요, 그 말만 아니길 빌었다.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열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참는 듯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 때문인지 슬픔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형 말을 어떻게 믿어요. 대체 이제 와서 왜 그래요. 솔직히 바보 취급 당하는 거 같아서 짜증나요."

  "나 너 때문에 길거리에서 울고, 매일 미친 놈처럼 네 생각만 했어. 널 좋아하게 됐어. 염치 없지만 나 받아주라."

  "언제부터..."

  "한 달 끝나기 전부터. 끝나는 날 고백하려고 했어..."

  "...나는, 전혀 몰랐어요. 형도 나를 좋아하게 됐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그만 둔 건데 지금에서야 이렇게 말하면..."

  "한 달만, 네 옆자리 나한테 주라. 잘 할게."

  감정을 모르는 것처럼 슬픈 영화를 볼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 태영은 살짝 놀란 듯 보였다. 나는 태영의 손을 봤다. 눈물을 닦아주려다 멈칫한 손. 그게 어떠한 가능성이라고 받아들인 나는 태영의 손을 잡아올려 내 젖은 눈가를 쓸었다. 태영은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끌려왔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태영의 질문. 그 물음이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답을 알았다. 그 답이 진심이기도 했다. 마지막 세 글자에 온 마음을 담아 망설임 없이 전했다.

  "미안해, 태영아. 좋아해."

  늘 습관처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던 까만 고양이 키링. 이걸 태영에게 건네줄 수 있는 기회가 방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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