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레님네(220호)

옆집 적폐날조의 무언가

[짓큐츠바] 자업자득의 등하불명

※ 마왕짓큐x츠바키의 얼렁뚱땅 로판

※ 라미레(@ Lamire_touken)님의 가내드림에 대한 적폐날조 3차 창작입니다

가신들이 멋대로 추진한 결혼식날이 오고야 말았다. 공국의 주인의 결혼답게 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짓큐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이런 소문 나쁜 대공에게 팔려오듯 시집 온 영애도 제대로된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여 짓큐는 신부의 면사포 베일조차 걷어주지 않았다.

식을 올렸으니 그녀는 엄연히 짓큐의 반려요, 대공비였으나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가신들이 읊던 신부의 신상정보는 커녕 이름 조차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그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최악의 신랑이건만, 한술 더 떠 그는 무려 초야에 신부를 소박 맞히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

짓큐가 저택에서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는 서재였다.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나는 공간에서 홀로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리도 고요하고 평온할 수가 없어, 때때로 서재에 머무는 것을 즐겼다. 다른 이가 서재에 오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서재만은 청소도 직접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사용인들은 절대 서재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이었던 것 같다.

측근인 소우자가 쪼아대듯 하는 잔소리를 피해 서재에 들린 짓큐는, 서재 한쪽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작은 소녀의 모습에 눈을 껌뻑였다. 그 외의 사람이 서재에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한 사용인들은 서재 근처에도 오지 않는지라, 멋모르는 새로운 메이드인가 싶었다. 책에 정신이 팔려 짓큐가 서재에 들어온 줄도 모르는 허름한 옷을 입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조그마한 새를 연상하게 했다. 무심코 귀엽다는 생각을 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소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 안녕하세요...."

"아아."

소녀에게로 다가간 그는 힐끔 그녀가 읽던 책의 내용을 곁눈질했다. 그 책은 북부에서 나는 식물들에 관한 책으로, 짓큐도 굉장히 좋아하는 책이었다.

"책을 좋아하나?"

"....네, 좋아해요..."

짓큐의 물음에 대답한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여기 서재는 읽어본 적 없는 책들도 많아서 좋아요."

즐거운 듯 주위를 둘러보는 소녀의 모습에 짓큐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비맞은 새처럼 주춤하던 모습이 어느새 온데간데 없다. 떠는 듯한 반응도 짓큐가 누구인지 알아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성격이 그런 듯 했다. 그런 모습이 어쩐지 묘하게 짓큐의 흥미를 끌었다.

"서재에는 자주 오나?"

"아, 있다는 건 들었는데 와보는 건 오늘 처음이에요...."

오는 길을 알았으니까 이제 자주 오려구요. 자그마한 목소리지만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아, 츠바키라고 해요...저, 당신은?"

"유키지라고 한다."

그의 성에서 일하는 메이드인 이상 언젠간 그의 정체를 알게 되겠지만, 제가 대공인 줄 모르는 소녀의 모습을 좀 더 봐두고 싶었던 그는 측근들이나 알법한 아명을 댔다. 가까운 책장에서 적당히 책을 한 권 뽑아들고는 소녀의 옆에 앉았다. 소녀는 한순간 가까워진 거리감에 살짝 주춤거리면서도, 곧 짓큐가 펼쳐든 책에 관심을 보였다.

"남부의 식물에 관한 책이네요."

"읽어봤나? 흔한 책은 아닌데."

"작년에 언니가 생일선물로 구해다줬거든요. 좋아하는 책이에요."

남부에서만 자라는 식물 중에 직접 보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며 즐겁게 이야기의 물꼬를 튼 소녀와 대화하는 것이 굉장히 즐거워서, 짓큐는 제 서재를 침범한 외부인의 존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그 후로 3주 정도, 짓큐는 시간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일 오후에 서재로 걸음했다. 그렇게 서재에 가면 늘 책을 읽고 있는 츠바키가 짓큐의 기척을 느끼고 책에서 시선을 떼곤 오셨어요 유키님, 하고 배시시 웃었다.

"츠바키, 일이 힘들지는 않나?"

"아, 아뇨. 뭔가 하려고 해도 다들 말려서요..."

그 말을 듣고 짓큐는 다른 사용인들이 그녀가 어려서 배려해주거나, 서투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주인된 자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귀여운데 뭐, 일 좀 못하면 어떤가 싶었다.

"그대는 언제 저택에 들어왔나?"

"한달쯤 됐어요."

대답하고는 어서 다시 책을 읽고 싶은 건지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츠바키를 짓큐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못 보던 사용인인데다가, 새로 사용인을 뽑는다는 보고도 들은 적이 없고, 한 달 전쯤 저택에 들어왔다면 대공비를 따라온 시녀인가, 싶었다.

그보다 책이 더 관심이 가는지 눈길을 주지 않는 츠바키가 어쩐지 섭섭해서, 짓큐는 검지손가락으로 츠바키의 뺨을 톡, 하고 살짝 찔렀다. 츠바키가 흠칫하며 짓큐를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츠바키."

"네?"

"그대는, 연인이 있나?"

"그, 그런 건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며 튀어나온 대답에 짓큐는 안도했다.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니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언제부터 마음을 빼앗겼을까, 돌아보니 처음 본 그 순간 부터였던 것 같다. 사랑스러운 연두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속절 없이 마음을 빼앗긴 것이리라.

소녀가 놀라지 않게, 평온을 가장하며 그는 츠바키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좋아해. 그대, 내 연인이 되어주지 않겠어?"

그 말에 츠바키의 반응이 이상했다. 수줍어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저....죄송한데...제가, 남편이 있어서요."

뭐?

뒤통수를 검집으로 후려 맞은 것 같은 기분에 짓큐가 멍하니 츠바키를 바라보았다.

"....진짜,인가?"

"네, 제가 유키님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다시 되내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가 이미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다고?

난생 처음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행복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계속 함께 있길 바랬다. 그래서 고백을 했다. 츠바키도 자신을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라서,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미 결혼을 했다니.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동시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녀의 남편을 죽여서라도, 츠바키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녀의 남편 따위, 알게 뭔가. 그는 북부의 주인이고, 이 땅에서 그가 원하면 가질 수 없는 것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츠바키의 목소리가 그의 몸을 멈추게했다.

"유키님의 호의는 감사해요....그래도, 그러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사랑 없이 한 결혼이지만,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니까...저는 그 분께 대한 의리를 지켜야해요."

"남편을 사랑하나?"

"아마, 아니요."

"그런데도?"

"그래도요."

평소의 츠바키의 태도와 다르게 의연하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짓큐는 거기에 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츠바키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녀를 부인으로 맞았으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남편이라는 놈이 한없이 부럽고 증오스러웠다. 눈앞에 있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짓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벗어났다. 의아해하는 츠바키의 시선이 그의 등을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츠바키를 괴롭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

그래서 그는, 츠바키의 남편을 죽여없애는 대신, 그녀를 마주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 연두빛 눈동자를 다시 마주한다면, 스스로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므로.

***

외로움이 덮쳐오듯 부딪혀 허무하기까지한 며칠이 지나갔다. 츠바키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일에 몰두하던 짓큐는 집사가 가져온 소식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 여자가 보자고 한다고?"

"예, 시간이 되신다면 한 번 뵈었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부인. 츠바키의 주인. 애써 츠바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던 짓큐의 노력을 비웃듯이, 츠바키에 대해 떠올리게 한 대공비에게 짜증이 치민 짓큐는 어디 원대로 해주마 하고 집사에게 말했다.

"지금 가겠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잠자코 죽은 듯이 살면 대공비로서 대우는 섭섭치 않게 해주련만, 부러 부스럼을 만드는구나. 기별은 드려야하지 않겠냐는 집사의 말에 안내해라, 하고 명령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주인의 말은 절대적인 지라, 집사는 작고 연약한 안주인이 가여우면서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주인을 안내할 수 밖에 없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대공비의 방 앞에 도달했다. 안에 기별하자,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어오세요 하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어딘가 귀에 익은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애써 머리 속에서 지운 짓큐가 벌컥 방문을 열고 대공비로 추정되는 작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대공전하 처음 뵙겠습니......."

그 작은 체구와 붉은 머리카락은, 짓큐 미츠타다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것이었다. 멍청하게 어? 하는 소리를 내자 대공비도 엉겁결에 고개를 들어 짓큐를 쳐다봤다.

"....어."

"....아."

짓큐와 대공비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츠바키?"

"...유키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놀란 얼굴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

한참 후에, 얼추 진정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다. 각자의 앞에 찻잔이 놓여있었지만, 둘 다 손대지 않아 미지근하게 식어가고만 있었다.

"...내 실책이로군."

"아, 아니요. 제 잘못이죠...제가, 대공비인 걸 알면 유키님이 불편해 하실 것 같아서..."

아, 유키님이 아니라 대공전하시죠. 그렇게 말하며 어쩔 몰라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츠바키를, 짓큐가 찬찬히 바라보았다. 서재에서 만날 때 입고 있던 간소한 옷과 편하게 풀고 있던 머리와 달리, 귀족가의 안주인다운 격식 있는 드레스와 장신구가 참으로 잘 어울렸다. 짓큐가 말이 없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귀끝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야, 그가 알던 츠바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지만,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서, 심장을 뜯어내는 심정으로 멀리하려고 애썼는데, 이미 제 반려였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한탄스러우면서도, 기쁨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저, 대공전하..."

"그대, 유키라고 불러. 그게 익숙하잖아."

"...그, 유키님."

"응, 츠바키."

갑작스럽게 밝혀진 서로의 정체에 놀랐지만, 익숙한 호칭이 오가자 조금은 진정한 듯한 츠바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짓큐와 눈을 마주했다.

"츠바키."

"네, 유키님."

"나는 그대를 좋아해."

언젠가 들었던 것과 같은 고백에, 츠바키가 잠깐 입을 다물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저, 이 말은 꼭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이지?"

"유키님은, 결혼도 하셨으면서, 어째서, 저에게 고백을 하셨나요?"

무, 물론 유키님 부인이 저긴 하지만, 그땐 아무 것도 모르셨잖아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단호하다. 이런 모습도 그녀의 사랑스러운 부분이다.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해보이면서도, 필요한 때에는 물러서는 일이 없다.

"...정략결혼이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어. 그대가 너무 좋아서, 계속 함께 있고 싶었어."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라도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말했던 츠바키는 그런 짓큐를 환멸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짓큐는 츠바키에게 솔직하게 굴고 싶었다. 다만, 츠바키가 그를 환멸할지라도, 츠바키는 짓큐의 아내였다.

"그대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미소를 띈 짓큐가 그리 말하자, 츠바키의 얼굴이 화악하고 붉어졌다.

"난생 처음 사람을 사랑스럽다고 여긴 건 그대가 처음이야. 상냥한 면모도 좋아해, 수줍어하는 모습이 귀여워, 그러면서도 그래야할 때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굳은 심지도 사랑스럽게 생각해. 그대와 있으면 행복해. 나는, 그대를 사랑해."

쇄도하는 짓큐의 고백에 무언가 말하려고 몇 번이고 시도하던 츠바키가 한 마디를 꺼내놓았다.

"...유키님은...나쁜 분이세요..."

"앞으로 평생 만회하게 해줬으면 하는데."

"...정말이지, 이런 일은 소설에나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그런 유키님을, 저도 좋아해요."

겨우 마음을 꺼내놓은 츠바키가 짓큐의 반응을 보기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짓큐는 자리에서 일어나 츠바키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두 팔 가득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 유키님."

"사랑해, 츠바키."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란다는 듯이 츠바키의 귓가에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짓큐에, 츠바키는 어쩔 줄 몰라했다. 놀라서 긴장하던 몸이,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짓큐를 마주 안았다.

"저, 저도요..."

이런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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