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방식
하태성, 누구도 아닌 남자 / CP
당신과 가장 가까이, 오래도록 곁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이 거리로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거리를 한 걸음이라도 좁히는 순간, 주저 없이 떠나갈 당신을 알았다.
느린 걸음이 발목을 잡았다.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은 어디일까, 의미 없는 물음을 던진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조용히 흘렀고, 실체가 없는 소리는 안개처럼 사라졌다. 남자는 점점 더 가라앉는 기분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 ….”
피곤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였다. 바스락거리며 꺼낸 담뱃갑은 어쩐지 불길하도록 가볍다. 흔들어보니 소리도 없다. 젠장, 살짝 열어보니 실제로도 텅 비어있는 내부에 그대로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얼굴도 따라 구겨졌다. 기울어진 우산 따라 빗줄기가 옷자락에 튄다. 영 되는 게 없어.
계속 걸음을 옮기며 남자는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 밑단이 축축하게 젖었다. 오래된 휴대폰, 낡은 영수증, …쓸데없는 것들이 주머니에서 굴러다니다가 그의 손가락에 뭔가 걸렸다. 아, 사탕. 남자의 손바닥 위로 막대 사탕이 올라왔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자신에게 왜 사탕 따위가 있나 생각 하다가 한 사람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젊은, 경위. 하태성.
짧은 이름을 떠올린다. 아니지, 이제는 '전'경위인가. 그는 사탕을 입에 물었다. 입이 심심하니 이거라도 대신 물고 있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물었으나 입 안에 퍼지는 달달한 맛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적지근한 단 맛이 혀에 천천히 맴돌았다.
하태성을 떠올렸다. 담배, 그만 피우면 안 됩니까? 하는 목소리가 선명하다. 그놈 짓이네. 담배를 다 피운 게 아니라 있던 것을 버리고 대신 이런 깜찍한 사탕을 주머니에 넣어놓은 것일 터였다. 담배 대신 사탕이라니, 어린애도 아니고. …사탕의 단 내에 이끌린 빗소리 따라 친구가 생각난다. 끝내 잃어버린 친구.
몇 달 전에 있었던 짧은 소동의 시발점인 유상일과 주정재의 만남. 사실 그는 그들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었다. 주정재는 같이 갔으니 알고 있었지만, 유상일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겠지. 그 뒤에 그가 있었음을. 오랜만에 보았던 그 얼굴은, 초췌하고 그래.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눈동자에 짙은 복수의 그림자는 회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정재에게 전달해놓은 것들이 유상일의 손에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추락하는 일이 없길 바랬지만 과거에서 이어진 인연의 끈이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유상일 목을 조여버린 결말은 남자를 곪게 했다. 슬퍼했던가, 울었던가. 이미 말라비틀어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요동치며 울렁거렸다. 남자는 그 감정들을 모두 양분 삼아 곧 섰다.
까마득한 옛날, 그의 복수를 돕기로 했던 약속은 이제 모두 지켰다.
경감님의, 복수도 이미 끝냈다. 남은 건 백석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복수의 길에, 계속 걸음을 옮기려는데 애송이 하나가 눈에 밟혔다. 사탕을 가득, 깨물었다. 날카로운 소리였던 것 같다. 엉망으로 깨지면서 입안을 찌르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 손 봤던 얼굴은 꽤 자연스럽게 근육이 반응했다.
길을 잃고, 복수의 그림자를 밟는 애송이는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자리 옆에 서 있는 건 늘 과거의 자신이었다. 어리석은 정은창, 개새끼. 자신을 욕하며 혀를 찼다. 하태성이라는 놈은, 과거의 자신이면서도 제가 아는 놈이랑 너무 닮아서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젊은 유능한 경위, 권력으로 잃은 소중한 사람들. 당연하다는 듯이 걷게 된 복수귀의 길.
과거의 남은 잔재들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사라지고 현재의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않게 될까. 주정재에게 분노를 쏟아내던 하태성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주정재 그 새끼도 참 여전했다. 바르게 좀 살지, 하긴. 내내 곁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변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기대하기도 아쉬웠고, 그 대신 끝을 직접 내주었지. 상냥하게.
초라하게 죽어가는 주정재의 모습이 선명하고, 그 후에 다시 만난 하태성의 눈동자도 선명하다.
과거의 나다.
몇 번이고 생각하고 되 읽는다. 이 앞에 있는 복수를 품은 자들은 과거의 나다. 짧은 조소를 지었다. 입안에 남은 사탕이 혓바닥을 뒤집는다. 달다, 미적지근한 단내다. 얼마든지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 있었는데, 이 작은 복수귀에게 손을 내민 것은 다 유상일, 네놈 때문이다. 너와 똑 닮은 놈을 제 앞에 떨어뜨려 놓고 뒈지면 어떡하라는 거냐….
“당신, 주정재 아래에서 움직이던 사람이죠. 여쭤볼게 있습니다.”
첫 만남이 떠오른다. 이렇게 정직하고 직선적인 사람의 뒤에 네가 아른거렸다. 제 손짓 하나에 무너질 것처럼 휘청 이는 놈은 복수라는 끈 밖에 쥐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까마득한 오래 전이 되어버린 병원 속의 네가 생각난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경위님.”
“이제, 내게는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아, 절망이다. 가볍게 웃었다. 새로운 말이다. 동시에 과거의 너를 그렇게 둘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한 속죄였다. 내민 손을 잡았다. 나는 전부를 말해주지 않을 거야. 알아서 찾아. 짧은 웃음이 톡톡 튀었다.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얼마 만이지. 이 알 수 없는 유쾌함.
그렇게 한 공간에서 생활 하게 된 것도 이제 몇 달이다. 다 먹은 사탕의 막대를 뱉어내며 치아로 혀를 끌었다. 단내가 지독하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것이 많아져서 좋아하지 않게 된다. 경감님, 유상일, … . 은서야. 잊을 수 없는 이들의 죽음이 이어진다. 뱉어내지 못한 연기 대신 흩어지는 숨이, 조용한 애도였다.
…
“…당신.”
“…하, 으.”
하태성은, 시야를 방해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분명 지긋지긋한 행위 임에도 계속 이어졌다. 달뜬 숨이 내뱉어졌다. 처음은, 그의 악몽 탓이었다. 유독 비가 심하게 내리는 밤, 그의 방에서 괴로운 신음이 들렸다. 얼떨결에 같이 지내게 된 지 몇 주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문 너머로 들리는 거의 숨넘어갈 듯한 소리에 하태성은 양해도 구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발작.
제대로 호흡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목을 잡는 손을 억지로 끌어내리고 힘으로 눌러도 남자의 힘에 이겨낼 수 없었다. 봉투로 쓸만한 것을 떠올릴 정신도 없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 그에게 무작정 입을 맞췄던 것은, 급박한 상황의 탓으로 돌렸다. 강제로 호흡을 유도하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입술을 맞대기만 하지 않고 숨이 섞였다. 그와 자신의 섞인 숨은 지독하게도 달았고 잔인했다.
남자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하태성은 마주한 시선을 피했다. “…젠장.” 그의 목소리가 잠겨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이래서 같이 지냈으면 안됐는데. 하는 그의 후회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하태성은 아무 말도 않았다.
“젠장….”
하태성.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제 멱살을 쥐고 다시 입술을 부딪혀왔다. 급하게 입을 맞췄던 방금과는 확실히 다른 입맞춤이었다. 부드럽게 닿은 입술이 허락을 구하듯 몇 번이고 부빗였고, 틈으로 들어온 뜨거운 살덩이는 느리게 입안을 헤집어대었다. 하태성에게 있어서는 낯선 자극들이었다. 남자는 무척이나 능숙해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아래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서로서로 탐하기에 바빴다. 진득거리는 서로의 욕망이 뒤섞이고 서로를 긁어냈다. 기분 나쁜 것이 몸을 잠식해간다. 벗어날 수 없는 실들이 손끝, 발끝, 천천히 전신에 감겨왔다. 한번 시작 한 것은 두 번째도 간단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체온이 닿았고 그의 목소리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랑? 아니었다. 필요에 의한 탐함이었다. 서로에게 부족함을 상대에게 억지로 취하는, 그런 행위였다. 그래야만 했다.
“… ….”
새벽이 지나면 그는 늘 담배를 피웠다. 평범한 담배의 불쾌한 향과 조금 다른 향이었다. 평범한, 흔한 담배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남자는, 표정 변화가 잘 없었는데 담배를 그렇게 피울 때면 무언가 …. 그래, 그건 그리워하는 얼굴이었다.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났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 무어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봐도 어차피 대답해주지도 않으니까.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것은, 현재에 있는 것은 그와 자신인데 그는 대체 누구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거지? 흩어진 연기를 눈에 담았다. 그는 꺼트린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털어놓고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마르고, 흉터가 많은 몸이 시선에 들어온다.
당신은, 언제 즘이면 내게 이야기 해줄까.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깊게 잠들었을 때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치졸한 짓임을 알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그 안에 있던 것들을 전부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가 계속 자신을 누군가로 비춰본다는 것을. 어차피 서로 체스 말일뿐이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책상에 뒹굴던 사탕을 대신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아마 신경도 쓰지 않고 버릴지도 모른다. … 멍청한 짓 이다. 알지만 범접 할 수 없는 그의 그 과거의 잔재에 끼어들지 못할 테니 이렇게라도, … …. 이렇게라도.
나를, 나를 똑바로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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