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바다의선

도진성식 / 황도진 김성식 / 짧은 단문 / 30분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바다가 있으나 똑같은 바다는 없다.

그래서 김성식은 황도진을 찾을 수 없었다.

동해안의 경상남도 울산시의 바다는 잔잔한 편이었다. 포항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야 국도를 따라 파도가 치고 절벽을 깎아내니, 김성식 기억속의 바다는 언제나 잔잔한 바다였다. 그게 울산바다였는데.

"뭐하냐."

황도진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김성식을 향해 물었다. 김성식은 손가락에 걸어두고 있던 담배를 입에 물며 연기를 길게 뱉어냈다. 대답 않는 그를 황도진은 소리 없이 보챘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백기를 든 것은 김성식이었다.

"뭐하기는."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바다를 보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다 타들어 가는 담뱃재가 바람에 따라 흩날린다. 김성식은 황도진을 바라봤다.

"그러는 형님은 웬일이요."

황도진이 걸음을 옮겨 김성식과 어깨를 맞춰 나란히 섰다.

"웬일은."

"웬일이지. 그토록 보이지 않더니 새삼 모습을 보이는 게."

짧게 타들어가 더 길게 잡히지 않는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채 꺼지지 않은 불씨에 약한 연기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그것은 마치 향의 불씨였다. 가늘고 길게 올라오는 불씨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추모하던 그 향을 닮았다. 그렇다면 향이 가진 색이 이 담배의 향이었을까.

"네가 임마, 오질 않으니 볼 수 없었지."

황도진이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며 꺼지지 않은 담배를 발로 비벼껐다. 연기는 꺼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향을 끌 수 없다. 대신, 연기가 흔들릴 뿐이었다. 파도가 친다.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밀려 올라온다.

"이런 촌 바다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온답니까. 하여간."

지긋지긋한 이 촌 동네가 뭐가 좋다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맞닿을 수 없는 이해의 선이다.

"고향을 그렇게 이야기 하면 쓰겠냐."

황도진은 덤덤하게 이야기 한다. 경상남도 울산시에서 울산광역시로 승격하여 겉으론 도시의 옷을 입은 동네는 더 이상 그들이 자라왔던 그 시골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 시간 사이에 서 있는 김성식은 여전히 울산이 옛날 그 촌 동네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 속의 어지럽고 촌스러운 티는 쉽게 지워낼 수 없었다.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이곳은 이미 너무 고였고, 지워버리고 싶은 시절을 품고 있었으니.

"고향은 무슨."

"태어난 곳이 고향이지, 김성식. 다른 건 다 좋지만 고향을 등지지 마라.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함부로 버리고 뒤로하는 것이 아니야. 너라는 사람을 채워놓은 공간을 쉽게 보지 마라."

"잔소리는. 뒈져서도 지겹지 않소?"

김성식은 혀를 차곤 등을 돌려 황도진을 바라봤다. 허공에서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웃은 것은 황도진이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시원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성식은 그 미소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미소였다. 김성식이라는 사람의 젊은 시절을 움직였던 웃음. 그 웃음을 마주 보며 김성식은 자각하지 못한 채 따라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웃기는."

불만스럽게 내뱉는 말은 결국 모나지 못한 채 흘러나왔다.

김성식은 세우던 날을 결국 갈고 또 갈았다. 뭉툭해진 날은 아무에게도 공격적이지 못하게 된다.

"왜 하필 이 바다요?"

그는 황도진에게 물었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다. 옷 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파고든다. 차갑다. 겨울 바다는 차갑다. 춥고, 시리다. 김성식은 황도진의 미소를 보며 더욱 시린 감정을 삼켰다.

"왜긴."

고향이니까.

황도진의 눈동자에 바다가 비친다. 그것은 김성식이 여전히 피하고 싶고,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울산의 바다가 비치고 있었다. 담긴다. 김성식의 아버지를 삼키고, 그의 과거를 삼켰던 지긋지긋한 바다. 그게 황도진의 눈동자에 담겼다.

"짜증 나는 영감."

김성식은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싫으냐."

"짜증 나게 하네 정말."

정말 싫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 김성식은 괜히 입으로만 투덜거리고 만다. 몸을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여긴 정말 돌아오지 않을 거요."

"그래라."

"당신 때문에 온 것도 아니고."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당신에게 죄송스럽지도 않아."

"네가 잘도 그럴까."

대화는 길지 않게 이어진다. 황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김성식만이 감정을 숨기지 못하니.

김성식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차갑고 서늘한 겨울바람의 공기를 폐 가득 채워낸다. 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뒤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지겹고, 지긋한 바다와 사람을 뒤로하고 김성식은 바다를 떠난다. 울산, 그의 과거를 실었던 곳. 떠나는 걸음 뒤로 황도진은 이야기 했다.

"잘 가라."

바람에 실린 그 목소리를 김성식은 애써 무시했다. 뒤 돌아보면 안된다. 돌아볼 수 없다.

이미 사자의 목소리, 죽은 자의 말. 모든 것은 환청이고 망상에 불가할 소리들을. 김성식은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찾았다. 텅 빈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김성식은 이제 다시는 울산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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