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視的 誤謬

키워드: 무지개

날 선 유리가 테이블과 맞부딪히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낸다. 타율적인 존재의 증명만이 되풀이되다 일순간 기화한다. 본연의 쓸모조차 망각된 채 강박적으로 가로막힌 또 다른 유리가 제 속을 가로질러 베어내면, 그 찰나를 파고든 비정형의 실존이 겨우 존재감을 과시한다. 연이은 찰나는 방관과도 같아서, 인공적 우연이 빛을 발하고서야 두터운 프리즘마저도 제 기능을 단정하고야 만다. 태초의 운명이리라 멋대로 짐작하며 처절한 암흑 속 유일한 광원이 되었을 얄팍한 빛 마저도 명을 달리하듯 산개하고 나면. 책상을 뒤덮는 유리의 소산물, 적막마저 덮어버리는 무지개. 인간의 입맛대로 일곱조각 나 이름 붙여진 정의적 존재.

탁.

인류의 희망을 머금은 세모난 유리조각이 반 바퀴 구른다.

수어 번 구겨진 검지의 가벼운 굴림 따위가 떠안은 옅은 움직임이 바야흐로 세계를 뒤흔든다. 상징을 부여받은 일관된 존재가 알지 못할 어딘가로 부유해버리는 것은 필연보다는 개척에 가까운 형태였음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한 때의 광명은 그 존재조차 부정당한 채 수장되고야 만다. 긍정에 긍정을 덧바른 표상조차 그 결말은 백장이라.

이런 것도 어린 시절에야 흥미로웠지.

가상을 좇는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줄 알면서.

아름다운 것을 숭상하여 끊임없이 모조를 만들어내면서도 근원적 예술을 배제해내지 못하는 이들의 얄팍한 미. 나란히 세워 각을 맞추고 표면을 깎아내며 규격에 끼워넣어 세공하는 것이 고도의 심미적 가치라 주장하면서도 인위적인 소산 따위는 인정하지 못하는 작자들. 아름다움을 논하며 달라붙은 손을 잘라내는 이들이 추구하는 기예는 도대체 무엇이며 단지 그 한 단어로 추락하는 가치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멋대로 의미를 부여받은 무지개도, 제멋대로 오명을 덮어 쓴 보석도, 태어났을 뿐인 생명 따위도.

그렇다면 그저 자연현상을 뒤따라 갈 뿐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가치있는가

삶을 위해 존재하는,

그저 수없이 되풀이 될 결말을 알 수 없는 재생산과 재활용을 위해 존재하는,

불특정한 한 생명체의 생을 위한 발버둥으로 매듭지어진 자연의 계보를

수많은 생명의 삶과 죽음을 통해 확립된 무언가의 정론을

그저 반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그 작은 회로로 삶을 죽이는 나는.

이 인위적 세상에서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존재인가.

기적과 보물, 이변의 행운을 상징하는 무지개조차 희귀함에서 그 가치를 찾는 법인데

고작 주먹만한 유리조각을 흔드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무지개가 다 무슨 소용이랴

이토록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행운이라면 왜 지금껏 내게는 오지 않았나

비통한 인공물의 비정한 태세는 영원토록 재생산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의 중심에서 하염없이 돌아가는 것만이 의무이자 운명이거늘

그 태고의 기적을 목전에 두고 잔존한 것은 오직 유혈 뿐이라.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