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과 사막 사이의 은하수

https://www.youtube.com/watch?v=ngm99aJh7ig


 아버지가 죽었다.

 유언장에는 바실리의 이름만 있었다.

 끝까지 지독한 인간. 바실리가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싫었던 지긋지긋함이 지금은 도리어 기꺼운 듯도 했다. 빌어먹게도 유쾌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게도. 당시 이르쿠츠크에서 복무하고 있던 바실리는 부친의 부고에 급하게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덜컹, 덜커덩, 삼일 밤낮을 흔들리던 기차의 규칙적인 소음. 그 일관적인 리듬 사이로는 자칫 경계를 늦추면, 금세 상념이 스미곤 했다.

 그 언젠가 누구는 바실리를 더러 시베리아의 밤을 닮았다고 했다.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같이 복무하던 동료의 말이었을 것이다. 바실리가 이미 머리칼을 새까맣게 물들여버린 이후의 일이다. 아버지의 흔적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사실, 그래서 그랬다. 결과는 마음에 들었다. 부친의 흔적이 썩 남지도 않은 제 외관이 기꺼웠다. 그 이후로는 거울을 보면서도 썩 거슬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르쿠츠크는 넓었다. 겨울이면 도시 밖의 평야에는 거대한 설원이 펼쳐졌다. 설원에서 보면 도시의 불빛이 저 멀었다. 그래서 밤은 어두웠다. 빛 한 점 없이. 새하얀데도 새까말 수 있구나, 그때 그걸 알았다. 그것이 딱 그가 머리를 물들인 색이었다. 왜 검은색이었을까? 사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암흑을 받아들이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암흑을 품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이미 바실리는 밤을 걷고 있었으니까.

 장례는 빨랐다. 사실 지루했었던 것 같다. 

 '알아서 살아.'

 '…….'

 '우리가 다섯 살도 아니고, 부모님 없다고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는 나이는 아니잖아?'

 장례가 끝나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바실리가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하며 팔짱을 꼈다.

 '형, 우리 서로 어떻게 살던 간에 신경 끄자고.'

 사실은 가문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부모님도 니콜라예프의 이름도 지긋지긋했으니까. 아, 진절머리가 났다. 부친의 죽음이 가져온 것은 슬픔보다는 권태였다.

 그러므로 그 말은 사실 바실리가 니콜라예프를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참 후에 뒤돌아 보고 나서야 어쩌면 그게 조금 다른 의미로 들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가문을 물려받은 동생이 연을 끊고 살아가자는 말을 하는 것은 알렉세이에게 정 반대로 와닿았을지도 몰랐다. 마치 바실리 자신이 나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더러 나가달라는 말처럼.

 일그러진 알렉세이의 얼굴을 기억한다. 거기 어떤 감정이 들어 있었는지 바실리는 사실 아주 잘 알았다. 소용돌이치는 질투나 열등감, 사실 뭐라 이름 붙여도 몹시 복잡한 형용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이상하게 무언가 몹시 재미있어졌다. 미안, 형. 형이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말은 취소할게. 상황에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그 말이 혀끝까지 올라와 걸렸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은 있었으므로 그저 웃기만 했다. 그저 바실리는 눈앞에 있는 일그러진 낯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의 사후 해외로 부대를 옮겼다. 중동 지역이었다. 상부에서는 굳이 전도유망한 힘 있는 군벌 가문 출신의 젊은 장교가 일선의 격전지로 가고 싶어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했다. 그러나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으니 심경의 변화가 있었으리라 추측한 듯 군말없이 발령을 내 주었다. 물론 부친의 죽음이 심경의 변화를 불러온 것은 맞았다. 다만 그것은 남들이 으레 상상할 실의나 비탄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그건 자유였다─바실리 니콜라예프가 부친의 생전에는 제아무리 제멋대로 굴며 몸부림쳐도 결코 완전하게는 누릴 수 없던 것. 광활한 설원. 꽁꽁 언 땅, 얼음으로 만든 칼날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 

 즐거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자유로워졌으니까.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옭아매던 권태와 작별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막은 사정없이 모래바람이 몰아쳤다. 하루아침이면 인간이 있던 흔적은 물론이고 높게 쌓인 모래언덕마저 사라지곤 했다. 모든게 덧없었다. 하늘만이 같았다. 북극성은 언제나 북쪽에 있었다. 사막도 설원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도시가 멀어 밤이면 암흑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건 그 하나였다. 별이 밝았다. 

 최전선에 치안이 썩 좋지 않은 지역을 전전했던 만큼 전투가 잦았다. 사람이 죽고 다쳤다. 사실 그런데도 여전히 별 감흥이 없었다. 지루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낯선 지도가 익숙해졌다.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전략은 거의 언제나 성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루했다. 유능한 장교였던 바실리가 이끄는 중대는 가장 낮은 사망률과 가장 높은 승전률을 올렸다. 승진이 빠를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여전히 지루했다. 누군가 그 비결을 물었다. 바실리는 가만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시니컬한 어조로 충고했다. 병사들한테 가치를 두지 마. 그랬다. 사실 가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지루했다.

 목을 텁텁한 모래가 가득 채웠다.

 숨이 막혔는데, 권태와 무의미 때문인지 먼지 때문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사실 언제나 가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어릴 적부터 계속 그랬다. 봄이 되어 꽃이 피듯 사람의 목숨이 피고 가을이 되어 낙엽이 스러지듯 사람의 목숨이 스러진다. 그러니 타인은 고작 그 정도 가치를 지녔을 뿐이다. 딱 그만큼. 가을이 되면 스러지는 낙엽과 봄이 되면 피어나는 꽃들만큼의 가치. 뭐든 무가치했다. 죽음의 무게는 딱 사라진 자들의 빈자리만큼,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질량의 분량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사라진다 한들 의미를 지닐 리가 없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면 맹목이었다. 그의 형이 품고 있던 것과 같은.

 홀린 듯 흥미로운 것을 찾았다. 즐거운 것. 지긋지긋함을 조금 덜어 줄 만한 것. 재미있는 것.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삶에 그런 것은 별로 없었다. 의미 있는 것이 없으니 즐거운 것이 있을 리 없다. 담담히 삶을 반추한다. 아, 그러니까 대체 인생에서 뭐가 재밌었더라? 턱을 괴고 가만히 곱씹어 봤다. 그리고 그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대로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번개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바실리 니콜라예프는 돌아왔다.

 설원에서도, 사막에서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결코 찾을 수 없던 것이 어디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