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페커미션 08. [캐해타입] 막심, 막심과 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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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심 페트로비치 시보보진스키(이하 막심)의 심리상태에 대하여
이 글에서는, 막심이라는 캐릭터에서 보이는 이중성과 모순, 그리고 귀족적인 면모에 대해 서술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쥐여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100% 맞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반대로 곤경에 빠졌을 때만 볼 수 있는 점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이 없는 세계(라고 인식한)에서 막심이 보여주는 행보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신앙심과 도덕심과 적극성은 연관은 있을지언정 같은 카테고리에는 속할 수 없습니다. 막심의 경우 막심의 행동과 정신을 묶고 있던 여러 요소들이 신이 없는 세계에서 풀려 날뛰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흑막에서의 막심의 행동이 완전한 본모습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가려져 있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없고, 타인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막심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실험합니다. 이는 현실에서 몽상과 사색에 빠져있는 모습과는 대비됩니다. 신의 존재가 없고 행동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 막심은 행동에 나섭니다. 즉, 신의 존재는 막심의 행동을 제한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막심은 왜 신을 부정하지 않는가? 이는 어릴 적부터 앓아온 뇌전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정신과 몸의 분리, 죽음에 대한 간접경험, 황홀경과 고통이 교차하는 지점이 규칙적으로 찾아온다면. 이런 환경에서 인간이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 뇌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그가 겪는 병증을 과학이나 의학만으로 설명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 막심의 경우 집안 대대로 독실하게 믿는 신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기 힘들지요. 막심에게는 더더욱, 보통 남들이 겪지 않는 일을 겪는 사람으로서 발작에 대한 근원으로 가장 쉽게 삼을 수 있는 것이 신입니다. 신은 또한 굉장히 간단하며 강력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믿음이란 그런 것이지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바로 옆에 있는 소세지를 두고 멀리 스테이크부터 찾아나서는 인간은 없습니다. 막심에게 신의 존재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막심이 뇌전증 환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강경파 개혁주의자 혹은 강경파 왕정주의자..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타고난 성격은 많은 생각만큼 행동에 옮기는 실천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가진 질병과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행동을 막아 몽상가로서 남았다는 느낌일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막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에 도덕성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현실에서의 막심에게는 신이 있고, 그것은 심지어 진리의 상부구조로서의 개념으로서 주로 존재합니다. 이는 막심이 일탈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은 막심의 가장 강력한 구속구이지만, 그렇기에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앓아온 병과 이에 대한 고찰로 막심은 자신의 적극성에 대한 부분을 스스로 구속했고, 이는 아동기 때부터 쌓인, 자신도 모르는 슬픔과 상실이 기저에 늘 깔려있는 원인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허무주의에 강하게 매료된(혹은 타고나기를 그렇게 보이는)것도 당연합니다. 무의식이 원하는 바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좌절되는데, 신의 존재 때문에 어긋나지도 못하고 부유한 가정환경은 막심이 생각만 거듭하며 살아도 될 토대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허무하겠지요, 당연히도. 남들이 막심에 대해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인데 심지어 그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도 전부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아상이 불안전하고 본인도 그걸 제대로 못 보고 있는데 남들이 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타고난 성격에 의하면 삶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행동력도 강했고 적극적인 면도 있었지만 억눌려있고, 그것이 때로는 불규칙적으로 표출된다면 종잡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든 무신론자가 도덕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막심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신이 강력한 구속구이기도 하지만, 신이 없으면 막심은 그닥 도덕적인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도덕에 대한 기준도 신에게 위탁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태어나기를 비도덕적이라거나 사이코패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고, 태어나기를 귀족으로 태어났으며, 타인과의 교감보다는 스스로와의 대화를 중요시합니다. 따라서 타인이 어떨까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환경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그 환경을 이용해 타인에게 개입하고 실험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막심이 가지고 있는 오만함이 드러납니다. 타인을 같은 인간이라고 여긴다고는 할 수 없는 태도인데, 이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귀족이라는 배경에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더해, 자신이 주기적으로 겪는 비현실적인 환상과 고통은, ‘자신은 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이 없다면 자신이 신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병증에 대한 보상심리로서, 자신은 인간보다 높고 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깔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신만이 고통을 겪고 자신만이 다른 것을 느끼는데 거기에 이유도 없고 논리도 없다면 그것은 상당히 견디기 힘든 사건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은 특별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고통을 겪는다고 하면 그것은 충분히 견딜 만한 고통이 됩니다. 환경에 의해 그리고 필요에 의해 오만함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형의 백그라운드를 고려하자면, 막심은 아마도 장남의 역할을 일부 맡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막심의 행동적인 보수성(이라고 해야 할까)은 여기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즉 둘째나 막내에게 나타나는 패턴에 첫째의 패턴이 일부 가미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가령 가문은 형의 일이라고 잘라 말하면서도 형을 포함한 가족에 대해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거나요. 형으로 대접은 해주지만 자신이 챙겨야 할 인간으로 본다거나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더더욱 혼란스럽겠지요.. 허무한 듯 보이면서 삶에 관심이 있고 그런 것 같으면서도 타인의 삶에 관여하거나 하려들지는 않고 행동력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데 행동하는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러한 점들에서, 막심은 아주 다면적이고 이중적인 면을 지닌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읽은 막심에 대한 심리상태 고찰입니다. 틀린 면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른 여러 요소를 고려하지 못한 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추가적인 질문을 하시면 언제든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2. 막심과 일리야의 비교분석
어떻게 이렇게... 파고들수록 재미있는 캐릭터들을 만드신거지요 처음에는 긴 이름과(러시아여..) 이런저런 설정 때문에 다가가기 힘들 수 있지만 곱씹을수록 굉장히 좋은 캐릭터들입니다. 분석하기에 너무너무 재미있는 캐릭터들이에요. 제가 임상과 범죄 쪽에 치우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물론 이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남의 캐릭터를 함부로 어브노말하게 말하는 것은 심각한 결례가 아닐까싶네요).
사실 많은 성격의 경우 성장과정을 자세히 알수록 도움이 됩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고, 아이를 어떻게 키웠고, 무슨 일이 있었으며, 애착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친구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갔으며 사랑은 어떠했는지. 그렇지만 이건 현실인간에서의 이야기이고, 캐릭터의 경우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설정할 필요도 없고 할 여유도 없죠. 저번의 막심의 신에 대한 감각이나 우월감 또한 귀족 특유의 애착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성장배경이나 형제서열, 부모와의 관계를 아예 배제하거나 추측하며 쓴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어릴 때 이야기가 나온다면 알려주시면 캐해석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성격심리학에서, 아니 심리학의 많은 분야에서 성장과정은 인간을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성격을 이루는 데에 유전과 환경은 상당히 크거든요. 학자마다 다르지만 구성의 50%가 유전, 30%가 환경, 20%가 노력이라고 할 만큼. 어찌되었든, 어떤 캐릭터의 행동에 의구심이 생겼을 때에는 성장배경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답이 잘 나올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일단, 막심의 안티테제로서의 일리야인 것이지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죽음에 대한 경험과 그에 따른 견해의 차이, 성장배경의 차이를 중심으로 보면서 일리야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막심의 경우 어릴 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사죽음을 경험합니다. 이 반복적이고 주기적인 경험이 신의 존재와 이어져 막심이 사회적으로 일탈하지 않을 모든 이유를 만든다고 전에 이야기했었지요. 그는 죽음의 공포와 죽음의 황홀경(멜라니 클라인의 죽음의 추동과 비슷한 맥락)을 모두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 양극단의 동시적, 주기적 경험은 인간을 불안정하게 만들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안정함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또한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편집증이나 분열증이 오지 않은 이유가 근본적으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신이라는 존재로 긍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어릴 적 환경이 상당히 안정적이었다는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애정을 받았건 받지 못했건 부모나 환경이 주는 시그널이 일정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했다면 꾸준히 사랑을 주고, 엄격했다면 꾸준히 엄격하고, 싫어했다면 꾸준히 싫어하고. 변덕스러운 분들은 아니셨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일정한 환경 하에서 불안정을 다스리기는 훨씬 쉬우니까요.
또한 신실하게 종교를 믿는 집안이라면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신으로 돌리는 것도 당연하지요. 종교란 단순히 어떤 신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는 어떤 한 인간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주요 요소일 수 있으며,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일 수 있습니다.(이 부분은 종교학적인 관점) 신의 존재에 의문을 가질 수 있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사후세계의 존재나 세계의 형성, 인간의 선악을 논하는 데에 영향을 크게 미칩니다. 게다가 환경이 변덕스럽지 않았고 뇌전증 외에 큰 사건이 없다면 신을 긍정하기란 더욱 쉬워집니다.
여기서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시대의 무신론자들은 모두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냥 신실하게 자라다가 무신론자가 될 수는 없는 건가? 물론 그냥 무신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신론에 대한 것을 충격적으로 접하고 결국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주장의 바탕에는,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형성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개념조차 없는데 유무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신이 없다는 주장은 신에 대한 개념이 있고 이에 대해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넓은 의미로 보자면 무신론 또한 종교일 수 있습니다. 세계를 보는 시야라고 정의를 내린다면요.
어쨌든 막심의 경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아주 잘 알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했기에 타인의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타인의 죽음을 자신이 숱하게 겪어온 것 중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의 욕망이 좌절되고 자신의 고통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눈을 돌릴 여지가 있었을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세계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막심은 자신의 세계 속에 빠져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일리야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일리야의 경우 자아가 형성될 시기에 타인, 그것도 극도로 가까운 아버지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덤덤하게 반응했지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일반적이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보통의 아이라면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고통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요.
저는 일리야가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며 자랐을 것을 예상해보았습니다. 혹은, 태어나기를 사이코패스로 태어났거나요(욕이 아닙니다 병리적인 용법입니다). 물론 아버지의 학대를 받아서 후천적으로 사이코패스가 되었을 수도 있고 후천적 사이코패스라면 어머니 또한 자식 양육에 극도로 무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애착의 대상이 어머니가 되지 않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면 정말 무심하지 않았을까요……. 어찌되었든, 일리야는 상당히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리하고 타인에게 쉽게 환심을 산다던가 하는 면모가요.
물론 사이코패스라도 가까운 혈연에게는 감정을 가진다고 하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만 아주 가까운, 자신의 목숨과도 관련된 사람에게는 민감하게 감정을 파악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가까운 혈연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의 대부분이 자기애가 강한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니 또 다른 자신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자기애가 확장되는 것이고, 결국 그들의 감정도 자신의 감정이니 타인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 경우 일리야가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누나입니다. 상당히 높은 확률로 일리야가 어릴 때의 생존욕구를 채워주고 양육해준 것은 누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누나가 아버지를 배신자라고 하고 떠났다면 그것은 일리야에게 진실이며, 누나가 배신자에 대해 강한 거부감정을 가졌다면 일리야 또한 아버지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버지가 있는 장소를 가르쳐준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일리야가 어리고 약했기에 간접적으로 살해했을 뿐, 장성한 시기였다면 과연 문을 열어주고 거처를 가르쳐준 것으로 끝났을까? 의문을 가져볼 만한 일입니다. 누나의 마지막 말을 지령으로 인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이코패스적인 자기애를 잠깐 언급했었습니다만, 다른 쪽으로 생각해도 일리야의 자기애가 높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부친살해라고 하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프로이트를 속된 말로 비하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그 정도로 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너무 길어서 뺍니다). 어쨌든 프로이트는 부친살해욕구가 좌절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일리야의 경우 그 부친살해를 간접적으로나마 성공합니다. 이 부친살해의 경우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리야의 경우 어머니가 아닌 누나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누나를 실질적인 어머니로 보고 있다면, 누나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모, 그것도 동성의 부친을 적대시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대부분의 부친살해욕구는 꺾을 수 없는 아버지를 눈앞에 두고 좌절하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일리야는 적대시한 결과 살해에 성공합니다. 이에 대한 성취감과 누나를 독점할 수 있다는(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졌습니다만 심리적으로) 것은 자기애 과잉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심지어 농노로 출발해 자기 손으로 성공을 거둔 자를 자신이 쓰러트렸죠.
여기서 막심과 일리야의 공통점, 자기애적인 성향이 드러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모든 것이 대척점에 있는 둘인데 그 대척점에 있는 모든 요소가 그들의 공통된 일부 성격을 설명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게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자신의 선천적인 면모를 신성시한 것 때문에 자기애를 가진 막심과 자신의 손으로 지령(혹은 욕망)을 완수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 된 일리야라니, 한 쪽은 위를 향해 사고하고 한 쪽은 아래를 향해 사고한 결과점이 유사하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살인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그는 어릴 때 간접살인을 저질렀으며 그 대상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상하게 여겨질지언정 살인죄로 의심받거나 처벌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잊어버릴 수도 없죠. 스스로에게서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요. 인간의 비합리성을 믿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배경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이 도덕 자체의 노예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만)자신을 우월하게 보면서도 범죄자임을 알고 있기에 자신은 타인을 기꺼이 노예로 삼을 수 있으며, 동시에 타인이 자신을 노예로 삼을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이코패스인데 살인자인 것을 신경 쓰다니, 그리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미디어의 편견이 불러온 오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이코패스라 해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게 아니고 ‘이성적으로’ 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악감이라는 감정은 모른다 해도 그것이 잘못된 거라는 걸 납득할 수 있는 거죠. 여기에도 누님의 기여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누님과의 사이를 잘 모르므로 자세한 서술은 피하겠습니다.
막심은 삶에 대한, 타인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욕구가 좌절된 상태라면 일리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막심은 아예 신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른 세계로 가서야 타인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지만(폭주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요?) 일리야는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심지어 비밀 좌익 서클의 리더이기까지 합니다. 콘스탄틴..이란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친구를 끌어들여놓고 자신은 인민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건 일리야의 대인관계는 본인에게 있어 교류라기보다 간섭입니다. 인민주의라는 신념조차 자신에게는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죠.
여기에서 또 둘의 공통점과 차이가 드러나는데 둘 모두 타인에게 간섭하지만(흑막일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막심이 삶과 인생에 대한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는 것으로 간섭한다면 일리야는 자신의 신념을 실제로 구축하기 위해 간섭합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안정적으로 살아온 막심의 욕구는 충족되지 못하고, 여러 큰 사건을 겪으며(부친의 죽음과 가족의 해체) 불안정하게 살아온 일리야의 욕구는 충족되고 있다는 것 또한 참으로 재미있는 대조점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막심의 경우 귀족이라는 배경과 신사적인 면모, 그리고 신체적인 매력이 타인에게 어필하는 게 크다면 일리야의 경우 자신의 능력과 유사성의 원리(사회심리학 이론 참조)를 활용한 것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비밀좌익서클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점에서 인간관계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함을 알 수 있지만 리더라는 직함에서 나오는 ‘능력 있어 보이는’ 효과도 사람들을 일리야에게 호감이 가도록 하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비밀서클이니 아무데나 말하고 다닐 수는 없겠고, 능력보다도 타인과의 공감(하는 척)을 잘 하는 면에서 호감을 가져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이코패스가 흔히 사교성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막심은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일리야는 부유하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과 통하는 게 많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둘을 심리적으로 비교를 해보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막심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는 니힐리스트가 아닙니다. 삶을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면모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주의자라고 말하기가 상당히 애매합니다. 실존주의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흑막일 때를 보면) 왕당파라거나 사회주의자라거나 아나키스트라거나 이런 것을 논하기에 그는 스스로의 사고, 세계에 대한 탐구 자체에 매우 깊이 빠져있습니다. 신을 긍정하지만 정교회의 교리를 따르지는 않고 허무감을 느끼면서도 인생을 사랑하며 실존을 긍정하면서도 신을 진리의 상부구조에 놓고 있지요. 아마 그 자신도 그를 무어라 정의내리라고 하면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그가 가진 여러 지위적, 성격적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조금 허무하면서도 개운한 설명은 나옵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여러 모티프를 따온 1인 종교, 그러니까 자신을 신과 인간 사이에 두고 여러 사상과 종교의 개념을 가져와 스스로 재정립한 자신만의 새로운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비록 그 사실은 스스로도 눈치 채고 있지 못하고 있겠지만요. 어찌 보면 흑막일 때 했던 여러 가지 사고실험의 현재화는 자신의 새로운 종교, 혹은 사상의 틀을 구축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만들기 위해 실행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세계도 물론이고 자신조차도 모르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저번보다 길었는데 파생되는 것이 너무 많아 잘랐습니다만, 추가질문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흥미로운 캐릭터들을 만나서 저 또한 분석하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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