両取り逃げるべからず

양잡이는 도망치지 마라

K=Potassium by KPota
7
0
0

登場人物

샤라쿠 아키히코写楽秋彦 탐정

사와다 코헤이沢田公平 부검의

모리시타 쿄이치로森下恭一郎 형사

하나야 케이花屋敬 프로파일러

사쿠야 하루咲夜春 서점 직원, 추리소설가

하나야 메이花屋芽衣 서점 점장, 해커

신도 쥬조眞堂十三 회사원

스즈키 노보루鈴木昇 회사원

이자요이 겐이치十六夜健一 쇼기 기사, 영세 야왕野王. 본명은 사쿠야 토무요咲夜十夢世

쿠보 카즈요시久保一佳 쇼기 기사

스즈키 아키라鈴木旭 전 쇼기 기사, 영세 명인名人 

미쓰이 키요타카三井清隆 화학 교수

우노 마시로宇野眞白 전 야쿠자, 추리소설가


1

"결정적인 사인은 가슴의 자상. 길쭉한 날붙이로 단번에 심장을 찔렀네. 회 뜰 때 쓰는 칼 같은 게 생각나는군. 아무튼 급격한 출혈로 피가 거의 빠져나갔어. 이런저런 쇼크로 금방 세상을 떴을 거로 보이네."

사와다 코헤이沢田公平는 Y자 모양의 봉합선이 새겨진 사체를 더듬으며 설명했다. 혈액이 빠져나가 파리해진 피부는 부검실의 차가운 공기를 머금어 건조하고 서늘하다. 눈앞의 방문객은 사체에 손을 댈 생각은 딱히 없어 보였고, 다만 굳은 표정만을 유지하고 있다. 사와다는 부검대를 향해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편다.

"살해 방법이 조금 달라졌어. 이번이 네 번째인가? 이전까지는 독극물을 주로 사용했는데 말이네."

"머리는요?"

"저번 것들이랑 비슷하지."

신장은 백 육십이 좀 넘을까. 눈에 띄는 특징 하나 없는 깨끗한 남성의 육체였다. 노화 상태로 보아 연령은 아마 사십 대 중반에서 오십 전후. 흔한 직업 표지 하나 없었으므로 그는 별다른 추리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크나큰 문제가 하나 있다. 어깨 위로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머리만이 아니라 목까지, 즉 머리와 목을 몸체에서 떼어낸 모양으로, 결과적으로 두 어깨가 일직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부검의는,

"이상해. 답잖게 심장은 잘만 찔렀으면서 목 자르는 건 전보다 어설퍼졌어. 삐뚤빼뚤한 아마추어의 절단면이야. 게다가, 전번에는 죽이자마자 신나선 목을 자른 게 눈에 보였네만, 이번에는 달라. 죽이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목을 잘라냈어."

라고 첨언했다.

부검의에게 질문을 던진 방문객은 대답이 없었다.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얼굴이었고, 샤라쿠 군이 저런 표정 짓는 것도 꽤 오랜만이군, 부검의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한동안 탐정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가. 

"아는 사람이라고 했나? 뭐 하는 사람이지?"

그리 물으니 그제야 샤라쿠는 시선을 사와다에게로 돌린다.

"아…… 모르셨어요? 쇼기 기사요. 좀 유명하신 분인데."

"쇼기?"

"네. 이자요이 겐이치十六夜健一 씨라고, 우리나라 쇼기 계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드시는……."

"아하. 나는 이름만 전달받아서 몰랐지."

발이 넓구만. 적당한 추임새를 덧붙이고 나서야 (이러한 처세술은 최근에야 익힌 것이었다) 사와다는 사체에서 한 발짝 물러난다. 잘 정돈된 탁상에 놓인 인적 사항 서류를 대충 훑다가, 이름이 뭐라고? 하며 다시금 묻는다.

"이자요이 겐이치…… 아, 이건 가명이에요. 본명은 사쿠야 토무요咲夜十夢世, 라고…… 이름이 특이해서 콤플렉스였다고 들었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의 말꼬리가 줄줄 끌린다. 현실에 눈을 두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어쨌거나 샤라쿠의 말은 정확했다. 형사부에서 인계받은 서류에는 사쿠야 토무요라는 본명이 정자로 기록되어 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뭐…… 이것저것."

둥근 안경 너머의 다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사와다는 무표정하게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갈 거네,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메일로 부탁하겠어, 그러곤 체구에 맞지 않는 부검 가운을 훌러덩 벗어냈다.

신원 미상의 시신이 신고된 건 아침 무렵의 일이다. 신고자는 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진 자연공원에서 운동하던 시민. 잘 다듬어진 공원 길을 따라 조깅하던 도중 풀숲 사이로 삐져나온 발이 보여 곧장 신고하였다고 한다. 머리가 절단되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시신이 지니고 있던 신분증과 옷매무새 등으로 신원은 금방 밝혀졌다. 사쿠야 토무요 46세. 근처 이웃들의 증언으로 어젯밤부터 부재중이라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경시청 내부에서는 한 달가량 전부터 시작된 연쇄 살인의 연장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한 후 머리를 잘라내는 악독한 수법의 연쇄 살인이 도쿄 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참이다. 사라진 머리들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여, 범인이 잘린 머리에 집착하는 엽기 살인마라는 주장이 분분했다. 결과적으로 이자요이 겐이치 살인 사건은 연쇄 살인을 조사하던 경시청 특별 본부로 넘겨졌다.

샤라쿠 아키히코写楽秋彦는 아침을 먹으며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누구도 타박을 주지 않았다.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아 있던 샤라쿠 가 구성원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 탓이었다. 세부는 다르겠으나 기저에 깔린 것은 당혹이 분명하다. 가주家主는 입안에 든 쌀알을 느리게 씹으며 녹슨 두뇌를 깨우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 누가 죽었다고? 머리가 어떻게 됐다고?

그 뒤로 샤라쿠는 급하게 집을 나섰고, 도쿄 도내에서 일어난 살인이라면, 더군다나 머리가 없는 기이한 사체의 부검이라면 분명 그가 전담할 것이 뻔했으므로, 경시청 지하의 부검실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사쿠야 하루咲夜春는 도쿄 모처 서점의 정직원이다. 평소와 같이 느지막한 시간에 출근해선 사장에게 대충 인사를 올린 후, 막 업무에 착수한 때였다. 바닥 청소 도중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 전화를 받는다. 들은 적 없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서,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상대는 경시청의 모리시타 형사라고 했다. 경시청이요? 왜요? 되물을 새도 없이,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사쿠야 토무요가 죽었다고 했다. 뒤이어 시신 수습을 위해 경시청에 방문해 달라는 요지의 말을 줄줄 읊는데, 하루는 잠시 제가 잠에서 덜 깨었나 고민한다. 그 뒤로, 질 나쁜 보이스피싱인가? 생각한다. 그렇다기엔 낌새가 영 이상한데. 손발이 말단부터 싸늘해진다. 이런 감각은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다. 언제? 엄마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휴대전화를 든 채 얼어붙어 있으니 카운터 안쪽의 직원실에서 하는 일 없는 사장이 슬금슬금 걸어 나왔고, 왜 그러고 있어? 라며 속삭였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 일뿐이니까, 사쿠야 하루는 겨우겨우 짜낸 목소리로 통화를 마무리한다.

"아빠가 죽었다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파멸적인 곱슬머리의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뜬다. 동시에 검지를 굽혀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곤, 아빠가? 되묻는다.

"보이스피싱 아냐? 아빠한테 연락해 봐."

그러자 하루는 곤란한 얼굴을 해서.

"아빠…… 휴대폰이 며칠 전에 고장이 나서. 수리 맡겼다고 했어. 그제도 집 전화로 연락했었고……."

"그럼 집 전화로 걸어."

고양이 마냥 바짝 올라간 눈꼬리가 바르르 떨린다. 액정을 터치하는 손가락 역시 위태위태하다. 잘못하다간 얘 휴대폰도 작살나겠는데. 하나야 메이花屋芽衣는 멍한 눈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귀에 거슬리는 수화음이 몇 번 반복됐다. 일 분 정도 지나서, 지금은 부재중입니다, 음성 메시지를 남겨주시면 이후 확인하겠습니다, 사쿠야 토무요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루는 아랫입술을 하얘질 정도로 꽉 깨문다.

스피커폰은 아니었으나, 하루의 반응으로 통화의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므로.

"어디로 오래?"

메이가 물었고 하루는 경시청이라고 대답했다.

    

"아버님의 일은 유감입니다."

모리시타 쿄이치로森下恭一郎는 상투적인 말로 입을 뗐다. 입술 왼쪽을 수직으로 긋고 지나간 날카로운 흉터가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다. 하루는 불그스레한 눈가에 힘을 준 채 눈앞의 상대를 똑바로 바라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토무요는 왜 죽은 건가요? 유족을 경시청까지 불러낼 정도면, 평범한 사고는 아니라는 거네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힘 있게 뻗어 나온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메이는 발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어라, 이게 지금의 이 아이랑 어울리는 단어던가? 아무튼 딱히 해 주고픈 말은 없었다. 괜스레 노트북을 담은 천 가방을 만지작거린다.

"아, 예……. 오시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모리시타는 사죄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현재로서는,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도쿄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신 듯합니다."

"네?"

하루의 목소리가 뒤집힌다. 무슨 소리를 하냐며 따지는 것 같은 목소리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시신 대면 전에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만, 현재 아버님의 시신은 목이 절단된 상태입니다. 보기 힘드시다면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신은 장례식장 쪽으로 착실히 인계할 수 있도록 신경……."

"안 봐도 된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저, 엄마도 돌아가신 지 한참 됐어요. 외동이라 형제도 없어. 제가 아니면 토무요를 누가 봐 줘요? 아니, 애초에, 애초에……."

크지는 않지만 여전히 힘 있는 목소리다. 한 음절 한 음절, 분노와 절망의 양가감정을 뒤섞어 또박또박 말하고 있다. 나름 오랫동안 같이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네.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던 와중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게를 실어 부러 발소리를 숨기는 듯한 걸음이다. 발목의 탄성으로 소리를 죽이는 것이 꽤 능숙하다.

"애초에 이상하잖아, 모리시타 군."

메이가 뒤를 돌았다. 하루도 이를 꽉 깨문 채 고개를 돌린다. 처음 보는 남자가 셋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중반을 좀 넘었을까. 동그란 안경 뒤에서 순하게 처진 다갈색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곱슬대는 고동색 머리칼과 퍽 어울리는 갈색 트렌치코트에 스트라이트 무늬 면티를 받쳐 입은 채다.

"샤라쿠 씨……."

하루가 중얼댔다. 아는 사람이야? 하고 물으니, 엄마 학생이었던 사람이에요……. 라고. 아하, 분명 돌아가신 엄마가 피아니스트셨다고 했었던가.

"뭐가 이상한데요? 오랜만에 와선 또 훼방입니까? 샤라쿠."

"훼방이라니, 모리시타 군은 간만에 봐도 말이 심해."

내 개입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 덧붙이곤, 탐정은 가느다란 눈썹 한쪽을 살짝 치켜세웠다. 선해 보이던 인상이 단번에 까다로운 스타일로 변모했다.

"수사 방침에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방침이랄까, 형사들의 눈은 너무 어두운 것 같아서."

"뭐?"

"이번 사건, 누가 봐도 모방범이야. 절대로 같은 범인이 벌인 짓일 리 없어."

더군다나 모방범이라면 이자요이 씨의 생존율은 급격하게 상승해. 

다색의 탐정이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2

남자는 처진 눈을 반쯤 감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 눈은 머리를 감싼 붕대로 가려져 있는 채다. 시판되는 문구용 가위로 대충 자른 것 마냥 누덕누덕한 흑발은 대략 귓불까지 닿는데, 역시 하얀 붕대가 얼기설기 감겨 있다. 콧잔등에 걸친 두꺼운 뿔테 안경은 약간의 도수가 있어 뵌다. 미약한 굴절률을 보아 아마 평범한 근시용 안경일 테다. 

신도 쥬조眞堂十三는 종이봉투를 뒤적인다. 내용물은 별거 없다. 병문안 김에 근처 가게에서 산 화과자 세트다.

"키노코 씨, 오늘은 좀 어때요? 아직도 백지 상태?"

귀여운 토끼 모양의 화과자를 내밀었다. 남자는 옅게 웃으며 연분홍빛 토끼를 받아든다.

"네……. 기억나는 게 어, 없네요. 큰일이에요. 적어도, 이름이라도 떠오르면 좋을, 텐데."

"곤란하시겠어요~"

신도는 고개를 갸웃하며 녹빛 화과자를 집어 든다. 매실 모양이다.

"저…… 저마저도 제가 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데. 생면부지의 신도 씨께서…… 이렇게 도움을 주셔도, 괜찮으신가요?"

"응? 뭐어. 별 상관없어요. 동병상련?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신도는 내려간 눈을 접어 웃었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반절이 씹혀 사라진 토끼를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려던 참이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밥맛이 좋아 무려 달걀을 추가한 규동 한 그릇을 다 비우는 업적을 세웠다. 이제 근처 카페에서 커피만 사 들고 가야지. 아니, 오늘은 차를 좀 마셔볼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뒷골목으로 발을 옮긴다. 도쿄는 무척 복잡해서, 큰 거리만 따라 걷다간 우회만 잔뜩 하게 되는 탓이다.

쓰레기와 오물이 난무하는 뒷골목을 아무렇지 않게 걷는다. 신도는 본래 청소 혹은 깨끗함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와, 더러운 것 좀 봐. 국가 차원에서 정리 사업을 좀 해야겠는걸. 그런 시시한 생각이나 흘리며 좋아하는 카페가 있는 블록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쓰레기봉투가 쌓인 골목 한구석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신도는 경쾌한 스텝을 잠시 멈춘다. 그 자리에 우뚝 서선, 저것이 정말 사람인지 살피기 시작한다. 혹시 근처 옷가게에서 내놓은 마네킹은 아닐까. 곡선형의 척추를 보아 구십 퍼센트 정도 사람일 것 같긴 하지만. 하여간 최대한 긍정적인 사고를 유지하며 슬금슬금 거리를 좁힌다. 맑은 봄날의 단 공기에 희석된 오물 냄새가 시큼하게 풍겼다.

사람이 맞았다. 안경을 쓴 남자가 새우잠을 자듯 웅크린 채 쓰러져 있다. 평범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채다. 아무리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반바지를 입기엔 이른 날씨 아닌가? 신도는 한쪽 무릎을 꿇어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본다. 

몸체가 흔들리자 귀를 덮고 있던 머리칼이 얼굴선을 타고 이마 앞으로 흘러내렸다. 몇 가닥은 귓가에 엉겨 붙은 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엉긴 머리카락 사이로 검붉은 핏자국이 모습을 드러냈고, 신도는 그제야 남자의 생사를 확인할 생각이 들었다.

    

신도는 반차까지 내어 남자를 입원시켰다. 이보다 좋은 반차 사유는 없지 않나. 제 직속 부하가 유선상으로 무어라 잔소리를 하긴 하였지만, 허울에 불과한 투정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신도였다. 오랜만에 맞는 일상적인 비일상에 몸을 맡기고 회사를 탈출한다. 무척 즐거운 일이지 않나.

남자는 뒤통수에 금이 갔다고 했다. 다치고 시간이 좀 흐른 것 같지만, 다행스럽게도 출혈이 적어 처치를 받으면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을 거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의사를 향해 신도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응급 처치는 마쳤지만 아무래도 오늘 눈을 뜨기는 그른 모양이라.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잠든 남자의 곁에 간단한 메모를 하나 남겨둔 후 귀가하기로 했다.

길에 쓰러져 계시길래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일어나시면 연락 주세요. 신도 쥬조, 080-XXXX-XXXX

   

아침에 눈을 뜨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등록되지 않은, 처음 보는 번호다. 높은 확률로 어제의 그 남자겠지. 밤 아홉 시에 온 전화를 받지 못한 이유는? 부끄럽지만 애인과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는 적당한 핑계를 고민한다. 일찍 곯아떨어졌다고 하는 것이 가장 나은 핑계일 듯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반차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부하 직원에게 잔소리를 넘어 싸늘한 비난의 눈빛을 받을 것이 틀림없었으니. 실제로 신도가 출근 도장을 찍자마자 스즈키 노보루鈴木昇는 엄청난 양의 서류를 들고 왔고, 오늘은 도망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어제의 과오를 겨우겨우 반쯤 청산하니 (신도는 언제나 진지하게 일에 임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불쌍한 놋쨩한테 커피라도 사 줄까? 생각하며 부하 직원의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간다. 노보루는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고 있다. 무언가를 열중해서 읽고 있는 모양이다. 어깨 너머로 슬쩍 훔쳐보니 별것도 아닌 뉴스 기사다.

"놋쨩, 원래 살인 사건에 관심이 많았어?"

노보루는 어깨를 흠칫 떨더니 고개를 뒤로 돌린다. 신도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아뇨,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이길래."

"에~ 되게 집중해서 읽고 있던데~ 무슨 뉴스야? 아침에 늦잠을 잤더니 뉴스 볼 새도 없었거든~"

커피 사 줄 테니까 얘기 해 줘~ 신도는 눈가를 살풋 접어 웃는다. 제가 미려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철저하게 계산된 표정이다. 노보루는 찰나 상사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아침 신원 미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머리가 잘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지니고 있던 신분증과 옷매무새 등으로 쇼기 기사 이자요이 겐이치임이 판명되었다. '머리가 잘린 시신' 이라는 특수성으로 미루어 볼 때 최근 발생 중인 도쿄 연쇄 살인 사건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고인 이자요이 겐이치 9단은 야왕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고 있었다. 상대는 쿠보 카즈요시久保一佳 9단. 야왕 타이틀전은 7번기로, 현재까지의 스코어는 이자요이 3승 쿠보 1승. 이자요이 9단의 안정적인 방어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쿠보 9단은 전성기의 스즈키 아키라鈴木旭 9단을 빼닮았다. 이자요이 9단은 은퇴 이전의 아키라 9단에게 승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랬던 이자요이 9단이 지금의 쿠보 9단에게 3국이나 승리했다는 것은, 이자요이 9단이 나름의 연구를 거듭해 쇼기의 신경지를 개척한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1국의 패배를 무시할 수는 없다. 승리한 대국에서의 쿠보 9단은 명인 스즈키 아키라와 가장 비슷한 양상을 보였고, 쿠보 9단이 그러한 지점을 잘 벼려낸다면 역전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등의 논쟁으로 쇼기 계는 꽤나 시끄러웠다.

그런데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이자요이 9단이 별안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쇼기 계는 하루 만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던 기사가 유명을 달리한 것은 역사상 최초였던 탓이다. 본래 어제 치러야 했던 5번째 대국은 영원히 치를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이자요이 9단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야왕 타이틀의 이전에 대한 논쟁 역시 분분해졌다. 기사의 사망은 기권과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러므로 쿠보 9단의 부전승이고, 야왕 타이틀은 쿠보 9단이 가져가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파. 아니다. 다른 대국도 아니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타이틀 방어전이라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라는 의견이 소수파.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의견이 몇 가지.

   

"……한편으로는 타이틀을 위해 쿠보 9단이 암살자에게 살인을 청부한 거 아니냐, 라는 허무맹랑한 소문도 돈다는 것 같고요."

"무서워라~ 나, 쇼기라든가 체스라든가 그쪽은 잘 모르거든. 뭔가 체계가 잡혀 있구나~"

점심 식사 내내, 스즈키 노보루는 이자요이 겐이치와 쿠보 카즈요시와 스즈키 아키라라는 쇼기 기사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우와, 이렇게까지 세세한 설명을 원했던 건 아닌데. 놋쨩, 실은 쇼기라는 스포츠에 엄청 정통한 걸지도……. 신도는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우동 면발을 후룩댔다. 쫄깃한 면의 식감이 퍽 좋다.

아무튼 쇼기 해설가급의 설명에 대한 값은 지불해야 했다. 근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쥐여주고, 회사로 복귀해 남은 업무를 대여섯 시간 정도 하고 나면 어제의 남자를 보러 갈 수 있을 터였다. 

어제의 결재와 오늘의 서류가 혼재한 오후의 일과 시간 동안, 이자요이며 카즈요시 같은 흥미 외의 이름은 금방 의식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다섯 시 반이 조금 덜 되어서 남자의 병실에 도착했다. 급하게 온 터라 별다른 병문안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다. 신도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병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고, 침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의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아! 안녕하세요! 메모는 읽어보셨나요? 제가 신도 쥬조예요."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뿔테 안경 너머의 긴 속눈썹이 애처롭게 바르르 떨린다. 신도는 성큼성큼 병상의 환자에게 다가간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초면의 방문객을 올려다보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명함 한 장 드릴 테니깐 긴장 푸시고…….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병원에서 필요하댔는데. 어? 병원 측에서 얘기 안 하던가요? 아직도 이름표가 안 붙어있네……."

신도는 명함을 꺼내려 작은 손가방을 뒤적인다. 원체 정리며 청소를 안 하고 살다 보니 가방 안은 영수증과 그 외의 잡다한 쓰레기가 부피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차지한다. 그런 아수라장 안에서 겨우 명함 케이스에 손이 닿아 기뻐하던 그때였다.

눈앞의 남자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신도는 흠칫 놀라 명함 케이스를 꼭 쥔 채 꺼내 들었고, 허둥지둥 남자에게 명함을 건넨다. 신도 쥬조, XX기업 연구1팀 팀장. 사회적 명망은 충분히 있는 명함인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영 울음을 그칠 줄 모른다. 어, 이게 아닌가?

신도는 당황스러움을 만면에 드러낸 채 열심히 남자를 달랜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는 대충 자신과 비슷해 보였고……. 단지 그것뿐이었다. 달래면 달랠수록 남자는 더욱 서럽게 울었으므로, 신도는 그를 어르고 달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병실을 회진하던 담당 의사가 와서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자는 후두부의 충격으로 잠시 기억을 잃은 상태다. 제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병원도 남자도 곤란해하고 있던 참이란다. 지갑은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럼 기억은 언제쯤 돌아오는데요? 신도가 물으니 의사는,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는 애매한 답변만을 남겨둔 채 병실을 떠났다.

"아까는 왜 우신 거예요? 얼마나 놀랐는데~"

"……다른 사람을, 보면……. 조금이라도 기억이 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제가 왜 그런 더러운 뒷골목에 쓰러져 있었고, 어떤 사람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마치 방금 태어난 것 마냥 깨끗한 백지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과 절망감과,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당해선 그만 울고 말았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계속 저기, 저기요, 당신, 하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러게요……. 병원 분들도 곤란하실 텐데."

남자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동작이다.

"음……. 키노코茸 씨?"

"키, 키노코? 버섯이요……?"

"그게, 머리카락 모양이 꼭 버섯 같아서. 집에서 머리를 자르셨나 본데요? 큰 바가지 같은 거 뒤집어쓰고……. 그런 거 치곤 기장이 좀 길긴 한데."

"에에……."

신도는 씩 웃어 보였다. 미소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는, 신도의 얼굴을 보곤 덩달아 느릿느릿 입꼬리를 올린다.

"……네에, 기억이 계속 아,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테니깐. 키, 키노코, 로……"

키노코는 몇 번, 키노코, 하고 중얼대더니, 제 머리칼을 더듬었다. 귓불까지 닿는 누덕누덕한 머리카락에 어쩐지 위화감이 드는지 몸을 움츠리다가.

"저, 내일도 이 시간에 올 거니깐 기대하고…… 혹시 휴대전화는?"

키노코는 고개를 젓는다. 바지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아항,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내일은 좀 차도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 후로 신도는 삼십 분 정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을 먹으며 들었다는 장황한 쇼기? 이야기 역시 해 주었다) 동거인이 기다린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병실을 떴다. 

동거인이 있구나. 저런 멋진 사람이라면 역시 애인이려나? 키노코는 하릴없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와 동시에, 변함없는 제 상태에 조금 우울해져선, 차가운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3

"방금 전까지 사와다 씨랑 점심을 먹고 왔어. 모리시타 군, 아직 부검 결과는 못 들었나 봐?"

"유감스럽지만 당신처럼 막역한 사이가 아니라서요. 결과는 점심 이후에나 나온다더니, 그 인간…… 민간인한테 수사 기밀이나 흘리고……."

"뭐, 그건 동료랑 유대 관계를 못 쌓은 모리시타 군 책임이고."    

탐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다. 제스처만 보면 꽤 오만방자하네. 하나야 메이는 흘러가는 꼴을 멍하니 지켜본다. 한참 연하인 직원을 혼자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따라 왔는데 어쩐지 귀찮게 되었다.

"살해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어. 세 번째 살인까진 오로지 독살만 고수했는데, 갑자기 심장을 단칼에 찔러냈다고. 이 정도는 현장에 출동했던 모리시타 군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다마다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이전 시신들에서도 찔린 상처, 소위 말하는 시체 훼손의 흔적은 발견됐어요. 독을 주사하고, 심장을 찌르고, 목을 잘라낸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죽이기'에 집착하는 엽기 살인의 범주라는 게 이미 판명됐다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와다 씨랑 밥 먹다 왔다니까? 모를 리가 있나."

"이번엔 독으로 죽은 게 아니라 칼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야?"

메이가 대뜸 물었다. 의외의 인물이 끼어들어 놀랐는지, 샤라쿠는 다갈색 동공을 살짝 좁히며 시선을 돌린다.

"그렇습니다. 이전까지는 치사량 이상의 청산가리 용액을 주입했어요. 사람 열 명은 너끈히 죽일 정도의 양이라고 하던데. 모리시타 군 말대로 '완벽하게 죽이기'에 집착한 결과로 볼 수 있겠죠."

"아, 그래. 재미있네."

탐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디가 재미있으시죠? 그리 묻는 듯한 얼굴이다. 메이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저 무표정하게 샤라쿠를 바라볼 뿐이다.

"아무튼…… 사와다 씨가 말하길, 이번 시신에서는 청산가리도 뭣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해. 외부인보다 정보가 늦으면 어떡해, 모리시타 군."

"하!"

멀끔하게 생긴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헝클어뜨린다.

"월권행위로 발 빠르게 얻은 정보 가지고, 뭐요? 형사들의 눈이 어두워? 지금 그거 하나 먼저 알아냈다고 의기양양해 있는 겁니까?"

아무래도 정말 화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저 탐정이라는 작자가 있든 없든 경찰은 점심 넘어 부검 결과를 입수했을 테고, 누가 봐도 이번 사건은 이상하다는 결론을 냈겠지. 그런데 굳이 지금 저런 도발을 하는 이유는? 혹시 인맥을 동원해 형사를 놀리는 걸 즐기는 탐정인가?

"아아, 진정해. 모리시타 군의 비효율적인 분노 습관은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모방 사건이라는 결론이 났다면 곧장 다음의 추리로 넘어가야 하지 않겠어. 범인은 어째서 이런 엽기 범행을 모방하였는가?"

"피해자한테 원한이라도 있었나 보죠! 타이밍 좋게 특색 있는 연쇄 살인도 일어나고 있겠다, 거기에 편승하면 쉽게 원한을 해소할 수 있다!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있어……."

줄곧 입을 다문 채 무언가를 고민하던 사쿠야 하루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중얼댔다. 모리시타는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유족을 바라본다.

"중요한 건 '죽이기'가 아니야. '살인'이 아니라…… '모방' 그 자체에 이유가 있어……."

"하?"

모리시타라고 했나? 너무 정석적인 '멍청한 형사' 아니야? 메이는 몰래 생각한다.

"하루 씨, 추리소설가라고 했지? 이자요이 씨가 엄청 자랑스러워하셨어. 문학에 조예 하나 없는 아버지 아래서 잘 커 주어서 고맙다고……. 그럼 질문을 좀 해도 될까. '머리 없는 시체'는 보통 어떻게 쓰이지?"

하루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인다. 부릅뜬 눈은 허공에 고정한 채, 비실비실 무너져가는 미소를 흘리다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물대는 목소리로 답한다.

"피해자를 바꿔치기 위해……."

   

탐정의 논지는 이러했다.

연쇄 살인의 방식이 단순한 '독살' 혹은 '척살'이었다면, 어제와 같은 모방 범죄는 상식적인 사고를 가진 일반인 선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죄의 정상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이번 도쿄 연쇄 살인은 그와 궤를 달리한다. 사지도 아닌 목을 잘라내어 숨기지 않았는가.

목을 잘라낸다? 인간은 대부분 얼굴로 타인을 구분한다. 얼굴이 새겨진 머리는 곧 인간의 정체성이다. 머리를 잘라내는 순간 목숨은 당연하고 사자로서의 일차적인 정체성 역시 잃는다. 역사적으로, 그 잔인한 참수형이 어째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을 거라 생각해? 극악무도한 죄인이 한순간 인간 이하의 고깃덩어리로 추락하는 걸 보고 싶어서 아닌가?

그러니 어지간한 분노가 없다면 참수에는 심리적인 거부감이 따른다. 윤리를 뛰어넘는 분노와 피안을 뛰어넘는 분노는 그 마지노선이 아득히 떨어져 있다. 이자요이 겐이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분노를 가진 인물이 있는가? 이런 엽기적인 살인에 편승하여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포악한 분노를 가진 인물이?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모리시타 군 같은 경찰이 조사할 일이지.

하지만 탐정이 보기에, 이자요이 겐이치라는 사람은 아주 둥근 성격에 (감과 두뇌는 날카로운 편에 속했다) 인간관계도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 타인이 그에게 불길 같은 분노를 갖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볼까. 하루 씨가 언급한 그대로, '살인'이 아닌 '모방'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도쿄 연쇄 살인이 아닌 제삼자의 단독 범행으로 본다면, 이것은 흔해 빠진 '머리 없는 시체'다. 머리는 곧 인간의 정체성이다. 제삼자는 시체의 일차적인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머리를 잘라냈다. 이후 백지가 된 몸뚱이에 이자요이 겐이치의 형상을 뒤집어 씌웠다. 신분증과 옷매무새───이자요이 겐이치의 부모님, 사쿠야 하루의 친조부모님이 정성스레 지으신 고급 기모노───를.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한다. 시체가 정말로 이자요이 겐이치일 가능성과, 이자요이 겐이치가 아닌 신원불명자일 가능성이다. 그러나 전자의 가능성은 시시하게 부정된다. 시신이 정말로 이자요이 겐이치라면 그의 머리를 잘라낼 이유가 없다. '분노로 촉발된 모방 범죄'라는 명제를 거짓으로 치부한다면 말이다. 이쪽 가능성의 증명을 위해서는 경찰 측의 심도 있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탐정은 다시금 강조한다.

'모방'의 시점에서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지금 안치실에 누워 있는 시신은 이자요이 겐이치가 아니다. 누군가 사람을 죽여 이자요이 겐이치로 꾸며 두었다. 시신의 신분증과 옷매무새는 '진짜' 이자요이 겐이치의 것이 맞으므로, 안타깝게도 그 역시 본 사건에 휘말렸음은 명확해 보인다.

새로운 의문이 생겨난다. 범인은 어째서 이런 조작을 했나? 표면적인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이자요이 겐이치를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다. 그가 죽으면 누가 이득을 보지? 이 즈음해서 모리시타는 하루를 바라보았고, 하루는 독기 서린 눈으로 형사를 노려보았다. 알리바이를 확인하면 제가 결백한 것쯤은 단번에 나올 거 아녜요! 목소리가 다시 카랑카랑해진다.

샤라쿠 아키히코는 이쯤에서 말을 줄였다. 현재 상황에서 뽑아낼 수 있는 추리는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그가 죽으면 누가 이득을 보지? 라니. 한때 명인 타이틀까지 땄던 쇼기 기사라면 연봉은 분명 어마어마할 테고, 그런 그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딸 사쿠야 하루뿐이니 누가 봐도 이 아이가 수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메이는 눈을 가늘게 뜬다. 이 새끼는 아군인가? 그리 고민하는 눈치다.

모리시타 형사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미간에 깊게 새긴 주름을 펼 생각도 않고 탐정의 연설을 경청하다가, 별안간 복도 저편으로 달려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이다. 윗선에 일러바치기라도 할 셈인가. 그와 비슷하게 탐정의 휴대전화가 울렸고, 그 역시 전화를 받다가 돌연 계단 쪽으로 사라진다. 뭐야? 우린 이제 어떻게 하라고? 투덜대는 메이 옆에서 하루가 허탈하게 큭큭댄다.

"넌 왜 웃어?"

"뭔가…… 오싹오싹해서요……."

입꼬리를 발발 떨며 웃는 그 얼굴에 저농도의 홍조가 서려 있다. 너도 참 변태다. 연하한테 약한 나도 변태고…… 외로운 시신이 방치된 안치실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발신자는 미쓰이 키요타카三井清隆였다. 안 그래도 제 쪽에서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이건 의외네요. 샤라쿠의 인사치레에 미쓰이는 더욱 의외의 대답을 했는데, 무려 이자요이 겐이치의 시신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도 괜찮은 건가? 탐정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만다. 점심시간, 그러니까 지금 당장 경시청 쪽으로 오실 수 있냐는 물음에 미쓰이는 긍정의 의사를 밝혔고, 샤라쿠는 다시 지하실의 부검의를 만나야만 했다.  

샤라쿠에게 미쓰이라는 패는 필수불가결했다. 그와 동시에 포섭하기 어려운 인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왜 필수불가결한가? 당연하지 않나? 이자요이 겐이치의 신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미쓰이 키요타카다. 이자요이와 미쓰이를 커밍아웃시킬 심산은 아니다. 단지 미쓰이가, 이건 이자요이의 신체가 아니라고 귀띔만, 이야기만 해 준다면, 계획은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계획이라고 해 봤자 단순하다. 시체에서 몰래 긁어낸 살점과 이자요이 자택의 부산물을 비교하면 된다. DNA 검사를 해 주는 사설 기관은 널리고 널렸다. 미쓰이의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처사다. 인간은 가끔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 더군다나 정신적인 핀치 상태라면 더더욱.

사와다에게 안치실 출입을 몰래 허가받은 후 (다른 관계자가 오면 대충 둘러대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쓰이가 도착했다. 교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아, 좀 곤란한 상태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미 미약하게 현실을 보고 있지 않다……

평소였다면 그와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는 제 연인의 이야기를 물었을 샤라쿠 아키히코였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복도를 걷고 지하로 향하는 짧은 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다.

안치실의 문을 연다. 머리를 잃은 시신이 서늘한 철제 안치대에 눕혀져 있다. 바비 인형의 머리를 뽑아낸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교수는 흑,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가 싶더니, 비틀거리며 그 앞으로 다가간다. 엇, 절단면은 안 보는 게 좋을 텐데. 민간인에게 중요한 충고를 잊어 안타까워하던 와중이었다.

텅 빈 안치실에 히스테릭한 웃음이 웅웅 울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샤라쿠가 무어라 대처할 새도 없이,

"이건 대체 누구랍니까? 하, 하하! 이게 이자요이 씨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샤라쿠 씨라고 했나? 이거 이거, 세상이 단체로 미쳐버린 거 아닙니까?!"

교수는 숨이 넘어가듯 깔깔 웃어댔다. 환희와 광기가 괴상한 비율로 섞인 그 표정과, 안치실의 채도 낮은 조명을 받아 번쩍이는 안경에, 순간적으로 압도된 샤라쿠는 반응에 대한 진위판단은 하지 못했고…… 다만 원초적인 공포만을 온몸으로 느꼈다.

  

4

"여, 보스. 나야 나."

"누가 네놈 보스지?"

전파 너머의 남자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다. 이 새끼,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아낸 거냐? 한 단어 한 단어 내뱉을 때마다 언성이 점점 커지는 것이, 성대에 크레셴도 악센트라도 박은 건지 궁금할 지경이다.

"어떻게 알아냈냐니. 나를 아직도 우습게 보고 있나 봐? 보스."

내가 당신 신상을 그쪽 인간들한테 뿌려버리지 않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판 아냐? 하나야 메이는 거만한 어조를 꾸며냈다. 남자는 대답 없이 이를 바득바득 갈아댄다. 우와, 그 나이에 이빨 건강 안 챙기면 곤란할걸…… 나도 곤란해하고 있거든. 후속타까지 알차게 때리고 나서야 본론을 꺼낸다. 상대는 이제 콧김을 씩씩 뿜어내고 있다.

"요즘 야쿠자들 상황은 몰라? 뭐, 파벌 싸움이라든가, 자금줄, 기타 등등."

"그 잘난 손가락으로 못 찾는 것도 있나?"

"뭐……. 확인 차."

"확인?"

"당신이 현역일 때도 했었지? 승부 조작."

간만에 동생과의 단란한 덕담 시간을 가졌다. 하나야 케이花屋敬는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인데, 우연찮게도 경시청에서 프로파일러로 일하고 있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선 알고 있는 걸 다 말해보라고 했다. 말 안 해 주면 너만 손해야. 내가 경시청 데이터베이스까지 뚫고 들어가는 꼴을 보고 싶으니? 케이는 수화기에 대고 끙끙대는 신음을 몇 번 흘리다가, 제 누나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던지…… 돌아가는 상황을 간추려서 이야기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모방 범죄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아직 도쿄 연쇄 살인 사건의 수사가 계속되고 있어서, 이자요이 겐이치 살인 사건에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지 않는 모양이다. 누나는 이자요이 겐이치 쪽이 궁금한 거지? 하며 묻기에 메이는 긍정의 대답을 한다.

단번에 급소를 찌른 폼이 예사롭지 않다. 아마추어가 우연찮게 급소를 찔러 죽였다기엔 너무나 깔끔한 공격이다. 아무래도 사람을 죽이는 데 능숙한 인간이 아니겠느냐…… 하나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잘린 목이다. 절단면이 티 나게 조악하다. 실톱도 아니고 평범한 칼로 어렵게 자른 모양이다. 범인이 꽤 힘들었을 것 같다고…….

프로파일러의 견해는? 메이가 물으니 케이는 몇 초간 대답이 없다. 임마, 대답. 한소리를 듣고 나서야 소심한 면이 있는 동생은 우물쭈물 입을 연다.

목의 절단면은 별 상관없을 것 같아. 사람을 죽이는 거랑 목을 자르는 건 아예 다른 일이니까. 웃기게도 케이는 어제의 탐정과 비슷한 말을 했다. 야쿠자들은 사람을 죽이지, 토막 내지는 않아. 갈아버리거나 녹여버리는 경우는 있어도. 토막을 내서 얻는 이득이랄 게 없으니깐. 오히려 처리하기 귀찮아진달까, 해만 돼. 그러니 경험치가 낮을 수밖에 없고, 절단면이 덜떨어져도 딱히 이상하진 않아…….

아하, 야쿠자? 고맙다. 참고하마. 대체 어디에 참고하는 거냐는 동생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메이는 전화를 끊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어딘가 나사가 빠져선 컴퓨터에 골몰했다. 무한히 이어지는 가상의 세계가 미치도록 멋지다고 생각했던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이미 아는 사람은 아는 네임드 해커가 되어 있었다. 제 멋진 코드에 대한 수요는 예상보다 많았다. 코드를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대학을 갈 이유도, 취직을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으므로 메이는 노트북 액정 앞에서 제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런 와중에 음침하고 불법적인 웹사이트에 흥미를 가진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온갖 인간 쓰레기들이 모인 악취 나는 사이트에서, 인생이 재미없다면 약을 좀 해 봐 라는 권유를 받았다. 확실히 골방에 틀어박혀 자판만 두드리고 있으니 순수한 재미는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중간 크기의 테디베어가 집 앞으로 도착했다. 커터칼로 푹신한 배를 길게 가르니 보이는 건 소형 주사기와 기묘한 투명도의 용액. 속는 셈 치고 해 보는 거야, 딱 한 번만. 메이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날 밤이 첫 경험이었고, 상상도 못한 쾌락이 뇌를, 신경을, 의식을 자비 없이 눌러 으깼다. 아, 씨발, 거짓말. 이빨이 박박 갈리는 수준의 쾌락은 공포와 구분하기 어렵다. 자칫하다간 혀가 잘려나갈지도 모른다. 온몸을 뒤덮는 간질간질한 오르가즘과 새파랗게 날 선 오감과 치솟는 불건전한 아드레날린을, 아무래도 한 번만 경험하기에는 아까웠다…….

약은 생각보다 값이 나갔다. 정기적으로 투여하기에는 상당한 돈이 깨질 성싶었다. 그래서 메이는 뒷세계에 발을 담갔다. 더러운 루트로 돈 벌 궁리만 하는 야쿠자 새끼들은 언제나 상품 운반책을 찾고 있었고, 24시간 자유로운 프리랜서 하나야 메이는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운반책 일을 하다가 만난 쓰레기들은 많았지만, 약을 끊고 그나마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현재 기억에 남는 쓰레기는 두 명 정도.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만난 쓰레기. 야쿠자도 아닌데 사람을 일곱 명이나 죽였다고 했다. 뭐, 인생이 허무해서 약을 했다니 그럴 만도 한가.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관심도 없다.

나머지 하나는 뒷세계의 왕초. 몇 년 전 갑작스레 뒷세계 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영향력이며 명예가 아직도 잔열처럼 남아있긴 한 모양이다. 야쿠자라고 하니 자연스레 그 성질머리 더러운 오야붕이 떠올랐고, 메이는 작업 착수 오 분 만에 우노 마시로宇野眞白의 신상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번에 쇼기 기사가 하나 죽었는데, 알아? 쇼기가 뭐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자요이니 뭐니 하는 놈 말이냐?"

"뭐야, 잘 아네?"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어서. 이름이 특이한 놈이라 뉴스 보자마자 알았다."

"인연? 아하, 보스. 은퇴는 위장이고, 실은 물밑에서 쇼기 승부 조작을 사주하고 있었나?"

"이 새끼가……."

"농담이야. 슬슬 귀가 먹먹해지려고 하니깐, 소리는 그만 지르고……."

분명 그놈의 육아한다고 은퇴했었던가? 메이는 조소를 머금는다.

"그 쇼기 기사가 칼잡이한테 죽은 것 같대서. 야쿠자에 쇼기라. 딱 떠오르는 건 스포츠 도박, 승부 조작밖에 없지 않나? 당신이 현역일 때도 했었다면서. 뭐였지?"

"바둑."

마시로는 무뚝뚝하게 툭 내뱉는다.

"애비가 바둑을 특출나게 좋아했어. 그 새끼,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대국을 보고 도박판에 돈 거는 걸 그렇게 좋아했지. 결국 쫄따구 새끼들이 잘 보이려고 삼삼오오 모여선 승부 조작을 사주했고…….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 쪽 놈들은 돈 벌려고 그 짓 했던 게 아냐. 보스 발가락 핥아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받아 처먹으려고 했던 거지."

"다른 파는 돈 벌려고 도박판을 벌였다는 거군."

"당연한 소리 아냐? 항쟁이니 파벌이니 하지만 야쿠자도 결국 이익 단체다. 기본적으로 돈 벌려고 모인 놈들이야."

"쓰레기 같은 짓으로 돈을 모아서 문제지만."

마시로는 별 대답이 없다.

"그래서, 이자요이라는 놈이 야쿠자의 도박판에 엮인 것 같다는 소리냐?"

"그런 냄새가 난달까. 마약 운반책의 감? 범인이 칼잡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더니 머리가 나빠진 거냐?"

"하?"

"야쿠자가 선수를 죽일 이유가 어디 있냐는 말이다."

애초에 동기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다───마시로는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조폭이 얽힌 스포츠 도박? 사설 도박 사이트를 하나 열어둔 후 스포츠 선수들을 몇 명 매수하면 된다. 브로커는 선수들에게 승부 조작을 제안한다. 동시에 조작의 결과를 랜덤한 사이트 이용자들에게 흘린다. 이는 호구들을 잡기 위한 미끼와 덫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이후 성공적인 조작을 한 선수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한다…… 이 절차의 반복이다.

"이 순환고리에서 어떻게 하면 '선수를 죽인다'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지? 선수가 불법 도박에 가담했다는 죄책감에 자살한다면 몰라도, 야쿠자가 손을 써서 죽일 가능성은 거지는 제로다. 돈만 몇 푼 쥐여주면 그 배의 돈을 가져다주는 금덩이라고."

"선수가 경찰에 자수한다고 나설 수도 있잖아. 그럴 땐 묻어버리는 거 아냐?"

"야쿠자가 그렇게 멍청한 조직으로 보이나? 뒷돈이 왜 뒷돈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몰래 주는 게 뒷돈이잖냐. 꼬리 자르기를 위해 흔적은 안 남기는 게 정상이다."

"흠. 하기사 그냥 묻어버릴 생각이었음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은 안 했으려나."

메이는 침대에 누워선 중얼대다가 한순간 눈을 번쩍 뜨고는,

"……이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 소리야 또?"

"고인 이자요이한테 머리가 없는 건 알고 있어?"

"뭐?"

"뉴스 봤다며. 아는 게 뭐야?"

"죽었다는 내용만 보고 넘겼다만……. 머리가 없다고?"

"어이 보스. 가끔은 진득하게 앉아서 뉴스도 끝까지 보고 좀 그래라."

"어떻게 이자요이라는 걸 알았지?"

"신분증이랑 옷으로."

아아……. 한숨이 반 정도 섞인 탄식을 뱉고, 마시로는 그 후 일 분가량 말이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숨소리와 작게 들리는 타자 소리 정도. 연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성도 아닌 늙수그레한 남자의 숨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있는 이 상황에 짜증이 나선, 메이는 허리를 팍 세워 앉는다.

"보스, 뭐하냐? 선 채로 죽었어?"

"그러면 죽일 이유가 있어."

"뭐?"

"어이, 이자요이 겐이치는 타이틀 매치를 하다가 죽은 거잖아. 왜 이런 걸 먼저 말 안 했지?"

타자 소리가 난다 했더니 기사를 검색하고 있던 거였나.

"지금 필요 있는 정보야?"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게 이상할 정도다."

"하?"

"3승 1패라고. 한 번만 더 이기면 되는 상황 아니냐. 네 말대로 배경에 도박판이 깔린다고 한다면야, 이런 확실한 시점에서 선수를 죽은 걸로 꾸밀 이유는 너무 명확해."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잠깐만, 내가 언제 시체의 바꿔치기를 언급했지?

"도박 판돈이 이미 모인 상태에서, 경기가 취소되면 갈 곳 잃은 판돈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스터가 미친놈이 아닌 이상 원 주인들한테 돌려주겠지……. ……어?"

"알겠냐? 야쿠자는 선수를 죽일 이유도 없고 죽은 걸로 꾸밀 이유도 없다. 전자는 자멸하는 꼴이고 후자는 모인 판돈만 날리는 꼴. 그렇다면 도박 시장에서 남는 건 도박판에 뛰어든 불나방 같은 놈들. 어이, 요즘 발랑 까진 어린놈들이 그렇게 도박을 많이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냐? 일진, 폭주족, 그리고 한구레半グレ. 네가 말한 칼잡이에 가장 가까운 건 한구레라고 생각한다만……."

쇼기를 기반으로 한 불법 도박 사이트는 꽤 많았다. 이자요이 겐이치의 야왕전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전이므로, 대부분의 사이트가 베팅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이름은 익명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베팅액은 공개적으로 걸려 있다. 나의 재력을, 혹은 역으로 베팅하는 깡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많은 모양이지. 메이는 수십 개의 불법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정보를 긁어모았고, 결국 특이점 하나를 발견한다.

쿠보 카즈요시 9단의 승리에 천만 엔을 걸었던 익명의 사용자가 존재했다.

5

남자가 발견되고 삼 일이 지났다. 어제까지, 그는 여전히 제 이름도 떠올리지 못한 채 병원 서가의 책만 읽고 있었다. 깨진 머리야 며칠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물겠지만, 기억도 되찾지 못하고 신분증도 지갑도 없는 상태라면 귀가에 대단한 차질이 생기겠지. 때문에 남자는 제 기억을 되찾기 위해 무던 애를 쓰는 듯했다.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신도는 기억을 잃은 남자에게 꽤 흥미를 느꼈으므로, 퇴근 후 삼십 분 정도는 세상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와 약간의 담소를 나누곤 했다. 남자의 누덕누덕한 단발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버섯이라는 이름이 꼭 어울리는 헤어스타일. 대체 어떤 미용사가 저렇게 머리를 못 다듬었을까. 아님 정말로 집에서 머리를 자르기라도 한 건가. 아직도 집에서 머리를 다듬는 사람이 있나?

아무튼 남자───키노코는 신도를 보면 기쁜 얼굴을 했다. 기억을 잃은 후 유일하게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세상에 너와 나 단둘이 남겨진 기분일까. 신도는 기억을 잃은 적이 없다. 기억이라 하면, 원치 않는 기억까지 드넓은 뇌리에 꾸역꾸역 남는 편이었다.

키노코는 무얼 하던 사람일까? 그와 대화를 나눈 지 이틀째 되던 날, 신도는 토끼 모양의 화과자를 먹는 키노코를 조목조목 뜯어보았다. 손짓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그것이 어느 분위기와 유사하냐 하면, 곡선미가 있는 한복보다는 아무래도 곧게 떨어지는 기모노의 쪽이다. 뭐, 일본인이니 한복보다는 기모노가 마땅히 더 어울리겠으나…… 전체적인 품은 그러했다.

품위가 있다. 그 한 마디로 일축할 수 있다. 난잡하고 제멋대로인 생활을 하는 신도와는 정반대의 벡터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사람이 저런 엉망진창인 헤어를 하고 있지? 미묘한 위화감에 신도는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지만, 부족하다 못해 텅텅 빈 정보값으로는 무엇 하나 예측해 볼 수가 없다.

신도는 남은 화과자를 키노코에게 떠넘기고 병실을 나왔다. 대여섯 개 정도가 남았던가. 키노코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신도는 씨익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음 날. 그제의 과오를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 퇴근 후에도 자판을 두드리던 신도는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뉴스에서 무어라 하는 말을 들을 새도 없이, 동거인이 구워 준 버터롤을 입에 문 채 현관문을 나선다. 갓 구워진 빵의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엘리베이터가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찰나의 순간 동안 신도는 열심히 버터롤을 씹었고, 오늘은 점심을 꼭 챙겨 먹어야지, 그런 다짐을 한다.

스즈키 노보루는 어제보다 후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사를 들들 볶는 데에 최적화된 부하가 아닐까…… 고소한 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입을 다시며 신도는 제 자리에 앉는다. 당분간은 또 재미없는 업무의 연속이다. 신도의 체감상, 재미없는 업무를 두 개 정도 끝내야 그나마 흥미로운 안건이 올라왔다. 나도 회사원 말고 연구원이나 할 걸 그랬나. 교수도 재밌을 것 같고…….

잡념에 휘둘리면 역시 업무 능률은 급격하게 하락한다. 그리고 신도는 일 년 중 삼백 일 정도를 잡념에 휘둘린다. 출근하고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건너편에서 엑셀에 흔해빠진 결과값을 입력하던 스즈키 노보루가 흘긋 팀장 쪽을 바라본다. 머리 좋은 팀장은 회사 근처의 빵집을 찾아보고 있다…….

스즈키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의 바퀴가 끌리는 소리에 신도가 뒤를 돌아본다. 머리칼을 분홍과 노랑의 투톤으로 물들인 중년의 팀장은, 놋쨩, 오늘은 어쩐지 양식이 땡기지 않아? 그런 태평한 소리를 했다.

일본 각지에 체인점이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이런 곳은 음료수 바가 따로 있어서 좋아~ 조금씩 골라 마실 수 있잖아? 팀장은 속눈썹이 긴 미려한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렸다. 어차피 두 잔도 다 못 마시면서 드링크 바를 주문하는 건 사치 아닌가. 노보루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양식이 당긴다던 신도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시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판 위의 햄버그가 퍽 맛있어 뵌다. 육즙과 소스로 반들반들한 빛을 내는 토실한 햄버그를 앞에 둔 채 신도는 드링크 바로 걸음을 옮겼다. 팀장이 가지각색의 음료들 앞에서 고민하는 동안, 노보루의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테이블에 등장했다. 귀여운 문어 모양 소시지가 노보루를 올려다본다. 노보루는 악의 없이 소시지를 포크로 쿡 찍어선 씹어 삼킨다.

신도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노보루는 배가 고팠으므로 포크를 돌돌 말기 시작한다. 벽걸이 TV에서 쇼기 기사 살인 사건의 후속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자요이 겐이치 사체 발견 후 3일.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장례식은 가족의 뜻으로 아직 치러지지 않고 있다고…… 가족의 뜻으로? 장례식을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자요이 9단 정도의 기사라면 조의를 표하는 동료들이 꽤 많을 텐데. 노보루는 문득 제 이복 형제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라면 분명 장례식에 참석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자요이 9단이다. 명인 스즈키 아키라 9단에게 몇 번이고 도전했던 이자요이 9단.

나폴리탄 위에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는 몇 초간 움직이지 않았다. 의아함에 노보루가 고개를 드니 신도가 넋이 나간 얼굴로 포도맛 환타를 손에 들고 서 있다. 그 시선은 TV에 못 박힌 채다. 막 이자요이 9단의 생전 사진이 자료 화면으로 지나가던 참이었다.

"왜 그러세요?"

새콤한 케첩을 고소한 우유로 잘 잡은 맛이다. 고급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석적인 나폴리탄 스파게티. 노보루는 다시 포크를 돌돌 돌렸고, 신도는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팀장님? 음식 다 식습니다."

"놋쨩, 저 사람이 이자요이야?"

"에?"

스파게티를 우물대며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입안의 맛 좋은 음식물을 꿀꺽 삼키고 나서야 노보루는 보다 정갈한 답변을 내놓는다.

"네.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려서 죽은 쇼기 기사.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사진은 안 보여줬잖아."

"예?"

"사진은 안 보여줬잖아……. 놋쨩, 다 먹었지?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가자."

부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지갑에서 지폐 두 장을 꺼내더니, 계산서 위에 이천 엔을 올려둔 채 휙 하고 레스토랑을 나간다. 계산서에 정리된 두 사람의 식대는 천 오백 엔을 조금 넘었다. 아직 따끈해 보이는 햄버그와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환타를 망연히 바라보던 노보루는, 3분의 2 가량이 남은 나폴리탄 스파게티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신도가 향한 곳은 시내의 한 병원이었다. 고작 누군가의 병문안을 위해 귀중한 점심시간과 맛있는 점심 식사를 버려야만 했는가, 노보루는 번뇌한다. 애초에 왜 나까지 데려오신 거지? 팀장님 말이니 까라면 까야겠지만. 아직 입안에 감도는 짭짤한 나폴리탄 소스의 향이 정상적인 사고를 음해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한 것이, 신도는 단 한 번도 노보루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꺼내며 풍부한 사적 교류를 즐겼을 인간이다. 그러나 오늘의 신도는 다르다. 동행자인 노보루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다만 목표한 병실을 향해 급하게 걸어가고만 있다.

명찰 하나 없는 병실의 문을 연다. 노보루는 일순 그곳이 빈 병실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환자의 이름이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던 탓이다. 착각은 금방 해소되었다. 병상 위에는 분명 환자가 한 명, 있다. 창문에서 쏟아지는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책을 읽고 있다.

나이는 신도와 비슷한 정도일까. 얼굴의 많은 부분을 가리는 뿔테 안경 뒤의 순해 보이는 눈이 두 사람을 향했다. 신도는 어떠한 인사도 하나 없이 뚜벅뚜벅 환자의 앞으로 향하더니,

"아, 신도 씨, 오늘은 꽤 일찍……. 앗, 히익……."

두꺼운 뿔테 안경을 거칠게 벗겨냈다. 신도의 대각선 뒤에 서 있던 노보루는 흠칫 놀라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살짝 뒤집힌 목소리를 내고야 만다.

부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도는 낚아챈 안경을 병상 옆의 협탁에 대충 던져둔다. 당황하다 못해 두려워 덜덜 떨고 있는 환자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다. 노보루는 다시 신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비일상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팀장의 옆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하다. 항상 살갑게 내려가 있던 눈꼬리가 탐욕스럽게 대상을 관찰한다. 신도는 이제 환자의 턱을 잡은 채, 3D 모델이라도 스캐닝하듯 지근거리에서 내려다보는 기행을 벌이고 있다. 왜 저러시는 거지? 이거, 말려야 하나? 노보루가 주춤주춤 신도에게로 다가가던 그때.

"노보루, 경찰에 신고해."

"에, 예?"

"이거 봐, 이자요이 겐이치한테 험한 짓을 해 뒀잖아? 나 참. 아무도 못 알아본 게 이해가 되긴 되는군."

"예?"

오늘 몇 번째로 하는 '예?' 인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병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 전까지 팀장에게 유린당하던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공포가 가시지 않은 검고 깊은 눈동자가 마악 흔들리는 것이 첫 번째로 보였고, 얼굴의 전체적인 조형은, 맞다, 이자요이 겐이치 9단을 꽤나 닮았다. 

환자의, 이자요이 겐이치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이제는 덮여버린 책 위에 둔 손을 꽈악, 마디 하나하나가 새하얘질 정도로 쥐더니, 노보루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말을 꺼낸다.

"……스, 스즈키 선생님……."

"……하?"

"아니, 잠깐, 스즈키 선생님이 아니야……. 스즈키? 잠깐…… 당신은…… ……나는?"

무심코 팀장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팀장은 이례적으로 노보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미려한 얼굴이 노보루를 매섭게 관찰한다. 아, 그래. 세상엔 웃기는 우연도 다 있구나. 본래 세상이란 그런 법이다만. 가늘게 눈을 뜬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고, 제 부하의 속내까지 전부 뜯어내고 나서야 다시 환자를 흘긴다.

"바보 같은 짓을 했어……. 그제 전부 끝낼 수 있었는데."

노보루가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 신도는 스스로 경찰에 연락했다. 

환자───이자요이 겐이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작은 축에 속하는 몸을 벌벌 떨며,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6

"그 탐정이 한발 늦을 때가 다 있네."

뭐였을까, 그 메일은. 사건 조서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며 모리시타 쿄이치로가 중얼댔다. 경시청 수사 1과, 살인범수사 제 1계. 평소였다면 동료 형사들로 복작댔을 부서는 오늘따라 텅텅 비었다. 다섯 번째 도쿄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다섯 번째는 아니다. 네 번째 사건으로 오인된 이자요이 겐이치 살인 사건은───더 엄밀히 따지자면 피해자는 이자요이 겐이치가 아니었으나, 편의상 모리시타는 호칭을 고치지 않았다───모방범의 행적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어제,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이자요이 겐이치의 생존이 확인되었다. 그는 도쿄 시내 모처의 병원에서 신원불명자의 신분으로 입원 중이었다. 마음씨 좋은 회사원이 뒷골목에 쓰러져 있던 그를 입원시켜 주었다고 했던가. 회사원───신도 쥬조는 그를 발견하고 삼 일이 지나서야 경찰에 신고하였다. 도착한 수사원들은 신도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자요이 겐이치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긴 머리칼이 거칠게 잘려있었던 탓이다. 게다가 두꺼운 뿔테 안경까지 씌워져 있어, 누구도 그를 이자요이 겐이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듯싶었다.

───인간은 대부분 얼굴로 타인을 구분한다. 얼굴이 새겨진 머리는 곧 인간의 정체성이다.

탐정의 말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재생된다. 아아, 그런가. 정체성을 이중으로 잃고 만 것이다, 이자요이 겐이치는.

모방범은 이자요이 겐이치를 죽은 것으로 꾸미고 싶어했다. 그래서 애먼 사람을 죽이고, 목을 잘라내어, 이자요이의 옷과 신분증을 그 위에 덮어두었다. 이름 없는 시체는 이자요이 겐이치라는 이름을 받음과 동시에, 모두에게 죽음을 인정받는다. 이자요이 겐이치는 죽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 믿었다.

목적은 이자요이 겐이치를 죽이는 것이 아닌 죽은 것으로 꾸미는 것. 그 단순한 계산에서 나머지는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꾸며진 이자요이 겐이치가 아닌, 살아 있는 이자요이 겐이치다. 안타깝게도 이자요이 겐이치라는 쇼기 기사는 매우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슴께를 넘을 정도로 긴 장발이 그것이다.

범인이 어째서 이자요이 겐이치를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이대로 이자요이를 버려둘 수 없었다. 죽이지 않는다면 산 채로 버려야만 했을 테고, 산 채로 버린다면 특이한 외형을 가진 이자요이가 보다 빠르게 발견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자요이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동시에 얼굴을 가리는 뿔테 안경을 씌웠다. '살아 있는 이자요이'의 발견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안경을 씌운다. 동시에 옷을 바꿔 입힌다. 

언뜻 간단한 분장인 듯 보이지만 그 효과는 무척 크다. 사람들은 모두 이자요이 겐이치의 '기본적인 모습'───머리가 길고, 항상 기모노를 입고 다니며, 안경을 쓰지 않는 모습───만을 기억한다. 다른, 평범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기사들이라면 효과가 덜했을는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상대는 이자요이 겐이치다. 항상 고급 기모노를 후줄근하게 입고 다녀 야왕野王의 한자가 조금 다른 거 아니냐는 비아냥마저 듣는 기사다.

실제로 신도 쥬조가 신고하기 전까지, 병원의 누구도 그가 이자요이 겐이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쇼기 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라면 그 얼굴은 나름 널리 알려져 있을 텐데도.

……하지만 기억상실은 범인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아닐까. 예상했든 하지 못했든, 범인에게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자요이 겐이치의 기억이 멀쩡했다면 그는 깨어나자마자 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테고, 그렇다면 꽤나 빠르게 신원이 확인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든 게 엉망진창에 즉흥적이다.

뒤늦게 부검실에 얼굴을 내민 탐정은 그런 말을 했다. 마침 그 자리에는 모리시타가 있었다. 이자요이 겐이치의 생존이 확인된 이상, 신원불명 시신의 처리와 재검시에 대해 의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입술에 새겨진 흉터를 비틀며, 모리시타는 탐정의 의견을 경청했다. 사와다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곡물이 뭉쳐진 에너지바 따위를 맛없게 씹어 넘기고 있었다.

───시점을 변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자요이 겐이치에서 신원불명자로. 어째서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자요이 씨의 감금 혹은 후속 살인까지 고려했지만, 그가 생뚱맞게 병원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상처라고는 후두부의 타박상뿐인 모습으로 발견되었지 않나. 그가 감금 장소에서 혹은 살인 위협에서 탈출했다면 그보다는 더한 자잘한 상처가 있어야만 한다.

탐정은 입꼬리를 뒤틀어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범인이 이자요이 씨의 발견을 늦추려고 한 공작은 잘 알겠다. 확실히 일리 있는 공작이다. 이자요이 씨는 외관이 독특하니까. 그가 아무리 깨어나서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신분증도 뭣도 없는 상황에서는 자기 증명이 어렵겠지. 외관도 백팔십도 바뀌었으니.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범인에게 이자요이 씨를 죽이지 않을 이유가 대체 무엇이 있지? 범인은 이미 사람을 죽였다. 살인이라는 심리적 허들은 가볍게 넘었다고. 이런 품이 많이 가는 계획을 세우기보단 차라리 이자요이 씨를 죽이고 시체를 없애버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시체를 없애버리는 게 효율적이라니. 이상한 말이지만 확실히 기괴한 연쇄 살인에 편승하는 것보단 효율적이다. 모리시타는 말없이 탐정을 노려보고 있었고, 탐정은 그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다. 범인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과, 범인이 사람을 죽였을 가능성이다. 우선 전자. 어쩌다 범인의 손에 들어온 시체를 이번 계획에 썼을 가능성. 범인은 살인이라는 벽을 넘지 않고도 이번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범죄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자요이 위장 살인 사건이 발생한 건 그의 타이틀 매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다. 범인은 그의 승리를 방해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일으킨 것이 명확하다. 아아, 명확하다? 7판4선승제라는 룰 안에서 이자요이 씨가 막 3승을 거두고 있던 때였으므로───명확하다. 이런 타이밍 좋은 시기에 우연히 시체가 손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가정이다.

───그 다음, 범인이 사람을 죽였을 가능성. 전제를 하나 깔고 가야한다. 이전에 언급했던, 범인은 이자요이 씨를 죽이지 않는다 라는 전제다. 이 전제를 깔게 된다면 사건의 양상이 조금 뒤틀린다. 이자요이 씨의 타이틀 매치를 방해하기 위해 이자요이 겐이치 그 자신이 아닌 생뚱맞은 사람을 죽인다. 이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살인사건이니 상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기는 이상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범인이 일단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동시에 이자요이 씨의 타이틀 매치를 방해한다라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전후 관계를 뒤바꿔 보는 것이다. 즉 이자요이 씨를 방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닌, 사람을 죽여버려서 이자요이 씨를 방해하는 데에 써먹은 거라면.

───그렇다면 생각보다 부드러운 사고의 흐름이 가능하다. 신원불명자를 죽인 건 칼을 잘 쓰는 사람이다. 여기서 '칼을 잘 쓴다'란 '칼로 물건을 잘 자른다'가 아닌 '칼로 사람을 잘 찌른다' 이다. 칼로 사람을 잘 찌르는 사람. 싫어도 반사회적 세력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자, 어째서 그들이 쇼기 기사를 방해할 이유가 있나? 반사회적 세력들의 양상을 고민해 보면 답이 나온다. 첫째, 이자요이 씨가 그들의 영업을 방해해 배로 갚아줬든가. 둘째, 복잡한 이해관계에 이자요이 씨가 엮여 방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든가. 사실 둘 다 같은 기반을 공유한다. 다름 아닌 '돈'이다. 반사회적 세력의 행동 원리는 돈이라는 거다. 땅따먹기 따위가 아니라.

……나름 흥미진진하게 탐정의 연설을 듣고 있던 모리시타의 전화가 울렸다. 상사였다. 전화를 받으니 곧장 귀청에 박히는 '얌마, 너 지금 어디 있어?!'. 아까 시신 처리에 대해 부검의랑 의논하러 간다고 했지 않습니까? 투덜거리는 꼴을 탐정과 부검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는 모리시타의 귓가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자요이 겐이치 살인 사건의 범인이 방금 자수했다. 요즈음 도쿄에서 극성인 한구레 소속의 젊은이가───스스로 경시청 정문을 걸어들어와 제가 벌인 짓이라고 자수했다.

모리시타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훔쳐 들었는지. 탐정은 한발 빠르게 부검실을 나가 수사과로 향한다. 그는 모리시타의 상사들과도 연이 있다. 애초에 수사과에서 탐정을 싫어하는 사람은 모리시타뿐이고, 상사들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살갑게 대해주는 편이다……. 그런데도 형사들에게서 직접 정보를 뜯어내지는 않는데, 그만의 예의라는 걸까.

한구레 소속이라는 젊은이는 이미 신문에 들어간 후였다. 탐정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그럼 이걸로 손은 떼야겠군요. 대뜸 그런 소리를 했다. 그는 도쿄 연쇄 살인 사건이 아니라 이자요이 겐이치 살인 사건이라는 별개의 사건에만 흥미를 가졌으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탐정은 눈 깜짝할 새 연갈색의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수사과의 문을 나섰다.

한구레란, 이른바 청소년 폭력 서클의 진화한 버전. 학창 시절 악명을 날리던 폭력단들이 나이를 먹고 그대로 범죄 집단으로 성장해버린 케이스다. 하나하나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에서 야쿠자와 구분되나, 오히려 공권력의 감시를 받는 야쿠자들의 손발이 되어 대신 움직이기도 한다. 때로는 촉법소년마저 한구레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 조직범죄대책부의 골머리를 썩이는 존재다.

자수한 한구레 청년도 보통의 한구레와 다를 법 없는 한구레였다. 그는 답잖게 쇼기에 관심이 있어, 쇼기를 보고 불법 도박 사이트에 베팅을 하는 게 취미이자 용돈벌이 수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한구레의 경리 담당이었다는 것이다.

요즈음 쇼기 계에 쿠보 카즈요시라는 신예가 막 떠오르고 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9단까지 승급한 그는 첫 타이틀 도전 상대로 이자요이 겐이치를 골랐다. 그 자신의 대국 스타일이 최근 은퇴한 명인 스즈키 아키라 9단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던 탓이다. 오만하다면 충분히 오만한 선택이었으나, 재미있게도 이자요이 9단은 첫 대국에서 패배하고 만다. 예전의 스즈키 9단이 떠오르기라도 했던 걸까, 대국 중반 어이없는 실수를 하나 했고, 그것이 꼼짝없이 패배로 이어졌다.

이자요이의 패배 이후 한구레 청년은 쿠보의 승리에 올인하기로 결정했다. 쿠보는 분명 이자요이 정도는 가볍게 밟고 오를 수 있을 테다. 베팅을 하기 직전 떠오른 것이 한구레의 재정 상황이었다. 그가 속한 한구레는 모종의 야쿠자 파에게서 자금을 지원받고 있었는데, 얼마 전 지독한 술판을 벌이느라 상당한 금액을 쓰고 말았다. 그것을 이걸로 메운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닐까. 청년은 그런 생각을 했고, 결국 한구레의 재산을 끌어모아 천만 엔이라는 거금을 베팅하고 만다.

그러나 판도가 뒤바뀌었다. 이자요이 9단은 그 이후 연속해서 쿠보에게 승리했다. 쇼기 계에서 뒹군 연륜이라는 걸까. 이자요이가 한 판 한 판 승리할 때마다 청년은 오들오들 떨어야만 했다. 그 와중 갑자기 찾아온 야쿠자의 연락책 격 남자가, 너 이 새끼, 흔적이 안 남을 줄 알았냐? 돈을 어디에 빼돌린 거냐? 하며 무서운 얼굴로 묻기에…… 청년은 그만 그를 찔러 죽이고 말았다. 참으로 우발적인 범죄였다. 이자요이 9단이 세 번째로 승리한 날 밤의 일이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모리시타가 듣기에는, 탐정이 추리한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이자요이를 납치해 옷을 벗기고, 죽은 남자에게 옷을 입히고 머리를 자르고, 이자요이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대충 구한 뿔테 안경을 씌우고……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자요이의 생사는 별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이자요이가 한순간이라도 죽은 것처럼 보이면 장땡이었다. 그래야만, 베팅했던 거액의 돈을 '경기 취소'로 돌려받을 수 있었으므로.

"돈은 돌려받았나?"

모리시타의 동료 형사가 물었다.

"……예."

"그런데 어쩌다 자수할 생각이 든 거지? 그대로 잠적해도 됐을 텐데. 상황을 보면."

"……메, 메일이 와서."

"메일?"

"네가 이자요이 겐이치에게 한 짓을 알고 있다. 자수하지 않으면 내가 경찰에 정보를 뿌려버릴 테다. 자수하는 게 형량이 더 적은 건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알고 있겠지, 라고……."

"……허?"

"……누나, 다크 히어로 짓을 하는 건 좋은데, 엄청 좋은데…… 좀 덜 요란스럽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진동하는 전화를 받으니 하나야 케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메이는 여전히 침대에서 위를 보고 누운 채로, 허여멀건 천장을 그저 올려다본다.

"어이, 덜 요란스럽게라니. 메일보다 덜 요란스러운 매체가 대체 어디에 있냐? 내가 모스 부호라도 썼어야 했니?"

"아니, 그게 아니고…… 하아……."

"애초에, 내가 뭘 했다고 그러냐? 서점 골방에 박혀서 자판만 두들겼는데."

"……방금 메일 보냈다고 시인했잖아?"

"하항."

메이는 멋쩍게 웃는다.

"아무리 봐도 누나가 할 짓 같아서. 경찰이라면 학을 떼는 인간이 이자요이 위장 살인 사건에 관심 갖기도 했고. 대충 떠본 건데……."

"그래서, 용건."

단답형의 대답에 케이는 금방 주눅이 들어선, 머뭇대는 기색을 폴폴 풍기다가 겨우 입을 뗀다.

"……뭘 어떻게 한 거야? 도박 관련된 건 또 어떻게 알았고."

"뒤엣건 노코멘트. 앞의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근데 도박에 얽혔다는 걸 알면 할 일은 명확하지 않니? 도박 사이트들 싹 다 긁어내야지."

"하아……."

"그 멍청이가 눈에 띄게 거액을 걸었길래 생각보다 금방 찾아냈지. 그 뒤론 뭐, 대충 계좌 뜯어내고. 당연히 대포 통장일 줄 알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그냥 자기 명의더라. 뭐지? 이 등신은? 그런 생각이 다 들었다고. 덕분에 실 탐색 시간은 반나절도 안 걸렸단다. 동생아."

"……으응, 알았어."

그 뒤로도 뭔가 주춤주춤, 머뭇거리는 기색. 메이는 남자의 목소리를 길게 듣는 취미가 없었으므로 또다시, "또 뭔데. 용건.".

"……이제 약은 완전히 끊은 거지?"

"비슷한 건 하고 있다만."

"뭐?!"

"어이, 히로뽕을 왜 한다고 생각하냐? 도파민을 미친 듯이 뿜어내기 위해서야. 도파민, 경시청 소속이니깐 도파민 정도는 알지?"

케이는 대답이 없다. 가련한 숨소리만을 훌쩍훌쩍 내는 것도 같다.

"섹스할 때도 도파민이 나온단다. 젊은 애가 확실히 좋네."

"……"

부끄러움이 많은 남동생은 별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메이가 비실비실 웃으며 그저 침대에 누워 있자니 메일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고, 발신인은 방금까지 잡담을 나누던 하나야 케이. 

[ 범인 자수시켜줘서 고마워. 다음에 밥이라도 살게. ]

메이는 계속해서 비실비실 웃었다. 답장은 따로 하지 않았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