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대만] 비인도적 운명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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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도적 운명 02
그러니까, 저 녀석 왜 자꾸 저러는 거냐고.
저번에 주의를 준 이후 대만은 더욱 노골적인 태웅의 시선에 시달리고 있었다. 옳다. 태웅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인 것처럼 자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럴 텐데.
왜 이렇게 어디를 가도 서태웅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대만이 맞은편에 서 있는 태웅을 응시했다.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건지 태웅은 사복 차림으로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그냥 산책하러 나왔는데요.”
이렇게 사람 많은 번화가에? 되묻고 싶지만, 심증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놓고 묻기는 무리다. 정말 그 서태웅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번화가로 산책을 나온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물증은 없다. 대만이 가시지 않는 찝찝함을 삼켰다.
“선배는 혼자예요?”
“보면 모르냐?”
대만을 힐끗힐끗 살피던 태웅이 묻는다. 녀석이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고쳐잡았다. 대만이 의심스럽게 태웅을 바라봤다. 역시 서태웅은 저번의 그 ‘일’ 이후로, 이상했다.
“그러면 같이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녀석이 눈치를 보듯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저 녀석, 저거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거다. 대만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서태웅과 같이 다닌다? 상관은 없었다. 외출을 위해 긴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무릎의 이름을 들킬 일도 없다. 오히려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서태웅이 왜 이렇게 구는 건지를 캐물을 기회. 한 번은 우연, 두 번도 우연. 그러나 세 번째까지 오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잖아. 대만이 못마땅한 얼굴로 태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따라오려면 따라와라. 밥은 먹었냐?”
“아니요. 아직.”
대만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다. 태웅의 시선이 대만의 손목을 향했다. 금속 재질의 시계는 평소 대만에게서 보기 힘든 시계였다. 말 그대로 사적인 자리에서나 착용할 만한….
“뭔데. 시계에 관심이라도 있어?”
그 시선이 현재로서는 굉장히 지긋지긋했기에 대만이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옷소매를 끌어내렸다.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녀석의 시선이 살갗 깊숙이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질색한 표정까지 지으며 태웅을 응시한다.
“너 역시 요즘 이상한데.”
“……제가요?”
“어.”
하지만 그것 역시 심증이었다. 별것도 아닐 일인데 하필 그 대상이 ‘무릎’이어서 자신이 과민반응 하는 걸지도 모르고. 며칠이 지났으나 무릎에 새겨진 이름은 여전히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다쳤던 무릎에 새겨진 상처라 꽤 신경이 쓰이는 건 맞았다.
무릎이란 대만에게 있어 역린과 같다. 더는 아프지 않지만, 드러내기 꺼려지는 약점과 같은 것. 항상 옷이나 보호대에 가려져 있기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무릎이라는 상징성이 서태웅이라는 이름의 의해 관통된다. 이 의미 모를 조합은 대만의 심정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됐고 밥부터 먹자. 뭐가 괜찮냐?”
하지만 아무리 지워보려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자신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편한 점이라고는 탈의 시 무릎을 철저히 숨겨야 하는 것. 그리고 괜히 서태웅이 의식되는 것뿐이니. 견디라고 한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역시.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대만이 힐끗 태웅을 흘겨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저 녀석 입에서는 아무거나 괜찮다는 답이 돌아올 테니까. 정말로 아는 식당 아무 곳이나 갈 생각이었다. 이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흐름에 관한 대만의 사소한 반항이었다.
* * *
“너 갑자기 사람 몸에 나타난 ‘이름’같은 거 들어본 적 있냐?”
이 싱숭생숭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 사태를 해결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소문이 잘 모이는 사람에게 ‘물어보기’였다. 물어보기의 첫 타자는 영걸이었다. 발이 넓은 녀석이었기에 충분히 소문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결과는 별다른 소득이 없이 끝났다. 그렇다면 그다음의 차선책으로는 권준호가 있었다.
“응?”
그래. 권준호. 흔히 말하는 ‘다정’한 놈이라 그런지 권준호의 주위에는 의외로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기에 고민 있는 사람들의 고민 상담도 줄곧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영걸이에게서 소득이 없었던 만큼 대만에게 남은 희망은 권준호밖에 없었다.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대만이 간절하게 준호를 올려다봤다. 무척이나 간절한 시선에 준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름? 갑자기?
“사람 몸에 이름이 나타나?”
“젠장. 역시 너도 모르는 거냐.”
준호를 올려다보던 대만이 체념한 채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 다음으로 누구한테 물을 수 있지? 방법을 바꿔야 하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법한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더는 물어볼 만한 놈이 없었다.
더 짜증 나는 건, 지금 순간에도 여전히 무릎에 새겨진 글씨가 신경 쓰인다는 점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던 대만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뭔데? 곤란한 거야?”
“조금? ……내 얘기는 아니긴 한데.”
혹시 모르니 ‘자신이 아니다.’ 말을 덧붙였다. 깊게 체념한 대만을 바라보던 준호가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자기 얘기가 아니라고? 저런 얼굴로?
……누가 봐도 자기 얘기라고 써 놓은 것 같은데….
그런데 이름? 준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퍼특, 떠올랐다. 언젠가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다. 보통 ‘이름’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고 더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던가. 느낌상 대만이 말하는 이름이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웠다.
“음? 들어본 적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뭐?”
체육관 바닥에 누워있던 대만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네 일 아니라며, 준호의 잔잔하게 웃는 얼굴 위에 문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대만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으게, 정말 내 얘기는 아니고 친척이 곤란해해서 말이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고 왜, 저번에 능남고랑 연습 시합했을 때. 경기 끝나고 거기 윤대협이 말했던 걸 들었어.”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의 이름이 등장했다. 윤대협. 그렇지만 떠올려 보면 녀석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타입이긴 했었지. 대만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게다가 사교성 있으면서도 나이브한 태도로 인해 주위에서 이것저것 여러 말을 들었을 법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준호의 말은 충분히 신뢰도가 있었다. 대만이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러 가게요?”
“아, 미친! 깜짝이야.”
등 뒤에서 서태웅의 목소리가 불쑥 들린 건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못 잡은 대만이 기우뚱거렸다. 단단한 팔이 흐트러진 대만의 몸을 받쳤다. 서태웅이다.
“……뭐 하냐, 서태웅아?”
“연습 안 해요?”
“안 하겠냐?”
갑작스러운 태웅의 난입에 준호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야 대만이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 모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방금까지 저 커다란 후배 놈이 대놓고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대만이 조금 바보 같았다.
“윤대협이랑 만날 거면 얘기해. 본인 연락처는 몰라도 경태 연락처는 아니까.”
태웅을 향했던 대만의 고개가 준호에게로 퍼특, 돌아갔다. 동시에 못마땅한 태웅의 고개도. 박경태면 윤대협과 명확하게 연결해 줄 것이다. 대만의 얼굴에는 미약한 희망이 서려 있었다.
대표로 연락처를 받아 둬서 다행인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자리를 옮기기 전에 대만에게 슬그머니 시선을 두었다.
“……박경태?”
“어. 왜 능남에 시끄러운 그 녀석 말이다.”
이야……. 뭔지는 몰라도 엄청 못마땅한가 보네. 점점 날카로워지는 태웅의 눈매에 준호가 부지런하게 자신을 찾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저 둘의 이야기다. 그러니 자신은 상관은 없었다. 엮여봤자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도 준호가 걸음을 떼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나저나, 뭔가를 숨기려면 제대로 숨기는 게 나을 텐데. 등 뒤에서 구조요청 신호가 가득한 대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권준호는 의외로 냉정했다.
뭐가 됐든 대만아, 자업자득인 거야.
미련 없이 자리를 옮기는 준호의 모습을 대만이 간절하게 바라봤지만, 이미 발을 뗀 구원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애초에 자신이 왜 저 녀석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거지? 문득 고개를 든 못마땅함에 대만이 삐뚜름한 눈을 한 채 태웅을 응시했다.
주둥이가 댓발 나와 있었다. 그 위에 뭐든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아니, 내가 이미 안면 있는 윤대협 좀 만나서 물을 게 있다는데 자기가 왜?
“서태웅. 네가 뭐 오리냐? 주둥이는 왜 그렇게 댓발 나왔어.”
얄미워. 얄미워 죽겠어. 대만이 튀어나온 주둥이를 손으로 꽉 잡는다. 입술이 붙잡힌 태웅이 못마땅하게 대만을 노려봤다. 뭔데. 할 말 있으면 말로 해. 선배가 입술 잡고 있잖아요. 무의미한 대치는 잠시간 이어졌다. 결국 대만이 붙잡아서 쭉쭉 잡아당기던 태웅의 주둥이에서 손을 뗐다.
“왜 만나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알 바냐?”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서태웅에게 잘못이 없다고 해도 따져보면 자신을 난감하게 만드는 건 ‘서태웅’이 맞았으니까. 그러니 서태웅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은 있었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대만이 태웅을 노려봤다. 그 시선에도 서태웅은 기가 죽은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이니까. 신경 꺼라.”
사생활. 그 한마디가 태웅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 묘한 어감의 연결은 아주 폐쇄적인 관계를 연상케 했다. 태웅의 얼굴에 더 못마땅함이 서렸다. 하지만 대만은 그보다 더한 이유나 해명할 생각이 없었다.
“난 마저 연습하러 간다.”
관계에 관해 해명할 이유도 없다. 애초에 윤대협과 자신은 저번에 고작 한 번 봤던 사이가 아닌가. 해명할 만큼의 거대한 사유가 잡을 만남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괜히 짜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자기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마음 어딘가가 결리는 부분은 무시한 채 대만이 마저 공을 튕겼다.
* * *
윤대협과의 만남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박경태에게 연락했을 때 마침 우연히 옆에 윤대협이 있었고. 직접 연결된 전화로 인해 최대한 근시일에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또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대만은 이제 슬슬 난감을 넘어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번 마음에 걸리던 서태웅의 태도도 그러하고, 지금 보이는 서태웅의 모습도 그러했다. 명백하게 짜증이 난 얼굴임에도 서태웅은 대만의 등 뒤에 꼭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건데.”
“그러게 만만군한테 징그럽게 왜 그러냐, 여우 자식아?”
대만의 얼굴에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오는 걸 보다 못한 백호가 으르렁거렸다. 그것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태웅이 뻔뻔하게 대만의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태웅의 이런 행동은 고작 하교하는 길에서 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그 말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학교 쉬는 시간, 점심시간, 심지어 연습할 때도. 이러다가 등굣길도 따라붙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지 서태웅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끌고 싶은 애송이처럼 대만의 근처를 알짱거릴 따름이었다.
“송태섭아. 백호 데리고 먼저 가라.”
“……예?”
이 상황에서 저건 또 무슨 말? 태섭이 눈썹을 치켜 올랐다. 저 선배가 왜 저래. 그러나 태섭은 이내 대만의 얼굴에 스민 짜증을 읽어냈다. 어, 그래. 이번은 서태웅이 확실히 이상한 게 맞았다. 타인이 자신이 보아도 서태웅은 과하게, 거추장스럽다 못해 일상에서 난감할 정도로 정대만을 따라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는 흔히 말하는 엄마 오리와 아기 오리 같은 단순한 따라다님이 아니었다. 대만의 주위를 보는 태웅의 시선에는 선연한 경계가 스며있다. 그건 같은 팀인 자신과 백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명백한 과보호. 태섭이 한숨을 삼켰다. 그래…….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낫다. 자기 객관화가 확실한 태섭이 자신보다 높게 자리한 백호의 뒷목을 붙잡더니 질질 걸음을 옮긴다.
“왜!!”
“조용히 하고 가자. 선배는 애 적당히 잡고요.”
어차피 후배를 주먹으로 두들겨 팰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피곤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치수 선배와 준호 선배가 빠진다고? 그러면 이 망나니 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거지? 다음 대 주장이 누가 됐든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멀어지는 걸음에 의해 골목에 남은 건 태웅과 대만뿐이었다. 대만이 옛적 막 나갔을 때처럼 짝다리를 짚었다. 그 시절 짬밥이 남은 듯이 퍽 불량해 보이는 모양새다. 태웅은 여전히 그런 대만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문제냐?”
“……뭐가요.”
“너 말이다, 너. 요즘 뭐가 문제냐고.”
못마땅한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난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릴 만큼 노골적인 짜증이. 그런 대만의 태도 앞에서도 태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이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저 시선이 대만은 거슬렸다. 이상할 정도로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저 주둥이가 가벼워 이런 말 저런 말을 가볍게 흘리고 다니는 놈이었으면 좋을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는 이유도 쉽게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바람과 다르다. 대만은 저, 저, 저. 필요한 말만 하는 주둥이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너. 왜 자꾸 따라다니냐고.”
“……윤대협 만나지 마요, 선배.”
내뱉는 게 무슨 구린 연애소설에서나 들을 법한 대사다. 뚱하게 하는 답에 대만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 자기가 뭔데? 머릿속에는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아니 다시 말하는데.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냐고.”
태웅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대답이라고 내놓자, 대만의 말이 날카로워진다. 대만은 이쯤에서 자신이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후배에게 보이는 건, 고질병처럼 이어지던 자신의 아주 나쁜 버릇이었다. 한 번 크게 너울진 생각은 끊임없이 생각을 뒤흔들고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초조함과 불안은 일전, 농구를 그만뒀을 때 대만이 허우적거리던 감정이었다.
마치, 그때, 무언가를 직감한 것처럼.
그리고 대만의 감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그야 선배는 제 짝이잖아요.”
“……뭐?”
“선배한테 있잖아요. 제 이름.”
이게 무슨 소리지?
기실 태웅은 방금의 말로 대만에게 사건의 모든 실마리를 뭉텅이로 쥐여준 셈이었다. 가닥가닥 나뉘지 않은 실마리는 온통 뭉치고 뭉쳐 엉망으로 매듭져 있었다. 경황이 없는 일 앞에서 대만은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한 거지?
그러면. 나쁘지 않은 머리가 순식간에 굴러갔다. 코트의 위에서 머리를 굴리던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쏟아지는 조명 아래에서 냉정해지던 머리와 달리, 불안으로 심장이 뛰었다. 서태웅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붉은색의 보호대 위, 진득하게 스치던 그 손길을.
“너……. 설마 다 알고 있었냐?”
그런데 어떻게 안 거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그는 이름이 새겨진 후, 무릎을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낸 적이 없었다. 처음 락커룸에서의 일 이후 컨디션 관리를 핑계로 일상에서도 보호대를 착용하고 벗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름이 적힌 무릎은 누구에게도 노출된 일이 없다. 소름이 끼쳤다.
태웅이 고개를 기울인다. 그 모습을 대만이 가만히 응시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만은 자신에게 새겨진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짝이라고? 짝? 대체 그 불합리한 단어의 의미는 뭐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자연적 현상의 앞에서 논리적인 생각은 필요가 없는 건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대만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무릎에 새겨진 이름, 서태웅이 말하는 ‘짝’, 그리고 서태웅 그 자체가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했다. 태웅이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굳어버린 대만의 뺨에 태웅의 손이 닿는다.
“그러니까 만나지 마요.”
느릿한 손길, 자신에게 말을 읊조리는 음성은 서태웅의 것이 맞았다. 지워지지 않는 섬찟한 감각에 대만이 손끝을 굳혔다. 굳어버린 얼굴에 명백한 경계가 스몄다. 낯설다. 서태웅이 맞았지만, 낯설었다. 대만이 몸을 뒤로 물린다. 입술을 다물었다. 선연하고 날카롭게 어린 경계가 태웅에게 닿는다.
“너. 뭐냐?”
지금 대만에게 펼쳐진 일련의 상황은 이성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떤 논리적인 잣대를 가져다 대어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대만이 몸을 뒤로 물리자 대만에게 닿았던 손이 어색하게 떨어진다. 서태웅은 지금 대만의 반응에 매우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선배 그게….”
“됐고. 뭐냐니까.”
그토록 경계 어린 시선은 태웅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태웅이 움츠렸던 손을 뻗었다. 하지만 대만의 얼굴에 선연하게 띄워져 있는 경계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저는….”
“야. 서태웅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당분간은 아는 척하지 말자.”
제대로 되지 않은 설명, 갑작스럽게 들이밀어진 말. 그간 자신이 받아왔던 당황과 스트레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서태웅. 지금, 미쳐버릴 듯이 치미는 뭔지 모를 불안. 그 모든 게 대만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머리 위의 가로등이 깜박거린다. 대만이 태웅을 내버려 두고 골목을 나섰다. 환하게 켜진 가로등은 꺼지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거리에 내려앉았다.
* * *
윤대협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앉은 채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그 밤으로부터 며칠이 지났어도 여전히 대만은 납득할 수 없었다. 뭐지? 서태웅 녀석이 어째서 그걸 알고 있는 거지? 게다가 그 말은 또 뭔데?
시발, 윤대협이 아니라 무당을 찾아갔어야 했나? 잘 쓰지도 않던 비속어와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서태웅이 말한 것들을 이리저리 꿰맞춰도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일 앞에서 정답이라는 결과는 절대로 도드라지지 않았다. 팔짱을 꼈다. 이미 빠르게 탈탈 떨고 있던 다리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어라, 먼저 와있었네요?”
“네가 지각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 거냐?”
그런 상황에서 윤대협과의 만남은 성사되었다.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서태웅의 태도와 함께 날카롭게 나갔던 자신의 말까지. 당황스러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자신은 어른스럽게 그에게 더 상세한 앞뒤 사정을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그간 이상하게 쌓이고 쌓였던 심증은 서태웅의 이상한 말에 확신으로 변해 직접적인 증거가 되어버렸고, 터졌다. 찝찝하다. 서태웅이 자신에게 보였던 모습,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과민한 자신의 태도까지.
“그건 좀 봐주세요. 어쩔 수 없었다고요.”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그런데 정대만 선배. 확실히 무슨 일 있었죠. 왜 이렇게 예민하지?”
능청스러운 놈. 예전에 봤을 때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확실히 격양된 신경은 저렇게 능청스러운 분위기의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풀리고 있었다. 소파에 몸을 늘어트린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는데 말이다.”
“말하세요.”
윤대협이 태연하게 답하면서 주문해 두었던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저었다. 서태웅과 너무 다른 모습이기 때문일까. 느릿한 손길과 함께 컵에 집중된 윤대협의 시선에 대만은 왜인지 모를 안심을 느꼈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열었다.
“너. ‘이름’이란 거 들어 봤냐?”
“흠. 이름이요?”
눈치가 빠른 녀석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다. 잔으로 향했던 시선이 대만에게 물끄러미 닿았다. 집요한 눈이다. 방금의 평가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시선의 위에 서태웅이 잠시 겹쳐 보였다.
집요해 보이던 대협의 시선은 잠시 뒤 사라졌다. 매우 당연하게 시선이 레모네이드로 돌아간다. 맞다. 서태웅의 경우가 이상한 것일 터였다. 대만이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요. 그래서. 말하면 대가는 뭘 주려고요?”
개인적으로 마주한 윤대협은 ‘나이브하다’라는 그간의 평가와 달리 계산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빨대가 컵에 담긴 레모네이드를 휘적일 때마다 노란 알갱이가 터지면서 부스러졌다. 그놈의 이름이 뭐길래 이렇게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지. 대만이 한숨을 삼켰다.
“뭐든.”
“어라, 선배.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또 묘한 말이다. 대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놈이나 저놈이나 뭐 하잔 건지. 대만이 안 알려줄 거라면 됐다며,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에이 왜 그래요. 별거 없긴 한데, 들은 건 있어요. 별것도 아니니까 그냥 말해줄게요.”
빨대가 불투명해진 레모네이드를 빨아들인다. 시큼하고 단 음료가 대협의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 실제로 대협은 지금의 상황이 아주 흥미로웠다. 그 ‘이름’이라는 걸 묻는 게 이, 북산의 슈팅가드라는 점에서. 대협이 방긋 웃었다. 재밌는 게 눈앞에 있고, 대만이 제시한 ‘뭐든’이라는 조건 또한 마음에 들었기에 대협은 그와의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있었어요. 자기한테 제 ‘이름’이 새겨졌다고 우겨대던 팬이요.”
물론, 일반적인 팬은 아니었고. 사생활까지 따라다니던 악성 팬 중 하나다. 그러니 팬이 하는 말이 자신과 엮이기 위한 ‘수작질’이라는 것임을 대협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운명. 그건 이어질 수 없는 사람들을 아주 낭만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니 대협 또한 처음 팬의 말을 들을 때는 그저 혼자 써 내린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늘어놓던 말은 아주 잘 쌓여있는 서사의 한 조각처럼 들렸다. 혼자서는 절대로 완성할 수 없는 방대한 서사. 왜인지 모를 탄탄한 설득력. 비단 거짓으로만 취급할 수 없는 말이라 판단했다.
“조금 판타지스러운 말인데. 종종 그런 핏줄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름’과 ‘짝’이라는 강제적인 관계가 있는 집안 말이에요.”
결국 그 팬의 말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뭐, 만약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은 그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운명? 그 단순한 두 음절의 단어는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이기 짝이 없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족쇄가 될 뿐이었다. 뭔가에 얽매여 있을 법한 성정이 아닌 윤대협에게 ‘운명’이라는 것은 명백하게 후자의 의미였다.
물론 아무리 운명이라는 것을 걷어내고 걷어낸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이라는 건 존재했다.
왜 종종 그런 것들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문득 묵직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경우. 그 거대한 너울의 앞에 무력해지는 경우가. 그것 역시 알 바가 아니긴 했다. 대협이 호롭, 빨대로 레모네이드나 빨았다.
“핏줄? 집안이라니?”
“말 그대로 영화에서 나올 법한 얘기 있잖아요. 가계도를 타고 계승되는 저주 같은 거? 그것의 낭만화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제 눈에는 낭만이고 운명이고 전부 저주와 다를 바 없지만요. 윤대협이 덧붙이는 말이 대만에게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손에 땀이 차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위에는 제 일이 아니라며 ‘이름’에 관해 수소문했지만, 자신은 실제로 그 당사자였다. 그러니까 새겨진 운명의 당사자 말이다. 서태웅. 석자가 새겨진 무릎이 욱씬거리는 기분이었다.
“왜요? 선배. ‘이름’ 생겼어요?”
“……아니. 내 일은 아니고. 친한 사촌 동생이.”
더듬거리는 말은 어색했다. 대협이 웃었다. 정대만은 무언가를 숨기는 게 미숙해 보였다. 그런 미숙함의 사이에서 알아차렸다.
‘이름’. 그건 명백하게 정대만, 본인의 이야기였다.
코트 위에서 그렇게 매섭게 보이던 그의 코트 바깥의 모습이 어떤지 알 것만 같았다. 대협은 웃고 싶은 것을 참았다. 명확하게 구분된 정대만의 모습은 진득한 흥미를 끌었다. 자유로워 악취미라고 불리는 윤대협의 흥미를 말이다.
“원한다면 해결 방법. 같이 찾아줄 수 있어요.”
“어…. 정말?”
보통 운명은 월하노인에 의해 붉은 실로 매어진다고 하니.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원래 이와 같은 미신적인 걸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것과 관련하여 수소문할 사람은 꽤 있었다. 대협이 장난스럽게 검지와 중지를 가위처럼 잘칵거렸다.
“운명이라는 게 진짜라면 그걸 끊어놓을 방법도 있지 않겠어요?”
정대만이 윤대협의 흥미를 끌었다. 대협의 머릿속에 분해하는 서태웅의 얼굴이 스쳤다. 게다가 이건 반쯤 단순한 흥미이기도 하고.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는 대신, 이 정도의 장난은 괜찮잖아?
“그러면 다음 주 주말에도 한 번 볼까요?”
해결의 큰 조각은 자신에게 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대만이 시간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쨌든, 대만은 이 지긋지긋한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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