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와 비산
포스트아포칼립스AU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덩굴, 덩굴, 덩굴뿐이다. 연둣빛 잎사귀와 짙은 올리브색의 줄기가 너무도 탐스럽지만, 혹여라도 그 색에 혹해 손을 대었다간 그대로 몸이 녹아 사라지는 아름다운 함정. 물론 올리브가 무슨 색인지 류건우는 알지 못했지만, 공동체의 어른 중 하나가 그리 말했으니 그건 그 색이 맞을 거다.
그 식물이 언제 나타났는지 이제 와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애초에 류건우는 그 식물이 없는 세상에 살았던 적이 없었다. 그저 태어나보니 그곳은 이미 아름다운 덩굴로 뒤덮여 멸망해 가는 세계였다. 푸르게 뒤덮인 폐허와 폐허 사이 간신히 살아남은 몇 없는 맨땅에 기생해 간신히 죽음을 미루는 날들. 류건우는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고, 그마저도 열여섯 살 되던 해에는 살던 공동체가 완전히 초토화되며 홀로 떠돌아야만 했다.
공동체를 잃은 류건우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도, 부족한 물자도, 열악한 환경도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적은 사람이었다. 내가 아닌 타인, 우리가 아닌 남들. 저를 받아주나, 했던 공동체에서 요구한 것은 독이 가득한 식물이 복잡하게 뒤엉킨 곳을 탐색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이를 뒤적여 간신히 확보한 물자들은 고맙다는 말 하나 없이 빼앗기기만 했고, 몇 달을 그리 수탈당하던 류건우가 딱 한 번 발악하자 그 분풀이로 온몸을 두들겨 맞았다. 분하고 억울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류건우는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류건우는 상처만 잔뜩 끌어안고 그다음 날 동이 채 트기도 전 그곳을 떠났다. 어쨌든 살아야 했으니까. 불타는 마을, 그곳에서 아직 어리다던 자신만을 겨우 내보냈던 부모님이, 어른들이 그렇게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어쨌든, 류건우는 공동체가 사라진 지 꼬박 6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성공했다. 일신의 힘도 경험도 풍부하고, 침입자를 막을 수 있도록 덩굴로 그럴싸한 트랩을 만들 수 있었으며, 한참을 떠돌며 애써 모은 종자로 밭을 일궈 나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삶을 꾸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집으로 삼은, 내부 장식이 다 뜯어져 벽체와 유리만이 남겨진 그 폐허에서 류건우만이 살아 숨 쉬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동쪽에서는 생존에 하등 쓸모없을 색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류건우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면 류건우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익숙하게 지우며 밭으로 나가곤 했다.
그렇게 평생 혼자 살아갈 줄로만 알았었다. 아주 오랜만에 덩굴 트랩을 넘어 바깥으로 나간 류건우의 눈에 웬 어린애가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움찔거리기라도 하면 덩굴에 닿을 것 같은 위치에 쓰러진, 덩치만 컸지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것이 분명한 앳된 얼굴의 소년. 등에는 빈 통이 매여 있었고, 한 손에는 줄이 끊어진 무언가가 꽉 쥐인 채였다. 류건우는 깜짝 놀라 소년에게 다가갔다. 덩굴의 반대편으로 황급히 소년을 끌어낸 뒤, 코 아래를 짚어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미약한 바람이 느껴지자 류건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온기가 느껴졌는지 곧 소년이 눈을 떴다.
“여긴...”
“정신이 드냐.”
“그, 네. 감사합니다. ... 어.”
제 눈앞에 있는 덩굴에 당황하기라도 한 걸까, 소년은 흠칫거리며 류건우가 있는 쪽으로 물러났다. 저를 돌아보는 소년에게 대충 고개를 까닥인 류건우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류건우는 제 소매를 얄팍하게 잡아당기는 힘을 느꼈다.
“뭐냐.”
소년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류건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이 활을 고칠 방법이... 있을까요.”
“활보다는 날붙이가 더 쓸만할 텐데.”
“그것도 있지만 이건 받은 거라서, 고치고 싶어요.”
류건우는 소년의 말을 가늠하듯 시선을 움직였다. 이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근처에 있는 공동체는 두 개, 하나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지만 하나는 외부인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류건우는 애초에 공동체에 속하지 않기로 했었다. 이 경우 결말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소년이 이곳에 나동그라진 채 있던 이유는 아마도, 저 활 때문에. 류건우는 이곳에 처음 도착해 정찰하던 중 흘긋 보았던 앳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 눈앞에 있는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앳된 얼굴 아래로 깔린 것은 명확한 좌절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있다. 류건우는 그 얼굴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이건 작은 충동에서 비롯된 제안이었다.
“네가 싫지 않으면 따라와라. 활 관리하는 법은 알려줄 수 있으니까.”
“...! 감사합니다.”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좌절이 일순간 깨끗이 걷히며 작은 기쁨이 피어오른다. 류건우는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답답한 마음은 늘 그랬듯 무시하고는 소년을 데리고 조용히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주위의 미행이나 정찰이 없는지도 꼼꼼히 확인했다. 소년은 류건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뒤를 쫓고 있었다. 류건우는 말없이 손을 뻗어 소년에게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곧 작은 온기가 손을 잡았다. 트랩을 피해 얼마나 걸었을까, 작게 일군 밭과 수원, 회색의 건물이 보였다.
“일단은 여기서 며칠 있어라. 어차피 그 활 고치기 전까지는 나가봐야 한 입 거리밖에 안 되니까.”
“네...”
갑작스레 주어진 호의에 당황했는지, 소년은 이제껏 쫄래쫄래 잘 따라왔으면서도 떨리는 눈으로 류건우를 보았다. 아까는 너무 기뻐서 의심을 잊기라도 했던 건가, 하기야 의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긴 했다. 이놈도 아주 맹탕으로 살아온 건 아니구나 싶었던 류건우는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는 밝았고, 적어도 어두워지기 전에는 저를 따라 들어오겠거니, 싶었던 생각도 있었다. 그 생각이 오산이었음은 곧 밝혀졌다.
“...”
“...”
“너 왜 안 들어와.”
한참이 지났는데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 소년이 신경 쓰여 밖에 나가자, 소년은 제 활을 등에 맨 통에 끼워놓고는 조심조심 밭에 앉아 돌을 고르고 있었다. 그걸 본 류건우가 기겁하고 소년을 들어 올리자, 소년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다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 재빨리 소년을 부축한 류건우가 타박을 던지자, 소년은 한참 말을 고르고는 조심스레 말했다.
“제가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내가 너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러냐. 아니면 네가 날 죽이려고?”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류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얼굴은 앳되지만 몸은 제법 다부지다. 필연적으로 힘쓸 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다부진 몸은 훌륭한 생존 조건이다. 그런데도 쫓겨났다면 이유는 단순하다. 이런 세상에서도 염치란 걸 알아서 쫓겨난 거다. 그게 아니면 무언가의 다툼에서 패배했거나. 하지만 사실 둘 중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류건우는 눈앞의 소년에게서 예측한 배신에 상처 입은 과거의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너 안 죽여. 너도 나 못 죽이고. 그러니까 그냥 들어와.”
“...”
추우니까 들어오라는 말은 망설임 끝에 집어넣었다. 저 나이 먹고 공동체에서 쫓겨난 놈이 그걸 믿으면 그거야말로 등신이었다. 믿을 것 없는 남의 말을 함부로 믿는다는 건 밖에 남든, 공동체로 다시 들어가든 살아남을 수 없을 멍청한 놈이라는 뜻이니까.
“빨리.”
소년은 그제야 후다닥 류건우를 따라 들어왔다. 아직 저린 다리가 풀리지 않았는지 비틀거리는 소년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는 소년이 자리에 앉는 걸 확인하고서야 저녁거리를 담은 그릇을 내밀었다. 따끈하게 끓인 묽은 스튜였다. 소년의 것을 한 입 뺏어먹자 소년은 그제야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류건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자신의 몫을 조금 떠먹었다. 평소엔 먹을 만했던 그 스튜는 하필 오늘따라 더럽게 맛없었다.
소년의 이름과 나이를 알게 된 건 류건우의 집에 객식구가 들고서 어언 2주쯤 흐르고 난 후였다. 소년의 이름은 류청우였고, 나이는 열여덟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분명 저 어린놈이 앓아눕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류건우는 생각했다. 깨끗한 헝겊에 찬물을 적셔 틈틈이 옷 바깥으로 드러나는 피부를 마사지하고, 최대한 먹기 쉬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류건우에게도 아주 오랜만이었다. 열에 들떠 혼미한 얼굴로도 기어이 일어나 뭔가 하려는 류청우를 힘으로 애써 눌러놓은 채 당장 급한 보수만 하고 들어온 류건우는 결국 열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류청우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거 암만 봐도 마음 편해지니까 그제야 앓아눕는 모양인데.”
이 또한 익숙했다. 이곳을 제대로 구축했다고 판단한 직후 류건우 역시 호되게 앓아누운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어린 녀석이 자신 앞에서 마음 놓고 앓는다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벌써 이렇게 마음을 놓은 것을 질책해야 하는지. 복잡한 속마음에 한숨만 푹푹 내쉬던 류건우는 앓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식혀둔 물수건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해열에 좋은 약초는 지난번에 다 써서 채워둬야 했다. 그렇다고 아픈 애를 홀로 둘 수는 없으니 류청우가 본래 건강한 놈이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류건우는 그렇게, 류청우가 앓던 일주일 내내 류청우의 곁을 지켰다.
“너 활도 다 고쳤으면서 왜 계속 여기 있냐.”
“형 외로울까봐요, 하하.”
“기어오르는 거 봐라, 이 새끼가.”
제게 장난을 걸어오는 류청우를 응징할 겸 가볍게 헤드록을 걸면 류청우는 그저 좋다며 하하 웃기만 한다. 류건우는 그런 류청우를 가끔 말없이 오랫동안 보고는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이 근처 분위기가 살벌해서인지 주변 지역에서의 정찰이 늘어난 탓에, 류건우는 주변 지역을 탐색할 때 반드시 홀로 나섰다. 혹여나 류청우가 휘말려서는 안 되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가끔은 트랩 근처에까지 타인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류건우는 선득해지는 가슴 한구석을 안고 몰래 흔적을 없애고는 했다. 류청우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거였다면 류청우가 류건우의 슬하로 들어온 4년 전에 이미 이곳은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이 발각된다면 그 이유는 하나다. 4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공존 상태를 유지하던 두 공동체 사이에 전쟁이 터지는 것. 그 전에 어떻게든 류청우를 독립시키려고는 했지만, 그런 기색을 내비칠 때마다 류청우는 미묘하게 웃으며 말을 돌려버리곤 했다.
“슬슬 독립해야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그 푸른 눈에 동경 대신 다른 것이 깃들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누군가는 비웃겠지. 하지만 긴 방랑으로 타인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에 익숙해진 류건우에게 그 정도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류건우가 류청우의 이름을 부르면, 처음엔 놀란 듯싶다가도 이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 같은 것이 특히. 그런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
“언제까지 여기 고이려고 그러냐. 지금 너 정도면 어딜 가든 못 잡아서 난리일 텐데.”
“그래도 제가 있어서 좋지 않아요?”
“까분다.”
그리고 가장 짜증 나는 건,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는 저였다. 류건우는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손으로 덮어 숨기며 툭 던지듯 말했다.
“나 금방 올 테니까 잠깐 들어가 쉬고 있어라. 오늘 날 덥겠더라.”
“네, 형. 메뉴는 뭐로 해둘까요?”
“요리라곤 배춧국밖에 못 하면서 뭘 물어봐.”
“하하! 그래도요. 앞으로 잘 가르쳐줄 거잖아요.”
류건우는 피식 웃고는 네 멋대로 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트랩 밖으로 나서는 류건우의 뒤편에는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류청우만 남아 있었다. 류건우 역시 한결 부드러운 마음으로 몸을 움직여 트랩을 넘었다.
“...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그러나 트랩 밖으로 나서자마자 발견된 흔적은 류건우를 현실로 끌어내리기 충분했다. 이전에 발견된 것보다 명백하게 가까이에서 발견된 그을린 흔적. 보란 듯이 모양을 내어 늘어놓은 돌조각들. 이건 마치, 마음만 먹으면 이런 작은 집터 따위를 짓밟는 건 일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류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껏 일궈온 것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더군다나 집에는 류청우도 있었다.
“... 그래, 나 혼자가 아니지, 이젠.”
저야 어디에 떨어뜨려 놓든 살아남겠지만, 류청우는 아니었다. 내보내야 했다. 그 어린 애는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됐다. 류건우는 어째서인지, 10년 전 자신을 마을 밖으로 내쫓던 어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도 바쁘게 돌아가느라 뜨거워진 이마 위로 팔을 올린 류건우가 그대로 이를 악물었다. 이 이상의 정찰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망칠 준비였다.
“류청우, 너 뭐 챙길 것 있냐.”
“... 아뇨. 왜요?”
“내일 바로 나가.”
“네?”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류건우는 비축해 둔 식량을 집어 들어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다른 것을 챙기기 위해 뒤돌아섰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류건우는 류청우의 손아귀에 붙잡힌 제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사람들이에요?”
류건우의 눈이 커진다. 그것으로 충분히 답을 유추해 낸 류청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형, 저만 보내려고 했던 건 그것 때문이죠.”
“아니, 그건...”
“건우 형.”
류건우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불안한 정적 속에서, 화롯불만이 이따금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어두워진 바깥, 주홍빛이 안온한 폐허 안에서 오직 분위기만이 사늘했다. 반쯤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걱정하는 건, 형.”
“...”
“저는 형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 없어요.”
너와 내가 만난 건 네가 열여덟 살 때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쏘아붙이려던 류건우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그런 말을 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대신 류건우는 그대로 저보다 큰 류청우를 팔 안에 가두었다. 손에 닿은 등이 움찔거리는 것은 무시한 채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곧 뜨끈한 온기가 저를 감쌌다. 잠깐 이놈이 왜 이러나, 싶긴 했지만, 이따금 기온이 떨어지는 새벽에는 곧잘 이랬기 때문에 류건우는 금방 팔을 풀었다. 류청우가 제 얼굴을 자신의 눈앞에 들이대기 전까지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무엇 때문인지 류건우는 알지 못했다. 그 풍부한 경험 속에 이런 건 없었기에.
“같이 떠나요, 그럼.”
담담한 미소, 그 아래 숨은 단단한 눈빛. 류건우는 그제야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떠나는 것도, 류청우를 떠나보내는 것도, 적어도 류청우가 제 마음을 깨닫기 전에 모든 것을 끝냈어야 했다는 것을.
다음 날, 류건우는 눈을 떴다. 색유리 너머 불투명하게 이지러지는 햇빛과 아름답게 반짝이는 푸른 하늘 아래로 잎사귀가 파르르 흔들렸다. 오늘따라 유독 불안해 보이는 류청우를 애써 건물 안으로 들여보낸 류건우는 멀리서 들려오는 서걱이는 소리에 긴장했다. 저 소리는 덩굴의 잎사귀를 뗄 때나 나는 아주 거친 소리였다. 밖으로 나가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반격이고 뭐고 개죽음당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에 류건우는 이를 악문 채 무기를 점검했다. 무기라고 해 봤자 도피 생활을 했던 류건우가 예전에 쓰던 간단한 칼과 작은 방어구 정도였다. 믿을 건 트랩과 경험뿐, 류건우는 조용히 덩굴 뒤로 숨어들었다.
태양이 머리 위로 떠올라 그림자조차 없어지는 시각. 덩굴 표면에서 분비된 독을 칼날에 덧바르며 숨죽이고 있던 류건우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잎사귀가 머리 위로 던져진다. 황급히 칼을 휘두르려던 순간, 파공음이 귓가를 스쳤다.
“습격이다!”
습격은 네놈들이 했는데. 순간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곧 머리가 차가워졌다. 류건우는 머리 위를 스친 저 화살의 주인을 알았으니까.
“불을 질러!”
“그러면 저 밭까지 탈 텐데...!”
덩굴이 워낙 굵은 탓에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밭까지 알고 있다면 이미 다 털린 것이나 다름없다. 류건우는 트랩의 틈을 찾아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이것부터 어떻게 좀 해 봐!”
“억!”
또 화살이다.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나오지 말라는 명령은 어기지 못해서, 그런데 홀로 나선 류건우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아서 하나씩 날리는 것이리라. 부러진 활을 놓지 못해 쓰러졌던 소년은 어마어마한 실력의 궁수였음을 이제야 깨달은 류건우는 결국 또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그날 주워 온 것은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였다.
“말이 다르잖아, 조셉! 이놈은 검만 좀 쓰는 놈이라며, 왜 갑자기 활이 나오는데!”
“난들 아나! 이 새끼가 그새 배웠나 보지!”
조셉이란 이름에 움찔거리다가도 자신을 향한 거친 욕설에는 그러려니 한 류건우가 또다시 넘어오려는 손목을 베었다. 무시할 수 없는 출혈을 내주었으니 당장 전선에서는 빠질 것이다. 검을 피하려던 놈들은 고스란히 트랩에 걸려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겪고, 그렇다고 피하지 않으면 그대로 신체의 한 부위를 잃는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저 고집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하나 베어내면서도 내심 궁금해하던 류건우는 곧 답을 얻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
“저항이 너무 거세. 그냥 다 태우고 처음부터 하라고 해!”
“저 개새끼 하나 잡으려고 X발! 그냥 다 태워!”
저 덩굴은 불에 약하다. 얼마나 약하냐면, 작은 불씨 하나라도 덩굴 표면의 독에 닿으면 무섭게 증식할 정도로. 주위의 모든 것을 다 태우지 않으면 무엇으로도 끌 수가 없어서, 그 불타는 마을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야, 뒤로 물러나!”
독이 타며 피어오르는 유독한 연기가, 태워버리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작열하는 불길이. 류건우의 손끝에서 차가운 액체가 방울져 떨어진다.
“형!”
아닌데, 그 안에서 들렸던 소리는 이게 아닌데. 류건우는 퍼뜩 고개를 들어 저를 부른 사람을 찾았다. 이건 그를 돌봤던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다. 이건 그가 돌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건우 형, 정신 차려요!”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불꽃 옆에 류청우가 있었다. 류청우가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잘못 본 건 아닌지, 그런데 그게 알 반가. 류건우는 곧장 류청우의 멱살을 붙잡고 불길 반대쪽으로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을 받아낸 땅에 흙먼지가 잦아들고, 바들거리던 류건우의 손이 조금 진정되자 그제야 류청우가 류건우를 감싸 안았다.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진정해요, 형.”
류건우는 그제야 멱살을 풀었다. 제 가슴께에 자꾸 귀를 가져다 대는 류건우 때문에 괜히 심란해진 류청우가 조심스레 건물 안에 자리를 깔고 류건우를 뉘었다. 깊고 얕은 자상과 화상이 눈에 띄었다.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상처를 깨끗한 물로 씻고 약초를 가루 내 뿌린 헝겊으로 잘 여며준 류청우가 일어서려던 순간, 류건우가 몸을 일으켰다.
“형?”
“...”
류청우는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류건우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뜨겁게 터지는 숨결과 무언가를 웅얼거리는지 미약하게 전달되는 성대의 진동, 꽉 감았는데도 피부를 간지럽힐 정도로 떨리는 속눈썹이 류청우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류청우는 류건우의 등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아주 느릿한 손길로 다치지 않은 곳을 조심조심 토닥이자, 류건우는 그제야 진정이 되는 듯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다 많이 지쳤는지 제 품에 안겨 잠든 류건우를 몇 번이고 쓰다듬던 류청우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결국 류건우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어버렸다. 노을빛으로 물든 색유리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류청우가 참전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애초에 이 주위를 둘러싼 저 덩굴에 불이 붙으면 항전이고 뭐고 다 끝이라는 것을 류건우도 류청우도 적들도 모두 알았다. 그런 면에서 이건 차라리 방재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류건우가 피곤함에 찌들어 그리 중얼거리는 것에 류청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좀 그냥 들어가 있으라고 사정을 해대도 불안을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 류청우도 일이 돌아가는 꼴을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저를 멀리서 지원하는 류청우 덕분에 부상도 줄어든 것은 맞아서, 류건우는 제가 안 나가면 형이 안 다칠 수는 있냐는 류청우의 추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 그냥 지금이라도 짐 싸서 나가는 게 어떠냐.”
“하하.”
“웃지 마, 정든다.”
“이미 들었잖아요.”
“하.”
류건우는 어이가 없는 듯 입을 삐죽이고는 류청우를 향해 팔을 뻗었다. 팔 뻗은 모양새도 또 불안하기 짝이 없는지라 류청우는 황급히 류건우가 원하는 대로 그를 안아 올렸다.
“뭐야, 왜 이렇게 드는데.”
“다르게 안으면 싫어할 거니까요.”
“하.”
그렇게 말하면서도 멋쩍게 웃는 류청우를 보고 류건우는 결국 표정을 풀었다. 말없이 이부자리를 가리키는 손끝에 류청우는 잠깐 소리 내 웃더니 조심스레 류건우를 자리에 내려주었다. 류건우가 옆자리를 손으로 때리자, 류청우는 알았다는 듯 옆자리에 누웠다. 당연하게 몸을 구겨 제 품으로 파고드는 류청우의 몸 위로 한 팔을 얹고, 한 팔을 베개 대신 내어준 류건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동안 전투는 소강상태였다. 트랩을 이루는 줄기가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까지는 방어에 성공한 것 같았다. 류건우는 조용하기 짝이 없는 반대편을 잠시 노려보았다. 이미 원한이 적립된 이상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류건우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류건우는 조용한 반대편을 잠시 놔둔 채 류청우의 곁으로 돌아갔다. 해둘 말이 있었다.
“류청우. 만약 이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저 주머니랑 네 활만 챙겨서 뒤쪽으로 나가. 덩굴 사이로 길이 나 있을 거야. 그대로 빠져나가면 오아시스 쪽으로 나갈 거다. 알겠냐.”
화살을 정비하던 류청우의 손이 멈칫하는 것을 보기는 한 건지, 류건우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건 종자 몇 가지랑 보존식량, 물통이다. 보존식량 최대한 많이 넣으려고 하긴 했는데 얼마나 버틸지 가늠이 안 되네. 더 못 챙겨놔서 미안하다. 길 입구는 네가 보면 알 거야.”
“형.”
“무거워도 참아. 물통 저거 큰 것 같아도 생각보다 얼마 못 버텨. 안전한 수원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물 아끼고.”
“형은 같이 안 가요?”
“내가 왜 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류건우를 본 류청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정적을 유지하던 류청우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바깥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무리 한낮이라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밝은 빛에 류건우가 황급히 나가보려 몸을 뒤틀었다. 조금 더 빨리 명반응에 성공한 류청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재빠르게 팔을 뻗어 류건우의 눈을 가렸다. 저걸 류건우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불이에요.”
“...!”
“같이 나가요. 서둘러야 해요, 형.”
이전과 달리 팔 아래 갇힌 몸이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 그걸 알아챈 순간, 류청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류건우는 제 눈을 가리는 손을 부드럽게, 멈추지 않고 떼어냈다. 힘없이 떨어지려는 류청우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류건우가 창백하게 웃는다. 새하얗던 빛은 어느새 노을의 그것처럼 붉어졌다. 색유리,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미칠 것처럼 아름다운 무지갯빛 광채가 어른거린다. 그 빛을 그대로 받아 반짝이는 류건우는, 노을처럼 찰나에 사라질 것만 같아서. 류청우가 팔을 뻗었다. 어느새 기분 좋은 열기가 몸을 덮친다. 시간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미안하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류청우의 눈앞으로 류건우가 다가왔다. 입술에 닿은 버석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붉은빛을 받으면서도 푸르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새카만 머리카락이, 약간 서늘해서 닿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체온이, 옅은 연기 냄새가. 순식간에 덮쳐오는 감각의 파도가 아연했다. 류청우는 반사적으로 류건우의 뒷덜미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열기를 기꺼이 반기고, 기꺼이 상대를 침범한다. 등을 감싸오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그럼에도 눈은 감기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얼굴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다란 은사만을 남기고 떨어진 류건우가 조심스레 입술을 맞댔다 떼어낸다.
“건우 형,”
“너무 늦게 말해줘서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언뜻 그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뜨겁게 덮쳐오는 열기와 불로는 모자라다는 듯 어디선가 날아와 심장에 꽂히는 날붙이, 그를 추진력 삼아 강하게 등을 밀치는 힘이 류청우가 기억하는 류건우의 마지막이었다. 열기에 이지러지는 공기 사이로 화려한 빛이 휘어지듯 쏟아지다, 이윽고 류건우를 덮쳤다. 돌아가야 한다는 직감과 이대로 홀로 떠나는 것에 대한 극심한 거부감에 류청우가 돌아가려 하자,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듯 류청우의 앞으로 불길이 쏟아졌다. 류청우는 망연한 눈으로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터지며 비산하는 유리조각을 보았다. 거짓말처럼 류청우를 피해 가는 불은 도대체 누구의 안배인가. 눈물조차 말라붙어 뜨겁고 건조한 그곳에 남은 것은 저도 모르는 사이 등에 매인 커다란 주머니의 존재감도 느끼지 못한 채 굳어 서 있는 류청우, 류건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랑뿐이었다.
낙하落霞: 낮게 드리운 저녁노을.
비산飛散: 날아서 흩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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