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하
그리고 남겨진 것은
낭설. 그를 둘러싼 지독한 소문은 날이 갈수록 몸집을 부풀렸다.
시장 골목 어귀에서 소란이 일었다. 이어지던 험한 말들이 몸싸움으로 번지기 직전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누군가가 둘을 말리려 나섰다. 앳된 얼굴이 그가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이란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싸움을 말린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사과를 구한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꼴이었다. 인파를 뚫고나온 아이는 비틀대는 남자의 앞을 막아서고 연신 허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먼저 시비를 걸었던 남루한 행색의 남자는 풀린 눈으로 비틀대더니 대뜸 눈에 악을 품고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소년은 제 몸으로 그를 막아야만 했다. 소년의 야윈 팔다리는 남자의 힘을 버티지 못했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가판대 위를 나뒹굴었다. 알싸한 술냄새를 몸에 두른 남자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조차 기억하지 못 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대상에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가했다. 몇번의 저항과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내리꽃히는 폭력을 버티던 소년의 입에서 단발적으로 터져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가 겨우 두사람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게 했다. 그제서야 구경꾼들은 열을 내며 달려드는 '아버지'라 불린 남자를 잡아 끌어내리기 시작했고 아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에게 잡혀 아득바득 고함을 지르며 버둥대던 그는 성난 숨을 들이쉬다가 진이 빠졌는지 얌전해졌고, 자리에 서서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되뇌다가 침을 찍 뱉고는 성큼성큼 골목을 벗어났다. 아이는 가게 주인에게 또 다시 죄송하다며 몇 마디를 얹어가며 용서를 구한 뒤 터진 입술을 앙다물고 곧 그의 뒤를 쫓아갔다. 몇몇의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찼고 누군가는 참 딱한 신세라며 한마디씩 입에 올렸다.
그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란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은 거무잡잡한 피부에 술독이 올라 울긋불긋한데다 표독스러움이 덕지덕지 붙은 제 아비의 면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피부는 태양을 본 적이 없다는 듯 마냥 창백했고, 흑색의 머리와 검정의 교복 덕에 마치 색이 사라진 모노톤의 무성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말수가 적었는데, 눈을 찌를 정도로 긴 앞머리를 하고 푹 숙인 고개는 시선이 항상 아래로 향해있어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다.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그의 눈을 제대로 본 사람도 없다는 것이며 그 아래에 가려진 눈이 남자와 닮았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소년은 학교에서 어떤 존재였는가. 창백한 피부와 덥수룩한 검정 머리. 그는 움직임이 적었고, 언제나 목 끝까지 잠겨있는 셔츠 단추와 미약한 숨소리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에겐 붉음과 재생의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의 전유물이어서, 소년은 괴담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여름이 되어도 피부를 감추는 긴 옷이라던가, 언뜻 보이는 줄어들지 않는 상처와 반창고의 개수는 상상력이 더해지기 좋은 소재임이 분명해서, 그는 언제나 어딘가에서 약간의 존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야기는 시간과 함께 더욱 선명해졌다. 그는 소문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지를 남겨 놓으면 그것을 몇 배로 부풀리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다. 어느 곳에서나 그는 동정과 기피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소년을 둘러싼 거대한 부피의 소문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쟤 때문에 쟤네 엄마가 죽었대. 쟤네 아빠는 미쳐서 반병신이 됐대. 쟤도 사실은 벙어리래. 소문은 사실을 기반으로 함으로 어느 정도는 맞는 말들이었을 지 모른다. 다만 소년의 모친은 지병으로 돌아갔으며, 부친의 파멸에 소년은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지도 않았다. 큰 문제없이 단란한 가정이었고 평온한 삶에 안주하고 있었을 터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뀌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부친은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것은 좀먹듯 평화를 앗아갔다. 소년의 부모는 서로 얼굴을 붉히고 언쟁을 높히는 일이 잦아졌고, 문 뒤에 숨어 어미의 눈물을 보는 일이 늘어났다. 고함이 오가고, 소년은 그런 제 어머니 곁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유를 몰랐다. 애초에 없는 이유를 찾으려 해봤자 답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기를 몇 년,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모친의 지병이 심해졌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늘었다.
소년은,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주은하는, 무언가 눈치채기도 전에 이렇게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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