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돌

[천마돌/화진이비] 사이비는 무림에 환생 했다

졸립 by 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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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마는 아이돌이 되었다(약칭, 천마돌)의 2차연성

  • 스포일러성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위화진X사이비

  • 사이비가 무림(원작에 나오는 무림(X)/완전히 또 다른 평행의 무림(O))세계에 환생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사이비는 자신의 죽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명을 부르던 남자를, 주저 없이 자신의 목을 베었던 신을,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따랐는지 모를 아이도 기억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은 이제 무의미했다. 자신은 다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났으니까. 예상치 못한 인생의 재시작에 막막함이 밀려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오래 살아왔어도 무슨 소용인가. 결국 다시 0살부터 시작하게 되었으니. 막막하게 펼쳐질 긴 삶이 사이비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될 텐데 말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생에도 유복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난 듯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 생에는 위로 형이 하나 있다는 사실 정도랄까. 물론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자신이 태어난 지 한 살이 되던 날에도, 가문이 멸망하던 날에도 형이라는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집은 불길에 휘말려 타들어갔고, 사방에서 울부짖는 비명과 익숙한 피비린내가 주변을 뒤덮었다. 그 혼란 속에서 사이비는 이번 생도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비는 조용히,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온 세상이 불타는 소리와 함께 삶이 끝나기를 고요하게 받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검은 녹빛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장발의 사내가 연기 가득한 방에 들어와 자신을 들어 올리기 전까지 말이다. 동그랗게 뜬 눈을 매운 연기가 자극하며 간지렵혔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작은 손을 천천히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의 손을 잡았다. 작고 여린 손길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순간의 떨림을 감지한 것은 오직 사이비와 그 남자뿐이었다. 남자의 반응에 사이비는 마치 발견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손만한 작은 얼굴에 맑게 피어오른 웃음을 보고는, 그만 시선을 뗼 수 없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이 아이가 과연 현실을 알기나 할까.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며 방긋 웃어 보이는 아이를 보자, 남자는 홀린 듯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 품에 안기자, 아이는 들려오는 비명 소리 속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이 세상과 동떨어진 소리처럼, 맑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비명과 불길 사이에서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 좋으냐. 네 어미와 아비를 죽인 자의 품에 안긴 것을."

남자는 주변의 열기 때문인지, 빨갛게 익은 아이의 얼굴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 좋으면, 나와 함께 하겠느냐."

남자는 아이가 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신 아이의 의사를 물었다. 남자의 물음에 착각일까 싶을 정도로, 아이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진 것 같았다. 자신을 잡은 작은 손에도 약간의 힘이 들어가자, 남자는 이 아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남자도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왜 이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지 알 수 없었으나,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을 보며 웃는 아이의 목을 칠 만큼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순간의 변덕지도 모르지만, 남자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사이비는 문득 환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신도 나를 가엽게 여기셨구나 생각할 정도로 몇 년간 이어져 온 행복한 나날 속에서 사이비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인들은 “광놈”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사이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지내며, 사이비는 그가 자신이 알던 이와 똑같은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정하고, 착한… 자신이 그토로 바라고, 보고싶던 자신의 신이었다.

그 신은 전생과는 달리, 사이비를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자신의 신은 사이비가 ‘천마‘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걸 싫어했다. 그러나 사이비가 고집 센 아이마냥 “천마님. 천마님.” 그렇게 부르면 남자는 못 이기겠다는 듯 혀를 차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천마의 그 손길이 사이비는 좋아 말없이 그 따스함에 기대었다.

그 손이 자신의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이비는 그저 무심하게 넘겼다. 전생의 자신또한 직접 부모를 죽였던 사람이었으니 전혀 개의치 않은 일이었다. 그 사실을 모른채 천마가 자신의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사이비를 불쌍하게 여겨 손가락질하거나, 비웃기도 했지만, 사이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마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거라.”

드르륵, 문이 열리고 들어가면 피곤한 얼굴을 숨기고선 자신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는 그 사람이 좋았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자가 건네주는 당과는 기꺼이 받아 먹었다. 흘린 부스러기가 볼에 묻을 때마다 부드럽게 그 볼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아 일부러 묻혀 먹기도 했다. 이 다정함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랬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그의 신을 악신이라 부르더라도, 사이비에게는 다정하기 그지없는 신이었다. 자신의 이유 모를 숭배에 남자는 다소 거북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또한 사이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의 탈을 쓰는 일은 사이비에게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무림에 태어난 지도 어느덧 19년이 지났다. 사이비의 머리는 허리까지 자라, 매일 아침 그것을 묶는 일이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몸에 딱 맞게 입었던 정장 대신, 이제는 하늘거리는 비단 옷과 넓은 소매가 익숙해졌다. 그러나 사이비는 점점 따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마대전으로 인해 바깥 세상은 비명과 혼란으로 가득했지만, 마교 안에서 천마의 관심을 독차지한 사이비는 그 난세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천마는 사이비를 안전한 곳에 남겨두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고, 사이비는 그저 천마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그의 하루였다.

천마는 그 시간 동안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허락했지만, 사이비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없었다. 무공을 익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난 뒤부터는 그조차도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근처 마을에 내려가 이것저것 사들이는 일도 처음에는 새롭고 흥미로웠지만, 곧 이전의 평범한 삶과 다를 바 없음을 느끼며 금방 싫증이 났다. 결국, 사이비의 유일한 낙은 연못 근처를 서성이며 천마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물 위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흩날리는 바람을 느끼며, 사이비는 그 기다림 속에서 점차 깊어지는 외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천마님은 언제 돌아오실려나요….”

연못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사이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마가 자신을 데리고 다닐 법도 한데, 여전히 자신이 어리다고 여긴 것인지, 천마는 그의 동행을 거부했다. 사이비는 그럴 때마다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애초에 무공을 배운 이유도 천마를 돕기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보호받기만 하는 처지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마교도가 되어 천마와 함께 싸웠다면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마가 돌아와 옷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며, 사이비는 어느새 기쁜 마음으로 “천마님”하고 달려가곤 했다. 천마는 잠시 멈칫거리다가도 옷이 잘 정돈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이비를 안아주었고, 그 순간 사이비의 마음은 다시금 녹아내리곤 했다. 천마의 따스한 품속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모든 불만을 순식간에 사그라지게 만들 만큼 포근하였다. 결국, 아무리 심통이 나더라도 천마의 품 안에서는 그저 작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곤란해하면서도 그 온기가 참 좋았다.

다 자란 지금에도 천마의 품에 안길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그 따뜻한 행복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사이비는 천마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로 결심하며 한 발 물러나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마 위화진을 기다리는 시간은 날이 갈수록 점점 길어졌고, 사이비는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연못가에서 물고기들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보내던 것도 이제는 점점 지루해졌다. 마침내 일어나볼까 하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근처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진 듯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이비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싸움을 일으킬 자들은 이제 없을 텐데… 누가 이런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네요.”

사이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경공을 펼치며 연못가를 벗어나 소란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이미 싸움은 끝난 듯, 한 사람을 둘러싸고 둥그렇게 모여 있는 마교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이비는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의 접근을 눈치챈 마교도들은 즉시 길을 내며 물러섰지만, 아직 사이비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한 사람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비는 조용히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저어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죠?"

사이비가 뒷짐을 진 채 생긋 웃으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마교도들의 소란스러움이 줄어들었다. 한 마교도가 말을 잇다말고 사이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사이비를 바라보았다. 사이비는 그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마교도는 당황한 듯 시선을 마주했다.

사이비는 마교도들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인물을 확인하고자 고개를 기웃거렸으나, 누군가가 팔을 들어올리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사이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시야를 가린 자를 확인하려 했다. 그는 자신을 가린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보려고 애썼다.

"뭐죠?"

"…볼 게 못 됩니다."

사이비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시야를 가린 마교도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은 없을 텐데요?"

사근한 목소리 속에는 현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 느껴졌고, 사이비의 뒤에 천마가 있다는 것을 아는 마교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찌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교도가 물러나자마자, 사이비의 시야에 들어온 얼굴에 그는 순간 표정을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이는 마교도들과 싸우느라 여기저기 다쳐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포박되어 있었지만, 그 얼굴은 사이비에게 너무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일검군…?"

사이비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온 이름은, 여기서 결코 마주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이의 이름이었다. 전생의 제일검보다 덩치도 키도 조금 더 컸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다친 흔적으로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수려하고 화려한 미모는 사이비가 잘 알고 있는 그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어째서 여기에…?’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이비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피에 젖어 있던 남자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칠 뻔했으나 사이비는 몸을 움츠리며 마교도들 사이로 빠르게 숨어버렸다. 자신이 왜 숨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 짧은 눈맞춤에서 가슴 한쪽이 아릿해진 사이비는 어딘가 불안감을 느끼며 도망치듯 입을 열었다.

"저자는 누구죠?"

"무림맹주…입니다."

"무림…맹주요?"

"세간에서는 제일검이라 부르고 있죠. 큼… 저런 실력을 가지고 제일검이라니, 웃기지 않습니까?"

"제일검은, 우리 천마님이시지."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킥킥."

"여기가 어딘지 알고 혼자 들이닥치다니, 미친 거 아닙니까?"

이미 제압된 적을 앞에 두고 마교도들은 비아냥거리며 그를 깔아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발로 차며 품위 없는 행동을 이어갔다. 사이비는 그들의 행동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표정에 급히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무림맹주… 제일검.’ 익숙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사이비는 혼란에 휩싸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이 세계는 무슨 세계란 말인가요….' 천마 위화진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큰 혼란스러움이 찾아와 그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어떻게 할 거죠?"

"그야… 죽여야죠? 마교에 쳐들어온 이상 죽은 목숨인 거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일이 한 두번도 아니고… 라는 말을 덧붙이고선 자신을 쳐다보는 마교도들의 시선에 사이비는 표정을 갈무리 하고선, 얼굴을 가렸던 부채를 탁 접고선 입을 열었다.

"천마님은 알고 계시나요?"

"예? 그건…"

"그럼, 지금 천마님의 명도 없이 그를 죽일 생각이었나요? 옥에 가두세요."

"네?"

"저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합니다. 천마님의 명이 오기 전까지 그를 옥에 가두세요. 죽여선 안 됩니다."

사이비의 단호한 명령에 마교도들 중 몇몇은 불온한 시선을 보냈지만, 사이비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회피하였다. 불편한 분위기속 서로 의논하는 듯하더니 결국 명령을 따르기로 했는지 그들은 그자리에서 제일검을 죽이지 않고, 옥쪽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마교도들에 의해 끌려가던 제일검의 눈동자가 순간 사이비를 향해 커졌다가 곧 감겼지만, 사이비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려 애쓰며, 그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에 돌아온 사이비는 방을 정리하던 이들을 모두 내보낸 뒤, 정갈히 묶었던 머리를 풀어내고선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알 수 없네요. 단순히 닮은 얼굴일까요… 아니면,"

천마님처럼, 그가 정말 자신이 아는 그 제일검일까요? 익숙한 얼굴을 둘이나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사이비는 혼란에 빠졌다. 이들 말고도 자신이 아는 얼굴들이 더 있을지, 제일검은 왜 혼자서 천마가 없는 틈을 타 마교에 쳐들어왔는지 궁금해졌다. 보통 그 정도 되는 직책이라면 다른 이와 함께 오거나, 천마의 눈앞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나? 왜 하필 주인 없는 집을 노린 것일까? 알 수 없는 상황에 사이비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볼을 가볍게 짝,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곧 천마님이 오시니, 천마님께 물어보면…"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나 그 생각을 방해하였다. '이걸 어찌 물어본단 말인가. 저자가 누구냐고? 그럼 천마님은 말하겠지. 무림맹주의 제일검이라고.' 하지만 사이비가 알고 싶은 것은 단순한 신분이 아니었다. 저자가 정말 자신이 아는 그 제일검이 맞는지, 그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걸 알아내려면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상황을 마주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사이비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한 감정은 전생에서도, 지금에서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워, 사이비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저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확인하지 못하는 걸까요."

사이비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비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처소 문을 이렇게 마음대로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바로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천마님뿐이었다. 순간, 아까 전까지의 혼란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고, 사이비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그토록 무겁게 느껴졌던 발걸음을 이제는 가벼이 옮기며 천마님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천마님!"

사이비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하지만 그가 천마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그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던 옷은 흐트러져 있었고, 짙은 혈향이 코를 찔렀다. 그제야 사이비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천마님? "

사이비는 자신이 달려오면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주던 천마가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제야 천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깨끗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던 모습은 사라지고, 피로 얼룩진 채 바라보는 무심한 눈길은 사이비에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보여줬던 행동들이 다시금 스쳐 지나가며, 사이비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어루만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그런 반응을 숨기려 애쓰며, 사이비는 생긋 웃어보이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사이비의 모습이 심기라도 거슬린 걸까, 천마는 피 묻은 손을 가볍게 털었다.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물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다시 무심한 눈으로 사이비를 응시했다. 사이비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천마는 핏물을 털어내던 손으로 그의 볼을 슥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예전과 똑같았기에, 안도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손길이 느닷없이 멈추자, 사이비의 마음속에서 미묘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천마의 눈빛에 숨겨진 무언가를 읽어내려 애쓰며, 사이비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때 마주한 천마의 표정에는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사이비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지만, 천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그의 머리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어릴 때와 변한게 없구나."

천마가 몸을 돌려 나가자, 사이비는 미처 그를 붙잡지 못하고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요…' 속을 알 수 없는 천마의 행동에 머리를 굴려보려 했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마가 다른 이와 함께 다시 처소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천마는 사이비의 앞에 한 사람을 내동댕이치듯 던졌다. 사이비가 그가 누구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천마는 손으로 사이비의 턱을 잡아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이자를 아느냐?"

"네?"

"이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볼 수도 없는 상태로 자신 아래에 움찔 거리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아냐 묻는 다면, 답을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요─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에 사고가 멈춘 듯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가까워진 거리에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뛰는 심장을 신정시키며, 침을 삼키 꼴깍 삼키고선 천마의 손에 잡힌 채로 작게 고개를 절레였다.

"제가 천마님 빼고,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마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천마님만 보고 살았다는 것을… 뒷 말은 끝내 내뱉지 못한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이비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천마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의 턱을 잡은 손으로 볼을 툭툭 쳤다. 그리고 턱을 아래로 내리게 하자, 사이비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사이비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그럴 텐데 말이지.”

천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사이비의 반응을 보곤 이어서 물었다.

“너는 어찌, 알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는 게냐.”

그의 발아래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림맹주, 제일검이었다. 끌려오면서 반항이라도 한 것인지, 이전보다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사이비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삼켰다. '도대체 왜… 천마님이 이자를 이곳에…' 자신이 옥에 가두라고 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자신의 앞에 데려온 적은 없었는데…. 사이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천마는 그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듯 자신의 품을 뒤적이다가 작은 종이 쪼가리들을 꺼내 사이비에게 건넸다.

"읽어보거라. 그리고 할 말이 있거든, 말해보거라."

사이비는 그 종이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천마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받아 든 그는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적힌 내용을 확인한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에 사로잡혀 천마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종이에 적힌 내용은 마교에 대한 극비 정보들과 천마의 일거수일투족이 상세히 기록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 모든 것이 사이비가 익히 알고 있는 필체로 적혀 있었기에, 그는 떨리는 눈으로 천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천… 천마님, 저는 모르는 일 입니다. 제가, 제가 천마님을 배신 할 리가 없잖아요. 저에겐, 저에겐 천마님 뿐인데…! 제가 왜, 천마님을 배신을 하겠습니까."

"네? 천마님. 이런 거에 속아 넘어가실 분이 아니잖아요?"

사이비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천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사이비는 숨이 막혀오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모함을 한단 말인가. 자신이 특별히 미움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는데… 달라진 것이라면… 사이비의 시선이 이내 제일검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천마는 몸을 움직여 쓰러진 제일검을 앉히고, 고개를 들어 사이비와 시선을 마주했다.

"없긴, 여기 있지 않느냐."

"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이비가 의문을 표하자, 천마는 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는 척을 하는 게냐? 이미 본좌에게 다 들킨 것을."

그리고 천마는 말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내 기꺼이 속아 넘어가주마."

"네 형이 하나 있지 않더냐. 그 형이 이 녀석이고… 그리고 너는 알지 않느냐."

천마는 마지막으로, 무거운 진실을 던지듯 말했다.

"내가 네 부모를 죽인 자라는 것을."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내뱉는 천마의 말에, 사이비는 마치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천마가 '형'이라고 말한 순간, 제일검은 금방이라도 천마에게 달려들 기세로 억지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천마의 손에 의해 단숨에 쓰러졌다. 그런 제일검을 바라보며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주, 제일검이. 자신 위로 하나 있다고 했던, 가문이 멸망할 때까지 코빼기 보이지 않았던 형제라는 것을.

이번 생에서는 부자 관계가 아닌, 형제 관계였던 것인가…? 사이비는 자신도 몰랐던 이 관계에 허탈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를 억누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런 사이비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며, 천마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갔다.

"너는 영악한 아이였지."

"처음 만난 그 날도,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 보였었지. 그래 넌 그런 아이였지. 뭐든 다 아는듯한 눈으로, 세상을 다 살았다는 듯한 눈을 하면서 본좌의 앞에서만 순진한 척 하는 것을, 내가… 정말 몰랐던 것 같으냐?"

"천마님…."

"그럼에도 내가 너를 살린 이유는,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고 어린 녀석이 어떻게 나를 그렇게 잘 아는 눈으로 볼 수 있는지, 어린아임에도 불구하고 왜 뜨거운 불길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왜 그때 나를 보고 웃었는지, 왜 나에게 이토록 달라붙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며 쓰다듬는 손길은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다정하여, 사이비는 그 다정함에 입안의 살을 살짝 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저는,"

"됐다. 다 아는 사실을 또 듣기 싫구나."

뺨을 쓰다듬던 손이 사라지고, 그가 등을 돌리자 사이비는 털썩 무릎을 꿇곤 빌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자신이 소란에 신경을 썼기 때문일까? 제일검의 얼굴에 흔들려 지나치지 못하고 그를 옥에 가두라고 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이전 생에처럼 말이다.

"천마님.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천마님을 속인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번 일만큼은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제발… 죽이셔도 상관없지만 제가 천마님을 배…"

"갈!"

"천마님…!"

"쯧, 영악하던 네 눈치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순간 내력이 담긴 목소리에 사이비는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피가 느껴졌지만, 더 큰 충격은 덤덤히 이어지는 말과 한치의 분노도 없는 시선이었다. 사이비는 빌던 것을 멈추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예?"

"도망치거라."

"네?"

"네 형이 왔으니, 어서 도망치거라."

그렇게 말하며 천마는 제일검의 혈자리를 몇 번 짚었다. 정신을 차린 제일검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천마는 그를 사이비의 품에 던지듯 안겨주고는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너희 가문은 이미 오래전에 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쓸데없이 너희를 죽일 필요는 없다. 너희 가문의 멸망을 바랐던 자도 이미 죽었고 말이다."

"그러니 가거라."

"네가 본좌를 배신할 리 없지 않느냐. 생각은 알 수 없고, 숨기는 것이 많지만, 그것이 본좌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며, 본좌를 위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천마님…”

"곧 마도천하가 열릴 것이다."

"무슨─!"

마도천하라는 말에 제일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지만, 천마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제일검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림맹주 제일검은 듣거라. 정파는 본좌에게 패할 것이다. 그럼 세상은 혼란에 빠지겠지. 특히 너는 더 바빠질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가족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거라."

"내 곧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때까지는 다른 일보다 네 동생을 지키는 데 집중해라."

"그게 싫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거나, 아니면 네가 구하자고 했던 형제를 죽이거라. 물론 지금의 네 상태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팽팽한 신경전 속, 사이비는 여전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천마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일들에 대해선 빠르게 눈치채고 행동 하더니만, 본인에 대해서는 이리 파악이 느려서야…. 라며 사이비의 머리를 헝클어 뜨린 천마는 다정한 손길과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고선 말하였다.

"이번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냐?"

"본좌가 그들에게 속아 너를 죽이기를 원하느냐?“

그렇게 말하며 천마가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를 암기들이 튕겨나가며 벽에 박혔다. 동시에, 컥 하는 짧은 비명이 들리더니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 상황에 사이비는 도대체 언제부터… 왜… 하는 눈빛으로 천마를 바라보았고, 천마는 혀를 짧게 차며 말했다.

"내가 왜 너를 안 데리고 다녔는지 이제 알겠느냐?"

"이렇게 꽁꽁 숨겨도 노리는 자들이 있는데, 밖에 데리고 다니면 더 노릴 게 뻔하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며, 천마는 사이비와 여전히 경계심을 품은 제일검을 막무가내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사이비와 자신만 알고 있던 비밀 통로로 그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가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제일검은 통로를 마주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뒤에 천마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놀란 기색을 감추며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19년 만에 처음 만난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사이비는 흠칫 놀랐지만, 손을 빼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웃음을 짓던 제일검은 동생이 생각보다 이곳에서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지낸 곳이 마교였다는 사실과 천마의 손에 자랐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천마를 몰래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본 천마는 세상에서 들려오던 소문과,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제일검은 그 사실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저자가 정말 정파를 말려 죽이던 천마가 맞단 말인가? 다른 정파의 사람들이 이 생각을 본다면, 미쳤냐는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제일검은 마음속의 찝찝함을 애써 뒤로하며 여전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천마를 바라보는 사이비와, 그런 사이비를 바라보는 천마를 번갈아 보던 순간이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무공을 배운 것 같지 않은 아이가 뜻밖의 힘으로 제일검을 밀어냈다. 제일검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통로 안으로 먼저 들어갔고, 방 안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통로 앞에 서서 천마를 바라보던 사이비는 망설이다가, 천마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올려다보았다.

"천마님…"

"왜 부르느냐."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거라."

"왜… 저를 노리는 겁니까."

그 말에 천마는 잠시 멈칫하며 시선을 내렸다. 사이비를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되물었다. "알고 싶으냐?" 사이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마는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건 말이다… 영리한 너라면 알지 않겠느냐. 모르겠다면, 내가 올 때까지 생각해보거라."

그렇게 말하며 천마는 사이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사이비가 제일검을 통로로 밀어 넣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천마가 다정한 손길로 사이비를 통로에 넘겨버렸다. 자신도 이렇게 넘어갈 줄 몰랐던 듯, 사이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그가 천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금세 갈무리하며 웃는 얼굴로 사라지는 사이비를 보며, 천마는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이윽고 등을 돌린 그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 중 두 구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한 뒤에야, 그는 조용해진 사이비의 처소를 벗어났다.


"저…"

비밀 통로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즈음,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하던 제일검이 멈춰서서 사이비를 불러세웠다. 앞서가던 사이비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제일검을 바라보았다. 이 통로를 아는 자는 극소수였고, 그들이 탈출했다는 소식이 퍼질 일도 없었기에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사이비는 제일검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물어볼지 궁금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네?"

"그…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요. 혹시, 이름이…"

쭈뼛쭈뼛,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제일검이 반말을 해도 될 것을 조심스럽 묻는 모습에 사이비는 익숙한 느낌을 받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수많은 질문 중에 자신의 이름을 묻다니… 그런 모습이 자신이 기억하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사이비는 웃느라 고인 눈물을 살짝 닦아내고는 제일검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다가섰다. 허리를 숙여 보라는 손짓에 제일검이 고개를 숙이자, 사이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이라고 하는 이가 형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맞는지 잠시 망설였지만, 둘 사이에 불만은 없었다. 사이비는 제일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두드린 뒤, 손을 떼며 말했다.

"제 이름을 묻기 전에, 본인의 이름을 먼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아…."

생각해 보니 형제임이 밝혀졌을 뿐, 제일검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이비의 물음에, 제일검은 그제야 자신도 통성명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뜨더니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어리숙하고 맹한 모습에서 예전의 제일검이 떠올랐다. 사이비는 내심 이번 생에서의 제일검은 어떤 이름을 받았을지 궁금해졌다.

"흠흠…, 다시 한 번 소개하자면… 저는, 무림맹주이자 제일검이며, 천마님이 말한 대로, 당신의 형인 사마세가의 사마휘(司馬輝)입니다."

사이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마세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마교에서 들었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었을 뿐,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제일검의 입에서 나온 '사마휘'이라는 이름이 반짝이는 그와 어울리면서도, 또 어색하였다. 사이비는 그 이름을 몇 번 입 안에서 굴려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는…"

사이비는 잠시 고민했다. 이 남성에게 어떤 이름을 알려줘야 할까? 자신이 사마의 성을 따라가는 게 맞을까? 그 이름을 버린 건 이번 생도, 전생도 오래전이었는데…. 사이비는 어색한 두 글자, ‘사마’에 망설였지만, 천마님이 가족과 함께하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결심을 굳혔다.

"사마천이라고 합니다."

"아…"

사마천은 오랫동안 불리지도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어색하게 내뱉었다. 제일검, 아니 사마휘의 표정은 울고 싶은 듯하지만 꾹 참는 모습이었다. 그는 품속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과 목걸이 하나를 사마천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마천은 사마휘과 그 물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목걸이에는 자신의 이름 ‘사마천’이라는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고, 종이는 끝이 너덜너덜해졌지만 잘 보관된 상태였다. 그 종이에는 부모와 주고받은 서신처럼 보이는, 자신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사마천의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이런 느낌은 처음인데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서신의 애정이 가득 담긴 글씨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내린 사마천은 이내 서신을 조심스럽게 접고 사마휘에게 돌려주었다.

"저는… 사실, 어릴 적의 기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네?"

"눈을 뜬 순간부터,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이야기는 천마님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마천은 길어질 것 같은 이야기에 통로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고,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두드렸다. 얼빠진 듯 가만히 서 있던 사마휘는 정신을 차리고 사마천의 옆에 앉았다. 사마천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지 생각하며, 천천히 자신이 태어나고 어떻게 천마와 함께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마천의 얼굴에는 슬픔이 없었고, 사마휘는 가문을 멸한 자에게서 행복하게 자랐다는 사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마천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 뒤, 사마휘에게 물었다. "그럼, 사마휘씨는 어떻게 살아왔나요?" 사마휘는 자신의 이야기도 해야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이다 "이야기를 잘하진 못하지만…"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소한 이야기부터 자신이 몰랐던 가족의 이야기들, 가문이 멸망하고 무림맹주가 되기까지의 여정 등을 들려주었다. 사마천의 눈은 어린아이처럼 반짝였고, 그 모습에 사마휘는 더욱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둘은 어느새 가까워졌고,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가 이어졌고 사마천이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사마휘의 등에 업혀 어느 산골 마을에 와 있었다.


그렇게 둘의 시골 생활이 시작되었다. 제일검 사마휘는 여전히 무림맹주였기에, 1년 동안은 사마천과 함께 지내며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형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외출할 때마다 선물을 사 오다가, 쓸모없는 것들 대신 실용적인 물건들을 사오라는 사마천의 말에 따라, 먹을거리나 필요한 물품들을 사 오곤 했다. 그리고 한 번 오면 일주일 정도는 사마천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마휘는 천마의 말대로 점점 더 바빠졌고, 5년이 되던 해에는 발걸음이 거의 끊길 정도로 드물게 찾아왔지만, 사마천은 간간이 날아오는 편지를 받으며 서로의 소식이 오갔다.

"오늘은 뭘 해먹을까요…"

사마천은 어느새 혼자서 요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닭장에서 계란을 한 움큼 담아 오며 이걸로 무엇을 해먹을지 고민하던 사마천은, 처음에 둘 다 요리를 못해 탄 음식을 먹으며 웃고 탈이 나기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마천은 지금의 한적한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천마님과 함께하는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 생각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사마천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마천은 문득, 여기서 지낸 지 한 달째 되던 날, 사마휘와 술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동생은, 천마를 좋아하는 거야?'

'푸훗, 네?'

'좋아하는 거 아냐? 연정의 상대가… 아니야?'

'그… 그게 무슨!'

연정의 상대라… 사마천은 천마를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연인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인이 아니더라도 천마님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하지만, 사마과의 이야기를 나눈 후, 사마천은 싱숭생숭해진 자신의 감정 속에서 자신이 천마님의 연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마님과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그저 옆에 있기보다는 천마님의 손을 잡고 싶었고,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기기보다는 그와 함께 간질거림 속에서 고개를 들어올려 천마님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망상과 열기에 뜨거워진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사마천은 애써 생각들을 떨쳐내고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가져온 계란과 잡은 닭으로 삼계탕을 해먹자며 손질을 하던 사마천은, 손질한 닭을 약재로 우린 육수에 넣을 때쯤 느껴진 인기척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사마휘와 자신이 설치해둔 진에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이곳에 들어올 이는 한정적이었기에, 사마천은 다가오는 기척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솥의 뚜껑을 닫는 것도 잊고, 그는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조용히, 발걸음 소리 없이 다가오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기에, 사마천이 그토록 기다렸던 이의 등장에 달려가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천마님."

사마천은 천마의 품에 안겨 5년간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익숙한 따스함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안기는 터라 어색할 법도 했지만, 능숙하게 자신을 받아주는 천마의 팔에 사마천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어디 다치시지는 않으셨나요?”

“오자마자 내 걱정이구나.”

“그럼 당연하죠, 제가 아니면 누가 천마님의 걱정을 하겠어요.”

“그건 그렇긴 하지….”

그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던 그간의 고독을 채웠다. 천마는 사마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제는… 혼자서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게다.”

“마도천하가…이루어진 건가요?”

“흥, 물론이지. 무림맹주 그 놈 때문에 금방 할 수 있던게, 5년이나 걸렸구나. 뭐…, 그 놈덕을 본 것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무림맹주… 제 형은, 어떻게 되었나요?”

“쯧, 형이라고 그녀석을 찾는 거냐? 아주 그 사이에 돈독한 우애를 다졌나 보구나.”

“천마님이 그러라고 하셨잖아요.”

투정 섞인 말에 천마는 미소를 지으며 사마천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마천은 그 손길에 자연스럽게 기대며 속삭이듯 물었다.

“형은…괜찮은 거죠?”

“그래, 네 형은 무사하다. 아마 곧 찾아올 듯 싶은데 소식을 받지 못했느냐?”

“6개월동안 답장 하나 없었는걸요. 그래도 무사하다니, 다행이네요.”

천마는 잠시 사마천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이지…”

“네. 천마님?”

“생각은 해봤느냐,”

5년 전, 헤어지기 전에 나누었던 말을 다시 묻는 그 질문에 사마천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그 말을 내뱉어도 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 맞는 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믿기지 않는 그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천마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깊이 고민한 끝에 결심한 대답을 내뱉었다.

“그건… 저를 소…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죠…?”

사마천의 대답을 들은 천마는 잠시 침묵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사마천의 눈빛에 천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중하게 여겼다라…그렇지.”

천마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으며, 그 안에는 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사마천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리며 그의 눈을 마주보게 했다.

“그런데… 너는 정말 그 이유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사마천은 천마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꿰둟어보는 듯한 천마의 시선에 사마천은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한채 떨리는 시선과, 열기에 붉어진 얼굴에 천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넌 항상 내 곁에 있고 싶어했고, 언제나 기다려줬었지. 내가 궁금한건,”

“여전히 그걸 원하고 있는지와, 그런 네 감정과 내 감정이 같은지를 묻고 있는게다.”

그말에 사마천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사마천은 열오른 자신의 얼굴을 손길에 비비다 손끝에 입을 맞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여전히 천마님 곁에서 함께하고 싶어요. 물론 제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옆에 있는게 아닌, 단순한 신하나… 어린아이 그 이상의 존재로… 천마님에게 그런… 과분한 존재가 싶답니다…. 제가… 미천한… 제가 그런 존재가 되어도 될까요?”

“그것이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면, 난 너를 거부하지 않을게다. 하지만 그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닐텐데, 그럼에도 넌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느냐?”

“네, 물론이죠. 제가 이 순간을…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천마는 사마천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천천히 훑어보았다. 언제나 생각을 알 수 없던, 아이의 얼굴에서 떨림과 설렘이 섞여 있었고, 그 눈빛은 진심인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마천을 바라보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천마는 사마천의 손을 살며시 잡고 그 손끝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자신이 손끝에 따라 입맞춤을 할 줄은 몰랐는 듯, 흠칫하는 사마천의 모습에 웃음이 흘려 나왔다. 사마천의 심장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고, 그의 눈은 행복으로 휘어져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이 되었음을 깨달으며, 사마천은 천마의 품에 기대었다.

저 멀리서, 또 다른 익숙한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지는 투닥거림에 사마천은 정말로 행복했다. 이제 자신은 이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허전하던 가슴 한 구석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의 길고 긴, 외로움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정말로 다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최고의 세계였다.


“…이거면 그아이의 고생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겠죠?”

어쩌다 이런 일이 자신의 세계에 벌어지게 되었을까. 한 때 자신의 세계를 위험하게 만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에게 이런 낙원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그녀는 그 아이의 능력을 빼앗고 소중한 것까지 잃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과거 그녀의 신도였던 아이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 아이는 이 사실을 결코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 편이 그녀의 마음에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단발머리의 여인은 조용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리잡던 미묘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책을 책장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에서, 이 이야기는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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