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아 비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240731

필사 by 한
2
0
0

p11.

모든 것이 하나의 순간 속에 있다. 나는 이 ‘있음’을 붙잡고 싶다. 그 순간들은 내가 호흡하는 공기 속을 지나다닌다: 그것들은 폭죽이 되어 공중에서 아무런 소리 없이 폭발한다. 나는 시간의 원자들을 갖고 싶다.

p13.

그 이유는, 지금 내가 말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지금 내가 쓰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껏 진실한 말에 가닿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의 사차원이다.

p14.

전축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으면 손이 진동하면서 온몸으로 파동을 보낸다: 그렇게 나는 진동이 품은 전기電氣를, 현실이라는 영역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토대를, 내 손 안에서 떨리는 세상을 듣는다.

그렇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그레고리안 성가의 반복되는 말들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토대다.

p16.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단단한 글쓰기를 쓴다. 나는 말을 손에 쥐고 싶다. 말은 하나의 물체일까? 나는 순간들로부터 주어진 열매의 즙을 짜낸다. 삶의 핵심에, 삶의 씨앗에 다다르려면 나 자신을 소거해야만 한다. 순간은 살아 있는 씨앗이다.

p18.

나도 안다, 내 시선은 세상에 완전히 항복한 원시인의 시선과 같을 것이다. 선이 굵은 선과 악만을 허용하고, 머리카락처럼 악에 뒤엉켜 있는 선에 대해서는, 선이기도 한 악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 신들처럼 원시적인 시선.

p22.

새로운 시대, 나 자신의 시대, 이 시대가 즉시 나의 도착을 알린다. 나는 충분히 용감한가? 지금으로선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먼 고통에서 왔으니까. 나는 사랑의 지옥에서 왔고 이제 당신에게서 벗어났으니까. 나는 멀리서, 중대한 혈통에서 왔다. 나는 삶의 고통에서 왔다. 그리고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는다.

p29.

이 모든 일은 흑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기도이며 비굴하게 간구하는 아멘이다: 왜냐하면 부정한 것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신의 인정을 필요로 하니까: 그것이 창조다.

p31.

나는 이치에 맞는 것에만 의존하는 사람들 특유의 끔찍한 한계를 갖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지어낸 진실을 원한다.

p39.

하지만 영원eternamente은 아주 단단한 말이다: 화강암질의 t가 들어 있다. 영원: 시작된 적이 없는 모든 것을 위한 말이다. 나의 이 작은, 너무도 한정된 머리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터져버릴 듯하다―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p41.

하지만 언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두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있다. 있다.

나는 그 핵심에 있다.

나는 아직 있다.

나는 살아 있는 부드러운 중심에 있다.

아직.

그것은 반짝이며, 탄력적이다. 윤기 흐르는 검은 표범의 걸음걸이처럼. 나는 검은 표범이 유연하게, 천천히, 위험하게 걸어가는 걸 본 적이 있다.

p48.

달은 매너가 서툴다. 당신이 들어서는 방향 왼쪽에 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아 달을 피한다. 왜냐하면 보름달은 가벼운 불면증, 사랑을 나눈 후처럼 무감각하고 나른한 것이기에. 나는 꿈을 꿀 수 있도록 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꿈속에서 오는 소식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p54.

나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고 있다. 먼저 양수 주머니를 찢는다. 그다음엔 탯줄을 끊는다. 그러면 당신은 혼자서 살아 있게 된다.

나는 태어날 때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내 비극의 원천이다.

p61.

내가 좋아하는 건 뜨겁게 달구어진 메마른 땅, 뒤틀린 나무들과 바위산, 흐리고 유예된 빛이 있는 풍경들이다. 그래, 거기에 숨겨진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나는 당신 역시 예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타고나기를 단단하고, 영웅적이며, 혼자이고, 서 있다. 그리고 나는 그림 같지 않은, 아름답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나의 대위법을 발견했다. 추함은 내가 치르는 전쟁의 기치다. 나는 추한 것을 사랑하고 그건 자신과 같은 것을 향한 사랑이다.

p68.

백인들은 흑인들을 채찍으로 때렸다. 하지만 백조는 깃털에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을 분비하고―마찬가지로 흑인들의 고통도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아픔을 주지도 못한다. 당신은 고통을 쾌감으로 바꿀 수 있다―‘딸깍’ 한 번이면 충분하다. 검은 백조?

p72.

자신으로부터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 내는 건 매우 중대한 일이다. 나는 자신을 창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한다. 우리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완전한 어둠 속을 걷기. 그건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산고와도 같으니: 어떤 것이 태어난다. 그것 자체가. 그건 마른 돌멩이처럼 단단하다. 하지만 그 중심부는 부드럽고 살아 있는, 필멸하는, 위태로운 그것이다. 기초물질의 생명.

p76.

그리고 여기가 악이 나를 지배하는 곳이다. 나는 여전히 잔인한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여왕인 동시에, 미래를 향해 도개교처럼 스스로를 내던지는 느린 진화이기도 하다. 나는 그 미래에서 새어 나온 희뿌연 안개를 이미 들이마시고 있다. 나를 둘러싼 기운은 삶의 신비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내 이름을 포기하며 자신을 뛰어넘고, 그래서 나는 세상이다. 나는 하나의 목소리만 가진 채로 세상의 목소리를 따라한다.

p80.

하지만 어떤 ‘그녀’는 산타 테레사 숲의 땅바닥에서 어미를 잃고 홀로 남은 새끼 올빼미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올빼미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올빼미를 안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먹였고 정답게 속삭여 주었으며, 결국 올빼미가 날고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신은 올빼미가 자라자마자 도망쳤으리라 예상했겠지만, 녀석은 그 광기 어린 종에 속한 동족들과 합류하는 일, 즉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는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 악마 같은 새가, 그 소녀를. 그러다 훌쩍 날아오른 그것은 마치 자신과 싸우기라도 하듯 스스로를 해방시켜 세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p82.

나는 그녀에게 감탄했고 그녀도 그걸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을 발현시킴으로써 영예로워졌고, 너무도 큰 사랑의 시선을 받았기에 며칠이 흘러도 시들지 않았다: 갓 피어난 꽃처럼, 그녀의 화관은 활짝 열린 채 탱탱하고 싱싱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녀는 일주일 내내 아름다움과 생명을 지켰다. 그러고 나서야 피로의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었다. 나는 마지못해 장미를 치웠다. 그리고 절대로 잊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우리 집 가정부가 뜬금없이 내게 이렇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장미는요?” 나는 어떤 장미를 말하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사랑받으며 오래 산 그 장미가 가정부의 기억에 남은 건 그녀가 목격한 것 때문이었다. 가정부는 내가 그 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또 내 에너지의 파동을 장미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 지켜보면서 나와 장미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맹목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그 장미는―사물들에게 자주 이름을 붙이는 나는 그 장미를 ‘내 삶의 보석’이라고 부르고 싶었다―타고난 본능이 매우 강했고, 덕분에 나와 그녀는 서로 더욱 깊이까지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건 짐승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p86.

나는 이해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게 해 주는 나의 몰이해를 믿으며, 나는 친구들을 잃었고, 나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끔찍한 의무, 그것은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스스로를 좀 더 무디게 만들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을 겪는 것. 더 이상 세상의 슬픔들을 짊어지고 갈 수는 없으니까.

p89.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신성한 절망의 순간이 온다: 신의 부재는 하나의 종교적 행위다. 이 순간 나는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나는 요구한다. 인간의 힘 이상을 요구한다. 나는 강하지만 동시에 파괴적이기도 하다. 내가 신에게로 가지 않았으니 신이 내게로 와야만 한다.

p94.

사랑과 건강한 자존심에 기반한 공격성을 지녔다. 수탉의 볏과 울음소리를 가진 듯하다. 극락조화는 동이 트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당신의 아름다움이 지닌 폭력.

p110.

하지만 만일 내가 세상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해하기’를 추구하게 된다면―자신을 내맡기는 행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안간 뛰어들어야만 하며, 그 뛰어듦은 이해와 몰이해를, 특히 몰이해를 아우를 것이다. 게다가 내가 뭐라고 감히 생각이라는 걸 하겠는가? 내가 할 일은 투항이다. 투항은 어떻게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오직 걸어야만 걷는 법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기적―사실을.

p111.

한번 시도해 보겠다. 그건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비뚤어져 있다는 뜻이다. 비스듬한 절단면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삶의 비뚤어짐을 깨달았다. 그동안 반듯하고 평행을 이룬 단면들만 보아 왔던 나는 교묘한 사선을 알지 못했었다. 이제 나는 삶이 다른 것임을 느낀다. 그 삶은 어렴풋한 생각들을 활짝 펼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그것은 순수한 동물적 활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다 마법적이고 섬약한 그 무엇이다. 나는 이 유달리 비뚠 삶 위에 내 무거운 앞발을 얹어 존재를 시들게 한다. 그 존재의 가장 비스듬하고 예측할 수 없는, 그와 동시에 미묘하게 치명적인 측면들을 시들게 한다. 나는 우연의 필연성을 이해한다. 그건 모순이 아니다.

p112.

나는 또한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도 알고 있다. 지면 바로 위에서 휘날리는, 바람 속에 펼쳐진 가벼운 그림자: 떠다니는 그림자의 삶, 열려 있는 어느 날에 떠오른 몸, 그리고 꿈들: 나는 땅의 풍요를 살아간다.

p113.

그건 엄청나게 끔찍해졌을 수도 있는 무언가로부터 차분히 회복하는 일과 닮아 있다. 냉담한 쾌락으로부터의 회복. 삶은 오직 막 눈뜬 이들을 위해서만 부서지기 쉬운 진실이 된다.

(중략)

사물들 사이에는 충돌하기 직전의 가벼운 어긋남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말들의 틈바구니에서 서로를 잃고, 더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존재들 사이에는 어긋남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벼운 어긋남, 이 ‘거의’ 속에서 서로를 거의 이해한다. 그리고 그건 삶을 똑바로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과 갑작스럽게 대면하는 순간 겁에 질려 그 섬세한 거미줄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울어져 있는데, 그건 우리가 예견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이 삶 속에 있는 그 무한히 다른 것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측면에서 산다―중앙의 빛이 나를 태우지 못하는 곳. 그리고 나는 조용히 말한다. 귀로는 나를 들어야만 하니까.

p118.

당신은 내가 쓰고 있는 이걸 절대로 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내 존재의 비밀을 써 내려갈 때―나는 그 비밀을 바닷속에 빠뜨리듯 내던지는 셈이다.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이 글을 쓰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순간들’에 대한 기록을 파괴한다면, 나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끌어냈던 곳으로, 나의 없음으로 돌아가게 될까? 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기묘한 현재 속에서 오직 격정을 통해서만 갱신되는 과거를 가진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 이미 지나온 삶을 떠올려 보면, 그건 마치 길을 따라 벗어던져 놓은 내 몸들 같다.

아침 다섯 시가 다 되었다. 희미해져 가는 새벽의 빛, 차갑고 푸른 금속의 빛깔, 그리고 어둠에서 태어나는 낮의 톡 쏘는 날카로운 맛. 그런 것들이 시간의 표면 위에 나타나고, 마찬가지로 납빛에 물든 내가 어둠에서 태어나는 중이다. 나를 넘어선, 그것인 내가.

p122.

나는 살아 있다. 하나의 상처처럼, 육신 속의 꽃처럼, 슬픈 피의 길이 내 안에 열린다. 올곧게 직진하며, 바로 그 이유로 라고아 산타 원주민들의 순수한 에로티시즘을 지닌 길. 나, 폭풍에 노출된 자, 돌의 뒤편에 새겨진 글귀, 나는 선사의 인류로부터 건네받은 거대한 공간들, 시간순으로 늘어선 그 공간들 속에 있다. 기나긴 천 년 세월의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내 표면을 그슬린다.

p135.

괜찮다. 나는 고독 속에서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죽어감은 아무런 소리도 없는, 내부를 향한 폭발이리라. 몸이 더 이상 몸인 걸 견딜 수 없는 상태, 만일 죽어감이 몹시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의 맛을 갖고 있다면? 만일 죽음이 기쁨이라면? 이기적인 기쁨이라면?

p140.

이 순간 나는 무엇인가? 어둡고 습한 새벽에 건조하게 메아리치는 타자기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물체이기를 원했다. 나는 하나의 물체다. 피로 더럽혀진 물체. 다른 물체들을 창조하는 물체. 타자기는 우리 모두를 창조한다. 그것은 요구한다. 그 메커니즘은 내 삶을 요구하고 또 요구한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복종하진 않는다: 내가 물체가 되어야만 한다면 소리치는 물체가 되게 하라. 내 안에는 아픈 것이 있다. 아, 그것은 얼마나 아픈지, 도와달라고 얼마나 소리치는지. 하지만 나라는 타자기에서는 눈물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운명 없는 물체다. 나라는 물체는 누구의 손안에 있는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내 운명이리라. 나를 구해 주는 건 소리침이다. 나는 생각―느낌 너머의 너머에 있는 물체 안에 있는 것의 이름으로 저항한다. 나는 절박한 물체다.

p150.

슬프다. 불안이 찾아온다. 왜냐하면 황홀경은 낮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호아홀경 속에서 울려 퍼지는 수정의 진동을 누그러뜨리려면 잠이 황홀을 뒤따라야 한다. 황홀은 잊혀야 한다.

낮들, 내가 살고 있는 낮의 강철 같은 빛 때문에 슬퍼졌다. 나는 물체들의 세계에 밴 강철 냄새를 들이마신다.

p152.

하지만 나는 고발한다. 우리의 약함을, 죽음의 미칠 듯한 공포를 고발한다―그러고 나서 그 모든 불명예에 대응한다―지금 쓰게 될 바로 이것으로 대응한다―이 모든 불명예에 기쁘게 대응한다. 기쁨, 가장 순수하고 가벼운 기쁨. 나의 유일한 구원은 기쁨이다. 본질적인 그것 안에 있는 무조無調의 기쁨.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걸 알게 된다는 건 너무 참혹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은 단 한 번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믿음 바깥에 있는 어둠에 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다는 것―그건 너무 참혹한 일이라서 나는 길들일 수 없는 행복의 순수함으로 대응한다. 나는 슬픔을 거부한다. 우리 기뻐하자. 기쁨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미친 듯한 깊은 기쁨을 체험한 자는 우리의 진실 가운데 가장 좋은 부분을 갖게 될 것이다. 나는―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내가 말로 붙잡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 버릴 이 지금-순간에 기뻐한다. 나는 패배하기를 거부하기에 바로 이 순간에 기뻐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 하나의 대답으로써. 보편적인 사랑, 그것 사랑, 이는 곳 기쁨이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심지어 그 사랑이 끝나버릴지라도.

p153.

언제 어디서 죽게 될지도 모르면서 죽기 위해 태어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지 않은가. 듣고 있는가? 나는 아주 행복한 상태로 계속 머물 것이다. 하나의 응답으로서, 하느이 모욕으로서. 내가 장담하는 한 가지: 우리는 죄가 없다. 신이여, 듣고 있는가?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이해해야만 한다. 그 후에는 너무 늦을 테니까.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